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게 길을 묻다 - ‘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존재의 발견 (10주년 컬러 개정판)
김용규 지음 / 비아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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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존재의 발견

숲의 철학자 김용규의 아포리즘 집 같은 자기계발서이다.

이 책을 읽으면 당장 숲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진다. 가서 다시 한 번 숲을, 나무를, 풀을, 꽃을, 다람쥐를, 새를, 지렁이를, 쌓인 낙엽을, 가시덤불을…. 찬찬히 훑어보고 싶다. 그 곳에 길이 있고, 철학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 깨닫게 된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나로서 살고, 돌아가는. 수많은 인생의 물음에 대한 답이 있었다.

선택할 수 없는 삶으로 태어나서 내 모양의 삶을 만들며 성장하고 나를 실현하는 삶을 살고, 그리고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다시 태어남과 ‘이음동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숲에게서, 나무에게서 배울 수 있다.


 

1막 태어나다/선택할 수 없는 삶.

모든 생명은 하나의 주체로서 살 권리와 능력을 이미 그 씨앗 안에 부여받고 태어난다.

인간 또한 나무처럼 부모의 몸을 빌려 어느 시간대에 태어나 그곳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 그 환경이 비옥하든 척박하든 태어난 자리에서 그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다. 힘겨운 자리에 태어난 억울함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즉 ‘본래의 명’ ‘숙명’이다. (탄생의 불가역성)

다행히 숙명은 생명체 스스로 선택하고 운영할 수 있는 운명이라는 장치와 맞물리며 생을 구성한다. ‘명命’을 운運영하는‘운명’이란 것이다.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자율과 자기 통제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숲의 천이’는 초목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변화시켜가는 숲의 현상이다. 숲 전체가 이렇게 흘러갈 때 숲에 사는 개별 종 또한 이런 시공간의 역동 속에서 자신의 삶을 운영해 가게 된다. 자기 씨앗에 담겨 있는 본원을 확인하고 그 힘을 믿는 일이며, 자신이 살아가야 할 ‘시대와 공간’을 아는 일이다. 나를 아는 것, 내가 태어난 때와 그 여건을 아는 것, 수용 하는 것, 그리고 생명체로서 내게 주어진 놀라운 힘을 믿고 끝까지 힘차게 살아내는 것! 이것이 생명을 부여받은 자들이 할 일이다. p.59

 

2막 성장하다/ 내 모양을 만드는 삶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잃기도 하고 버리기도 해야 한다. 또한 경쟁도 해야 한다. 경쟁이 하나의 자연법칙이라고 《주역》에서는 역설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 정정당당해야 함은 물론이다. 모든 생명의 삶은 모색과 자기 조정과 상실을 누적하며 경쟁함으로 성장하고 완성된다. 떡잎을 버리지 않고 결실의 계절을 만날 수 있는 들풀이 있었던가? 묵은 가지를 떨어뜨리지 않고 제 하늘을 열 수 있는 나무가 있었던가?

그러나 숲의 경계 영역, 즉 ‘임연부’가 있음으로써 숲 전체가 더욱 풍요로워지듯이 모두가 중심이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그저 저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저답게 자라나고 저다운 꽃을 피우면 족하다.

질경이는 어려움을 기회로 바꾸는 지혜를 일궈낸 풀이다. 질경이처럼 외로움과 고난과 위험을 삶의 안주로 삼을 줄 아는 사람, 육신은 고달픔을 택할지언정 영혼은 결코 꺾지 않는 사람이 되자. p.141

 

3막 나로서 살다/나를 실현하는 삶

사랑은 서로를 위해 각자의 욕망을 덜어내어 완성된다. 나도 있으면서 그도 있는 것이 사랑이다. 혼인목과 연리목처럼.

