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 브런치 - 원전을 곁들인 맛있는 인문학 브런치 시리즈 3
정시몬 지음 / 부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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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정의로 문을 여는 저자의 의도가 분명하게 보인다. 저절로 공감을 부른다. 고전은 '나이를 2천 살 정도 먹어야' 나, 좀, 고전이네~ 하고 이름을 올릴 수 있다거나, '지속적인 탁월함'을 가진 작품이라고 인용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가 가장 공감했던 고전의 정의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고전. 사람들이 칭찬은 하면서도 읽지는 않는 책.' 이보다 더 매력적인 고전의 정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전을 구매했는데도 읽지 않았거나, 혹은 도서관에서 대출해왔어도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나는 마크 트웨인의 고전에 대한 정의를 첫 번째로 뽑고 싶다. 실제, 『세계문학 브런치』를 읽다 보니, 고전의 맛보기나 재미있게 읽을 요소를 끄집어내서 밥상을 차려놓은 저자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고전 속 메시지들을 찾아 이야기를 끌어내고,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원전으로 토핑까지 얹어놓으니 저절로 빠져든다. 그 결과로 칭찬은 하면서도 읽지 않는 책을, 읽고 나서 칭찬까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겠냔 말이다.

 

모두 7개의 챕터로 나누어 그 흐름을 즐길 수 있게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그 포문을 열고, 단테와 괴테의 삶을 비교하면서 선과 악, 지옥과 악마를 말한다. 장르 문학에서 인간의 내면을 보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소개한다. 근대 소설의 거장들을 불러오고, 세계문학의 악동들이라 부르는 작가의 생애를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시를 읊으며 그들의 문장에서 감정을 읽는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 유명한 제목에 여러 번 읽어보자 마음먹으면서도 방대한 분량에 감히 첫 페이지를 열지도 못한 작품이다. 영화로 만나면서 흥미를 시도할 수는 있으나, 저자의 말에 멈칫거리게 된다. 실제 우리가 알고 들어왔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이야기는 왜곡되었건, 빠져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원전을 읽어야만 제대로 그 작품을 판단할 수 있다는 건 여기에서도 적용되는 말이다. 게다가 이 작품들을 검열해야 한다던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놀라웠다. 예나 지금이나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억압하려 했던 건 변함이 없구나. 그래서 고전이라는 말이구나 싶기도 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후대의 작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온갖 장르에서 재해석과 재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깊이와 작품성이야말로 고전의 힘이다. 독자 여러분이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향해 당긴 분노의 활시위처럼 힘차게 울리는 이 고전의 내공을 이번 챕터에서 조금이나마 느껴 봤기를 바란다. (76페이지)

 

메피스토펠레스를 데리고 와 우리 마음에 사이다 한 잔 뿌리기도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파우스트에게 던진 유혹에 메피스토펠레스를 악으로 볼 수 있지만, 어쩌면 얇고 두꺼운 가면 하나를 쓰고 사는 우리 모습을 대변하는 게 메피스토펠레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체면이나 분위기상, 해서는 안 될 일이나 말이 얼마나 많은지 너무 잘 안다. 그렇게 쌓이다가 뱃속에 엄청난 양의 고구마가 축적된 것처럼 만성 변비에 이르면 결국 성능 좋은 변비약 몇 알, 혹은 대장 청소를 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 닿지 않게 살려면,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의 거칠 것 없는 입담이나 느물거리는 만사 오케이 태도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에서 지금 우리 삶의 위치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을 불러오는 것. 고전의 힘은 여기서 발휘되는 게 아닐까.

 

문학에서 찾는 어떤 메시지나 가르침이 아니라, 그 맛을 즐기면서 접근하는 게 우선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서 왜 이렇게 무겁게 다가오나 싶었는데, 그 분위기는 언급된 작품의 제목과는 사뭇 달랐다. 고전이라고 해서, 첫 부분에 언급한 것처럼 2천 살 이상 잡순 작품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까지 끌어들인다. 흔히 장르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차려놓고 왜 그 작품들이 꾸준히 인기를 먹고 살아오는지 찾게 한다. 애드거 앨런 포, 애거서 크리스티를 비롯한 추리 소설의 대표 주자들이 말하는 냉혹한 현실을 상기하게 하면서도, 셜록 홈스 시리즈의 작품을 분석한다. (여기서 '분석'이라고 하는 건 깊은 연구라기보다는 맛보기 정도다)

 

『보물섬』을 쓴 스티븐슨과 『솔로몬 왕의 보물』을 지은 해거드가 활동하던 당시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이라 불리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탐험가, 모험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이야기 속에 반영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평론가 루카치(György Lukács)는 소설을 '부르주아 계급의 서사시(bourgeois epic)'라고 불렀는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모험 소설은 말하자면 '제국주의자들(imperialists)의 서사시'이기도 했다. (172페이지)

