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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채, 그 첫 5000년.
1.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가끔 부딪히는 문제 중 하나는 책의 평점을 어떻게 주는가, 입니다. 여기 알라딘에서는 마이리뷰를 통해 작성한 리뷰에 책에 대한 평점을 기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별 5개를 만점으로 두고 별 1개씩의 단위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점수 체계는 사실 세밀하게 만들어졌다고는 보기 어려워서, 각 책마다 고유한 점수를 매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불만족스럽겠지요. 저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별 다섯 개는 정말 창의적이며 논리가 빈틈이나 비약이 없이 잘 짜여있다, 고 여겨지는 책들에게만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며, 항상 제 생각이 옳다고 여길 수 없기에 그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별 두 개는 잘 안주는 편입니다. 별 한 개는 아무래도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읽은 책인 이상 부여하지 않고 말이지요. (읽지도 않았거나 건너뛰면서 읽었다면 아예 리뷰를 쓰며 별점을 매길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면 대부분의 책들은 별점이 3개에서 4개 사이에 머물게 됩니다. 만약에 별점을 소수점단위로 매길 수 있다면 아마 더 세세한 별점을 줄 수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저 대부분의 책들은 리뷰를 쓸 때마다 별점을 3점을 주어야 할지, 4점을 주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껏 리뷰를 써오면서 이 책 ‘부채, 그 첫 5000년’ 보다 더 별점이 헷갈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3점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라치면 지은이의 다음 문단에 나오는 주장에 설득되어 4점을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가운데 제 마음은 3점과 4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지요. 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수많은 생각을 접어두고 일단 이 책에 4점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점수를 매기는 데 왜 이렇게 민감한가, 라고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이 책에 대해서 이제부터 설명 드리는 것들을 들어보시면 제가 왜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2.
이 책, ‘부채, 그 첫 5000년’은 상당히 독창적인 책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화폐와 시장의 발전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는 기본적인 관념들을 다 뒤집어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물물교환이 있고, 그 후에 그것이 발전하여 화폐가 생겼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오늘날에 이르러 신용거래가 발달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먼저 부채, 쉽게 말해서 태초에 빚이 있었고, 이 빚의 척도가 있었으며, 그 척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에서는 물건과 물건의 교환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이 빚의 ‘척도’가 일종의 화폐역할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화폐는 화폐이지만, 신용화폐이며 주화로 만들어진 화폐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먼저 부채를 바탕으로 한 신용거래가 있었으며, 그 후에 주화를 사용하는 경제가 발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주화로 사용된 금, 은과 같은 귀금속들은 그것들이 폭력과 결합하게 되면서 화폐로 쓰이게 되고, 그 결과 약탈 또는 수탈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이 주장에 대해서 근거를 내세우기 위하여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과 동시에 인류학적인 접근을 시도합니다. 먼저 애덤 스미스가 글에서 주장했던 물물교환과 주화, 시장경제의 발전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조차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료의 추적을 통해 보여주는 것으로 반론을 펼치며 그가 외면해왔던 실제의 사회상, 즉 폭력과 노예제도가 뒷받침된 사회를 꼼꼼히 드러냅니다. 축의 시대, 중세시대 등으로 개념을 구분하면서 말입니다. 폭력과 노예제도가 없던 사회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면, 저자는 그런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료 조사를 통하여 그 실상을 드러냅니다. 실질적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은 기계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에 착안해야 하며, 인간인 이상 인간들끼리 가지는 정(情)이 있으며, 그 정을 통해서 서로간의 부채가 자연스럽게 상쇄되고 순환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마치 기계로 취급한 애덤 스미스의 이론과 그 이론으로부터 발전되어온 주류경제학의 단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인류학적으로 인도의 리그 베다, 브라흐마나와 같은 고문서에서부터 이집트의 로제타석과 상형문자에 기록된 문헌들, 성경이나 불교의 교리, 이슬람의 이야기까지 자신이 가져올 수 있는 자료는 모두 가져오면서 태초에 있었던 부채의 존재를 입증합니다. 또한 사실 실질적인 증거라고 보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만, 언어학적으로도 접근하여 truck(거래하다), barter(교환하다)와 같은 단어가 애덤 스미스의 시대보다 1, 2세기 앞선 시대에서는 trick, rip off, bamboozle과 같이 속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가져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물물 교환에서부터 화폐가 발생하였다, 라는 주장은 의외로 연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기에 단 하나의 반례만 가져오더라도 쉽게 파훼될 수 있지요. 그래서 저자는 그 반례로 남미의 원시 부족인 남비콰라 족이나 콩고의 렐레 족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실로 인류학자들이나 가능한 방법이 아닐 수 없지요. 어쨌든 이로서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 신용사회가 먼저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도 신용사회가 아닌가, 왜 오늘날은 옛날에 있었던 신용사회처럼 굴러가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저자는 답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전의 사회와 다른 비인간적이고 객관적인 신용화폐이며 이는 우리 인류가 소위 말하는 축의 시대,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사회의 요소들이 변용을 거쳐서 자본주의 제국의 시대에 침투하였기에 변질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3.