나무들의 노동과 휴식은, 깨달은 이들의 모습을 꼭 닮았다. 미래를 걱정하여 밤을 지새우지도 않고,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불면하지도 않으며, 부질없는 욕망에 휘둘려 늦은 밤을 배회하지도 않는다. 오직 순간에 순간을 더하여 지금에 충실할 뿐이다.

단풍으로 빚어내는 잎사귀들의 색은 모두 제 본래의 빛을 되찾는 것이다. 욕망을 담보했던 엽록소를 지우고 남는 빛은 본래의 빛이다.

홀로이되 홀로이지 않는 삶, 그것은 숲의 삶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으로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곤충과 짐승 등, 종들이 멸종하고 있다. 소멸은 소멸을 낳고 소멸은 다시 더 빠른 소멸을 낳는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멸의 법칙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간마저도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p.224

 

4막 돌아가다/다시 태어나는 삶

주검은 다시 숲의 다른 생명을 부양할 물질로 바뀌어 되먹임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관계망’이자 ‘물질순환’의 자연 질서이다.

초목이 그 시신을 통해 이끼를 키우고 애벌레를 키우고 새를 키우고, 마침내 흙으로 되돌아가서 산 생명의 영양분이 되듯이 우리 사람의 주겁도 미련 없는 흙이 되어 이 푸른 별의 생명을 부양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죽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순환이 멈춘 자리에서 생명도 멈춘다. 지구가 푸른빛의 별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찌 보면 죽음은 문 하나를 열고 닫는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p.241.

 

 

 

정작 두려운 것은 살아있으되 삶을 헛되이 사는 것이다.

나무들은 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오늘 하루를 철저하게 살아라.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는 온전히 썩어라.

한 순간도 살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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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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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70세 생일을 맞는 생일 1주일 전에 100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이자 한 가문의 가장. 가족의 하느님이자 멕시칸의 최고신. 가족의 지도자. 가족의 시계 같은 사람.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2 가지. '시간을 잘 지켜라, 변명을 하지 마라.'였다.

그런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지각을 했다

"멕시코 사람은 이런 실수를 하는 법이 없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모두에게 보여줄 것이다. 빌어먹을 자신의 장례식에는 기를 쓰고 일찍 가리라." p.14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는 한 달 후로 사형선고를 받은 골수암 환자다.

벌레나 병아리나 죽는 거지, 천사는 죽지 않는다고. 골수암? 지난 지난번에 약초와 미네랄을 발견했다고. 그걸 복용하면 산호초처럼 뼈가 다시 자라난다고! -중략- 나는 천하무적이야. p.91

내가 이집 어른이라고. 92

그의 할아버지 ‘세군도’ 그는 후에르타 장군과 싸우면서 살상 기술을 배웠고, 그 임무를 잘 해냈다. p.18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프르딩딩해질 때까지 칠리를 계속 먹는 아버지 돈, 안토이 오는 고통이야말로 그의 종교였다. p.103

그는 코뿔소였다. 그러니 죽음이란 놈을 들이받아 확 처박아버릴 것이다. 랄로는 문신이 있지 나도 하나 새겨보면 어떨까. 건강이 좋아지면 말이다. p. 103

그는 언제나 말했다.

"뭐든 해 내는 맥시칸(Mexi-Can)이 되어라. 우리는 능력 없는 맥시캔트(Mexi-Can’t)아니야.“ P.17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했다.

"빅 엔젤은 그냥 놔둬도 괜찮아. 자기 장례식에도 참석할 분이잖아."

그러나 그 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낀다.

가문의 모든 역사와 이 세계, 태양계와 우주가 기묘한 침묵 속에서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몸속 피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은 재깍재깍 흐르며 그의 존재를 갉아먹었다. p.19

후회가 밀려온다.

웃고 싶고, 좋은 책을 읽고 싶고, 모험을 떠나고 싶고, 아내가 만든 알본 다가스 수프를 한 번 더 먹고 싶고, 대학에 갔다면 좋았을 텐데, 파리에 가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카리브 해협을 일주하는 크루즈를 탈 걸 그랬어. 내심 스노클링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p.

