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C 힐러리 로댐 클린턴
조너선 앨런.에이미 판즈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저술 명의가 큼지막하게 박힌 책을 출판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저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는 의외로 크게 어필하는가 봅니다. ("저 사람은 책도 쓴 사람이야." "대단한걸?") 하지만 책의 외관만 지녔다 해서 그 종이와 잉크의 더미가 다 (책이 마땅히 품어야 할 평균적) 가치를 보장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정치인에게 매번 똑같은 방법으로 속는 유권자가, 책의 가치라 한들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회의주의가 어쩌면 세상을 보다 정확히 바라보는 시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이 시즌인가 보군"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출판 러시에 끼인 상품이라면 그리 달갑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정치인의 홍보책자가 아닙니다. 어떤 정치 진영을 지지하면서, 골수 팬이 아이돌스타를 바라보듯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민주당 지지자라면, 여태 간직해 오던 환상이 깨끗이 사라질 수도 있는, 두 노련한 저널리스트가 공동으로 기록한 "리얼리즘 연대기"입니다. 연대기가 다루고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아서, "두 대선 사이에 낀 4년"이 그 전부입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라는 게 어디 보통 중요성을 지닌 이벤트이겠습니까. 프라이머리-전당대회-대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만 다뤄도 대하소설 한 질 분량이 나올 것입니다. 이 책은 용케도, 얽히고설킨 요지경 같은 비화와 일화 중에,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여성 정치인, 그냥 여성 정치인이라고만 말하기엔 너무도 거물인 그녀에게 초점을 잘 맞추어(사진 찍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초점 맞추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정치 비사를 풀어 놓는 와중에 절묘하게도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구심점을 결코 비껴가지 않는 기교를 선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힐러리 클린턴의 홍보 책자도 아니고, 아무래도 과장이나 미화가 낄 수밖에 없는 자서전류는 더더욱 아닙니다.

 

7년 전(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누구나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을 점치고 있었을 때, 버락 오바마라는 신성(新星)이 등장, 기존의 모든 판도와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가 인기 있고 장래성이 충분하며 자격을 널리 갖춘 정치인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탄탄한 커리어와 관록을 갖춘 거물을 대신하기엔 너무 이른 것 아닌가, 그에게는 다음이란 기약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클린턴 여사는 이번을 놓치면 영원히 기회가 없지 않을까. "지나친 노욕"이라는 평판도 평판이고, 그 이전에 무리적 연령도 높고, 새파란 정치신인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면 과연 위신이 남아날 바가 있을까 하는 전망에 거의 다들 일치를 보았습니다. 이런 비관적인 전망은 그대로 "예언의 자기 실현력"을 발휘하여,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화제를 모은 지 불과 4년밖에 안 지난 초년생 오바마는 마침내 클린턴 여사를 꺾고 말았습니다. 부시 행정부가 저지른 대형 실책, 파국이 몰고 온 여파가 엄청났었기에, 공화당에서는 거물급 인사들이 출마를 회피했고, 따라서 민주당 전대의 승자는 차기 대통령으로 뽑히는 게 거의 확실시되었습니다.

 

이 책의 1장은 대통령 취임 직전의 오바마가, 힐러리 클린턴과 어떻게 협력하고 지지를 얻었으며, 지지를 대가로 약속한 바를 어떻게 일일이 다 실행에 옮겼는지, 양 진영의 기라성 같은 참모와 책사, 실무가들의 포진한 면면을 자세히 일러 주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2,30대의 젊은 수재들도 상당수이며, 앞으로 미국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 개성에 의해 물든 스토리를 펼쳐 갈지는, 일찌감치 이 챕터를 참조하고 관전하는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거물의 미미했던 시작을 조기에 발견, 주목하는 건 뒤늦게 판에 낀 관전자가 채 누리지 못하는 기쁨을 안겨다 주기 때문이죠. 단언컨대 2, 30년 뒤의 대권주자 중(민주당에 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책에도 수시로 나오지만 당적 변경이 미국이라고 해서 그리 금기시되기만 하는 것도 아니므로) 대여섯 명은, 이 책에 언급된 양 후보의 젊은 브레인들 중에 있을 겁니다. 책읽기의 재미는 이런 데서도 찾아야 하며, 편협한 정치 광신도의 자기도취 신앙고백은 순수한 독서인의 기분만 망칠 뿐입니다.

