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이상으로 순혈을 고집하는 바람에 한국말을 오히려 빈혈에 걸리게 하는 국수주의자들이 많다. 말도 인간처럼 혼혈아를 낳게도 하고 때로는 귀화하여 시민권을 획득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외래어를 많이 쓰는 것도 병이지만 무조건 말의 변화와 개방성에 말뚝을 박으려 하는 결벽증도 병이다. "그것은 일본식 말이다"라고 꾸짖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기 자신이 쓴 무슨 무슨 식이라는 표현이 바로 일본의 '시기(式)'에서 온 일본 투의 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우리가 지금 애용하고 있는 민주주의란 말 역시 일본 사람들이 그나마 잘못 번역한 말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데모크라시democracy의 번역인데 잘 알다시피 '.....크라시'는 제도이지 주의ims가 아니다. 민주제라 해야 할 것을 개화기 일본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라고 하는 바람에 덩달아 우리까지 그 말을 그냥 쓰고 있는 형편이다.

북한에서 금과옥조로 내세우고 있는 주체사상, 그래서 한국의 학생들까지 주사파가 생겨난 그 주체사상이라는 말까지도 일본 말의 역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주체사상이라는 말 자체에 주체성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보통 익살맞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는 굳은 말이 되어버린 것을 일본 사람들이 만든 말이라하여 버리고 새 말을 만들어 쓰자는 말이 아니다. 말끝마다 왜색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처럼 신경질적인 언어 국수주의를 따르자면 한이 없다는 본보기로 하는 소리이다.

                                                                        .     .    .(중략)

그런데 예사로 넘어갈 말까지 트집 잡고 들어지는 언어 국수주의자들이 웬일인지 국민학교라는 왜색 중의 왜색 말에 대해서는 함구를 하고 있으니 놀랍다. 국민학교라는 말은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교육을 상징하는 '폴크스 슐레'를 그대로 일본 말로 옮긴 것이다. '폴크스 슐레(국민학교)는 '폴크스바겐(국민차)'과 같은 전체주의적 이념의 산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한쪽 공장에서는 규격화한 자동차 폴크스바겐이, 또 한쪽 공장(학교)에서는 규격화한 폴크스 슐레의 아이들이 다량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이 인간의 개성과 다양성을 철저하게 배제한, 끔찍한 나치의 획일 사회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동맹국인 나치의 교육 정책을 부럽게 생각하여 그대로 직수입하고 그 명칭도 그대로 따다 붙여놓은 것이 바로 그 국민학교라는 명칭인 것이다. 그들 연호로 소화 16년에 국민학교령이라는 것이 일본에서 내려졌는데,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적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 취해진 정책이었다. 능력의 차라고 하는 것은 상급학교에 가는 단계에서 나누면 되므로 소학교, 중학교의 단계에서는 모두 같은 내용을 공부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각 학교에서 모두 다 같은 내용으로 교육을 해서 같은 사상을 불어넣자고 주장하는 교육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육은 나라의 손 안에 들어와 모든 학교의 교육 내용을 동일하게 규격화할 수 있고 나라에서 허가하지 않은 학교는 인정하지 않게 된다. 물론 국민학교의 신설도 제한하게 된다. 그 결과로 학교 교육의 내용과 수준이 똑같기 때문에 굳이 학교를 선택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국민학교는 자연히 거주 지역에서 가장 편리한 곳으로 보내는 통학구 제도가 생겨나게 된다.

이름만이 아니다. 통학 구역제 실시까지 똑같다. 사립 학교의 특성까지 죽인 것도 똑같다. 일제에서 해방이 되고 자유 민주주의를 국시로 삼고 있으며 미국식 민주 교유글 본받았다고 하면서도 국민학교는 황국신민의 그 국민학교와 이름도 제도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일본도 민주화하자마자 제일 먼저 버린 것이 국민학교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일본 요리 이름인 오뎅까지도 꼬치라고 고쳐놓으면서도 막상 나치와 일본의 유물인 '국민학교(폴크스 슐레)'라는 말은 마르고 닳도록 지켜가고 있는 것일까.

