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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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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라 만차의 ‘슬픈 얼굴의 기사’ 돈 키호테는 거인과 싸우고, 두 군대 사이에 끼어들어 놀라운 무훈을 발휘하여 상대편의 왕을 사로잡고, 다른 기사와 부딪혀 그를 쓰러뜨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손을 내밀어 그 쇠사슬을 부수고, 주인으로부터 학대받는 사람을 보면 그의 창칼로 그 핍박을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배 기사들의 고행을 본받아 그 또한 산 속에 들어가 깊은 고뇌에 잠긴 묵상을 몸에 익히기도 하며, 정말 필요할 때에는 성스러운 약물을 제조하여 몸을 치료한다. 성주가 어려움에 빠졌더라도 기사의 품격에 어긋나는 일이면 섣불리 뛰어들지 않는 자제심도 가졌으며, 자신의 종자인 산초에게 편력이 끝나면 백작 작위를 보장해주는 섬세함마저 가졌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힘은 그의 공주 둘시네아를 향한 타오르는 열정이다. 그러나 그의 공주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다른 공주를 외면하지는 않는다.

 

물론 거인이 풍차로 둔갑한다거나, 혹은 포도주 자루로 변해버린다거나 하는 일도 있고, 군대인줄 알았던 것들이 뛰어들고 보니 양떼들에 불과했다는 것은 사실 사소한 일이다. 그러다가 양치기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하여 치아가 다 빠지고 갈비뼈가 심하게 부러져버리는 것 또한 기사에게는 사소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여 성스러운 약물을 복용하였으나 다만 그 약물이 몸에 맞지 않아서 사소한 구토를 할 때도 있다. 성이 갑자기 마법에 걸려 평범한 주막으로 변할 때도 있고 공주인줄 알았던 존재가 평범한 여자로 변했다거나 하는 일도 있지만, 그러다가 다시 성으로도 바뀌고 공주로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신의 종자에게 약속한 영지와 작위는 언제 획득할 수 있을지조차 가물거리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편력 중에 겪는 일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그의 공주인 둘시네아는 남정네들을 두들겨 눕힐 수 있을 정도의 용맹을 보유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자신을 신실한 편력행에서 탈선시키려는 악마의 소행일 것이다.

 

실상은 이렇다. 라 만차의 돈 키호테는 사실 편력기사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다. 그가 살던 시기에는 더 이상의 기사도, 그리고 공주도 없었고, 다만 남은 것은 소설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설의 시대를 살고 싶었던 그는 그런 현실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은 망상으로 빠져나가고 만다. 웃긴 것은 기사도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매우 뛰어난 지혜와 이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와 그의 전설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저 한 눈을 가리고 앞 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된다. 오늘날 돈 키호테는 많이 알려져 있듯 망상에 빠진 사람을 지칭하거나, 더 나아가 이상주의자로 해석을 하게 된다.

 

