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여러 가지 중에서도 가장 호감을 끄는 것은 먹는 것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 싶다. 먹교수 이영자 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음식은 세 번 먹는 것이라고 했다. 눈으로 먹고, 냄새로 먹고, 입으로 먹고. 그러니 그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도 더 커지지 않을까?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충분하다며, 굳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던 나도 요즘에는 세끼를 다 챙겨 먹는다. 밖에 있을 때도 먹고 싶은 것 찾아서 잘 챙겨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 세끼를 채우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결과로 체중 증가라는 불행을 얻었으니... 다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는 숨길 수가 없다는 건 확실하다. 나도 모르게 젓가락이 먼저 나가고,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 씹고, 목으로 넘어갈 때의 그 기쁨. 맛있게 먹는 행복이 뭔지 이제야 조금 알겠다. 마음의 허함을 먹을 것으로 채우는 일도 마찬가지고, 너무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사람들 불러 모아 함께 나누고, 속이 상하는 일이 생길 때도 뜨겁고 매운 음식으로 슬픔을 식히려고 하는 걸 보면, 음식이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것은 분명하다.

 

대책 없는 인생을 사는 듯한 모리 마리에게도 음식은 행복과 가까이 닿아 있다. 부유한 환경에 공주처럼 자랐던 그녀가, 두 번의 이혼과 가난해진 살림에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갈까 싶었다. 태생부터 공주처럼 자라온 그녀의 삶이 이렇게 바뀔 줄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집안에 방치된 꽃들로 저절로 드라이플라워를 만드는 그녀가 직접 만들어가는 살림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그녀의 몇 문장으로 바로 사라진다. 씻은 듯이 없어진다. 그녀의 상황을 보면서 걱정을 하는 우리가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그녀는 태평하게 화려한 찻잔에 홍차를 달여 마시는 일상을 보낸다. 타인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그녀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180도로 뒤바뀐 환경이 그녀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있나? 하아. 그럴 수가 있더라. 모리 마리에게만 허용된 것 같은, 그녀만 가능할 것 같은 일상을 하나씩 풀어내는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녀의 일상 속으로 같이 들어가고 싶어질 정도로 긍정 마인드가 뿜어난다. 그녀의 일상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모리 마리의 아버지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쌍벽을 이루는 대문호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리 마리라는 작가도, 모리 마리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처음 알았다. 이런 대단한 이력을 가진 아버지를 둔 모리 마리의 성장이 어땠을지 기대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앞에서 그녀를 두고 '공주'라고 칭했는데,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그런 수식어가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예쁜 딸로 자라온 게 그대로 보일 만큼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모든 사랑을 넘치도록 주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그녀 인생에 계속 넘쳐흐르지는 못했다. 두 번의 이혼과 가난한 살림이 그녀 앞에 놓인 순간이 온 거다. 집안일은커녕, 부엌에 들어가기는커녕, 볕이 좋은 정원에서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일 것만 같은 그녀의 인생이 뒤집어진 거다. 극과 극의 환경. 이때부터 그녀의 삶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갈까 싶은 궁금증에 계속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녀가 그 순간을 어떻게 벗어나게 될지를.

 

그 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게 되는 건 이 책의 제목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가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일상의 기록 때문이기도 하다. 절대 쉽지 않은 인생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채웠던 그녀의 일상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틈을 비집고 들어온 작은 우울마저 털어내게 된다. 모리 마리는 탐식과 미식에 관심이 많은 작가다. 그녀의 취향대로 듣다 보면 세상 모든 음식을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말하는 음식은 원래의 레시피 그대로 한다면 더없이 우아해지고 보기부터 맛있는 음식이 될 것이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그녀만의 방식대로 새롭게 태어난 음식들이 대부분이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방법으로 본격적인 요리의 느낌을 내는 것'(61페이지)이 그녀의 요리법이니까. 이것만 봐도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확인했던, 그녀가 오늘을 사는 모습이 그대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순하게, 그러면서도 본연의 맛은 사라지지 않게, 그 음식과 함께했던 추억도 놓치지 않을 정도라면 충분하다는 듯이. 음식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 이상의 힘을 가진 것이라는 잊지 않게 강조하는 것만 같다.

 

책의 뒤표지에 강조하듯이 써진 말이 있다. "괜찮아, 먹고 싶은 건 매일 있으니까!" 이 신조대로 살아가는 그녀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건,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식탁 모습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느낌 때문이다. 조금 서툰 인생도 맛있는 음식 앞에서 순식간에 근사해질 수 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서다. 좋고 싶은 것의 구분이 명확한 그녀다. 맛없는 음식을 받아들고 화를 내기도 하고, 그녀만의 치유 방식으로 음식의 메뉴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인생을 돌이키며 들려준 유년 시절의 추억부터 현재의 생활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음식과 함께 들려오는 순간이 생생하다. 그녀 스스로 미식가라고 하지만, 그 미식의 진짜 의미를 아는 사람이어서 좋다. '음식에 관해 많이 알고 음식을 대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음식과 먹을 때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이 뭔지 아는 그녀 때문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들에 푹 빠져서 읽었다. 그래, 누구에게나 지나간 시간 속의 이야기가 있고, 음식을 대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되는구나, 싶은 공감에 괜히 배가 부르기까지 하다.

 

요즘 많이 듣는 말이 '소확행'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사는 것. 그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하곤 한다. 그 말을 아주 부정하지는 않겠다. 순간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행복에 그 순간이 행복하다는 건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인생 오늘 하루만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 소확행이 먹는 약이라면 그 약효는 오늘 하루 어느 순간의 잠깐이라는 생각에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때가 많았다. 지금만 괜찮으면 어쩌란 말인가 싶어서 말이다. 아마 내가 모리 마리였다면, 인생의 화려했던 시절이 자꾸 떠올라 오늘의 초라한 현실을 즐겁게 누리지는 못할 것 같다. 고통스럽고 매 순간 좌절할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형편없는 솜씨지만 요리를 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거워하거나, 홍차와 장미를 앞에 두고 사치(?)를 즐긴다. 내일에 또다시 찾아올 불행한 일들이 아니라, 오늘 자기를 확실한 행복으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인생을 채우는 것을 택했다.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녀 말처럼 먹고 싶은 건 매일 있으니까 괜찮은 거지 싶다. 자기 취향대로 먹고 싶을 것을 먹는 일이 가장 솔직한 행복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 인생을 근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듯하다. 소소하게 만드는 행복이 모이면, 인생 전체의 시간을 아우르는 행복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깨달음 같다.

 

 

요리의 맛은 봄이나 여름 등 계절의 변화, 그날그날의 날씨 상태, 선선하거나 덥거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또 먹는 사람의 기분에도 변화가 있으므로 숟가락으로 몇 숟가락, 몇 개, 몇 그램이라는 식으로 융통성 없이 만들 수 없는 법이다. (69페이지)

 

행복의 주체가 '나'가 되는 시간을 사는 것이 가장 최고의 행복이고, 최고의 인생이라는 걸 그녀만의 방식으로 전하는 게 재밌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찾아가는 시간을 열어준 것만 같다. 때로는 아이처럼 철이 없는 말과 행동을 보이는 것 같은 그녀지만, 조금은 뻔뻔해지는 인생도 행복해지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행복해지는 게 꼭 한 가지 길만 있는 건 아니잖아?! 행복에도 융통성이 있을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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