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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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이름을 알고 시인의 얼굴을 알고 시인의 목소리를 알고 시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들어본 상태에서 읽는 시집, 시도 사람도 한결 가깝고 다정하게 다가온다. 좋은 징조다.(알아서 오히려 좋지 않았던 경험도 분명히 있지만) 


올 여름은 길고 뜨거웠지만, 지금도 여전히 여름 안에 있지만, 이 시집은 이미 지난 여름에 나왔던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시인이 몇 해 전에 붙잡아 놓은 여름 언덕에서 이제야 조금 배운다. 배우면서 즐거워한다. 이제라도 다행이다. 앞으로도 다행일 것 같다. 


한 편의 온전한 시를 옮기거나 외우는 게 아니어서 번번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시를 읽다가 고르고 고른 대목을 옮긴다. 옮기면서 읊는데 홀로 울리는 내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든다. 내 목소리인 듯 시인의 목소리인 듯 겹쳐 들리는 것까지 고마워진다. 나는 아직 시를 좋아하고 있구나.  


어떤 쓸쓸함은 매혹적이다. 갖고 싶어진다. 이 시인이 여름 언덕에서 보여 주는 쓸쓸함 같은 것들. 집을 잃은 개라든가 홀로 피는 잡풀이라든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새라든가 반으로 접히는 호수의 풍경이라든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잠시 눈을 돌려 본 곳에 쓸쓸하기 그지없는 여름 언덕 한 곳쯤 발견한다면, 발견할 수 있다면, 여름이 저마다에게 언덕 하나 정도는 선물해 주고 간다면, 우리는 또 이럭저럭 견디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신 나서 산다면 아주 좋겠지만.  


이 여름의 언덕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다시 빛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

해와 달이 애틋하게 서로를 배웅하고
울타리 너머 잡풀이 자라고
떠돌이 개가 제 영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 P11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얼굴은 빗금투성이가 되겠지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 P15

보기에 좋아야 한단다 아가야, 허물 수 없다면 세계가 아니란다 - P18

낮게 나는 새들이 있고 그보다 낮을 수 없는 마음이 있고 - P27

어떤 날엔 세상 전체가 호수로 보일 때도 있었다 슬픔이 혹독해질수록 그랬다 - P35

미로는 헤맬 줄 아는 마음에게만 열리는 시간이다 - P38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 P46

에프트의 포플러나무는 에프테에만 있다는 사실
오늘의 포플러나무는 오늘의 색으로 빛나고
유예된 죽음만이 내게 하루치의 물감을 허락하는 것이기에 - P72

알고 보면 모두가 여행자
너도 나도 찰나의 힘으로 떠돌겠지 - P91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영영 오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 P95

내 마음이 던진 공을
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

그래도 가끔은
지평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 P107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거 - P119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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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 (완전판) - 오리엔트 특급 살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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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된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에,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헤아려 보면 알겠지만 귀찮군) 시험 마치고 학교에서 단체로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후에 책도 읽은 것 같은데, 사건 전개 몇 장면은 기억에 남아 있으나 범인이 누구였는지 몰라서 그걸 알고 영화를 보려고 책을 읽었다.(나는 결말을 알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다, 너무 두근두근하는 구성은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가 가진 작가의 전집에 있는 한 권이고, 현재 품절로 뜬다. 개정판이 있는 모양이고 다른 출판사에서도 발간한 게 있다. 워낙 유명한 책이니까. 추리소설이라고 하는 장르를 좋아하다 보니 즐겨 읽는 편인데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머리에 담고 읽어 보았다.

 

1. 작가가 무심한 듯 말하고 있으나 기억하면서 읽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2. 작가가 굳이 말하지 않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3. 작가가 일부러 말해 주지 않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추리소설이 따지고 보면 작품 속 탐정(형사)과 범인과의 싸움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새 작품 속으로 빠져 들어 그것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는 결말에서 새삼 정신을 차리게 되고 아, 또 작가에게 졌구나 싶어지는 것이다.(기분 나쁜 패배감이 아니어서 다행이고)

 

스스로 불러일으킨 물음은 장대하였으나 답을 찾는 것에는 실패했다. 초반에는 책 안에 이 물음을 메모해 놓고 장면이나 문장에 유의하면서 느리게 읽었는데 곧 잊고 다 읽어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이 또한 작가의 역량인 것을. 심지어 100년이나 지난 작품임에도 나를 빠뜨리고 마는 구성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겠다. 나도 그렇고, 두뇌 싸움을 즐기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게 아닐까? 우리는, 나는, 왜 잘난 척 하고 싶은 걸까?     

 

쌓아 둔 추리소설 책이 많다. 즐겁고 설레서 좋다.(y에서 옮김201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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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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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여행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이제야 알게 된 게 좀 많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내게 중요한 기준은 누구의 여행이냐이지 어디로 간 여행이었나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랬던가, 그래서 같은 여행지에 대한 글을 읽고도 어떤 책은 마음에 들고 어떤 책은 아니고 그랬나 보다.


9년 동안 여행 에세이를 써 왔다고, 그걸 이제야 책으로 만들었다고, 코로나 19로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 보라며 내놓은 책. 작가가 독자를 대상으로 기대했을 수준을 넘길 정도로 나는 만족했다. 내가 가 본 적 없는 뉴욕과 아헨, 단 며칠 동안이었지만 발은 디뎌 보았던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 나처럼 잠깐 스쳐 지나간 게 아니라 한 곳에서 한 달 이상씩 머물렀던 여행지에서의 이야기라 낯익음도 낯섦도 신기하고 흥미롭기만 했다. 아, 이렇게 공간을 바꿔 살아볼 수도 있는 것이구나.