사실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새로운 돈 키호테를 만난 듯했다. 나는 통섭, 으로 윌슨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지금이야 흔한 단어이지만 내가 읽을 당시에는 단어 자체가 상당히 생소했었다. 물론 학제간의 간격을 극복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가로지르는 일, 이라는 개념 자체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지만, 어떤 개념이든지 그 이름이 붙을 때 제대로 연구 대상으로 잡을 수 있다. 이 통섭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인데, 통섭을 윌슨의 의도로 다시 정리하자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그 사실들에 기반한 이론을 통합’ 하는 것이다. 보통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화해, 정도로 쉽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고, 윌슨 본인도 거기에 대해서 크게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저 정리를 뜯어보면 통섭, 이라는 것의 개념만 정의한 것이 아니라 그 방법론까지 정의해놓았다. 가장 먼저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실들에 기반한 다양한 이론들을 수집한다. 그러면 이론들 사이에는 사실이라는 공통집합이 생긴다. 이런 이론들의 통합을 통하여 우리는 사실이라는 것에 대하여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통섭과 윌슨과 돈 키호테가 무슨 관계인가 하니, 이렇게 방법론까지 정의해두었기에 그렇게까지 허황되어보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힘든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애로사항이 많다. 통섭도 마찬가지이다. 쉽게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한다,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진정한 통섭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것이고 -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사회학자가 물리학 책이나 생물학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혹은 그 반대가) 통섭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 그렇지는 않더라도 특히나 윌슨의 경우에는 진화론 만능주의가 아니냐, 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진화론을 중심으로 통섭을 시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실을 택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 거칠게 말해서 원자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있다, 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에 해당할만한 인문학적인 이론이 있는가? 결국 인문학적인 이론과 함께 나아가려면 인간과 그 문화에 관련된 사실을 채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통섭 자체는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론을 택할 것인가’ 또한 문제가 된다. 한 사실을 설명하는 두 이론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두 이론의 발전 단계가 너무나 다르면, 쉽게 말해서 그 사실을 한 이론이 다른 이론에 비하여 너무나 잘 설명한다면 우리가 굳이 두 이론을 통합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연유로 나는 통섭에 대하여 부정적 예측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 예측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통섭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도덕, 자유 의지, 선과 악, 등의 문제에 있어서 그런 윤리학적으로 어려운 문제의 생물학적 기반을 찾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눈을 뜨게 되고, 우리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에 획기적 변화가 올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아직은 쉽게 도달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꿈을 꾼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것인가? 모두가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더라도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그 별을 손아귀에 쥘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윌슨에게서 돈 키호테를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인간 중심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는 결국 ‘통섭’ 자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결국 통섭이라는 것은 윌슨에게 있어서 인간 존재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윌슨이 그동안 천착해온 연구 분야와 저술한 책들 (바이오필리아, 인간 본성에 관하여 등) 을 살펴보면, 결국 그의 관심사 자체가 인간을 향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관심사를 넘어 윌슨 본인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완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돈 키호테적인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다. 정말 인간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번에 그가 쓴 지구의 정복자,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만 할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 이기적 유전자, 에서 개체 선택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우리 인류는 일종의 운반자로, 자기 복제자인 유전자가 어떻게든 자신을 퍼뜨리기 위하여 잠깐 머무는 로봇과 같은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유전자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거친 말로 도킨스가 표현했듯이, 우리가 피임만 하더라도 우리는 유전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기적 유전자’ 라고 해서 꼭 그 유전자대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는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렇게 유전자 결정론으로 여기는 것은 도킨스의 저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다.) 하지만 이렇게 도킨스가 인간의 특이한 위치를 인정하고, 유일하게 학습을 통하여 본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더라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이런 개체선택론에서는 개체와 다른 개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유전자 입장에서 해석하기에, 정작 ‘개체’ 본인의 생각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런 결론을 가져오는 것은 이타주의에 관한 것이다. 주변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이 유전자가 자신을 퍼뜨리려고 표현형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고? 그리고 그런 모습들 중 이타적인 모습이 가끔 보이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확산에 ‘도움’ 이 되기 때문에 보이는 거라고? 그리고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이타주의가 발달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이타주의가 드러나는 모습에는 크게 가지가 있다고 개체선택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야기한다. 그 중 첫 번째는 혈연선택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친족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이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 말이다. 친족이라면 자신의 유전자를 일부라도 공유할 것이다. 이를 두고 보통 포괄적응도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 지구의 정복자, 에서는 혈연 선택과 포괄적응도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는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두 번째 전략은 서로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을 때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원시인이 되어 사냥감을 추적한다고 하자. 공동의 목표가 있을 때에는 서로 협력하여야만 유전자 입장에서도 좋다. 괜히 따로 떨어졌다가 사냥감에게 도리어 각개격파 당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세 번째가 바로 호혜적 이타주이다. 트리버스가 정립한 이론인데, 쉽게 말해서 서로 오래 볼 사람이면 일단 도움을 주는 게 좋다는 이야기이다. 도와준 사람이 나를 다시 도와줄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이를 조금 수학적으로 풀어나가면 팃포탯 전략이 나오게 된다.

 

앞서 말한 문단에서 나온 용어를 조금 설명하겠다. 포괄적응도는 혈연 선택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가? 보통 진화론에서 적응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자손을 많이 남긴다, 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좋다. 그렇다면 포괄적응도는 포괄해서 자손을 많이 남긴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굳이 자손을 낳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자손을 낳아준다면, 그 자손을 통하여 나는 유전자를 전한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좀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다음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먼저 포괄적응도는 개체 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한다. 포괄적응도에 관한 등식은 다음과 같다. 개체 A의 포괄적응도 = 상호 작용이 없을 때 A 개체의 적응도 + (유전자 형질 a가 A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와 형질 a가 A와 근연관계에 놓인 개체 B에 영향을 주는 정도의 합) 여기서 볼 때 실질적으로 혈연 선택이 작용하는 곳은 괄호 안이기 때문에 혈연선택은 엄밀히 말하자면 포괄적응도에 포함되는 그리하여 그 적응도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포괄적응도와 혈연선택을 동일하게 두는 것은 미묘한 문제다. 윌슨은 이를 무시하고 (사실 이타적이나 이기적 행동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이 없을 때의 A개체의 적응도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무시’ 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둘을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무시한 경우 우리는 부등식을 하나만 고려하면 된다. 바로 rb-c>0 라는 것이다. r은 근친도, 얼마나 두 개체가 가까운가 (보통 유전적으로 가까운가, 라는 말을 사용한다.)를 의미하는 수치이며, b는 어떤 행위를 했을 때의 이득, c는 그 행위를 했을 때의 불이익이다. 그야말로 명료한 수식이다.

