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사진 찍기에 있어서 제일 즐거웠었던 때가 그립다. 강아지 같이 멋모르고 짖는듯이 컹컹거리며 시작했던 때가 있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방법을 익히고 나서 얼마간에 이어진 사진은, 지금 생각해봐도 그 시작할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 뭔지도 모르고 단지 카메라로 찍고 보고 읽는 재미. 그런 재미 때문에 군대 제대한 이후로 한 번도 새벽에 일어난 적이 없는데 눈을 뜨고 한 겨울 새벽길을 달려 바다 일출을 찍겠다는 일념을 만들어 낸다. 과정의 고역을 알면서도 그 재미 때문이 사진이 이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시작할 무렵의 재미는 사실, 하나도 없다. 호기심과 흥미로서만 이루어진 사진 찍기가 어느덧 시간이 지나 늙어가는 걸 느낀다. 아무래도 다시는 그 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은 점점 떼를 타게 만들고 사진의 흥미를 낡아가게 만든다. 덩달아 내가 늙어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직도 나는 좋은 사진이라는 것을 선명하게는 모른다. 여전히 좋은 사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언 듯 즉답하기 곤란하다. 글쎄 좋은 사진이 뭘까. 이 "좋은 사진"이라는 주제가 결국 사진 재미를 느끼는 것의 후발로 따라 묻는 질문이 생길 무렵은 사진이 점점 호기심도 없어지고 흥미도 떨어지고 심드렁해질 즈음에 찾아온다. 시작점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변하는 순간이 되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지금은 좋은 사진 하나 담고 싶지만 막상 좋은 사진의 정의를 내리기가 여간 곤란하지 않다. 물론이다. 결국 대답하기 곤란함, 좋은 사진이라는 모호성이 계속 사진을 찍어나가는 원동력이자 추력이 된 셈이니까 사진은 정말 아이러니하다고나 할까 한다. 내가 원하는 좋은 사진을 많이 담았더라면 아마 더 이상 사진을 담지 않았을 텐데 여전히 이 좋은 사진의 정의를 찾는 과정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문학의 시를 읽고 시인의 감수성을 사진에 접목시켜 보고 한 장소에서 몇 년간 지속적인 사진을 담는 경향이 만들어진 것이니까.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에서,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했다. 피사체를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너도 그렇다고도 했다. 사진을 찍고자 자세히 보고 오래 보게 된 습관을 만든 점이 사진을 통해서 배운 가장 큰 성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좋은 사진이란 늘 요원한 기분이랄까. 그야말로 끝이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항상 사진을 찍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이 아쉽고 피사체의 관점이 아쉽고 이렇게 밖에 찍지 못하는 재능이 아쉽고 싸구려 카메라가 고급형 카메라가 된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도 아쉽고, 아니 내 삶 전체가 아쉬움이 짙게 물이 들어간다. 그러니 늘 아쉬움이라는 갈증에 목이 타는 증상이 불만으로 생긴다. 땅을 파서 지하수를 만나 물이 고여야 하는데 난 지금 어디서 무엇을 파고 갈증에 물도 나오지 않는 우물을 파고 있는 걸까.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다 보면 왜 굳이 좋은, 이 "좋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왜 좋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 것인지, 더 모르겠다. 하다못해 다른 작가들처럼 전시회라도 하고자 찍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의뢰받아서 대가를 바라며 의무감으로 찍는 것도 아닌데 왜, 좋은 사진을 찾으려 하고 찍으려 하는 것인가라는 궁극에 수렴하는 질문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부질없음의 커다란 성벽에 막혀서 이 벽을 넘고자 끝없이 깨부수고 부질없다는 이 성벽을 넘어 부질 있음으로 의미 부여를 하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게 부질 있고 없고가 대체 무슨 차이란 말일까. 있든 없든, 고만고만하게 가야 할 운명일진데 왜 부질없음에서 부질 있음을 찾는 걸까. 인간은 끝없는 자신의 정체성하고 싸우고 있는 셈이다.

