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딸을 용서해야 해요. 아빠를 갖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카수미는 막 잠수하러 가려던 참이었다. 카수미는 소년의 눈동자에조그맣게 맺힌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치 카수미를 더 잘보려고 거기에 새겨 놓은 것 같았다. 

 몇 달 후, 남자들이 만에 닻을 내리고 땅 위로 올라오기 며칠 전에,
켑의 씨앗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정확히 카수미의 이모가 꿈에서보았던, 그들 가운데 누구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꽃, 훗날 열매가, 켑의 열매가 달릴 나무의 꽃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빽 소리를 질렀고, 녀석도 내게 소리를 되돌려 주었다. 몇 초 만에 우리 사이의 공기가 붉게 채색되었다. 나는 고함을 지르며 녀석에게 문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녀석에게 대항하기 위해 고개를 지독하게 늘여 빼야 했는데, 녀석의 숨결이 나를 스치며 어떤 달콤한 향기가 갑작스레 공간을 가득 채웠다. 라일락 꽃 향기를 비롯해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꽃들의 향기였다. 그 냄새는 틀림없이 녀석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지니고 왔을 것이다. 우아한 동시에 무겁고, 유혹적이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냄새였다. 그렇기는 해도 녀석이 고개를 숙일 때에야 겨우 나도 고개를 숙였다. 화난 눈으로 노려보려는 시도는부질없었다. 오로지 우주의 검은색뿐인데 대체 어디를 응시해야 한단말인가.

 그러니 교회는낭비다. 우리 모스크에는 금요일 예배 시간에 언제나 아주 많은 사람이 갔다. 내 생각에는 교회를 나눠 써도 좋을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에 가고 금요일에는 무슬림들이 가는 거다. 교회를 조금만 개축하면된다. 괜찮은 생각 아닌가? 난 다시 한번 곰곰 생각해 보고는 바바에게 묻는다. 하지만 안 되는 이유들이 또 꼭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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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미미의 가장 놀라운 점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갖고 나온 노인의 마음씨라고 말했다.
"미미는 언제나 자신을 가장 나중에 생각해."
엄마가 설명했다.
데이비드는 그런 마음을 왜 노인의 마음씨라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미미가 자신을 가장 나중에 생각한다는 엄마 말은 맞았다. 

원하는 것을 원할 때마다 얻는 것. 데이비드는 미미처럼 노인의 마음씨를 지닌 누군가도 그런 자유를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했다.
오래전에 자유의 땅은 정의의 땅이라고 불렸다. 사람들은 ‘정의‘가무엇인지에 대해 두꺼운 책들을 썼고, 마지막에는 정의란 자유와 같은뜻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아빠는 이렇게 설명했다.
 "네가 구두장이이고, 구두를 수선해서 돈을 번다고 가정해 보자. 다른 곳에 망가진 구두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구두를 수선하러 그곳에 갈 수 있어야 하지. 그게 정의롭지, 안 그래?"
데이비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비드의 방에는 풍성한 모피 외투를 입어서 하얀 북극곰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보아하니 부자의 땅에서 온 것 같았다. 화장실 옆에는 아직 방을 배정받지 못한 작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느긋하게 바닥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데이비드는 남자가 휴식의 땅에서왔으리라 결론지었다. 생각의 땅, 괴로움의 땅, 고집의 땅, 궁핍의 땅,
시간의 땅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자고 먹고 화장실에 갔다. 날마다 날마다….


"공정하지 않아요!"
데이비드는 공무원에게 말했다.
"뭐라고?"
공무원이 물었다. 두 눈이 가늘어지며 친절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여긴 자유의 땅이죠."
데이비드가 말했다.
"나도 안다."
"여기서는 인간적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지요.
다만 가장 중요한 것, 인간 자신만 빼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젊은이?"
"우리는 돈과 재산, 희망과 사랑을 엄마에게 보내도 되는데, 우리 자신은 오면 안 되잖아요. 그건 공정하지 않아요!"
"아, 그래?"
데이비드는 고개를 저었다.
"돈과 재산과 만질 수 없는 것들이 인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이 자유의 땅이라고 할 수 있나요?"
공무원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썰매를 언덕으로 끌고 올라가는데, 회색 구름이 갈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를리요는 그 뒤의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거기 태양이 있었다! 태양은 흐릿하고 작고 아주 멀리 있었다. 아무튼 아주 강렬하게 빛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거기 있었다.
태양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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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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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잘 읽히는 책들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작가가 미련하거나 영리할 때. 미련한 작가의 글은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힘이 있다. 멍청한것과는 다르다.영리함을 가장한 영악한 작가의 글은 읽다보면 쉬이 피로해진다. 감정의 과잉이 되거나 멍해지기 일쑤라서 말이다.
이 책은 잘 읽힌다. 영리하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잘 재단된 조각이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칫 밋밋하거나 과한 서사들이 들러붙기 쉬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들을 차근차근 잘 따라나선다. 작가의 의도따위 무시하기 일쑤인 나도 '어디 가자는대로 가볼까?'하며 그 의도를 읽어보려 애썼으니 말이다. 애를 썼다는거다 단지. 그 의도를 명확히 알겠다는것은 아니다. 다양한 눈 결정의 모양을 알고 있다해도 내 콧잔등에 떨어져 녹아버린 눈송이의 결정을 알아챘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겠다.
설국은 여러 번역으로 읽으면서도 늘 만족스럽지 못했다. 뭔가 더 있을텐데..라는 의구심. 더 있길 바라는 기대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지워버리고 남은 여백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던건 아니었을까. 그의 허무가 내게 닿는것이 두려웠던걸까? 에 생각이 미치자 내 머릿 속에 남은 설국의 온도가 조금 낮아지고 조금 더 분명한 눈이 보인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눈여겨보지 않았었는데 호기심이 인다.이미 출간된 것들(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0번이군)과 출간예정인 것들을 훑어본다. 입맛이 당기는군!
유서 한 장 없이 태연히 생을 놓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은 그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을테지만 그의 '마지막 생을 놓음'으로 비로소 매듭지어진 작품인듯 하다. 설국은 어쩌면 그의 삶을 관통한 차가운 허무였으리라.
눈부시게 시린 조각이불 같은 책을 읽었다.
개운하다.