 

팃포탯 전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쉽게 이야기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 라는 이야기를 안다. 이를 돌파하는 전략이 바로 팃포탯 전략이다. 처음에는 협력한다. 만약에 상대방이 나를 배신한다면 그 다음에 똑같이 배신한다. 이런 단순한 전략이 죄수의 딜레마를 헤쳐나가는 전략이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걸까? 수학적인 증명은 여기서 하기가 곤란할테지만 경험적인 사실은 알려줄 수 있다. 액설로드라는 학자가 이 죄수의 딜레마를 돌파할 전략을 찾기 위하여 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그 대회에서 우승한 전략이 바로 팃포탯이다. 결국 계속 관계가 유지된다면 협력하는 것이 서로에 이득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호 호혜적 이타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개체적인 입장이 아니라 집단적인 입장이라면? 집단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사실 저렇게 세 가지로 개체의 행동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이타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집단을 막아낼 수 있다, 라고 해석하면 이타주의에 대한 해석이 완료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입장에 지구의 정복자, 가 있다.

 

사실 지구의 정복자, 의 저자인 윌슨은 개체선택설을 지지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받아들이는 데에는 심리적으로 저항이 컸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와서 이렇게 개종을 한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가진다. 잘 살펴보면 포괄적합도, 라는 말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rb-c>0이어야 남을 도울 수 있다면, r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윌슨은 바로 이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실질적인 생물 종들의 관찰에서는 이 근연도 개념이 얼마나 허구인지 드러난다고 윌슨은 역설한다. 또한 적용이 되는 경우더라도 근연도 r이 r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크게 확장되어야만 하는 경우가 많으니 도대체 r을 설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결국 r이라는 것의 모호한 정의에 윌슨은 통렬한 비판을 날리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윌슨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윌슨은 개체 선택을 버리고 집단 선택 쪽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수학적 모델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다수준 선택이다.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이 각각 다른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두 이론을 종합한 이론인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탄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먼저 인류가 어떻게 진사회성 (분업을 하고 세대를 거쳐 번식을 하는)을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윌슨은 추적한다. 그리고 그 추적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된다 : 개체 선택을 통하여 여러 선적응들을 거쳐서 인류가 진사회성의 문턱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 선적응들을 통하여 발생한 집단에서 다시 자연 선택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윌슨의 주장에서도 문제가 있다. 책 말미의 해설에서 최재천 교수가 해설하듯이 윌슨 본인은 개미를 연구하던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개체선택을 개미와 같은 초유기체적인 의미에서 이해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포괄적응도와 혈연선택을 거의 비슷한 의미로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오해라면 오해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포괄적응도를 어디까지 해석할 것인가? 사실 윌슨이 제기한 문제는 근친도 r을 단순히 혈연을 넘어 관계를 맺는 전부로 본다면 사라질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경우 윌슨의 말대로 r의 정의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고 모호함이라는 측면은 해소되지가 않지만 이론의 통일성이라는 측면은 유지가 된다.

 

또한 사회 자체의 근원적인 억압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윌슨의 이론은 해석에 논쟁의 불씨를 남겼다. 윌슨의 이론을 다시 살펴보자. 여러 선적응들을 거쳐서 진사회성의 문턱에 이르러 집단을 이루고 사회성을 발달시켰다. 이 과정을 조금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조상은 육지에 살고, 손이 있으며, 어느 순간 고기를 먹고 불을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 인간은 불에 타죽은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죽은 생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고기의 맛을 알게 된 인간의 조상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고기를 먹기 위하여 사냥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초기의 집단은 혈연으로 매개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혈연이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이를 놓기만 하면 집단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손이 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행동에 관한 개체 수준의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혈연 수준의 집단은 다른 혈연 수준의 집단과 함께 더 큰 집단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닥불을 피워서 둥글게 둘러앉아있는 큰 집단을 생각해보라.

 