 

너무 헐레벌떡으로 살아온 탓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여유도 없고(나는 결혼 시작부터 전세 마이너스 대출부터 시작했으니까.) 늘 돈이 치이고 전셋집에 치이고 회사에 치이고 늘 치이다 보니 급급하고 사는 게 사는 거 같지가 않았다. 몇 달을 베낭매고 돌아다녀 본 적도 없고 하물며 일주일이라도 방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꽉 짜인 내 삶의 환경이라는 체재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삶의 감옥이 아니었을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제한은 늘 자본의 구속이나 다름없고 늘 허덕거림이 지난하고 지루한 일상의 진부함이 싫었던 반작용이 사진으로 버티려는 심리상태가 아니었을까 한다. 아니면 술로 버티려니 몸이 벌써 고장이니 말이다.

 

 

 

 

 

 

 

 

지금이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이전에는 그랬다. 여자는 그저 애 잘 낳고 시부모 모시고 남편 내조 하는 스타일의 삶처럼, 그런 시집이나 빨리 가는 게 할머니의 아버지 세대가 가진 일반적인 가족관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러니 딸이 태어나면 아들이 아니었음에 섭섭했고 딸을 빨리 키워 시집보내면 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할머니 시대의 딸들은 학교 보낼 생각이나 가르쳐야 할 대상은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부자집이었더라면 달랐을 수도 있지만 깡촌 시골에서 부자는 어려웠으니, 가만 생각해보면 유독 우리나라에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 몇몇이 있는 이유도 여자들이 배우지 못하는 환경에 기회의 확대가 더 필요했을 것이고 그래서 나온 학교가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화학당, 숙명학당등이 나중에 여자대학으로 발전했던 이유이다. 요즘처럼 입시에 차별을 두었다간 사단이라도 크게 날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여자들만 들어갈 특혜라도 주어야 할정도의 궁여지책이었다. 그 당시 학교를 가지 못하게 했던 생각들이 요인들이야 많았겠지만 우선 아들부터 학교 보내는 게 먼저였고 딸은 대충 키워서 시집이나 보내버리면 그만이라는 남성 중심사상은 근대화의 물결에서도 여전했다. 그 시절에 태어난 딸들이 이제 나이가 들어 70, 80이 되고 나니 문맹이란 것의 회한이 없을 리가 없었기도 했다. 이처럼 시골에서 할머니를 대상으로 글을 익히게 하고 문자를 읽게 하는 과정으로 나온 시집 같은 형식의 책이 나온 배경이다. 하다못해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도 집안이 가난하면 학습권은 아들에게 밀리는 케이스를 종종 보는데 그때 할머니들의 세대에는 오죽했을까 상상되고도 남는 일이다. 뭐 가까이는 우리 집 와이프 조차도 시골에서 고등학교 들어가는 게 며칠을 울고 불고 해야 들어 갈 수 있는 걸 이야기 듣곤 하니 말다했을 정도가 아니었겠는가 한다.

 

요즘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문자 홍수 시대에 문자의 청정지대?에서 산다는 것의 불편함을 할머니들은 전 시대를 관통해서 살았다. 학교를 못들어가서 글을 읽지 못해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왜 할 말이 없을 리가 없다. 살아온 인생의 회한이야 비로소 문자를 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게 산문이든 시든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글을 배우고 단어와 단어를 이어서 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단순한 생각의 구조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설익은 글쓰기에서 원초적인 응어리를 만나게 되는 시집이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의 호기심과 재미라는 배움이라는 즐거움이 할머니들에게도 분명 발생하는 이치와 닮았다. 글이란 묘한 것이,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삶의 앙금을 휘저어 내는 통절함이 뭍어 나온다는 것이다. 배설구가 막혔을 때 뚫어주는 무언가 그런 글이라는 점이다. 서툰 문장과 맞춤법에 상관없는 단어들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그 정서가 지긋하게 저려 온다는 것이다. 저림은 저미어 시려온다는 거다.

