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무대 위의 문학 1
하타사와 세이고.구도 치나쓰 지음, 추지나 옮김 / 다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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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난 후... 『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직접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TV나 책을 통해서 봤던 심리치료 과정에서, 서로의 처지를 바꿔놓고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그 정신적인 고통을 전문가와의 상담으로라도 덜어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상황극, 역할극 같은 것처럼 보인다. 아주 작은 무대(무대라고 할 것도 없는 어떤 장소) 위,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언제 어느 때,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그 일로 이런 고통을 받았지. 대충 이런 내용의 연극이 펼쳐진다. 고통 받았다고 여긴 사람은 그 반대의 관점을 연기한다. 실컷 흥분하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과격해지기도 한다. 그 맞은편의 누군가는 침묵하거나 듣기만 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서로에게 한발 더 다가서는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보는 사람이 느끼는 그 감정이 진실일지 아니면 그 순간의 가면일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살아가는 동안에 바뀐 그 입장에서 상대를 봐야 할 때가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연극이 많이 생각났다. 연극으로 먼저 오르고 난 후 소설이 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낭독회로 진행되었을 때도 상당히 주목받았다고 한다. 비단 일본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증거다. 새삼 얘기하는 게 불필요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 흔한 일상처럼 되어버렸다는 게 아픈 이야기라는 것. 이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계속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이 책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왕따 문제나 청소년의 자살 문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아이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부모의 진짜 얼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실의 이른 아침. 한 여학생이 자기 반 교실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유서로 보이는 편지가 담임선생님에게 도착한다. 편지의 맨 끝에는 같은 반의 아이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이 다섯 명을 따로 대기시켜 놓고 아이들의 부모를 호출한다. 학교에 도착한 다섯 명의 학부모들은 저마다 자신의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 착한 아이들이다, 내 아이를 격리해 놓지 마라, 죽은 아이가 행실이 올바르지 못했다, 편지가 조작된 것이다, 등등. 자신의 자녀가 죽은 아이의 가해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겠지.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인 줄도 모르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외침만 반복한다. 그런데 죽은 아이는 담임선생님, 그룹에서 외면당한 자신과 같이 밥을 먹어준 친구, 아르바이트하던 신문보급소의 소장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편지의 끝에는 똑같이 다섯 명의 이름을 적어서...

 

가해자의 학부모가 모이기 시작한 그 순간, 즉 이 연극의 처음 부분부터 나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한 생명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중학교 2학년, 소소한 수다에도 까르르 웃음이 날 것만 같은 가벼움마저 사랑스러운 나이, 인생의 큰 그림보다 당장 바로 앞의 유치한 우정이 소중하다고 여길 수 있는, 정말 순수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시간을 미처 다 반짝이지도 못하고 버린 것에 대해 아파해도 모자랄 고통일 텐데... 불태우고 찢어버린 편지를 앞에 두고 '이제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단명료한 마침표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무서웠다. 같이 그룹을 만들어야만 유지되는 게 중학교 생활이라니 인정하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지만 요즘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그런 모양이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무리의 형성이나 유지되는 근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를 동반한다. 그냥 미워, 그냥 싫어. 약해 보이니까, 만만하니까, 한번 찔러보니 말을 잘 들으니까. 또 어떤 이유가 더 있으려나...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룹 안에서 한 아이를 밀어내고, 왕따를 시키고, 횡포와 폭력, 협박을 일삼는 이유가 그저 무리와 한 개인이라는 차이 말고는 없던 것이다. 협박에 못 이겨 아르바이트해서 상납을 하고, 그것마저 채우지 못하니 가해자들이 나서서 원조교제를 시키는 것도 너무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진다.

 

그룹에 들지 못하면 외톨이가 되고, 아주 교묘한 따돌림으로 들키지도 않게 하는 고단수의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중학생이라니... 그 나이의 아이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아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로 되돌아가고는 한다. 현직 교사가 직접 쓴 이야기는, 그가 직접 경험한 내용이 아니지만 간접 경험으로 보고 듣고 상담한 많은 내용을 근거로 써졌기에 상당히 사실적이다. 그런 부분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시선이 바로 부모의 입장에서 취해야 할 자세다. 그것도 가해자의 부모 처지에 놓였을 때 어떤 시선과 생각으로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보이는 가해자의 부모들은 한결같았다. 계속 드러나는 아이들의 이름 앞에서도 부정했고,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오점만 찾아내려 했다. 피해자가 했던 그 불법적인 행동(중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한다거나, 원조교제를 하는 것 같은)만 들춘다. 그러한 행동이 이루어져야 했던 배경에 자신의 아이, 가해자가 있었음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매일같이 얼굴 보고 지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아이들. 겨우 십 년 조금 넘게 살아온 시간 동안 그 아이들에게 그런 인성이 갖추어진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단숨에 속내를 끄집어낸 엔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부모들을 휙 둘러보더니 조용히 곱씹듯이 말했다.

"오늘은 운이 좋았네요. 소원을 이뤘습니다. 줄곧 궁금했거든요. 걔들 부모들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엔도는 다시 한 번 부모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휴대전화 화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어서 사과해. 미치코한테 사과해! 어서!" (103페이지)

 

밖에서 행동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면서, 그 말 때문에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에 부모가 있다. 아이가 밖에서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집에서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할 것이다. 결혼한 여자의 입장에서 시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너희 친정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더냐,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성장이나 인성에 있어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가장 먼저 관계를 형성하는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서 굳이 그 배경에 부모를 대입해 판단하는 게 익숙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부모의 가르침이나 부모의 태도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는 부분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처음 상연되었던 연극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굳이 소설로 다시 써져야만 했던 이유가 이렇게 설명된다.

 

이야기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 진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누구나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 꺼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미치코의 진실을 알고 있던 신문보급소의 소장은 하루 늦은 자신의 행동에 울분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의 진실을 알고 있던 부모는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처리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쳤다. 나의 예상은 여기서 빗나갔다. 연극의 막이 내려지기 전에 많은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갈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긍정적인 다음 장면도, 가해자 부모의 태도가 달라질 거란 희망도, 가해자인 아이들의 인성에 대해서도, 온전하게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장 누군가의 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다음 행보를 가르쳤던 것일까.

 

연극이 끝나고, 단 하나의 조명만이 무대 위를 비추고 있는 듯하다.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피해자인 미치코의 표정을. 마치, 이제야 좀 편하다는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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