동시에 참회를 한다.

빅 엔젤은 목록을 작성 중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엑셀 시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하루에 하나씩 죄를 참회한 다음, 그걸 ‘다 참회했음’ 열로 옮겼다. p.103

바다거북 수프를 좋아하지 않았던 걸 참회했다. p.103

그다음은

절친한 친구 데이브의 권유로 감사할 거리들을 적기 시작한다.

일단 해봐. 감사는 기도와 같은 거야. 기도란 하면 할수록 쓸모가 있어. p.105란

‘나의 멍청한 기도 제목들’ 망고, 결혼, 가족, 걷기, 일하기, 책, 먹기, 고수, 막냇동생, 비 온 뒤의 야생화. p.106

그다음 하느님과의 협상에 들어간다.

빅 엔젤은 하느님과 협상 중이었다. ‘생일을 한 번만 더 보내게 해주세요. 제가 그 생일을 잘 보낼게요. 누구도 잊지 못할 생일을 만들 거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영원히 기억하겠죠.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모든 기적을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그렇죠? 저처럼요. 그러니 저에게 하루만 더 주십쇼. 들으셨죠, 하느님. 하실 수 있잖아요. p.116

다음 단계는 용서였다.

날 용서해주겠니?

미안하다

다 미안해

나는 네 아버지였어. 그런데 지금은 네 아기가 되었구나. 빅 엔젤은 훌쩍였다. 물론 딱 한 번뿐이었다. 309

 

 

드디어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잘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때쯤엔 골로 가겠지. 그의 몸은 이 상태를 견딜 수 없었다.

심장은 이미 망치로 두드려 맞은 느낌이었다.

“하느님? 안 계세요?”

그러자 확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무릎을 꿇었잖아. 멍청아. 그럼 고해를 해야지.

하느님께서 이렇게 만드신 것이니, 해야 할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을 터였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더러운 놈입니다. 정말로 더러워요.”

고해는 세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어김없이 'kubler-ross의 죽음의 5단계'를 거치는 과정이다.

그 일주일 동안의 좌충 우돌, 복잡한 가족관계, 그들의 눈물과 웃음. 죽음앞에서도 유모어와 경외심과 의연함을 보이려고 애쓰는 빅엔젤. 얽히고설킨 이해하지 못할 불륜들. 그 가운데에서도 끝내 화합하고 사랑하는 가족애.

빅 엔젤은 죽어가면서도 거의 초능력을 발휘하여 자식을 총탄으로부터 지켜낸다

그러므로 결국 그는 평소 자식들에게 가르쳤던 ' 경외심을' 본 보인다.

빅 엔젤, 그는 과연 그의 소원대로 세상을 바꿨을까?

그의 친구 데이브는 말한다.

아주 넓은 해안이 있어. 우리는 모두 자그마한 호수야. 그런데 저 물 한가운데가 요동치면, 중심에서부터 퍼진 물결이 완벽한 원을 이루거든, 인생이 그건 거라고, 멍청아. 너 말이야. 물결은 처음에 세차게 시작하지만, 해안으로 갈수록 점점 약해지지. 그러다 다시 안으로 돌아오고, 돌아오는 물결은 눈에 보이지 않아. 하지만 분명히 존재해서 세상을 바꾸는 법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본인이 뭔가 성취했는지 어쩐지 의심이나 하고 있잖아. 41

 

 

멕시코인의 국민성에 대해서 무지한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상황들이 많았다.

그들의 문화, 도덕관, 윤리관, 시대적 상황들….

마지막까지 새롭게 등장하는 무지하게 많은 등장인물들, 무지하게 많은 과거의 사건들. 얽히고설킨 가족 관계. 살인, 폭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잃지 않는 유모 감각. 작가의 유쾌한 어휘력. 그것들은 자칫 혼란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가끔은 가슴 먹먹하고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사람 사는'이야기, 가족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 본연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최고의, 최선의 행복이며 최고의 추구라는 것.

