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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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장면을 독자가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물론, 그 문장만으로도 소화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일 테지만, 이렇게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소설을 읽을 때면 상상하기만 했던 장면을 눈앞에서 마주함으로써 이야기의 이해가 훨씬 빨라진다.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흥미로움은 배가 된다. 실제로 『파이 이야기』는 이미 영화화되어 관객의 사랑을 받은 적도 있어서인지, 이번 일러스트 특별판은 소설과 영화의 만남처럼 문장과 장면이 함께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처럼 장면을 다 그리지 못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까 겁이 나는 독자에게 안성맞춤인 형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아직 소설로도 영화로도 만나지 못한 나에게 이 책을 만난 지금이 행운인 것을.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가족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주인공인 파인 파텔. 계속 인도에서 지내는 것의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이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위해 동물원 일부를 정리한다. 그렇게 남은 동물 몇몇과 캐나다행 화물선에 오른다. 하지만 이들이 캐나다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을 신이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그들이 탄 배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침몰하고 살아남은 이는 파이와 동물뿐이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벵골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에 오른 파이는 생존의 잔인한 현장을 목도한다. 다리를 다친 얼룩말을 하이에나가 잡아먹고, 두 동물의 싸움을 저지하던 오랑우탄을 하이에나가 또 잡아먹는다. 결국, 가장 힘이 센 벵골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처치하기에 이르고,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벵골 호랑이만 남았다. 비상식량은 한정되어 있고, 잔인한 호랑이와 인간의 동거는 계속될 수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구조를 바라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모든 것을 잃은 파이는 오직 이 순간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짐뿐이다. 호랑이는 같이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동물들을 다 잡아먹었는데, 이제 남은 건 파이뿐인데, 결국 파이도 호랑이의 밥이 되어버리고 마는 걸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이는 227일간을 표류하며 살아남았다. 호랑이와 대치하며, 긴장하며, 배고픔을 참으면서 말이다. 그게 가능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육지도 아니고 표류하는 바다 위에서 인간이 호랑이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게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불가능했다. 호랑이가 없었어도 그 위기를 벗어나는 건 어려웠을 일이다. 그런데도 2백여 일이 넘는 시간을 버티며 육지에 도달한 파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설은 처음부터 긴장하게 했는데, 파이가 신을 언급하면서부터였다. 보통 하나의 종교를 가지는 게 일반적이었다면, 파이는 여러 신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그가 아는 많은 신에게 기도했다. 그게 안 될 일이었을까? 각 종교의 사제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을 파이도 섬기기를 바라면서 이끌고자 했으나, 파이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나라식으로 하자면, 교회, 성당, 절 모든 곳에 의미를 두고 그 모든 신에 기도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언급된 신으로 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이야기하려나 싶은 찰나, 그들이 오른 배의 침몰과 파이의 표류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어쩌면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의 인생이 한 편의 소설에 가까운, '만들어지는 이야기'라거나. 그렇게 듣게 된 이 소설의 2부에 해당하는, 거의 3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파이 이야기는 생존에 관한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2부에 해당하는 태평양 표류기는 모든 시간이 바다 위에서 진행된다. 하나씩 죽어가는 동물들, 결국 살아남은 호랑이와 파이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오는지 들려주면서, 생존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런 것. 우리 삶은 보편적으로 흐르는 것과 동시에, 이성이란 것이 탑재되어 본성이 먼저 나아가려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늘 이성적인 판단을 앞세우고 사는 것일 테다. 그러한 일상을 보내는 게 우리의 평소 삶이라면, 파이가 벵골 호랑이 리처트 파커와 함께한 생존기는 수시로 찾아오는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본능이 이성을 누르고 튀어나오는 순간을 증명한다. (이 소설의 3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유추하자면 인간에게 내재한 생존을 위한 본능의 잔인함이 어떠한지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신에게 갈구해도, 누군가 나를 구해줄 거라 희망을 품으려고 애쓰는 와중에도 이성이 우리를 살게 하지는 않는다. 위기에 빠지는 순간마다, 특히 그 위기가 생존과 관련 있을 때는 더더욱 본능이 이성을 앞선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호랑이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듯이 상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그러한 생존과 본능을 위한 일이었다. (3부에서 이 동물들의 의미가 더 깊게 드러난다) 이 동물들이 파이와 공존하면서, 자기 존재를 위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공포의 대상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를. 강인해지고 잔혹해질 수밖에 없다. 목숨을 앞에 둔 우리는 그렇게 된다.

 

"지금 우리가 들러보지 않은 동물들도 위험하단다. 그것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 마. 생명이 있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방어를 한단다. 동물은 뭐든 사납고 위험해. 죽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다치게는 하지. 사람을 긁고 물어서, 상처가 붓고 곪지. 고열이 나고 열흘씩 입원해야 되기도 하고." (69페이지)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72~73페이지)

 

내 목숨이 위협 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도 동정심도 가려져버린다. (189페이지)

 

동시에, 수많은 선택에 관한 고민을 안겨주기도 한다. 앞서 말한, 어떤 순간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생존이 달라진다. 파이(동물들)가 이성을 앞세웠다면 평소의 모습대로 했다면 상대의 강인함에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본능을 앞세웠다면 자기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치열하게 싸웠을 것이다. 파이의 아버지가 누누이 말했던 동물의 방어기제, 본성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도, 실제로 응용하게 되는 건 목숨을 건 사투, 본능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누르고 살면서 세상의 이치에 순응해야 할지, 나를 시험하듯 모험 속에 내던져야 할지 항상 선택의 길에 서게 될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절망을 생존의 희망으로 바꾼 파이처럼 살아가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또 고민한다. 무엇이 이성과 본능, 무엇이 나를 살게 할 것인지를.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459~460페이지)

 

이렇게 유명하고 사랑받은 작품을 이제라도 읽게 된 게 다행이다. 문장과 일러스트가 함께 보여준 재미도 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특히 색채가 강해서인지 동물들과 바다의 장면들이 더 생생한 느낌이다. 사진 한 장으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문장에서 보이는, 동물과의 대치에서 흐르는 긴장감, 이대로 생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심각함, 낯설고 생소한 바다의 분위기까지 일러스트가 그대로 전한다. 마치 읽는 이가 파이가 되어 그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말이다. 올컬러 일러스트 40여 점이 수록된 이번 특별판이, 아직 파이 이야기를 만나지 못한 독자와 관객에게 호기심을 더해줄 것 같다. 문장과 장면 속으로 빠져들어, 힘껏 싸우고 헤엄쳐 육지에 도달할 그 순간까지의 모험을 피부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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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7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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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8 1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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