그런데 이 책의 문제점은 저렇게 많은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좋게 말하자면 독자들에게 불친절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저 중구난방으로 자료를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부채에 대해서 인도의 베다, 구약성서와 같은 고문헌들을 가져오면서 ‘원초적 부채 이론’에 대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 이론은 우리가 우리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면, 이 빚은 엄밀히 말하자면 도대체 누구에게 지고 있는 것이고, 누구에게 이 빚을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존의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따라 이런 저런 물물 교환을 통하여 형성된 시장이 정부보다 먼저 형성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시장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정부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한 근거들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채감이 어디서 기시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하나 제안된 것이 바로 이 ‘원초적 부채 이론’ 입니다. 고대에 창작된 베다의 시를 참조하면 우리가 지고 있는 부채감은 신에게 빚을 지고 있고, 죽음에 빚을 지고 있으며, 좀 더 확장하여 말하면 ‘산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존재를 보장해주는 사회의 연속성과 영속성’에 빚을 지고 있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학적 증거로 고대 인도유럽어의 부채, 라는 단어가 죄의식, 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라는 사실로 뒷받침되고 말이지요. 이윽고 신에 대한 이런 부채감은 인간에게 끌어내려져 신과 동일시 된 인간, 고대 이집트의 경우 파라오(태양신 ‘라’의 아들과 종종 동일시된)가 그 예가 되겠지요, 에게 권력을 줍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한참 위와 같이 ‘원초적 부채 이론’ 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을 하고 나서는 그 다음 장에서는 단칼에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라면서 잘라버립니다. 방금 전까지 열을 올려서 설명하던 내용은 사실상 저자 본인과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저자는 저자 본인의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런 식으로 부채를 설명하는 방식은 일종의 '국가의 논리' 이며, 우리 모두가 상환이 불가능한 빚을 안고 삶을 시작하게 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이제 독자들은 당황함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이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확 뒤집어 버리다니’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태도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드러납니다. 한 번도 당황스러운데 많은 부분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니 그 많은 자료들이 도리어 이해를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어쩌면 이는 자료의 과잉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쌓아보니 참 많고 다양하더라, 이 자료들을 다 이용하고는 싶은데 마땅히 본인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바로 이용할 만한 곳이 없으니 억지로 새로운 단락을 만들어 끼워 넣는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료가 산만하게 쌓이게 되고, 독자들이 저자의 중심 개념을 파악하는데 힘들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됩니다.
