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쓴 편지를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하고 싶거든, 날이 밝은 다음에 절대, 다시, 펼쳐보지 말고 그대로 부쳐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그건 누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뭐에 홀렸는지 캄캄한 밤에 스탠드 불빛 하나 의지해서 써내려간 몇 문장에 온 마음을 담았다. 그대로 봉투에 넣고 입구를 봉한 다음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다. 그럼 다 끝난다. 안전하게 상대의 손에 안착하면, 끝. 반면, 혹시라도 맞춤법이 틀렸을까 쓸데없는 말을 하진 않았을까 염려되어 정신 차리고 다시 펼쳐보는 순간 부칠 수 없는 편지가 되고야 만다. 다시 읽어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차마 부치지 못하고 다시 펼쳐본 것에 안도한다. 아, 다행이다, 얼굴 붉어질 일을 만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일까?

 

밤이라는, 마법을 부리는 시간에 적어 내려간 마음은 해가 뜨면서 저절로 풀린다. 신데렐라는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 마법이 풀리지만, 편지만큼은 아니다. 그 반대다. 밤에 마법이 걸리고 환해지면 마법이 풀린다. 이상한 건 유독 왜 밤에 책을 더 많이 읽게 되고, 말을 많이 하게 되고, 음악을 많이 듣게 되며, 누군가에게 전하는 말조차 밤을 이용하게 되는가, 이다. 물론 그 정도에 따라 개인적인 차이는 있다. 나를 비롯하여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느낀 얘기다. 하루의 일과가 마무리되는 시간, 조급했던 아침이나 나른함에 피곤한 오후보다 좀 더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기에 그렇다는 물리적인 이유 말고, 감정적인 이유가 가장 적합하게 들린다. 눈앞의 것들은 불을 켜지 않으면 캄캄해서 안 보이고, 한낮의 소란스러움 대신 고요함이 차지한 자리. 끊기지 않고 흐르는 음악보다는 누군가의 사연 한 자락이 더 귀에 들어오는 라디오가 어울리는, 음악의 볼륨을 조금 줄여도 그 속삭임에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

 

왜 그런 거지?

밤이 사람을 홀린다는 말 말고는 딱히 답을 찾기가 어렵다. 솔직히, 그 답을 굳이 찾고 싶지도 않지만... 밤에 잠들기 어렵다면, 잠들기 위해 몇 시간을 누워있어도 잠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잠을 청하고 싶지만 멀리 달아나버려 짜증을 불러오기 전에, 그래, 차라리 잠들지 않는 밤을 흘려보내는 게 낫다. 밤이 부리는 마법에 걸려들어도 좋은 거다.

 

 

 

 

 

 

 

 

그래서 이런 음악도 듣게 된다.

Meav - One I Love

누군가는 아일랜드의 정서가 우리와 많이 닮았다고도 하던데... 그래서인가? 메이브의 노래만큼은 나에게 잘 맞는다. One I Love는 아일랜드 출신의 팝페라 가수 메이브가 부른 노래다. 몇 년 전, 어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내 귀에 들어왔다. 그때도 밤이었다. 지금 말하기 어렵지만 잔뜩 소란스러운 마음을 붙잡고 어딘가로 향하던 골목길이었다. 어느 상가에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방 열린 창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어떤 노래인지 몰라 다음 날 온갖 검색을 통해 흥얼거리던 가사를 검색했다. 그렇게 알게 된 노래에 미치도록 빠져들었다. 이 노래 한곡을 몇 달 동안 반복재생해서 듣곤 했었다. 그렇게 밤낮 구분 없이 나에게 찾아들었던 노래다. 유독 밤에 들을 때가 많아 감정적으로 위험해지기도 했지만 중독처럼 끊을 수 없는 노래였다. 친구가 우연히 이 노래를 같이 듣고서는 무슨 장송곡 같다고 했다. 그렇게 들릴 지도 모른다. 워낙 우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게 듣는 사람의 기분이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노래만큼은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울할 때, 더 우울해지고 싶어서 들을 때가 많았다. 나에게 이 노래는 고요한 침잠에 아무 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노랫말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 노랫말 자체도 유쾌하지는 않지만 - 멜로디가 주는 분위기가 스산하다. 그럼에도 무슨 고질병처럼 이 노래를 찾는다. 몇 달 내리 들었던 적도 있다. 가을에 이 노래가 찾아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서늘해지는 이 계절, 가을, 밤에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어떻게 출렁일지 눈에 훤히 보인다. 잠들지 못해서 뒤척일 때면 더욱 염려해야 한다. 이 노래는 달콤한 꿈속이 아닌 몽유병처럼 목적지 없는 발걸음을 내딛게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One I love, two she loves, Three she's true to me...

One I love, two she loves, and three she's true to me...

 

 

 

 

 

 

 

 

 

 

 

 

 

한밤중에 빗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영화도 괜찮다.

