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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요즘 흔히 말하는 SNS는 하나도 하지 않는 셈이다. 사실 이런 SNS에는 일종의 유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서 SNS 유형의 서비스들을 살펴보아도 내가 어느 SNS도 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는 듯하다. 이전에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유행이었고, 그 이전에는 세이클럽이나 버디버디가 유행이었다고 여겨지는데, 나는 이 SNS의 세계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싸이월드를 제외하고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한 것을 지켜봤을 뿐이니 정말 좁은 부분을 견식 해봤구나,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SNS의 범위를 좀 넓혀서 이야기하자면, 인터넷 상으로 사교를 하는 대부분의 서비스를 이 범주에 포함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카페나 블로그도 어쩌면 SNS에 포함될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넓힌다면 나 또한 이 서재를 포함해서, 블로그 정도 (비록 이제는 거의 관리하지는 않지만) 로 SNS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사람들이 주로 SNS라는 말을 할 때 떠올리는 것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이다. 그렇기에 SNS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려면 이 둘을 중심으로 진행시켜야 할 것이고, 이 글에서도 범위를 그 둘로 한정한다. 물론 앞서 밝혔다시피 트위터 계정도 없고, 페이스북 계정은 가지고 있지만 조금도 업데이트 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둘에 대해서 자세히 논할 여력도 없고, 경험도 일천하다. 그러나 몇 가지 듣고, 본 내용으로 판단하자면, 이들 서비스들은 일단 블로그에 비하면 좀 더 즉각적이고, 무엇보다도 좀 더 짧은 내용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좀 더 부연하자면, 알라딘 서재나 기타 블로그에 글을 올려본 사람들은 아마 어느 정도는 느낄 것이다. 블로그 창을 열어 큰 공백을 마주하다보면, 왠지 모르게 그 공백을 어느 정도는 채워야 될 것 같은 기분을 말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짧게 글을 쓰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대개의 경우 블로그의 글은 적어도 트위터의 140자를 훨씬 상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트위터는 본디부터 짧은 글을 위해서 생긴 서비스이니 그 '트윗' 들을 살펴보면 모두 한 트윗, 길어도 서너 트윗 내로 문장이나 내용이 완결되는 경우가 많다. 내용 또한 트위터의 내용들이 더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여겨진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위에서 이 SNS 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망일 것이다. A에서 시작하여 B로 향하고, C로도 뻗어나가는 그런 연결망 말이다. 그 망은 너무나 복잡해서, 순차적이지 않고, C로 향했던 것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A에게 되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B자신이 자신의 트윗을 돌려받기도 한다. 이 SNS 세계에서 우리는 (적어도 같은 서비스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결의 놀라운 면모는 연결된 사람들끼리의 유대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아니다. 이 연결은 사람들의 양가감정,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는, 또한 자신을 최대한 진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최대한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하는 그 이중성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트위터의 거친 글은 감정을 여과하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처럼 보여주는 작용을 한다. 그 글을 다른 트위터 이용자가 보면서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트위터와 같은 도구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경우, 마치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비언어적인 표현이 중요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 내용만큼이나 그 글의 어조나 분위기가 다른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대화와 트위터가 다른 점은 우리는 대화와 달리 트위터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과장되거나, 좀 더 축소하는 등으로 변경시킬 여지가 훨씬 많아졌다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에 이중성의 충족이 작용한다. 비언어적인 표현(트위터 어구의 어조나 분위기)은 자신의 진솔함을, 언어적인 표현(글 내용)은 자신이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을 담당하는 식으로 말이다. SNS는 인터넷이라는 환경 아래에서 이런 방식으로 발달해왔고, 우리는 이런 SNS를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는 없을까?