 

오바마가 비록 일반 유권자 사이에서 지지는 높았지만, 전당대회 대의원을 확보하는 레이스에서는 당내 기반이 몹시 중요했으며, 이 점에서 정치신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 못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측의 적시 양보는 이래서 중요했으며, 미국 전당대회 관행에 비추어 이 해에 클린턴 측은 패배 선언을 몹시도 미루는 편이었습니다. 더 이상 지연되면 당내 갈등이 심화되어, 축제로서 마무리되어야 할 전당대회가 앙금을 남긴 채 끝이 나게 되고, 이 경우 클린턴 지지층은 대선에서 오바마의 표로 결집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컸죠. 이 책 중간에도 나오는 푸마(PUMA. "당의 단합은 개뿔"의 약자) 그룹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바마는 먼저 민주당 내부의 의견일치를 이끌어내야만 했고, 이는 정권 지분의 대거 양보로 이어집니다.

 

미국에서 가장 유려한 연설가로는 빌 클린턴, 콜린 파월 같은 인사가 손꼽힙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1990년대 8년기 동안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그 실세였다는 말도 있지만, 민주당 성향의 일반 유권자를 상대로, 인기나 지지도 면에서 빌 클린턴을 능가할 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을 놓치면, 빌 클린턴을 놓치는 거고, 이 경우 오바마의 역량과 성향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던 전통적 민주당원들의 지지가 표로 연결될지는 완전한 미궁에 빠져듭니다. 이 경우 선거전에서 집중적 관심을 모으다 정작 본선에서 패배하는 희귀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었습니다.

 

간발의 차로 교통사고를 모면하여 귀가한 아이에게, "잘 됐네." 하고 어깨만 토닥거려 주고 끝내는 부모가 있을까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혹시 현실이 될 수도 있었던 악몽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만전을 기하는 부모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2008년의 오바마는  젊고 미숙한 정치인이고 설사 패배한다 해도 이후 4년 내내 대통령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정계에서 20년을 누벼 온 힐러리 클린턴보다 더 현실적이었고, 더 노련한 처신을 할 줄 알았습니다. 이 책은, 오바마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오바마의 그런 "어른스러운" 면을 보고 크게 각성할 줄 알았던 그녀, 그리고 종전과는 다른 컬러로 거듭날 줄 알았던 그녀의 "후일담"이자 "리부트(?) 시퀄"입니다.

 