여행이라는 게 사람마다 형편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직업도 적성도 여러 가지 사정의 여유까지도 각자 여행의 시간과 질을 결정하는 조건이 될 것이므로 어느 것이 낫다 못하다 할 수는 없겠다. 아마 작가 역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아주 알맞도록 여행을 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이나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자신의 건강 상태까지 고려하면서. 그래서 더더욱 여행지에서의 생활이 충실해 보였을 것이고.  


소설가인 작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을 비롯하여 감각으로 겪는 모든 상황들을 소설의 재료로 삼기 위한 태도가 유달리 돋보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챙겨서 소설 속에 맞춰 넣는구나. 만나는 사람, 장소, 분위기, 소품 하나하나까지. 소설을 쓰기 위한 여행, 소설을 쓰기 위한 삶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게 또 나쁘다거나 모자란다거나 억울하다거나 할 것도 아니라서 축복처럼 숙명처럼 여기고 받아들이며 살아도 좋을 것 같더란 말이지. 


소설만큼 넓고 풍요롭고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읽는 일도 이렇게나 가슴 설레는데 쓰는 사람의 세상 만들기는 또 얼마나 근사할까. 아무쪼록 내가 좋아하는 이 작가를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소설가들이 좋은 글을 많이많이 써 주시기를.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해 줄 사명감을 가진 분들이실 테니.(y에서 옮김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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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끔찍한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7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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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작가들이 쓴 책 로재나를 읽고 주인공인 마르틴 베크가 활약하는 내용의 시리즈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을 빌려 본 것인데 시리즈의 하나라는 것만 알았을 뿐 전체 작품이 시간의 흐름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즉 1권을 읽고 7권을 읽은 것이다. 1권에서 젊게 나오는 마르틴 베크가 이 책인 7권에서는 나이도 들었고 이혼을 한 뒤 혼자 산다는 상황으로 등장한다. 아차, 조금 더 신경을 쓸 걸 싶은 후회를 했다. 


벌어지는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이 일어난 곳의 배경 묘사에 시선이 더 집중되는 글이다. 가 본 적도 없는 멀고 먼 스웨덴의 곳곳이 궁금해졌다가 차츰 친숙해지다가 마침내는 글 안에서 인물들을 따라 돌아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현장감이다. 끔찍한 사건과는 별도로 낯선 공간 안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는 기분, 어지간한 기행문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그래서 이제는 2권부터 순서대로 찾아 읽으려고 한다.


끔찍하다는 말의 뜻과 느낌, 이 책에서 본 끔찍한 묘사만큼 분명하게 인식해 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끔찍하게 살해된 사람이 나온다. 적절하다 혹은 적절하지 않다를 떠나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이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더 싫다. 얼마나 원한이 맺혔으면 이런 끔찍함을 택했을 것인가. 이미 죽은 이는 죽어서 모를 것이고 자신이 저지른 끔찍함을 겪는 이는 살아서 보는 타인들일 뿐인데. 경고 그 이상일 테지.  


경찰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사람이 경찰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경찰이 되면 안 되는가. 경찰이 되어서 꼭 해야 하는 일과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은 무엇인가. 하필 지금과 같은 시기에 이 책을 읽고 있자니 끔찍하게 당한 피해자에게 조금도 동정이 생기지 않더란 말이지. 경찰도 사람이지만, 사람으로서의 약점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범죄추리소설이 마냥 산뜻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희생자 모두가 가여운 영혼이 아니라는 것, 이걸 인정해야 하는 게 참 아픈 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Y에서 옮김202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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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입니다 - 딴 세상 사람의 이 세상 이야기
배명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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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쓴 산문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고 기억한다. 가끔 소설가가 쓴 소설보다 산문이 더 좋다는 느낌을 받아 내가 도로 당혹스러울 때도 있는데 결국 소설가의 소설을 더 잘 받아들이는 쪽으로 도움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작가의 이 책, SF 소설가로서 SF 소설을 쓰려고 하는 작가나 읽으려고 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글쓰기 과정을 전하는 이 책, 이 책으로 나는 이 작가의 책을 더 좋아하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 SF 소설을 한창 읽고 있는 독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읽으면서 어떤 SF는 내 마음에 들고 어떤 SF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구분을 할 정도에 이르기는 했다. 이건 어떤 SF 소설은 좋고 어떤 SF 소설은 좋지 않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뜻이다. 내 취향의 SF 소설을 발견해 나가고 있는 것일 뿐, SF 소설에 대한 평가나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SF 소설의 특징을 아직 내가 정리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좋기는 한데, 무엇이? 왜? 좋은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취향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말하기가 쉽고 편하다. 아닌 건 아니어서다. SF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다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여기고 있는데 이건 계속 읽으면서 내가 찾아봐야 할 재미있는 숙제 같은 일이다.  


이 책은 SF 소설에 대해 품고 있는 내 숙제를 해결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SF 작가가 이런 생각과 이런 고민과 이런 장치로 이런 소설을 써 내고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꼬집어서 설명을 해 주고 있으니 알아듣기 아주 쉬웠다. 게다가 재미있기도 했다. 작가라는 직업이 쉬운 게 아니라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종종 잊곤 하는데(가끔 이를 잊게 만드는 글을 만날 때가 있어서) 어떤 글이든 함부로 덤벼들거나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되새기게 했다. 아무렴, 내 생에 소설가가 끼치는 고마운 영향력이 얼마나 큰데.


SF 소설을 쓸 것도 아니면서 작가가 권하는 작가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 자꾸만 몰입했다. 작가의 권유가 그만큼 절실하고 깊었던 탓이다. SF 소설 독자의 입장으로 바꿔 읽는 즐거움, 덕분에 또 꼬박꼬박 누렸다. 글쓰기도 글읽기도 즐거운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y에서 옮김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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