 

이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은 사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이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대두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저자가 유동하는 근대, 라고 규정한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가치와 삶의 방향이 바뀌고 흔들리는가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개념을 받아들여 논의를 지속시켜보면, 어떤 사람이 어느 행성에 서 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지구에 이렇게 두 발을 딛고 서 있다고 가정할 때, 갑자기 지구의 지반이 목성이나, 토성처럼 가스 등으로 바뀌어버리거나 혹은 액체 처럼 유동성을 가진 물질로 바뀌어버린다면, 우리의 걸음은 그 전까지 걷던 걸음과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그 물질에 먹혀버리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하여 헤엄도 칠 것이다. 바로 그런 부분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생각을 진전시켜보자. 우리가 단독자로서 행성을 딛는다면, 그러니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행성을 딛고 있지 않다면 다른 논의는 무의미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유동하는 물질로 덮힌 행성을 나 혼자만 딛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똑같이 유동하는 물질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다. 그렇게 서로 버둥거리다가 어느 순간 손이 맞닿기도 할 것이고, 어느 순간 눈짓이 오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가장 먼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협동일 것이다. 이 무른 지각 위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서기 위해서 말이다. 협동이라고 규정짓고 보면,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저 흔들리는 유체 위의 사람들을 우리 현대 사회의 모형이라고 본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도 물론 존재한다. 유체 위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발을 딛기 위해서 겨우 상대적으로 좀 단단해 보이는 지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그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등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이는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그 이전에 협동이 먼저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먼저 손이라도 맞잡아야 상대방과 함께 올라가거나, 혹은 밟고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협동이 저런 상황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초기 조건이 조금 변함으로써 거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카오스 이론이라고 부른다던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적용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비선형적으로 복잡한 양식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복잡한 양식을 영위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초기에 가졌던 관계, 협동을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다시 그 협동을 부활시키기에 이르는데, 그 양상은 이제 일종의 SNS 형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렇게 단정짓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어떤 점에서 현대의 SNS가 초기의 협동 관계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가? 계승했다면 어떻게 변했는가? 그리고 왜 SNS 형식이어야 하는가? 이는 이런 예를 들면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 여중생의 납치 사건과 같은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럴 때에는 트위터의 활동들, 리트윗 등을 통하여 어떻게든 범인을 찾고 여중생을 찾으려는 노력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초기의 협동관계가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초기의 협동관계보다 그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140자로 리트윗만 하면 우리는 정의를 구현했다는 마음과 동시에 사회에 무언가 도움을 주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사회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초기에는 협동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협동 방식의 간략화로 인하여 누구나 간단하게 협동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초기에서 변한 방식이며 동시에 SNS 형식이어야 할 이유이다.

 

