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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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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가 시작될무렵, 유럽 신학계와 철학계는 고대로부터의 유산을 받았다. 그 유산은 고대의 두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신플라톤주의, 라는 이름이 붙어, 유대전통과 결합하여 플로티누스에 이르러 찬란하게 빛이 나기 시작하였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에서 역수입되어 이븐시나와 아하수에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 이라는 형태로 흐르기 시작하였으니 이에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 중세를 흔히들 암흑시대라고 하니깐 - 그 내부의 빛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빛을 수용하든, 혹은 배척하든.

 

그런데 이에 대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중세 신학의 첫 번째 줄기를 만든 교부철학의 아버지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호교론자들이 특히 이런 경향을 싫어했는데, 이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이, 그것도 교양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리스 철학을 소위 쿨-하다고 생각해서 열라게 공부하는데, 그런 사람들한테도 전도를 하고 싶은데, 어설프게 이야기했다가는 씨알도 안먹히네? 그러니 열라 멋지게 말을 화려한 수식법을 써서 이야기는 하는데, 이게 영 맘에 안든단 말이지.

 

생각해보라, 사실 플라톤도 그렇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고, 그들은 교회입장에서는 사실 이교도들아닌가? 그런데 이교도들이 그렇게 잠식하면서 생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우리는 그게 바로 교양이라고 마구 받아들인다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어디있는가 - 결국 이 간극은 둔스 스코투스에 이르러 극명하게 재조명되게 되고 이윽고 서로 갈길을 가게 되지만 그것은 이때보다는 훗날의 이야기이고.

 

그 중에서도 테르툴리아누스, 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한 말이 있는데, 바로 이 글의 제목인  Credo quia absurdum(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이다. 사실 라틴어가 제대로 맞는지 모르겠지만 -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거니 양해바란다 - 여튼 이런 말을 하면서 전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왠지 무언가 있어보이지 않는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이것이 전형적인 호교론자의 어법이었다. 무언가 있어보이면서도 그렇다고 뭐라 콕 집어서 설명하기도 어려운.

 

그리고 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라는 명제는 뒤에 스콜라 학파에 이르러 -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로 바뀌기도 하다가 (내 기억에는 안셀무스가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키에르케고르에 이르러 실존철학의 뿌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솔까말 백더하기 백은 이백이라는 거,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거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있누? 누구한테나 똑같은 그런 진리, 대륙의 합리론자들이었다면 무덤에서 벌컥 박차고 튀어나와 신발을 던질지도 모르겠지만 -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죽음을 완벽하게 은폐하고자 몸을 화산에 던졌지만 끝내 신발 한 짝이 밖으로 나와버렸다 -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다.

 

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생각한거다. 누구한테나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삶, 죽음, 그리고 무엇을 믿는가. 바로 여기서 믿음의 문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단숨에 격상되게 된다. 그리하여 저 모순된 언명이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믿어라! 일단 믿고 보라! 그러면 너의 삶에 닥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그런데 이 상황을 잘 살펴보면, 절대 논쟁에서는 이길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보통 우리가 논쟁에서 이기려면 논리적이어야 하고, 근거가 확실한 출처를 가지고 많이 확보되어있어야만 되는데, 1. 불합리하다 -> 논리적이지 않다, 2. 불합리하다 -> 근거가 확실한지도 모르겠다. 로 끝나게 되니 신과 관련된 논쟁에서 논리적인 결론이 날 수가 없는 거다. 그렇다면 저 언명을 포기하여야 하는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게 아니라면, 저 이교도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교도들의 철학을 교회의 중심에 놓다니? 그러면 다시 합리화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이교도고 예수도 모르지만, 그래도 계시비스무리하게 받은거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하더라도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왜? 저들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시한폭탄을 받아들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싸웠고, 결국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아타나시우스지만, 그 아타나시우스가 지금껏 통용되는 삼위일체에 대한 기본 해석을 내렸다고 해서 박해를 안받은 것은 아니다. 저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이 - 양태론이든, 아니면 예수가 피조물이든, 아니면 오늘날 받아들이는 것 처럼 신에 대한 위격이든지 - 이렇게 다양하게 되어버린 것은 바로 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스승의 이론을 중심에 놓았기 때문이기에 시한폭탄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 결과로 아타나시우스는 박해도 받았다. 오늘날 니케아 공의회에서 내린 삼위일체에 대한 표준 해석을 내놓았는데도 말이다.