 

네 번째 챕터에서 다룬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더 흥미롭다. 유명한 저자의 이름과 작품들에서, 마치 그 작품들을 읽은 것처럼 착각이 들게 하는 게 나에게 각인된 셰익스피어였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은 게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한두 편이 전부다. 그런데도 마치 '내가 혹시 그의 작품을 읽진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자주 갖게 한다. 너무 유명해서, 너무 많이 각색되어 대중에게 알려졌기에 내용을 다 알아서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또 오해가 생기기 쉽다. 그 작품의 일부분이거나, 내용을 변형했기에 원전과 다르게 알게 되고 또 그게 사실이라고 굳어지는 내용.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이 '그 상인'이라고 생각했던 적 없는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나이를 보면서 '에구구, 어린 것들이 공부나 할 것이지~'하면서 읽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의 절대적인 사랑 앞에서 한 번쯤은 나에게도 그런 사랑 찾아오기를 바란 적 없었나? 살벌한 요즘을 살아가기에 너무 철없는 생각인가? ㅎㅎ 이번에 앤 타일러의 『식초 아가씨』를 읽으려고 하다가 원전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먼저 제대로 읽고 나서 읽으려고 아직 펼치지 못했다. 희곡 버전과 소설 버전의 비교도 재밌을 것 같다.

 

특히 다섯 번째 챕터인 근대 소설의 거인들에서 소개한 작품의 목록이 토마스 C. 포스터의 『미국을 만든 책 25』에 언급된 목록과 겹치는 작품들이 몇 권 있었다. 그걸 보면서, 근대 소설에서 미국이 빠질 수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문학의 역사적 흐름이나 특히 이 책에서 말하는 고전들을 읽은 게 거의 없어서, 근대 소설과 미국 관계에 대해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겹치는 목록만 봐도 그 연관성에 관심 두고 싶어졌다. 문학과 역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또 한 번 이렇게 배운다. 『주홍 글씨』를 통해서 본 불륜의 공동 책임, 어떤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다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 여자의 인생과 사랑이 궁금하게 하는 『보바리 부인』과 『안나 까레니나』, 원전을 읽어야 그 인물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다짐하게 하는 『레 미제라블』, 오디세이아를 바탕으로 했다는 『율리시스』 등 읽고 싶은 목록이 더 늘었다. 2천 살까지는 아닌 이 작품들과는 나이 차가 그래도 덜 할 터이니 부담이 적지 않을까? ^^

 

『율리시스』는 이렇게 작품을 둘러싼 주변의 엄청난 찬사와 담론에 휩쓸려 오히려 독자를 많이 놓친, 전형적인 저주받은 고전의 하나다. 독자 입장에서는 일단 기죽지 말고 책을 집어 들어-이렇게 말하기에는 책이 좀 두껍기는 하다. 보통 8백 페이지, 거기다 후대 평론가나 편집자의 상세한 주석이 달린 경우에는 1천 페이지를 훌쩍 넘어가기도 하니까-시작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297페이지)

 

나에게 재미와 놀라움을 선사했던 여섯 번째 챕터.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도리언 그레이도 반가웠고,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는 첫 페이지에서 이해가 안 되는 설정이 시작되더라도 어려워하거나 고민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된다.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드라큘라』를 화면이 아닌 활자로 만나면 더 섬뜩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그 섬뜩함 뒤의 마음은 혹시 또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더라. 냉소와 독설의 대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이 더 궁금해진 건 물론이고, 아이들 책이라 여겼던 『걸리버 여행기』를 완독하고 싶어졌다(우리가 영화나 만화로 접한 걸리버 여행기는 원전 일부라고 한다). 『모비 딕』에 등장하는 캐릭터 스타벅이 스타벅스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도 이제 알았네. 무엇보다 나에게 이 챕터의 압권은 『돈 키호테』이다. 열린책들 판본으로 이 책을 구입했으나, 두 번 말하면 입 아플 정도인 그 말. 아직 읽지 않았다. 그냥 기사의 모험 정도로만 생각했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으면, 얼마나 주인공이 멋졌으면 이렇게 오랜 시간 회자하면서 다른 판본이 거듭 나올 정도가 되느냔 말인가, 라는 궁금증과 기대가 있던 작품이다. 그런데 이번에 알았다. 모험을 떠난 돈 키호테, 그는 젊고 멋지고 잘생긴 청년이 아니라 노인이었다는 걸. ㅠㅠ 뭐, 노인은 기사도 하지 말고 모험도 떠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지만, 오랜 시간 나에게 '돈 키호테'는 세상 모험을 즐기는 멋지구리구리한 배낭 여행자쯤으로 각인되었단 말이다. 정말 충격이야.