다음 목록으로 니체와 페소아를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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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2019-10-03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타샤 킨스키 좋아합니다

나타샤 2019-10-03 15:47   좋아요 0 | URL
^^ 테스에서 참 예뻤죠..

소피아 2019-10-03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스 ... 매우 예뻐 뿅갔어요

나타샤 2019-10-03 15:52   좋아요 0 | URL
나타샤 킨스키는 아니고 ..백석의 나타샤이긴한데..예쁜 나타샤도 괜찮겠네요.^^
 

 앵무새는 행복하면 사납게 주둥이를 간다. 앵무새는 격노하면 흥분해서 춤을 춘다. 앵무새가 우리를 무는 것은 애정이 있기 때문인데, 그 애정은 피가 나는 상처를 남긴다. 앵무새가 토해 내는 선물은 헌신의 표시이다. 이런 이상한 감정 표현을 두고
‘행복‘이니 ‘노여움‘ 이니 ‘애정‘이니 하는, 인간의 오만한 단어들은 그저 허공에 날리는 하찮은 겨에 불과하다. 그런 단어는 쥐라기의 아침기도처럼 우리 고막을 뒤덮는 앵무새의 소리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소리는 번역이 불가능하며 대꾸할 수도 없다. 앵무새도 그런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남자는 소장한 책들을 보여 주었다.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아주 뜻밖의 장소와 사람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글을 읽지 못하면서도 독서가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체험했고, 숲 도서관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구상을 해냄으로써 자기 체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곧바로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직접 우편함을 만들 수 없기에 돈을 주고 샀다.
우편함에 옛날 책들을 채웠다. 오래전에 좋아했던 책들 가운데서 골랐다.
한편으로는 책과 헤어지기가 힘들었지만, 그 보답으로 사람들이 책을 발견하고 지을 표정을 상상했다.
책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집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책들도 세상으로 나가 여행을 해야 한다.
바람에 흩어지는 낱알들처럼.

선생님이 첫 단어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발끝부터 빨개지기 시작했다. 그 빨간색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그냥 빨간색이라기보다는 미소였고, 미소로 이루어진 태양이었다! 내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는 내 마법의 힘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게 될 거다.
그날부터 그 어느 것도 평범한 것은 없을 거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머랭들도 깨어났다. 그들은 쟁반 가장자리에 빈자리가 생긴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거기 누가 있었을까 궁금해했다.
모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머랭들은 수를 세어 보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다. 모두들 동시에 세기 시작했고, 곧 모두 뒤섞여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누구 하나만 세도록 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누가 셀 것인지 한동안 의견을 모을 수 없었기때문이다. 마침내 결론을 얻는 데 성공했을 때 머랭들은 또 하나의 문제에 부딪혔다. 원래 몇이었는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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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내 작품이 책으로 나온 뒤에는 읽지 않는다.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는데, 《한 달 후, 일 년 후
Dans unmois, dans un an》를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내 책을 다시 읽은 적이 없다. 사람들은 이따금 나에게 내 작품의 등장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여러 이름과 장면, 이제 내게는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교훈 같은 것들을 상기시켜준다. 내가 내 작품을 다시 읽는 데 이렇게 열의가 없는 것은, 내 책이 다시 읽을 만큼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책꽂이에 수많은 다른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죽을 때까지 읽어도 다 읽지 못할 미지의 책들이 있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게다가 나는 이미 그 책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 시간낭비가 아니겠는가!

어떤 작가의 경우에는 어느 한 구절이나 한 단어가, 마치 어느한 음색이 곡 전체에 영향을 주듯이 작품 전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내 경우에는 작품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슬픔이여 안녕》에서는 안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이 한낱 정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바로 그렇다. 그 순간 독자 역시 안이 이 이야기에서 비운의 존재가 될 것임을 안과 더 불어 깨닫는다. 

그리고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한 열여덟의 나이에 사강으이미 사강이었다. 1954년 한 대담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은 이렇게말한다. "작가는 같은 작품을 쓰고 또 쓰는 것 같다. 다만 시선의각도, 방법, 조명만이 다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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