4.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저자는 책에서 ‘인간경제’ 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 ‘인간경제’ 는 일종의 원시화폐가 쓰이던 경제 체제를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원시화폐라는 말을 싫어하고 사회적 통화라는 말로 대체하는데, 이 사회적 통화는 국가나 시장이 없는 곳에서 흔히 보게 되는 조개껍질이나 깃털화폐, 섬유화폐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배워온 관념이 남아있기에 이런 조개껍질이나 깃털이 발전하여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주화로 변화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이 조가비 구슬이나 깃털 화폐는 실질적으로는 어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끊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의 예로 원주민들에게서 보이는 피의 부채, 신부값 등을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이 주장 자체는 사실 크게 보면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칼 폴라니가 쓴 ‘거대한 전환’ 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내용이 언급됩니다. 칼 폴라니는 말합니다. ‘우리의 시장경제가 어째서 무너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상품화 할 수 없는 것을 상품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상품화 할 수 없는 것이란 바로 인간 자신을 가리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과도한 발달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는데, 팔 수 있는 것은 다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가공하여 팔려고 하다 보니, 실제로 찬찬히 살펴보면 팔 수 없는 것들, 말하자면 인간까지도 상품으로 포장해서 팔고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여기서 칼 폴라니가 말하는 팔 수 없는 고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인간경제와 맞닿아있습니다. 이 경제에서 쓰이는 사회적 통화는 서로 비교 불가능한 인간 존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통화이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인정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통화이지요. 심지어 칼 폴라니와 이 책의 저자의 지향점마저도 똑같습니다. 현실 자본주의의 잘못된 모습을 밝힌다, 라고 말이지요.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애덤 스미스가 중세 페르시아 자유 시장 이론가들의 이론을 표절한 것 같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주장하는 부채가 화폐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하여 그 근거로 내세운 ‘인간경제’ 부분은 용어만 다르게 썼을 뿐 이미 다른 학자에 의하여 그 의의가 정교화 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칼 폴라니의 저서를 표절한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책의 저자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도출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애덤 스미스도 정말로 저자의 생각대로 표절을 한 것일까요? 애덤 스미스도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그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 아닐까요? 책의 뒷부분에서는 이슬람 자유 시장 이론가들의 책 구절과 애덤 스미스가 지은 책 구절이 서로 비슷한 것 같으니 영향을 받았다, 라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만 그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근거로 보기에는 모자랍니다. 저자의 문제제기와 주류 경제학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훌륭합니다만 책의 일부가 실제로 확실한 근거를 들지 못하는 상태로 애덤 스미스 죽이기에 할애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5.
위의 단락들에서 언급한 의미들로 판단하자면, 이 책은 마치 문이 닫힌 방바닥에 구슬들을 가득 쏟아놓은 것과 같아서, 방 바깥으로 구슬이 빠져나가지는 않지만 실제로 보배로 쓰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느낌을 줍니다. 결국 독자 자신이 책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정렬해야만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마치 오천 조각으로 나뉜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랄까요. 다 맞추고 나면 분명 훌륭할 거라는 것은 알지만 맞추기가 어려운 그런 퍼즐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저자의 마지막 말은 쉽게 흘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앞서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빚은 꼭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는데 ‘부채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갚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요. 얼핏 보면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만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의 깊은 곳에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는 부지런한 사람은 그 부지런함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해치는 사회이며 동시에 설령 본인이 하기 싫다고 할지라도 (직장에서 해고당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이 착취나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이고, 도리어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즐기는’ 사회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부채를 꼭 갚아야 한다는 관념이 약해진다면 우리는 조금 더 게을러 질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더 인생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경제 질서는 조금 더 자기 파괴적인 경향이 줄어들겠지요. 물론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서 제안하는 ‘희년 정신’, 굳이 풀어 말하자면 부채 탕감 정신은 사실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런 희년 정신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희년 정신이 가능할 수도 있는 시점에 이르는’ 노력마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저자가 책을 읽으며 그 많은 구슬을 하나씩 꿰어온 우리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부채는 원래 고유한 특질을 가진 인간들 사이의 자유로운 약속이었으며, 우리는 우리 사회의 존립을 위해서 그 타락한 약속을 순수한 상태로 되돌리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입니다.
p. s. 그러니깐 4점... 여러분은 몇 점을 주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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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 유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