 

이상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면, 다음과 같은데, 우리는 논쟁은 역시 인간의 것이고 믿음은 신에게 다다르는 것이니, 영원히 신자들은 논쟁에서 무신론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고 - 애초에 논리로 믿음을 설명하고 논쟁한다는게 말이 안되지 않는가 - 무신론자는 영영 신에 다다를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다다를 수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난 여기에 약간 비정통적인 사례를 하나 끼워놓고자 한다. 나니아 연대기에 그 사례가 나오는데, 거기서 아슬란은 바른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 것이라면 설령 적대자를 섬겨도 누구든 자신을 섬긴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니 말이다. 궁금한 사람은 최후의 전쟁을 읽어보시라.

 

여튼 바로 이지점에서 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가 시작한다. 그러니까 위의 서설은 말하자면 준비작업이다.난 코맥 매카시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전작이 뭔지도 모르겠으며, 왜 이게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을만큼 (광고에 그렇게 적혀있어서 솔깃했다) 대단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난 물음표다. 하지만 특색있게 대비를 해놓은 것에 대해서는 점수를 좀 주고 싶긴하다. 작가를 모르면 참 편하다. 이렇게 마구 평가하는 양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선셋 리미티드, 가 시작하는 지점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위의 저 서설이고, 여기서부터 흑과 백은 대립을 시작한다. 흑은 흑인 목사이고, 백은 백인 교수인데, 흑인 목사는 이야기한다. 불합리하지만 믿으라고. 그러면 너 좋아짐. 오케이? 하지만 백인 교수는 고개를 젓는다. 내 기반은 모조리 망가졌는데, 뭘 더 믿을게 있음?

 

그리고 시작하는 지점을 짚어낸 만큼 끝나는 지점도 짚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끝나는 점은 말하자면 불교철학의 용어로 진속이제설,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나가르주나, 가 불교철학을 정립하면서 나온 이야기이다. 일종의 부정변증법이라고 보면 되는데 - 그렇다고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떠올리면 곤란하고 - 쉽게 말해서 소위 말하는 변증법인 정반합에서, 정과 반이 서로 부딪히다가 둘다 지양되는 형식이다. 별로 어려운 말 아니다. 난 천재다. 라는 명제가 있고, 난 바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그럼 이 진속이제설에 따르면 니가 천재든 바보든 니 삶에는 아무 지장 없음ㅋㅋ 이 되는 거다. 아마 우리가 익숙하게 느낄 정반합공식에 따르면 넌 그냥 인간임ㅋ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흑인 목사의 말도 지양되어야 되고, 백인 교수의 말도 지양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들의 말은 둘 다 진리가 아니며, 둘 다 옳지 않다. 그리고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어떠한 것이든 진리는 둘 다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둘 다 나와 상관이 없다, 에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저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개의 명제는 더 높은 차원에 다다르게 되며, 그 차원에서 바라보면 저 두개는 비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내부에서는 팽팽하게 대립하는 대결이겠지만, 이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초월한 곳에 있는 존재가 보게 될 경우, 그러니까 독자가 책을 읽을때, 그 의미를 가지고 다시금 비진리로 지양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진리가 되리라. 그리고 그 진리는 읽어나가는 독자 모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읽어나가는 독자에게는 영영 저 책 내부의 등장인물들이 다다를 수 없고, 오직 그들의 말들만이 와닿을 뿐이다. 불교적 부정변증법이 이보다 더 잘 해당될 수 있는 곳이 있겠는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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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3-10 01:46   좋아요 0 | URL
두 사람만 나와서 뭔가 이야기를 하는가보네요 책 소개에 있는 글을 보니 그런 말이 있더군요 그 두 사람은 왜 거기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할까 싶습니다 어쩐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요 두 사람 말이 다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 말이 나름대로 진리일 수도 있죠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네요 진리는 하나가 아니고 시간이 가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한 건 얼마 안 됐어요

대립해서 흑과 백... 이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거군요
두 사람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볼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여기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는군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구나 할 뿐입니다


희선

테레사 2015-03-16 10:33   좋아요 0 | URL
이거 ..괜찮을까요?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어쩐지 두려워서 읽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깊게 상처받을 것 같아서요...이상하게 두렵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