여기에 도달할 때 이 큰 집단은 굳이 혈연만으로 형성된 집단은 아닐 것이다. 이 커다란 집단이 계속 살아남으려면 결국에는 이타주의적인 심성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윌슨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타주의적 유전자가 이기주의적 유전자 풀을 막아설 수 있게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렇게 큰 사회는 결국 이타주의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로 유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좀 더 명료하게 이야기하자면 희생을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이다. 큰 집단을 유지하려면 개인의 희생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 결국 집단 자체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이 그대로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이런 집단을 계승한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억압적인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개인을 사회를 위하여 희생으로 내모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런 해석을 내릴 수 있다면 개체 자신이 이기적 유전자의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관점보다 더 끔찍하다면 더 끔찍했지 덜 끔찍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윌슨은 앞서 통섭에 대하여 말해왔듯이 인간 전체에 대한 애정과 완전한 이해를 추구한다. 도킨스든 윌슨이든 인간은 특별한 존재다, 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윌슨의 경우에는 도킨스보다 좀 더 인간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런 특별한 존재를 해석하기 위하여 집단선택론을 다시 가져오게 된 것은 아닐까? 쉽게 말해서 진정한 이타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존재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무의식적인 소망을 위해서 집단선택론을 짜맞춘 것은 아닌가? 당장 오컴의 면도날을 통과시켜보라. (물론 오컴의 면도날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더 단순한 설명을 선호하는 경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두 번의 선택을 거치는 것과 한 번의 선택을 거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아마 후자인 개체 선택이 아닐까? 하지만 개체 선택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문제점들이 있기에 다수준 선택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윌슨의 다수준 선택과 개체 선택을 두고 어떤 관점에서 이타적 행동의 진화를 바라보아야 할 것일까? 사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약간 다른 관점이며 나 스스로의 가설 수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바라볼 수가 있다. 윌슨은 근연도 r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인간의 유전자는 같은 종인 이상 일부를 공유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있으려면 적어도 일부의 변이는 있되 큰 수준에서는 비슷한 표현형을 보이는 유전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부분을 편의상 r<0.5로 두고, r>0.5가 될 때 혈연관계를 드러낸다고 보면, 결국 r값은 0.5이상과 이하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0.5란 수치는 임의로 잡은 것이다.) r<0.5인 부분인 비혈연부분을 집단선택으로 바꾸게 되면 전체 r값에서는 다수준 선택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 때 어떤 장점이 있는가? 일단 호혜적 이타주의에 기대지 않더라도 한 사람이 전혀 혈연 관계도 없으며 집단에 속해있지도 않는 다른 사람을 구하러 뛰어드는 이타주의적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한 종이 아예 다른 종을 구하는 행위를 설명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왜 사람이 원숭이를 위해서 물에 뛰어들고 고양이를 위해서 도로에 뛰어들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단점도 있다. 단적인 예로 침팬지가 사람과 98퍼센트 정도 비슷하다는 말은 매우 허술한 말이다. 보통 두 종이 유전적으로 비슷하다, 라는 이야기는 생물학적인 연구방법 중 BLAST법을 사용하여 정렬하고는 확인해낸다. 그런데 이 확인한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유연관계가 높을 것이다, 라는 것만 보장할 뿐이다. 그렇게 기반 자체가 허술한데 어떻게 종 내부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종 내부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종 간의 이타주의는 오죽하겠는가.

 

이런 가설들이나 논쟁은 접어두고 이렇게 글 말미에 고백하자면 나 또한 불가능해보이는 꿈을 꾼다. 나 또한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윌슨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앞서 길게 말한 것처럼 다수준 선택과 통섭 이론에 대하여 조금 부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런 다수준 선택을 통하여 인류의 문화가 유전자들과 공진화해왔다는 것이 제대로 밝혀진다면 통섭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통섭을 바라고 있고, 인문학적인 견지에서의 빅히스토리big history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방법이든지 하나의 묶음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꿈을 꾸고 있다. 물론 이런 불가능해보이는 꿈을 꾸는 사람들 앞에는 풍차가 거인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 모두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이번 책에 대하여 도킨스가 내린 평가를 보라.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윌슨은 계속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거대한 그림을 그려왔고 일관성을 가지고 계속 학문을 연구해나가고 있다. 그 집대성이 바로 이 책이며, 그가 내린 결론과 연구의 결과는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 쓰일 것이다. 다수준 선택이 옳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이 자세 - 현실에 굴하지 않고 돈 키호테처럼 이상을 쫓는 자세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꼭 배워야 하지 않을까.

 

   

 

 

 

p. s. 아주 흥미로운 가설이 떠올라 논문을 써볼까 생각중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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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23 02:02   좋아요 0 | URL
다 알고서 봤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이 책을 쓴 사람이 하려고 하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은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렵다고 해도 그런 것은 마음 쓰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여러가지가 나왔을 테죠 돈키호테가 없었다면, 지금은 이런 사람을 뭐라고 했을까요^^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종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윌슨은 근연도 r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고 생각하는 거 맞을 것 같아요

논문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4-01-26 22:0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단 좀 더 지켜봐야될 것 같아요. 뭐랄까 저자의 태도는 본받을 만 하지만 집단선택론은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분이랄까.

yamoo 2014-01-23 12:58   좋아요 0 | URL
오,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이 책 한 번 훑어보고 구입해야 겠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가연 2014-01-26 22:09   좋아요 0 | URL
ㅎㅎㅎ저자의 모든 책들을 모두 총집결한 느낌을 주는 책이라.. 제가 볼때는 읽어야 할 책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 저자의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기는... 리뷰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저런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요. ㅎㅎㅎ 평가가 갈릴 수 있으니 한 번 직접 훑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