이 책에 보면 오바마 1기 집권기간 중, 국무장관이던 그녀가 대통령보다 더 높은 지지도를 기록하기도 했던 사실의 언급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힐러리 클린턴에게는 우리식 표현을 빌리자면 "안티", 혹은 "비토 세력"이 많았는데, 이는 화려한 락스타식 행보를 영부인 시절, 뉴욕 상원의원 시절부터 즐겼던 그녀에 대한 반감이 남긴 흔적이죠. 이들을 모두 성차별주의자라 부를 수도 없는 게, 여성 중에서도 그녀의 퍼스낼리티에 깊은 반감을 지닌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래의 스타일을 거두고, 실무자로서 조용히 외교 업무에 종사하며 세계를 순방하고 다니는 그녀의 선택을 지켜 보며, "생각했던 것과 다른데?" 같은 반응이 점차 대세를 형성했기 때문에 저런 여론조사 결과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빌 클린턴이 1992년 대선에 나왔을 때도, 많은 이들은 "외교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나섰습니다(맞상대였던 조지 H W 부시에 비해). 2008년에도 똑같은 지적이, 아내인 그녀에게도 행해졌다는 건, 여러 복잡한 생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4년 간의 국무장관 경험이야말로, "백의종군(사실 국무장관 같은 초고위직이 "백의"로 은유될 건 아니겠습니다만)", "외교 경력" 의 이미지를 그녀의 종전 약점위에 완벽히 커버해 주는 회심의 한 수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을 꼼꼼히 읽어 보면, 4년의 국무 장관 역임이 그리 성공적인 것만도 아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습니다(이런 솔직함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입니다). 콩고의 어느 여대생이, 이슈에 대한 남편(빌 클린턴)의 의견을 묻자 크게 역정을 낸 것도 국무장관으로서의 온당한 처신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솔직히 그녀의 강점은 미국 국내 문제의 개혁과 정비 쪽에 식견이 풍부하다는 쪽이지, 외교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그녀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일반 대중에 남겨진 이미지랄까 우려를, 이런 "자세를 낮춘 행보", 혹은 "성실한 동선"을 통해 크게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오바마는 민감한 정치 문제에 대해 일일이 총대를 메고 전선에 나서다(물론 이게 대통령의 본분이니 당연한 선택입니다만) 이미지를 많이  깎아먹기도 했습니다. 최소한 오바마 집권 1기의 최대 승자는 힐러리 클린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누차 말하지만 이 책은 힐러리 이야기만 담은 게 아닙니다. 힐러리를 주(主) 피사체로 삼되, 그녀 주위의 모든 유의미한 풍경을 가능한 한 사실 그대로 전달하려 애쓴 멋진 책입니다. 백악관 의전장은 실세 중 실세인데, 이의 지명권을 가진 힐러리(이런 약속도 안 지키면 그만인 게 정치판입니다)가, 자신의 극렬 지지자인 핵심 참모를 불쑥 카드로 내민 것도, 오바마 측에선 충분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을 지켰고, 이에 대한 답례는 2012년 힘든 승부에서 빌 클린턴의 전적인 지원으로 갚아졌습니다. 미국이라고 해서 추악한 술수와 배신이 난무하는 건 정치판의 공통 속성인데, 두 대인의 멋진 거래(그러나 결코 화합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를 지켜 보는 마음이 뿌듯해 오더군요.

 

이름이 이니셜로 불리는 건 정치인들의 로망입니다. 인기만 있다고 다 그랬던 게 아니라, 예컨대 로널드 레이건은 RR 등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친근하고, 뭔가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분위기라야 이런 애칭이 붙여졌습니다. 앞서 말했듯 클린턴 여사는 기껏해야 존경의 대상이었지, 그녀가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거나 친근한 이미지였다거나 한 적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것이며, 적잖은 계층, 집단은 그녀를 경원,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얼핏 Her Royal... 같은 착시마저 일으키는 저 이니셜 HRC는, 아직까지는 그녀의 견고한 지지층에서나 통하는 애칭일 것입니다. 이 구호, 이 울림이 만인의 입에서 자발적으로 나오게 하는 신뢰감, 우호감, 친근감의 형성이야말로 그녀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사실 그녀는 리버럴의 챔피언도 아니고 소외계층의 후원자도 아니었습니다. 이 책에도 나오듯 그녀는 뉴욕 상원의원 시절 지나치게 유태인 부자들의 눈치를 본다 해서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빈축을 사기도 했고, 그녀의 살아온 생애란 한 점 흠도 없는 엘리트의 전형적인 궤도였습니다.

 

2016년의 선거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란 진부하고 낡아빠진 프레임으로는 절대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승리는커녕, 2008년에 그녀가 패배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런 안이한 스탠스에 있었습니다(오바마가 만일 "최초의 흑인 대통령" 컨셉에 기대었다면 역시 패자가 되었을 겁니다)바보가 아닌 이상 또 같은 전략에 기대다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프레임은 이미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 시절에 충분히 소비되어서, 더 이상 뽑을 카드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2016년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바라는 건, 미국을 단합시키고 번영으로 이끌 능력 있는 대통령이고, 그 판단에 남녀의 성별은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클린턴 여사는 "덕망 있는 능력자"임을 유권자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게 과제이며, 이 객관적인 르포는 미심쩍어 하는 많은 이들에게, 최소한 비토의 스탠스로부터는 한 발 물러서게 도와 줄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에건 국민들이 원하는 건 원색적 진영논리나 선명성이 아니라, 국가를 당당히 "앞에서 이끄는" 소신 있는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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