호우시절 2009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혹은 “처음보다 설레고 그때보다 행복해” 라는 카피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남자 동하(정우성)는 중국 출장 첫날에 우연히 관광 가이드를 하고 있는 유학 시절 친구 메이(고원원)와 재회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만난 두 사람.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지금 어떤 사이일까. 달콤했던 과거의 시간이 떠오르고 보이지 않게 감정이 오고 간다. 그때와 지금, 뭐가 달라져 있을까. 앞으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때를 알고 딱 맞춰 내리는 비가 좋은 비라고 하는 것처럼, 지금 이들의 사랑은 때를 알고 잘 찾아와 준 것일까.

내가 그동안 봤던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참 잔잔했다. 감정의 기복이 있는데도 파도 같지 않았다. 때론 밋밋해 보이기도 했다. 그 유명한 다른 영화들 놔두고 이 영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볼거리가 많았던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많은 요소를 골고루 갖춘 영화다. 지독하게 싫어하는 비, 내 눈에 그다지 매력 있게 보이지 않는 배우, 그저 그런 스토리. 그런데도 왜 이 영화가 생각나는지... 낯선 나라의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추는 춤마저 생생하게 떠오른다. 충동적(?)으로 사랑을 나누려다 멈춘 두 사람의 괴로운 모습도 생각난다. 다시 만나서 반가운건지 염려하는 마음인지 모를 그 혼란이 그대로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뜻 그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어서 망설이는 마음이 얼굴에서 읽힌다. 안다. 그 마음, 그 고민, 그 불안함.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내린 결정과 반대의 결말을 보여준 두 사람 때문에 자주 떠오르는 영화다. 어느 날 메이에게 배달된 자전거가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고 있을 것만 같아 내가 괜히 설렜다. 비를 싫어해도, 좋아하는 배우가 아니어도, 상투적인 스토리에도 이 영화를 이 밤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 자꾸만 멀쩡해지려 애쓰는 내 마음을 흔들어서다...

“내가 아직도 널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때를 알고 내리는 비가 좋은 비야...”

 

 

 

 

 

 

 

 

 

 

이 분위기를 이어 서른 두 편의 단편영화 같은 이야기를 읽어도 좋겠다.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영화감독 김종관이 쓴 두 번째 에세이다. 그의 첫 번째 글이 살짝 향수를 불러오는 느낌이라면 두 번째 글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은 수줍게 얼굴이 붉어져도 좋을 분위기를 만든다. 한낮보다는 밤에 읽기에 더 좋다. 저자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단편 소설 같은 느낌에 뭔가가 덧대어져 짧은 영화 서른 두 편을 본 기분이 든다. 남자와 여자, 딱 두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둘은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고, 헤어진 사이일 수도 있다. 너 때문에 연애 불구가 되었다고 소리치던 여자가 남자를 괴롭히듯 늘어지던 장면은 찌질했던 연애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이야기 속 여자가 찌질해 보였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너와의 연애가 이런 후유증을 남겼으니 내가 치유할 수 있게 너도 나를 좀 도와야 한다.’ 라는 목소리로 들린다. 연애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 했으니, 그녀의 말투에서 전해지는 의미를 내 맘대로 해석해서 저렇게 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지나간 연애가 떠올랐다. 나는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서 어땠나, 저 여자처럼 당당하게 연애의 끝을 볼 수 있었나, 알량한 자존심 세우느라 쿨한척 연기를 했었나...?

저자의 경험일 수도 있고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랑의 여러 장면이 어느 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 이 밤에 그들의 이야기에 같이 뛰어 들어도 좋겠다. 이건, 우리의 시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술에 취한 듯 휴대폰에서 삭제된 전화번호를 기억해내지는 말자.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기적 같은 순간이 있었다. 잊지 말겠다고 다짐하던 아름다운 시간들이 있었다.

요즘은 굳이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잠시 머무는 것에 좀 더 충실히 즐기고 싶어한다. 남기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추억이 된다. 관찰자의 시선을 버리고 내가 풍경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인 기억이 생긴다. 감정의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아서 다시 오는 계절처럼 간간이, 그리고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243페이지)

 

 

마음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음악을 듣고도, 빗소리 같은 사랑을 봐도, 다양한 연애를 들었어도, 이렇게 밤이 부르는 상념을 이어가지도 내려놓지도 못하겠다면, 편지를 쓰자. 누가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 수신인이 없을지 모르지만, 쓰자. 끼적여보자. 시간이 흐르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시 그 글을 보게 되면 어떨지 모르겠다. 민망해지거나, 더 외로워지거나,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가슴에 담아두고 꺼내지 못했던 말을 해보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어. 혹시라도 누가 묻는다면, 왜 그랬냐고 나무란다면, 밤이 그랬다고 핑계라도 대면 되지 않겠나. 밤 11시가 마법을 부렸다고, 새벽 세시에 바람이 불어서 그랬다고, 지금처럼 비가 내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이다.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게 이유 없는 일도 일어나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도 많은 거다. 밤이라고 그 범주에 들어가지 말란 법도 없지 않나.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고. 그런 이유로 이해가 허용되는, 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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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4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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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4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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