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마신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08
이윤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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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사랑스럽게 보이는 때가 있다. 사람 그림자도 풍경의 그림자도. 어떤 이는 구름 그림자에도 반한다고 하던데. 어려서 막연하게 무섭게만 여겨지던 그림자가 조금씩 다정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이를 먹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그림자에게서 무섭다는 느낌은 아예 못 받고 있으니. 공포 영화라고 해도.


시집 제목에는 그림자가 나오는데 정작 시에서는 못 만났다. 봤으나 기억에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림자를 찾아서 다시 들추고 싶은 생각은, 지금 당장은 없다. 내가 아는 그림자와 시집 속 그림자가 많이 어긋나 있다. 안 친하다.


이 작가의 시를 꽤나 오래 전에 읽었다는 걸 알겠다. 그 시절의 호감을 떠올리고 내가 이 시집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구해 보았는데 기대만큼 설레지 않았다. 과거의 어떤 경험은 시간이 흐르면서 착각과 더불어 실제보다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옛 책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때는 오히려 다행스럽다. 나빠지는 것보다야 어쨌든 나을 테니까.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풍경, 생명으로 버티고 있는 자연의 구성원들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묘사해 놓은 구절들이 계속 이어진다. 어쩐지 나도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않은 채 맥없이 바라보는 기분이 된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빵 굽는 마을 간판 밑 스피커
밭뙈기 가장자리 호박 넝쿨
꺼칠한 잎들 사이사이
노란 귀를 디밀고
모차르트를 듣는다 - P42

도랑물 소리에 귀를 여는
참외꽃을 본 누군가는
웃음을 떠올렸다. - P76

은행잎들이 떨어지는
순간들을 기억하는가
은행잎들이 떨어지는 길이만큼
한숨도 쉬고 있는가 - P81

혼자 사는 집
안이 더 춥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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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2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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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기하다. 읽을수록 재미있고 빠져든다. 줄거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역사이므로 인물 간의 관계나 사건의 결과는 책을 읽지 않고 검색 몇 번만 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그 일을 어떻게 글로 그려 내고 있는지 그걸 읽는 게 흥미롭다. 마치 그 시대, 그 공간으로 내가 깃들여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아무래도 비교가 된다. 그 책을 읽은 지 시간이 꽤 지나서 제대로 비교를 할 정도는 못되지만 서술 방식의 확연한 차이로 인해 몰입은 이 책이 훨씬 잘된다. 작가가 정성을 다해 그리고 있는 인물들에도 기꺼이 응원을 해 주고 싶어진다. 전쟁에 나가면 이겼으면 싶고, 선거에 나가면 뽑혔으면 싶고, 그게 또 궁금하고 조마조마해서 인터넷으로 찾아 결과를 알아 낸 뒤에 읽기도 하고.

 

로마의 법이 어떻게 해서 권위를 갖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보고 있는 듯하다.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돈을 어떻게 얻는지, 서로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 가문과 가문이 어떻게 결혼 관계를 맺는지, 서로의 이권을 위해 어떻게 계약을 하는지. 지금의 우리네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니, 그때 그곳에서의 일이 그래도 그 테두리 안에서는 정직하고 명쾌해 보인다.(지금의 우리 사정이 더 음흉하고 비겁해 보이는 것은 순전히 내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양상도 새삼 재미있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하는지 생소하게 봤던 내용을 이 책으로 다시 읽으니 좀더 분명하게 알게 된 듯한 느낌이다. 병사가 되는 사람은 누구였는지, 전쟁에서의 역할과 일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전쟁 그 자체가 삶의 일부였던 시대 이야기.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 서로 다르게 불렸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고, 로마인의 자부심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로마, 로마인이 어떻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지위를 얻어 갔는지.

 

3권도 재미있을 것을 믿는다.(y에서 옮김201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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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3 빛 SF 보다 3
단요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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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의 책은 내 기대와 맞지 않았다. 혹은 내 성향과 맞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다거나 신기하다거나 이상하고 찬란하다 싶은 글을 만나지 못했다. 여섯 편 중에 하나도. 이럴 때 리뷰 쓰는 게 참 난감한데.

주제 혹은 소재를 빛으로 삼은 글들이다. 빛의 속성, 빛의 비유, 빛의 의미 등등을 SF 세상과 연결시켜 놓았다면 상당히 흥미로울 줄 알았는데 나는 왜 읽은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빛과 작가들이 생각하는 빛이 만날 수 없는 차원에서 흘렀나 보다. 그럴 수도 있을까, 있겠지, 세상이 다차원일 수도 있다고 하니, 나는 그러려니 여기니.

읽기의 본질을 떠올려 본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일. 상상도 있고 비판도 있고 감정도 있고 이성도 있고, 내 것과 비교하고 대조하고 분석하면서 읽는 일. 자체만으로는 세상 무해한 일. 읽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는 것, 읽고 난 뒤에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은 방향에 따라 세상에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이  독후감으로 작가들이 서운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y에서 옮김202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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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칭 포 허니맨 - 양봉남을 찾아서
박현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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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재미있게 읽었다. 이 작가의 글에 점점 더 빠져든다. 작가가 번역한 작품에 관심이 생긴다. 도서관 자료를 찾아본다. 많다. 기쁨이 서서히 차오른다. 올 여름은 이 작가와 함께 하게 될 듯하다. 썩 괜찮은 계획이다. 작가 자신의 소설과 번역한 소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내가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만한 힘이 내게 있어 주기를. 