이념어라는 시각이 아니더라도 중. 대학교라는 명칭이 있으면 당연히 언어 체계로 보아서도 소학교라고 해야 마땅하다. '소 . 중 . 대'이지 '국 . 중 . 대'가 어디 있는가. 한 나라의 정신과 문화의 기보늘 가르치는 학교 명칭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남기고 간 낡은 부대라면 그 안에 어떻게 새 교육을 담을 수 있겠는가. ... ...(중략) 여러 사람이 다니면 길이 나듯이 틀린 말도 자꾸 쓰면 우리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가치나 이념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공공 기관의 명칭이나 교육 언어는 그 뿌리를 제대로 찾아주어야 정신도 변한다. .....(중략)

어린애들을 이렇게 획일하하여 공장에서 국민차 뽑아내듯 뽑아내는 국민학교에서 과연 미래의 개성 있는 한국인들, 국제인들이 길러 낼 수 있을런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일리치 같은 학자는 우리 눈으로는 지나치게 자유방임하는 듯한 미국의 개성이 넘쳐나는 학교 교육 제도를 두고서도 야만한 획일주의라며 탈학교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판인데 우리 국민학교를 보면 무엇이라고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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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글들로 인해 1996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변경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글은 1993년에 씌어진 것이고, 현 시대에 맞게 다른 부분의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꾸었습니다.

                                                                                                    (176p~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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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카를 > Karl Orff - Carmina Burana

Karl Orff - Carmina Burana


1. 칼·오르프의 생애와 작품

칼·오르프(CARL ORFF)는 1895년 7월 10일 뮌헨에서 출생한 현대 독일의 대표적인 작곡가의 한 사람이며 교육자이다. 일찍부터 음악적인 자질을 발휘하여 피아노, 오르간, 첼로를 배웠으며, 어렸을 때는 자작의 인형극에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16세 때인 1911년에는 벌써 50곡 이상의 가곡과 니체의「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의한 합창, 관악 오케스트라, 2대의 오르간, 2대의 피아노, 2대의 하프를 위한 대작을 완성하였다. 1913년 일본의 가부끼에 따른 최초의 오페라「희생」을 작곡했다. 1914년 뮌헨 고등음악학교를 졸업 후, 1915년 -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 후 뮌헨·만하임·다름시타르 가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1921년에는 뮌헨에서 카민스키(HEINRICH KAMMISKY ; 1886 ∼ 1946)에게 사사했다. 1924년 도로테킨터(DOROTHEE G NTHER)에 의하여 창설된 고전교육·음악·무용을 위한 <귄터학교>의 음악 교육부에서 교편을 잡음으로써 교육자로서 출발했다. 1930년 - 1933년에는 뮌헨 바하협회의 지휘자로써 재직하여, 바하의「마태 수난곡」을 무대극으로 연주했다. 1937년 그의 대표작인 무대 형식에 의한 칸타타 3부작「승리」의 제1부인「카르미나 부라나」를 완성, 초연하고, 1939년「달」(DER MOND), 1943년에는「승리」의 제2부인「카툴리·카르미나」, 1953년에는 제3부인「아프로디테의 승리」를 초연했다. 1943년에는 오페라「재치여인」(DIE KLUGE), 1949년에는 오페라「안티고네」(ANTIGONAE)등을 계속 발표하여 오페라 및 극음악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1950년 - 1955년에는 뮌헨 고등음악학교 작곡가 주임교사가 되었으며, 1955년에는 튀벙겐 대학, 1972년에는 뮌헨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후에 바이에른 미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82년 3월 29일 그의 고향 뮌헨에서 사망하였다.

