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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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그때 딱 한 번만 오빠를 그냥 놔둬서 면접에 갔더라면 오빠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464페이지)

 

'아차' 하는 순간 인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만약에' 라며 그 순간을 반추하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순간이기에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다. 다만, 어떤 문제의 시발점이자 원인이 되는 순간이라는 것은 안다. 그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오빠의 면접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방식대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세상을 뒤흔든 범죄자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설마 내 아이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온갖 나쁜 일의 주인공이 내 가족일 거라고 처음부터 믿고 싶은 사람은 없다. 가족이란 그런 거다. 내 가족이 범죄자라고 하면 '설마' 하면서 부정부터 하기 마련이니까. 믿고 싶으니까. 그래서 감싸기부터 한다. 절대 아닐 거라고 믿으며 세상의 나쁜 짓에 내 가족이 연루되었을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사건의 진실을 알았을 때, 내 가족이 지독한 범죄자라는 걸 알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 같은 무서운 일이 내 가족의 일이 되어버렸다면...

 

“내 오빠는 연쇄살인범입니다!”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만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는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적은 있다. 남들이 모르는 각자의 가족 안에서 불편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을 만드는 가족 구성원을, 세상을 향해 욕하고 싶었던 적이 있지 않을까. 세상 둘도 없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밖에서 보는 그 사람의 모습이다. 저자의 오빠도 그렇다. 멋있고 인기 있는, 많은 여자가 그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며 온갖 것을 갖다 바치고 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대상이다. 어떤 죄를 저질러도 그는 빠져나갈 길이 열려 있다. 굉장히 지능적이고 악랄하며, 정신적으로 상대를 조종하면서 자기 외의 사람은 없는 것처럼 여긴다.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상대의 아픔 따위는 더더욱 모르는 사람이다. 사이코패스.

 

네덜란드 전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이 책의 등장은 잔인한 살인자를 단죄하고자 하는 한 가족의 몸부림이자, 살고자 하는 한 사람의 간절함이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자이면서 하이네켄 납치사건의 주범인 빌럼 홀레이더르의 여동생이 그의 잔인함을 온 세상에 드러냈다. 쉽지 않았다.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말해야 했다. 혹시나 자신을 뒤쫓는 사람이 있을까 봐, 자신이 하는 말이 도청당할까 봐 온몸으로 경계해야 하는 삶을 이어왔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몇 십 년의 세월을 두려움 속에서 견뎠다. 이 가족이 견뎌야 했던 시간뿐만 아니라, 빔(빌럼)의 잔인함을 그대로 받아야 했던 사람은 너무 많다. 빔은 자기 여동생의 남편까지 죽였다. 어린 조카들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했다. 자기가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을 빌미로 세상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특히 그가 만나는 여자들이 그에게 복종하게 만들고, 그 여자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그에게 당연하게 뭐든 해줘야 한다고 세뇌했다.

 

이쯤 하면 궁금해진다. 그의 잔인한 폭력성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처음부터 빔이 위협적이고 잔인한 존재였던 건 아니다. 착한 아들이었고 다정한 오빠였다. 빔의 잔인함을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훈훈하고 좋아 보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한 후 얼마 후 변했다. 술을 계속 마셨고 모든 일에 폭력을 앞세웠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혔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바로 폭력을 행사했다. 아내와 아이 할 것 없이, 심지어는 타인에게까지 그의 폭력을 드러냈다. 술과 폭력으로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다. 빔 오빠는 여동생 소냐와 아스트리드를, 남동생 헤라르트를 때렸다. 이 가족에게 대화는 의미 없다. 말이 사라진 곳에 폭력이 자리하면서 대화의 수단이 됐다.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폭력은 큰아들 빔에게 이어지고, 빔은 폭력을 넘어서서 거대한 범죄자로 성장한다. 아무도 말릴 수 없던 그의 잔인함에 가족들을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그에게 한없이 약한 존재로 자리했다. 그가 가족의 목숨을 쥐고 흔들고 있으니 아무도 나설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의 죄를 온 세상에 드러내고, 그가 다시는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게 가둬놔야 한다고 증언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폭력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다.

아빠는 엄마를 때렸다. 아빠의 예를 따라서 빔 오빠는 소냐 언니를 때렸다. 나의 '작은오빠' 헤라르트는 나를 때렸다. 나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먼저 싸움을 걸지 않았다. 아빠를 상대로도, 오빠들을 상대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장 어렸고, 거기다가 여자아이였다. 아무리 남자아이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해도 나에게는 늘 힘이 부족했다. (42~43페이지)

 

폭력의 대물림.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빔의 폭력성은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묻고 싶었다. 달래고 받아들여주고 대화다운 대화를 하면서 인간적으로 소통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정상적인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관계, 대상도 있다는 걸 빔이 보여줬다. 변호사가 된 아스트리드가 온 가족의 목숨을 걸고 증언하기로 한다. 이 책은 그 증언의 과정을 그대로 들려주면서 얼마나 긴장되고 위험한 순간을 넘어와서 세상에 내놓았는지 증명한다. 하루하루, 매 순간.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태로 살아간다는 게 정상은 아니다. 생각해봐라. 일반인이 방탄유리로 된 집에 살아야 한다는 게, 방탄조끼를 입고 지내야 한다는 게, 목 보호대를 차고 방탄 헬멧을 쓰고 다닌다는 게 일반적으로 보이는가? 증언하고 오빠의 살해 목록 1순위로 오른 아스트리드는 긴장하며 지냈다.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고마운 사람들과 작별해야 했으며,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그녀뿐 아니라 그녀의 모든 가족, 같이 증언한 오빠의 애인, 그들을 도와준 변호사까지 모두 빔의 적이고 그가 살해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런 관계가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정상적인 범주에서 생각하려면 아무런 답도 없는 문제였다. 답도 구할 수 없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일, 그런 대상이 바로 빔이었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에서 시작된 이 잔인함이 어떻게 이어지며 발전하는지, 그로 인해 세상의 악이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나는 2년 동안 이 순간을, 이게 나와 오빠의 관계에 어떤 전환점이 될지 상상했다. 여동생이 몇 년 동안 오빠가 유죄 판결을 받도록 공작을 해왔다는 사실을 오빠가 듣는 순간을 기다렸다. 오빠의 여동생, 오빠가 종신형에 대한 두려움을 믿고 털어놓았던 여동생이 이제 자기 손으로 오빠에게 종신형을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오빠가 심장에 칼이 꽂히는 기분을 느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여전히 눈물이 나왔다. (444페이지)

 

여동생이 친오빠를 법정에 세우는 일, 한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회고록의 등장이 일으킨 파문은 세대를 이어 대물림된 폭력의 결과였다. 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인생을 걸고 뛰어든 이 여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편으로는, 빔은 여전히 수감되어 있지만 언제 어디서든 그녀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게, 범죄자인 오빠를 가둬놓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날을 살아야 한다는 게, 이 가족을 비롯해 증언대에 오른 모든 사람들에게, 빔과 똑같은 종신형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이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위험을 무릅쓴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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