이것만은 '모든 인간의 공통분모'라는 진리를 작가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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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염세주의자 -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마지막 태도
염세철학가 지음, 차혜정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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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염세주의자>라는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선택했다.

나 같은 염세주의자(명색이 기독교인이라는 내가 염세적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있던 터였다.)도 당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눈을 말똥거리며 책을 펼쳤다.

염세주의! 왜 염세주의인가? 자칭 ‘염세철학가’인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그 이유를 밝힌다.

‘염세’는 하나의 출발점일 뿐, 이러한 정서를 계기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가치를 탐색할 수 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염세는 일시적인 기분 상태가 아니라 끝없는 지겨움과 권태, 그리고 무기력함이다. 그래서 염세대의 등장은 사회 전체가 매우 특수한 단계에 진입했음을 뜻한다.

이를태면 불계세대의 양육방식, ‘잘난 자식은 많지 않고, 굳이 고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굳이 다투거나 서두르지 않는 생활방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데 굳이 남들과 경쟁하며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佛’은 현재의 상황에서 탈피하는 것뿐 아니라 속세, 나아가 우주 전체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없어지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해서, ‘긍정의 힘’은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불합리한 지점이 있으며 자신에게는 그것을 개선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책은 <장자>를 통해 옛 철학자들이 우주, 사회, 인생을 대하는 사고를 짚어보고 장자가 ‘염세’에서 어떻게 출세出世로 돌아서서 철저한 불계인이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마지막 태도. ◆

‘가장 자유로웠던 철학자 장자에게서 배우는 인생내공 10가지’

폐물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비로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지속할 수 있다

▶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자아를 찾지 않을 때야말로 진정한 자아를 찾은 상태이다

▶ 진리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나의 사지를 자르고 너의 사상을 없애고 형체와 심지를 모두 쫓아버린 후에야 너는 비로소 우주와 혼연일체가 될 것이다.

▶ 인생을 한바탕 꿈으로 보는 관점이야말로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자신의 의지로 상황을 주도하는 것을 멈추고, 순응하는 순간 모든 사물이 기꺼이 우리에게 접근해 우리의 가장 큰 아군이 되어준다

▶ 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혜는 바로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 성숙한 사람이란, 바로 지금에 충실한 모습이다. 이들은 이 순간도 다음 순간도 우주의 이치 안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결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생각이 없으며, 우연히 명예를 얻더라도 그것이 뜬구름과 같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다.

▶ 우주의 관점으로 볼 때 생로병사는 인간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 결국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성장 여정을 떠나야 하며, 인간의 좁은 시야를 뛰어넘어 우주와 같은 속도로, 우주의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무위 (無位) !

진정한 염세주의자가 된다는것이 무위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라는 거란다. 어렵다

자는 전국시대 인물이다.

BC 770년경. 그러니까 서양사로 볼 때 구약시대다. 중국에 기독교가 AD 7세기 중반 경에 전파되었다고 하니 장자가 생존했던 때로부터 1400-1500년 뒤의 일이다. 만약에 장자가 기독교를 접했다면 어떤 철학자가 되었을까?

그가 말하는 ‘자연관’이, ‘우주관’이, ‘하나님’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결국 진정한 염세주의적 자유는 신을 향한, 신에 의한 자유함으로, ‘천지의 사랑’은 신의 사랑으로 대체될수도 있겠다는 나의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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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로부터 온 편지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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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에게서 온 편지>라는 제목에서 나는 ‘어린왕자의 뒷이야기’, 혹은 ‘어린왕자 시리즈’쯤으로 알고 이 책을 선택했다.

내 짐작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이건 번역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 이정서의 번역이야기, 혹은 기 출판된 이정서의 번역물, 이를태면 <이방인> <위대한 개츠비>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등에 대한 해명 이었다.