하지만 저런 의문에 답을 했다고 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 지금 와서 이런 형식을 빌려 협동이 재발견되었는가? 이는 현재의 SNS의 태생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현재의 협동은 유동하는 근대의 초기와는 그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초기에는 그 태생이 사람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기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원을 기업과 기술에 두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운영하는 기업, 그리고 물질적으로 그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서버들, 그리고 그런 서비스에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직접적으로 저 근본적인 문제에 답하자면 기업과 기술의 이권과 협약이 협동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이 그렇기 때문에 저런 서비스들의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까 트위터의 활동들, 리트윗 등을 통하여 사회를 바꾸려는 기획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조정환이 지은 인지자본주의, 에서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점거한 상태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기업이 지원하는 이 서비스는 근본적으로는 사람-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기계-사람의 형식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공장을 점거했다고 하더라도 가내 수공업이 아닌 이상은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더 편리해졌다. 하지만 잃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야기한다. 이런 트위터나 페이스북 세계가 있는 온라인 세계는 '사람들 간의 접속이 지속 되는 시간을 축소시킴으로써 접속이 무한하게 증대되고' 동시에 '인간들 간의 유대관계를 약화시킨다' 라고 말이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어, 나는 트위터 팔로워가 몇 백명인데, 나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 정말 많은데, 그렇게 의아해할 수 있지만 그들과 나의 관계는 앞서도 지적했다시피 다른 사람보다는 나 자신의 양가감정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이런 양가감정의 충족은 사람-사람의 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사람이 마주보고 있을 때에는 초면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좀 관계가 진척되면 새로운 의심이 생긴다. 과연 이 사람이 어디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라고.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이나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손해 보는 기분이 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어디까지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할 지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람-기계-사람의 관계에서는 기존에 자신의 감정과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상대방과 맺어지기는 쉬워졌지만 깊이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워졌다. 부연하면 더욱더 진솔함은 많아졌지만, 동시에 더욱더 숨김도 많아졌다. 이는 자연스럽게 유대관계의 약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은 고독에 빠지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이기에 사실 이런 결론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반대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독의 속성을 잘 분석해보면 그렇게까지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SNS의 활용 때문에 고독을 누릴 시간이 없어진 것 처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피상적인 고독이다. 고독을 누리고 싶다면 사실 컴퓨터를 안하면 되고, SNS를 안하면 된다. 이 책에서 진정으로 고독을 언급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 보다는 어떻게 사람이 사람-기계-사람의 구성'물'이 되어 기계에 동화되어 가는가, 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기계가 될 수도 없다. 거기에서 사람은 진정한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그 진정한 고독은, 사람-사람 관계 사이의 유대관계를 갈구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변모한다. 초기의 협동관계로 정말 먼 길을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초기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동안 쌓인 경험이 더욱 사람-사람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렇게 진정한 고독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면 온라인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잃은 유대관계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대답하도록 하겠다. 일전에 대학로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혜화역에 내렸을 때 왠 외국인이 돈을 조금만 빌려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었고 빨리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약속 때문에 혜화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홀끔홀끔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외국인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자신이 지갑을 잃어버렸고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결과적으로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였다. 사실 나도 고개를 저으면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대사관에는 연락을 했나, 경찰에는 말을 했나 등등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른 사람들처럼 고개를 돌리고 떠나간다면 이 사람은 좋지 못한 상황에 놓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설프게 그 사람에게 영어로 말을 하고 조금 돈을 주었다. 끝까지 갚겠다고 이메일이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그였지만 그냥 괜찮다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때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사실 나로서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당시에 주어진 정보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를 믿는다면, 객관적인 사실은 몰라도, 적어도 내 마음 안에서는 그는 정직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 도움도 진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피상적인 고독을 잃어버린,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의 말이 의심스럽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한 알 수 없다. 근거를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가진 근거로는 상대방을 판단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를 믿는 것뿐이다. 계속 그를 의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진솔함보다 그의 숨김에 더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사이의 유대를 갈구하는 그런 진정한 고독에 빠질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 발 앞서 나가서 먼저 그를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로는 거짓말로 신음할 것이고, 때로는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신음하고 손해를 본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는 회복될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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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5 08:46   좋아요 0 | URL
가연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

가연 2012-10-05 22: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오랜만이네요ㅎㅎ

2012-10-06 09:11   좋아요 0 | URL
흠, 믿어야겠군요. (믿어야 할 이유를 이보다 더 잘 쓰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가연 2012-10-06 18:34   좋아요 0 | URL
ㅎㅎ 마지막 말은 ㅎㅎ 유대관계가 회복될 거라고 믿는 수 밖에 없다/상대방을 믿는 방법으로 유대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이렇게 좀.. 이중적으로 써놓긴 했는데, 본문에도 언급했다시피 안믿을 이유가 '없으면' 믿는 수 밖에요, 풋.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2-11-17 18:20   좋아요 0 | URL
전, 페북,트윗은 안 합니다.
한때 싸이에 한껏 열올리면서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소중함에 확실히 눈떴거든요.
그때도 그렇고 끊임없는 의심에 빠질 때마다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믿는 만큼 손해보는 기분도 들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안 찍힐 만큼 조금씩 믿다보면
진실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생각으로 균형감각을 회복했습니다.

가연 2012-12-29 01:4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한때 싸이를.. 답이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