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덕 평전 - 겨레에 바친 애국혼, 반민특위위원장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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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덕을 아는 사람이 대한민국 5천만 인구 중 과연 얼마나 될까! 나름 역사에 관심이 있다는 나조차 김상덕 이름 석자를 접한 것이 불과 한달 여전. 반민특위를 궁금해하다 우연히 알게된 이름, 김상덕. 그가 해방 후 대한민국의 기치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의 첫번째 위원장을 역임하고 친일파, 그 부역자 및 반민족행위자의 처벌에 적극 나섰던 사람이라는 것을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왜? 6.25전쟁 당시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다는 이유때문이다.

 

     1891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민족학교로 이름을 드날린 경신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3.1운동의  근간이 된 2.8독립선언의 기초를 다진게 한 11인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후 7개월여의 고초를 겪다가 상해로 건너가 임정활동을 하게된다. 임정활동이 너무 지지부진하다고 생각된 김상덕은 만주쪽으로 건너가 김원봉의 의열단 등의 무장독립을 지지하는 단체들에서 무장독립활동을 하였다. 이후 해방이 되어 김구 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이 주도권을 이미 쥐어버린 해방이후 정국에서 김상덕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우여곡절끝에 남한 만의 단독 선거전에 고령을 지역구로 출마하여 1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데, 이 때 선거 운동을 도운 사람이 김구의 비서였던 선우진과 장준하(사상계 편집장)이었는데 이로 보아 제헌의회 출마에 김구와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선된 김상덕은 특히 친일파 척결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때문인지 제출 통과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다수의 동의를 얻어 선출되었다. 1948년 9월에 구성된 반민특위는 10인의 위원들과 사무국, 각도조사부, 특별재판관, 특별검찰관, 조사관, 서기관을 두고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다.

반민특위는 길지 않은 활동기간동안682건을 취급 408건 영장발부, 체포 305건, 미체포 173건, 자수 61건, 검찰송치 559건 석방 84건, 영장취소 30건 기소 221건의 기록을 남겼다. 첫 체포자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수었다. (물론 중간에 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생각보다 조사 및 체포건수가 작았다. 그도 그럴것이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되자마자, 이승만과 그를 따르는 친일파들이 끊임없이 반민특위의 활동의 방해하고 조작하고 공작하여 제약이 많았다. 나라의 대통령(이승만)이 노골적으로 반민특위 조사를 방해하는 데에야 어찌 원활한 활동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상덕은 끈질기게 활동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 일파는 권력을 잃을까하는 두려움에 그냥 있지않았다. 그들은 연달아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 김구선생 암살사건 등을 차례로 일으켜 반민특위의 활동을 전면 와해시키려했고, 실제로 6.6 반민특위 습격일에 많은 위원들이 부상, 잡혀가거나 하여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국가의 체계를 세우는 일에 국가 수반이 반대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이에 김상덕은 한계를 느끼고 스스로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그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와중에 피산하다가 잠깐 들른 집에서 그만 북한에 납치, 납북되고 만다.

     이 이후 김상덕의 행적은 여는 납북자와 마찬가지로 묘연하다. 다만, 그 묘지는 현재 납북자 묘역에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김상덕은 일제강점기 그 어느 누구와 견줄어보아도 손색이 없는 강력한 독립운동을 한 독립가이다. 그리고 해방이후 제헌의회 정국에서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납북되었다는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그 이름을 누리누리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 2013년 현재 대한민국의 기득권이 다 친일파, 친일부역자의 자손일진대 어찌 이런 인물이 버젓이 인구에 회자되게 놔두게 하겠는가.

 

    해방이후 역사는 되새김질 할 때마다 한숨과 분노와 통탄으로 한 장 한장을 넘기기가 너무 힘들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질 수 가 없다. 분명한 사실인데도 사실을 사실로 공유하지 못하는 이런 역사가 무슨 청사(靑史)란 말인가.

비록 잘 알지못하는 인물이라고는 하나 김상덕, 그 이름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게되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그리고 이를 위해 노력하리라 다짐하면서 오늘도 분노를 삭이고 행동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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