또 키워드분류를 하자면 <카뮈로부처 온 편지>와 같은 메타소설이다. 이런류의 소설을 처음 접하는지라 인터넷검색을 해 봤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메타소설이란, 기존의 소설 양식에 ‘반(反)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20세기 소설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 즉, 소설 속에 소설 제작의 과정 자체를 노출시키는 것인데, 메타소설은 이처럼 소설 창작의 실제를 통하여 소설의 이론을 탐구하는 자의식적 경향의 소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는 소설의 낡은 관습을 파괴하고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출판사 대표인 작가 자신을 화자로 설정하고 ‘소담’이라는 편집자와의 네이트온을 통한 대화 방식으로 ‘어린왕자’를 번역하는 과정을 엮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기존 번역물들을 주제로 하면서 동시에 다른 번역물까지도 포함한 지적과 반론을 펼친 것이다.

이마주image와 데생dessin의 차이, picture와 drawing의 차이, vous와 tu의 차이, 특히 봉주흐Bonjour와 봉수와Bonsoir의 차이 등. 수 많은 예들이 언급되는데 그 미묘한 차이는 엄청나게 다른 뜻으로 번역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디테일한 설명이 나에게 약간은 지루하기도 하고 어려웠다.

불어와 영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에게 그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직역과 의역에 대한 논란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는데 직역이 아닌 의역은 왜곡을 낳는다는 우려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작가의 서술 구조를 지켜 직역하려 애쓰지 않으면, 정말 작가가 고민해 만든 멋진 문장을 촌스럽고 유치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 테다.

문학예술은 단지 스토리만을 옮긴다고 해서 원래의 감동이 전달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p.255

‘의역’이라는 이름으로 왜곡시키고 있는게 우리 번역의 현실이고, 또 그것을 옹호하고 있는 게 평론가이며 언론이기도 한 것입이다. -중략- 냉정히 살피면 우리의 고전 소설 번역은 이처럼 아주 조금씩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p.262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안 사실이지만 작가 이정서는 기존의 수많은 번역본들의 오류를 짚으며 <이방인>을 새롭게 번역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해서 나도 이정서번역의 <이방인>을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다.

어쨌든, 그 어려운 번역의 세계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고 출판계의 살벌한 현실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특히 번역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 운 것은 책 좀 읽는다고 자부했던 나에게 꼭 필요한 일 이었다. 솔직히 그동안 나는 옮긴이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 했었다. 오로지 저자만 중요하게 생각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저자의 말대로 번역이 결코 거기서 거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번역은 다 그게 그걸 거라는 오해도 많이 한다. 큰 차이가 없을 거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역자에 따라 작

품은 천차만별이 된다. 어떤 것은 원작과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p.214

지금 이 후로는 책을 선택 할 때 반드시 번역자를 꼼꼼히 살펴봐야겠다.

책꽂이에 있던 소담 출판사의 <어린왕자>를 다시 꺼내서 대조 해 가면서 읽었다. 과연 이 책이 훨씬 더 쉽게 다가오고 매끄럽게 읽혀졌다.

책을 읽기 전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지만 기대 하지 않았던 또 다른 상식과 책을 고르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은 그 보다 더 큰 소득이고 유익한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나 같이 번역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책을 선택했던 모든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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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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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수식에 이끌렸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과 조선의 운명이 어떻게 연관될까? 하는 궁금함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다.

 

조선 22대 왕 정조시대이야기다.

유교가 조선의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던 때, 노론이 기득권을 행사할 때, 권일선을 교주로한 서학, 천주교가 들어온다. 공서파의 탄압은 거셌다. 신해년 시월 서학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정조를 비롯한 정약용등 서학파들의 고뇌가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역질보다 무서운 서학!”

순교당한 서학자들로 인해 나라에는 향기가 없어진다. 그들의 원혼이 향기를 뺏어간 것이다.