친구 셋, 영화감독 하담, 회사원 차경, 일러스트레이터 로미. 로미가 3년 전 제주에서 만나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양봉남을 찾아서 셋은 제주로 간다. 셋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제주로 간접 여행을 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몸은 편하고 마음은 충분히 들떠서 소설이 더 마음에 들었다. 셋은 결국 양봉남을 만날 것이고 각자 어려운 사정을 겪기는 하겠지만 그것들은 내 어려움이 아니기도 하고 분명히 해결될 것이니 조마조마하게 읽는 마음이야 즐길 정도였다. 내가 딱 좋아하는 취향으로.


연애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내 마음과 당신의 마음은 언제 어느 선에서 딱 마주치는 것일까. 누가 먼저 알아챌까. 알아챘다고 해도 확신은 어떻게 하지?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는 밀도와 당신의 마음이 나를 향하는 밀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믿었다가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면 어떻게 모른 척 하지? 작가는 이 상황을 그리는 데에 탁월해 보인다. 연애하는 마음에 대한 내공이 깊은 걸까?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도 같은데 내가 한 연애 경험은 모두지 보탬이 안 된다. 그래서 작가의 전개 방식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일지도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 남성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여성 인물들에 대한 것보다는 호의적이어서 도로 투박해 보인다. 장점은 확연히 돋보이고 단점은 그리 잡히지 않는 그럴 듯한 남성들, 그에 비해 여성들은 장단점이 세밀하게 드러나는데. 세상의 남자들이란 종족이 그리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삐딱하게 반응할 수밖에. 그런데 또 그렇게 한 겹 덮여야 연애가 되는 것이겠지. 그러니 연애하는 사람들을, 연애하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을 존경하게 된다. 내가 안 하고 못하는 것을 진심을 다해 하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추리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내게는 아주 고마운 소설 장치다. 답을 알아낼 수 없어도 머리를 굴리게 하는 작가의 의도, 계속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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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을 것인가 - 단백질과 암에 관한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연구, 개정판
콜린 캠벨.토마스 캠벨 지음, 유자화 외 옮김, 이의철 감수 / 열린과학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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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읽었다. 뭐라고 했을까? 작가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순순한 응대 대신 좀 떨어진 거리에서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볼까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는 내 식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다. 세상 일이 대체로 그러하듯, 내가 원하는 것만 골라서 취하는 것 같은. 

책은 두껍고 자료는 많고 읽기에는 지루하다. 책에서 말하는 정보가 정확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나로서는 할 수가 없다. 내 배경지식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말하는 바를 순순히 따르고 싶어지지도 않는다. 온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탓이다. 나는 약은 독서를 한다. 이럴 수도 있는 것지.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간 수명이 길어지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요즘은 장수 그 자체보다 건강한 노년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아 있을 것인가, 병원 침대에 누워 수명만 연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내 몸을 돌볼 수 있는 건강한 상태의 노년. 이렇게 되기 위하여 이 물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정치와 권력과 기업과 의학과 개인 사이의 상관 관계들. 각자의 이해 관계가 신기하게도 이어져 있다. 지긋지긋한 역사다. 개인은 참 하찮은 존재이나 인류는 이어지고 있고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고 있고 장차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 될 것이다. 사람은 지구에서 정녕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딴 식으로 먹고 살고 있는데?

크고 넓고 길게 볼 생각이 안 든다. 그냥 지금 내 앞의 한 끼만 생각한다.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많이 먹지 않아도 되어서, 먹고 싶은 게 그리 많지 않아서, 먹는 데에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아서 다행스럽다. 가끔 이런 책을 봐야겠다. 나를 점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y에서 옮김20250208)

나는 건강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정부가 국민 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부는 국민을 희생시키고 식품산업과 제약산업 편에 서 있다. 기업, 학계, 그리고 정부가 공동으로 국민 건강에 총체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 공중의 건강 보고서를 위한 자금을 제공하고, 학계 지도자들은 기업과 결탁하여 보고서를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부가 하는 일과 기업이 하는 일 사이에는 회전문이 존재하고, 정부의 연구 자금은 영양학 연구 대신 약품과 장비 개발 연구에 들어가고 있다. 이는 최고의 의사결정권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들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모른 채 고립적으로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세워진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아주 드문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 기업은 마지노선을 넘어서는 특정 권고나 결정에 대해 선출직 정치인들이 직접 개입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세금을 낭비하고 우리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다. - P432

낙농산업은 의과대학의 영양학 교육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고, 유명한 시상식에 자금을 지원한다. 이런 노력들은 기업이 언제라도 기회만 오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의사가 우리 이웃이나 동료보다 음식과 건강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영양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의사는 과체중인 당뇨병 환자에게 우유와 설탕을 기반으로 한 대체식 세이크를, 어떻게 체중을 줄일 수 있는지 묻는 환자에게 육류 위주의 고지방 식단을, 골다공증이 있는 환자에게 우유를 많이 마시라고 처방하는 상황이다. 영양학에 무지한 의사들이 건강을 해롭게 하는 예는 놀랍도록 많다. -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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