 

에이해브와 그 똘마니들의 으쌰으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스타벅. 하지만 비록 동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는지 몰라도 그의 이름은 『모비 딕』에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보다도 더 현대인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 최고의 커피 브랜드라고 할 스타벅스(Starbucks)가 바로 그의 이름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회사 창립자들 중 한 명이 『모비 딕』의 광팬이라는 인연 덕분이었다. (352페이지)

 

세르반테스는 그가 활동하던 16세기 무렵까지도 스페인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중세의 잔재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를 풍자하기 위해 『돈 키호테』를 썼다. 분명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풍차를 공격하는, 즉 이상주의에 도취되어 무모한 짓을 일삼는 일종의 '또라이'이자 반영웅(anti-hero)이다. 이 책이 동시대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향을 끌어낸 것도 예리한 풍자의 힘 덕분이었다. (390페이지)

 

마지막은 시로 그 브런치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들을 소개한다. 여전히 시를 읽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이 지워지지는 않지만, 그 배경과 시인의 삶을 듣고 읽으니,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 더 들어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편하지는 않지만 계속 접근하고 싶은 장르다.

 

바이런의 시편들 가운데 지금까지도 일반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는 작품은 연애시들이다. 이들 시에는 여성 편력이 복잡했던 그의 실제 인생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를 보면 바이런은 상당한 미남이었던 것 같고, 거기다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에 아름다운 시를 쓰는 재능까지 갖추어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절름발이였지만 오히려 그의 불구는 여성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해서 돌봐 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468페이지)

 

엘리엇이 뮤지컬 <캐츠Cats>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캐츠>는 고양이들의 습성과 생태를 묘사한 시를 모은 엘리엇의 시집 『늙은 시인의 영리한 고양이 안내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를 원작으로 한다(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서식하는 유대류 동물 '포섬possum'에서 따온 Old Possum은 엘리엇의 별명이었다). (527페이지)

 

 

시와 소설, 희곡 등 80여 편의 작품으로 우아한 브런치 차려놓은 작가의 밥상을 잘 받았다. 때로는 극과 극의 분위기로, 때로는 비슷한 부분의 비교로, 때로는 오해를 바로잡으면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졌다.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확인해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번 읽어봐도 좋겠다고, 이렇게 재밌는 작품들을 못 읽을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의미나 메시지는 그다음에 찾아도 늦지 않으니 부담 내려놓고 즐겁게 시작해 보라고 말하는 듯해서 안심된다. 그래서 선뜻 도전해보고 싶은 목록이 엄청 늘었다. (인터넷서점의 장바구니가 이미 터질 지경이라는 건 안 비밀)

 

다른 목적이나 수식어 필요 없이, 일단은 문학을 즐겁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와 가치는 둘째 치고, 문학의 맛에 집중하라는 저자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맛있게 먹어야 소화도 잘되고 영양분도 섭취가 된다. 말 그대로 '문학의 맛'을 제대로 전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발휘된 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고전 무식자인 나를 그 늪에서 건져 올릴 책으로 남을 것 같다. 이 어려운 작품들 이야기를 하면서 편하게 읽히는 책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데, 앞서 출간된 작품들은 읽고 싶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책들도 읽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도서 상세페이지에서 본 저자의 소개가 재밌어서 이 책을 읽게 됐다. 책을 좋아하지만, 책과 관련 없는 일을 회계 일을 하게 되었고, 어느 날 한국에 출장 왔다가 우연히 출판사를 소개받고 진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게, 저자는 천생 책과 가까이, 아니 이렇게 책을 직접 쓰면서 살아야 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 대책 없는 간서치가 되었다는 저자가 쓴 책은, 그것도 고전을 얘기하는 책은 어떨까 싶어 궁금했는데 읽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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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욱 2017-01-2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란 칭찬을 하면서도 읽지는 않는 책이라는 말이 정말 공감되네요. 저는 이 독서노트가 고전 같아요. 마치 소개하신 이책을 다 읽은 느낌이 드네요. 그래서 오히려 책을 사서 읽을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건 무슨 조화일까요....

구단씨 2017-01-20 19:57   좋아요 0 | URL
어쩌면 좋죠? 제가 이 책의 스포일러를 너무 과하게 드러낸 걸까요? ^^
이 책의 저자분이 들으면 슬퍼할지도 모르겠어요. ㅎㅎㅎ
이 브런치 시리즈를 한번은 다 접해보고 싶더라고요.
출간일 순으로 보면 이 책이 가장 최근 출간작인데, 그래서 저는 거꾸로 갑니다. ^^

조승욱 2017-01-2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부터는 좋은책은 칭찬만 하지 않고 직접 읽어보려고 결심했어요^^
덕분에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