어미의 죽음을 생생하게 바라본 도향과 그의 오라비 도몽, 누이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모두 파내버리고 불태워지는 모습을 봐야했던 창덕궁 내의원 김혁수, 의금부 지하감옥에서 한쪽 눈을 잃고 탈옥한 어짐창 김순, 사도세자의 익위자 박해무, 여령 이하임, 배손학, 박해우 등은 초라니패를 만들어 춤추고 노래하며 세상을 향한 복수를 꿈꾸며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불을 다루는 도향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는다. 아니, 도향의 살인적인 가야금 음계, ‘변음’에 의해서인지 불에 의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서역에서는 변음이 연주되면 죽은 자들이 돌아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권리로 산 자의 영혼을 수확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p.390

<최후의 만찬>이라는 다빈치의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쪽 세 번째 인물이 장영실이라고 설정한다. 과학으로 대동사회를 꿈꾸던 사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은 장영실 외에도 많이 거론된다. 그들은 ‘조선은 적그리스도로부터 세상을 구할 위도에 자리잡고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장영실은 <최후의 만찬>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사옵니다. 생명으로 꿈틀대는 조선의 향기를 점지하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사옵니다”

작가는 정조와 그 우측, 여섯명 의 신하들, 그리고 좌측, 여섯 명의 초라니패, 총 열세명의 표정에서 <최후의 만찬> 그림속의 열세명의 얼굴을 겹쳐놓는다. 정조의 운명과 예수의 운명. 시해와 역심과 반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들.

어쨌든 임금은 화해를 원했다.

“말 속에 임금의 뜻과 바람은 단순하면서도 면밀해 보였다. 서학의 용서가 아닌 화해를 임금은 구하는 것 같았다. 미움을 허물고 용기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적개심을 끊어내고 화합을 구상하는 것 같았다.”p.386

 

 

 

"팩트와 허구가 혼재된 서사에서 소설의 정체성은 ‘허구’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p.438

“이소설은 일반 역사소설의 문법과는 달리 그래서 어렵고 난해하다. 일면 어수선하기까지 하다. 등장하는 인물도 많고, 주제가 애매모호하게 보이기도 한다.” p.431

이 책의 심사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우리 문학에서 오래간 만에 만나는 품격 높은 새로운 역사소설이 탄생 했다는 사실에 모두 부목했다. 이 작가가 오랜 절차탁마를 거친, 깊은 내공의 소유자라는 것은 이런 고도로 절제된 시적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라고 심사위원들은 말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물고기를 거느리고 서쪽 하늘 멀리 느리게 흘러갔다. 노을은 멍든 세상을 감추고 먼 곳의 어둠을 불러와 땅 위에 꽂았다. 따순 온기가 밀려올 때 능선 위로 별이 하나둘 떠올랐다.”

 

 

난해했다. 시인지 소설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은유가 많았고 환상적이며, 같은 내용의 반복이 잦았다.

무수한 역사적 인물들, 궁중연향에 나오는 장악원들의 무수한 음악 곡의 이름들, 환상적인 구성들, 거의 반 이상 차지했을 것 같은 은유적인 묘사들……. 그리고 에필로그에는 죽은자들의 세계를 그렸다.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 무엇이 그 시대를 그토록 암울하게 만들었을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사회, 그 하나면 그 많은 비극들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을…. 결국 비극도 희극도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순교’ 그것이 과연 신께서 원하시는 걸까? 결국 그 순교로 인해서 더 많은 악이 파생된 것 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의 역사적인 악의 뿌리는 종교전쟁이었다. 인간끼리 서로 코끼리 만지는 장님들이 되어서 자기 중심적인 시각으로 남을 재단 하는 것. 그것이 태초부터 인간이 이끌어온 세상인 듯 하다. 과연 신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채 말이다.

읽는 내내 꿈꾸는 듯 아련하고 현란하고 암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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