 

과연 나는 사진으로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 무엇으로 저며 낼 것이며 시려오게 만들 것인지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본래의 의도는 맞춤법도 틀린 할머니들의 원초적인 그 맥락과 닿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자신이 없다. 이 시집을 보고 솔직히 부끄러웠다. 할머니보다 더 배웠다는 것이 결코 할머니들의 글을 처음 익히며 써나간 시에서 나오는 저미어 오며 시린 것에 반에 반도 못 따라가는 부족함은 이를 두고 하는 느낌을 말한다. 분명한 것은 할머니들의 세대에 쌓인 삶의 결핍들을 나는 뼈저리게 겪지 못한 차이쯤은 아닐까 한다. 절대적으로 빈한한 삶은 배움을 떠나 글조차도 익히지 못한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는 그것도 아니었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결국 시에 깔려 있는 정서의 감수성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는 프레임이다. 문장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원초적으로 발설되는 단어와 단어들에서 행간으로 뻣어 나오는 응어리보다 못한 것일테니까

 

할머니들이 시의 이론 따위를 알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요즘 아무리 인기 없는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에서 배우는 문학론이나 시학에 관한 지식과 기술들을 할머니들은 이제 겨우 한글을 뗀 수준에서 알리는 없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몸으로 체득한 삶의 운율이 저마다 다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오랜만에 시골에 온 손자 놈 등을 토닥이며 잠을 들게 할 때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운율은 노래가 되거나 한풀이가 되거나 사담이 되거나 심지어 자장가가 되는 원리가 시에 녹아 들어 있다. 그러니 글을 쓰게 될 때, 억지로 자수를 맞추며 운율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자신의 삶이 처연스럽게 닿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어느 시인이고 시를 배우고 시문으로 등단한 기성 시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할머니들만의 독특한 서정의 울림이 그래서 구별되는 이유는 아닐까 한다.

 

아무 멋모르고 사진 찍었을 때 사진을 가끔 본다. 어설픈 사진에서 사진에 대한 순수함은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재현해낼 수 없다. 사진을 찍는 기교는 늘었고 사진을 통해서 보는 시선은 더 정교해졌을지는 모르겠으나, 푸성귀처럼 담아낸 처음의 정서는 아미 잃어 버린지 오래이고 보니, 흡사 처음의 그 잔잔한 맛은 그립다. 좋은 사진은 무엇인지, 혹은 좋은 시는 무엇인지 사진을 봐도 시를 읽어도 여전히 오리 무중이다. 사진으로도 시로도 밥 먹고사는 사람이 아닌 비종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할머니들이 쓴 시에서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어쩔 수 없이 살아와서 경험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 후회와 고단함들. 어쩌지 못한 오늘의 자신의 처지의 처연성이 할머니 시에서 발견하게 될 때, 다시 나는 사진을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가진 현재의 조건과 환경들에서 할머니들이 쓴 시처럼 어쩌지 못하는 오늘의 이 순간을 그저 열심히 담는 순수함에 대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원효스님의 독송이 생각난다.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게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게 괴롭다.

- 원효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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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19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이론‘이라 불리우는 것들은 현실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편일 뿐인데, 지금은 이론이 현실을 제약하는 현실이 보다 일반적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론을 벗어난 파격이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yureka01 2018-06-19 15:38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처음이라는 신선한 파격에서 기성의 이론이 적용안되는 그런 거 ....^^..

cyrus 2018-06-19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이켜 보면, 독서가 제일 즐거웠을 때가 2010년, 2011년이었어요. 알라딘 블로그에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해가 2010년이고, 이듬해에 독서모임 활동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이때는 새벽까지 책 한 권 다 읽거나 술을 마실 수 있었어요.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겠어요. 이제 서른에 접어들기 시작했는데 제 몸이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어요.. ^^;;

yureka01 2018-06-19 16:00   좋아요 0 | URL
뭐든 처음 시작하고 기릿빨 오를 때가 제일 재미나죠...ㅎㅎㅎ 독서도 예외가 아닌거 같아요....

2018-06-20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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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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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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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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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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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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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8-06-20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쉬운 시가 좋은 시, 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진은 잘 모르겠네요 ㅎ
근데 꼭 좋은 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걸까요?
훌륭한 인생을 살아내야만 하는 걸까요?
자신에 대한 변명이나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생각은 걍 깜냥대로 살다 가자, 랍니다 ㅎㅎ

yureka01 2018-06-20 16:37   좋아요 1 | URL
네 책에서도 나오더군요..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사진이란 없다고 하더군요...

자기만의 좋은 사진이란거...만들라고 하던 조언이 생각나네요.,..

또한 자신의 좋은 사진을 강요할 것도 아니라고..ㅎㅎㅎㅎ

네 제 깜량대로 찍고 보자..이게 맞는듯합니다..^^..

2018-06-21 14: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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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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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2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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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07: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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