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75페이지)

 

십 년쯤 전엔가,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배려가 많아진다는 거였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타인을 향한 마음이 점점 열리는 걸 이야기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남들을 보는 눈도 더 넓어야겠고, 마음을 열어놓는 것도 더 크게 해야겠지, 라고 생각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나. 아니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라고 어딘가에서 읽어서였나. 그런 생각으로 동의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려고 했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한 말에 한마디 더 붙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친구가 하려던 말을 내가 끝까지 듣고 다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또 다른 의미의 공감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배운 '배려'의 기준이 변해가는 게 자연스러워서, 그 변화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때 우리는 친구가 꺼낸 말을 시작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참 했다. 살면서 나 먼저 위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내며 공유하고 공감하는 게 필요하지만, 나를 우선하는 마음이 더 커지고 내가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세가 세워지고 있더라고. 아프고 슬프고 기쁜 일들의 주체가 내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나만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결론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면서 언제나 내가 우선이 되는 인생이어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때의 기억을 꺼내 이제 와 생각해보니 참 살벌하게 들린다. 그런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점점 더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라서 그런지, 명확한 답을 꺼낼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의 답을 향해가는 쏠림이 있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이해보다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진다는 걸 알아서일까. 이 소설의 시작과 동시에 들려오는 윤재의 상태에서, 나는 그게 큰 문제인가 하는 의문을 먼저 가졌다. 다른 사람과 느끼는 게 다르다는 것, 그게 우리 사는 세상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인 건 맞지만, 그들의 감정을 모른다고 해서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닐 테니. 나이를 먹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으면서 그 냉정함이 더 심해지고 있었는데, 며칠 전 김정숙 여사의 행동을 보고 이 소설의 의도와 결말이 향하는 지점과 닮았음을 알았다. 평범한 아줌마 차림의 영부인이 이삿짐을 싸다 말고 나와서 60대 여성 민원인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라면이라고 먹고 가라며 데리고 올라가는 모습에서 우리가 살면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게 공감 능력이라는 것을... 그 민원인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것 말고 영부인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도 다 듣고 있더라. 영부인은, 잘은 모르지만 민원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것과 끼니를 거른 민원인에게 내놓은 라면 하나가 전부였다. 그 민원인도 안다, 영부인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래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면서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다더라.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 누군가의 상황과 감정을 공감하는 것.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라는 걸 전제했을 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하는 게 있을까? 윤재에게는 그게 없었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윤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몬드'라고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서,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게 어렵다. 반복된 학습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의 감정을 알 수 없다. 공포, 무서움, 분노, 애정, 호감, 등 사람들이 내보이는 그 어떤 감정 앞에서도 윤재는 침착하다.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느끼지 못하는 감정 앞에 표정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런 윤재의 상태에 엄마는 절망한다. 하지만 윤재의 삶을 위해 같이 노력한다.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고, 사람들이 보이는 보편적인 감정이나 태도를 알려주면서, 그때마다 윤재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익히게 한다. 사실 이런 일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인데, 이걸 알지 못하는 윤재는 반복된 학습이 아니면 알 수 없다니. 그것도 다 아는 게 아니다. 그런 상황이나 반응을 이해해서도 아니다. 엄마와 할머니가 그렇다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동안 많이 힘들 테니까 배워둬야 한다고 해서 하는 것뿐이지, 윤재가 이해해서 터득한 자세는 아니다.

 

이 소설을 계속 읽을수록, 윤재보다는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를 떠올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람의 죽음이 나이순으로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보통 나이순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면 엄마와 할머니가 죽은 다음에 살아갈 윤재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걸 걱정하는 엄마와 할머니의 표정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없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들. 그래서 더 많이 알려주고 싶고, 더 많이 느끼게 해주고 싶은 간절함이 소설의 곳곳에서 느껴진다. 엄마와 할머니가 참 많이 아프겠구나, 하고 느끼던 그때 비극은 시작된다. 윤재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크리스마스이브, 끔찍한 사고로 엄마와 할머니는 윤재의 앞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곤이'가 나타났다.

 

곤이의 등장으로 윤재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면서 계속 읽게 되는데, 소설을 잘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윤재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곤이였다.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가족에게 돌아온 아이, 그나마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와의 적응이 필요한 아이, 험한 말과 행동으로 자기 주변에 벽을 치는 아이. 그런 곤이와 윤재의 조합은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오히려 윤재의 모습을 더 궁금하게 한다.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다가가는 아이들로 비치지만,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특히 타인의 감정이나 태도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인 윤재가 겪어가는 마음의 변화가 기대되는 거다. 이유는 다르지만 두 아이는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그런 아이들이 계속 세상의 한구석에서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지, 세상에 섞이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방법을 같이 찾아보게 하고 있더라. 그 변화를 인지할 무렵 찾아온 또 한 명의 아이 도라. 도라의 등장은 열여섯 소년이 그 나이의 소년으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담담하게 하는 말들 속에서 머리로 배운 태도의 학습이 아닌 마음이 하는 소리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06페이지)

 

사는 동안 공감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하는, '평범'과 '특별'이 공존한다는 것도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저절로 공감한다. 각자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으로 눈물이 흐르고, 기쁨의 순간에 웃으면서 손을 맞잡는 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공부하듯 반복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두렵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처음부터 몰랐던 일인데, 자라면서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태도이자 감정인데, 그게 불가능하다? 요즘에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보다는, 모른다는 것보다는, 굳이 자기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일이 잦아지는 듯하다. 나부터도 그렇고. 나의 상황, 나의 감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아주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어떤 순간이 닥치면 나는 또 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할 테니까. 그러면서도 타인과의 공감이 살면서 아주 많이 필요한 일이라는 건 변함없다. 그런 공감 능력을 점점 잃으면서 사는 게 지금의 우리가 아닐까 하는 문제를 보여주고 싶은 게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작가의 의도야 작가만이 알겠지만...)

 

사는데 필요한 우선이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오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감정이 없이 사는 건 안 될 것 같다. 공감이 없는 타인과 삶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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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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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1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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