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계이름 - 말이 닿지 못한 감정에 관하여
이음 지음, 이규태 그림 / 쌤앤파커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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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감정을 조금씩 떼어 섞고, 주무르고, 이리저리 포개 보아야 그나마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난해한 감정이었다. 말로 어떤 장면이 충분히 해석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119페이지)

 

'말'에 대해 생각한다. 머릿속에서 생각하지만 멈춰있는 게 아니라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 그렇게 쏟아낸 말은 공감을 이루기도 하지만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는 걸, 항상 그 말이 어떤 사건의 단초가 되기도 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게 말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부터 그 말은 점점 줄어들었고, 타인을 이해하는 말은 더 아끼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의 높이와 상대가 하는 말의 높이가 다르다는 걸을 알게 되면, 말의 아낌은 더 많아진다.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도 다르게 나오는 말들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서였다. 그러니 말이라는 건, 그냥 최소한의 의사소통 수단이 되곤 했다. 상대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적당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그래서였을까. 말이 줄면서 동시에 표현도 줄어들더라는 이상한 결과를 얻었다. 어쩌면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말이 줄어드는데, 표현이 늘어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책의 부제가 더욱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말이 닿지 못한 감정에 관하여'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쏟아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읽기 시작했다.

 

때로는 의도와 상관없이 내뱉은 어떤 말들이 누군가를 난처하고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로 인해 말로 빚을 질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날의 감정을, 살면서 한두 번쯤 의무적으로 마주해야 할 과제쯤으로 생각한다.

변변치 않은 말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고른 말이, 못내 미안할 때가. 그렇게 말을 고르더라도 별 소용이 없어서, 말이 모자라다고 생각될 때가. 그런 때가 우리에게 몇 번쯤 있었다. (34페이지)

 

뭐라고 해야 할까.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막상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고, 그런 순간을 건너와서 상대와 더 애틋해졌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해나 공감 같은 걸 넘어서서, 말이 전하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그가 골목 어귀에서 만난 사람들, 힘들어서 말이 사라질 것만 같은 노동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지는 말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뤄놓은 현재의 삶에 녹아든 흔적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그렇게 내놓고 담아가는 말들을 그는 부딪치면서 들었다. 말이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눈으로 마주하고 감정으로 들었던 거다. 늘 말의 뒤에서 의도와 다르게 읽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을 겪는다. 그런 말이 전하는 외로움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게 위로였고, 공감이었다.

 

나는, 내 위로가 누군가의 슬픔을 기피하려는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슬픔은 늘 일인칭이었다. 누가 대신하여 아파준다는 말은 실행력이 없었다. 누가 먹어준다거나 들어줄 순 있어도, 아파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슬픔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말들이 필요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성을 다해 주물을 매만져야 보기 좋은 형상이 나오듯, 대상에게 깊이 물이 들어야 구체화될 수 있다. (243페이지)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이 책도 읽으려고 해서 읽은 게 아니었다. 그저 우연처럼, 실수처럼 내 손에 들어온 책이었다. 그러니 기대도 없었던 건 당연하다. 그렇게 펼친 책에서, 오히려 일부러 골라 읽었던 책보다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들 속에서 작가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부분을 읽다가 작가가 남자라는 걸 알았다. 사실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선입견에 작가가 여자일 거로 생각하고 계속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다.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그 아픔에 내 말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순간이 생겨날 뿐이다. 완전한 치유가 아니라, 그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거다. 그건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다. 우리가 겪는 슬픔은 늘 우리의 몫이기에, 작가의 말처럼 '슬픔은 늘 일인칭'이기에 누가 대신 아파해주고 이해해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불가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한계를 넘어갈 도구가 필요했다. 내 안의 말이 가 닿아야만 했다. 상대의 슬픔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이어야 했다. '뽈'을 차러 가서도 외로운 아버지, 손끝에서 완성되는 옷에 감춰둔 어머니의 자존심, 평생 이어온 이발소를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손자의 머리를 잘라주던 할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다며 두부를 팔던 남자. 말은 분명 우리 마음을 전하고 표현하는 수단인데도, 그게 다 전해지지 못하는 미완성으로 남을 때가 많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말이 다 들려주지 못하는 감정들에 다가가기 위한 우리의 몸짓을 이렇게 보여주려는 걸까.

 

말들은 수시로 내게 찾아와 버려지거나 읽혔다. 그건 어머니의 삶이 내 삶에 보내는 안부 같은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문득, 내가 누군가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 삶이 한 삶을 품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철을 넘기면서 동시에 말도 넘어온 것과 다름없었다. (202페이지)

 

여전히 밤은 어려웠고, 잠 못 들게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해명하는 말들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건 말이 쉬워지는 것이라고, 다룰 수 있는 말의 가짓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소통은 말로 이뤄지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에는 단순히 ‘말’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경험’이 필요했다. 대개 말은 누군가에게서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들어가고, 그건 한 삶이 다른 한 삶에게 보내는 우편 같은 거니까. 말의 종착지는 결국 누군가의 삶이고, 하여 자신의 범위 내에서 이해 가능할 뿐이라고. (192~193페이지)

 

저마다 가진 말의 높이를 계이름으로 말하며, 그 말의 표현으로 감정을 읽는다. 너무 높아서, 너무 낮아서 닿지 못한 말들 때문에 우리는 외롭고, 아프고, 상처받고, 오해한다. 너무 가벼워서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하고 날아가 버린 말들에 더 외로워지곤 한다. 일상처럼, 습관처럼 주고받는 말에서 우리가 마주한 감정은 상대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사연을 표현하지 못하고, 안부를 묻기 어렵고, 이해가 버거웠던 순간들을 마주할 때 필요한 건 말이었다. 온몸으로 읽어야 하는 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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