2. 칼·오르프의 작품 경향

칼·오르프의 흥미는 어디까지나 극음악이었으며 그의 주요작품은 거의가 모두 오페라나 무대를 수반한 작품이다. 초기에는 리하르트·시트라우스나 드뷔시등의 영향을 받았지만, 1930년경부터는 자신의 초기 작품에 불만을 느끼고, 많은 낭만적 수법을 버리고 독자적인 작곡양식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그의 음악의 바탕은 음악·언어·동작(특히 무용적 요소)이라고 하는 세 개의 기본적 요소의 완전한 일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에 의해 이루어진 드라마는 <세계>의 투영이라고 해서 자기의 극작품을 <세계극 - WELT THEATER>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리스 고전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그의 작품에 시종일관해서 나타난다. 그의 극작품의 제재에 그리스극이 많이 다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그의 고르지 않는 삼화음 극음악은 반복되는 화성 구조, 반복되는 선율과 단순하고 다양한 관현악법을 타악기 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스트라빈스키의 영향 때문이다. 그의 원시주의에의 접근은 리듬의 중시를 가져오고, 이 리듬의 중시는 또한 그의 교육원리의 기초가 되었으며, 어린이를 가르치는 창조적인 작품에 적용시켰다. 칼·오르프의 작품은 계획적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고, 그의 음악은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유럽과 미국 음악에 중대한 영향을 준 심미감에 있어서, 단순성의 최후의 가장 의미있는 대표로 불리고 있다.

독일의 나치 정권 - 보통 전체적이며 기념적인 - 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단순한 예술을 요구하여, 12음기법 음악을 가르치고 연주하는 것을 중단시켰다. 여기서 칼·오르프같은 작곡가의 새로운 단순성은 독어를 쓰는 국가들에게 강력한 반(反) 12음기법 세력으로 형성되게 한다.

3. 원본「카르미나·부라나」

카르미나(CARMINA)라는 말은 CARMEN(라틴어로 '노래'라는 뜻)의 복수형이고 부라나(BRANA)는 보이렌(BEUREN)의 라틴어 이름이다.「카르미나·부라나」는「보이렌의 시가집」(詩歌集) - SONG OF BEUREN - 이란 뜻이다. 이 시가집은 1803년 독일 뮌헨 남쪽으로 수킬로 떨어진 바이에른 지방의 베네딕크 보이렌(BENEDIKTBEUREN)의 수도원에서 발견된 데서「카르미나·부라나」란 이름이 붙었다. 익명의 유랑승이나 음유시인에 의한 세속의 시가집으로 13세기∼14세기에 걸쳐 골리야드(GOLIARD)로 불린 유량학생에 의거 라틴어로 쓰여졌다. 약 250여곡 풍의 몇 곡은 보표를 갖지 않는 네오마에 의하여 선율이 기보되어 있다. 전체는 4개의 부문 1) 도덕적 풍자적인 시 2) 연애시 3) 술잔치의 노래, 유희의 노래 4) 종교적인 내용을 가진 극시로 이루어져 있고 외설에 가까운 것도 있다.「카르미나·부라나」는 악보에 의한 해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는 거의 상상으로 연주되고 있다. 원사본은 현재 뮌헨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레코드 ; 국내에서는 현재까지 발매된 라이센스 레코드는 없고,「하모니아·문디」에서 그레만식(REN CLEMANCIC)지휘로 4배,「텔레푼 켄」에서 2장의「카르미나·부라나」가 발매되어 있다.

음악 감상 ; 음악은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직감할 수 있다. 현재 스페인 민요나 러시아 민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국내에 발매된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과 비슷한 감흥을 일으킨다. 음악은 고악기로 연주되고 타악기의 사용이 활발하다. 독창과 합창이 있고, 기악만의 연주도 있고, 대사도 나오고 낭송도 나온다.(음악 감상은「하모니아·문디」에서 발매된 4매중의 1매를 듣고 쓴 것입니다.)

4. 칼·오르프의「카르미나·부라나」

칼·오르프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일약 그를 유명하게 만든, 1935∼1936년에 작곡된「카르미나·부라나(CARMINA·BURANA)」는 1942년에 작곡된 「카툴리·카르미나(CATULI CARMINA)」와 1951년에 작곡된 「아포로디테의 승리(TRIONFO DI AFRODITE)」와 더불어 무대형식에 의한 칸타타의 3부작「트리온피(TRIONFI ; 승리)」의 제1부 작품이다.

1930년경부터 칼·오르프는 독자적인 작곡 양식의 확립에 정진한 결과, 1936년에 이르러 그의 독자적인 수법에 의거한「카르미나·부라나」를 내놓게 되었다.

「카르미나·부라나」는 주제가 되는 소재를 전개함이 없이 반복하고, 형식이나 화성은 극히 명징·간결하여 일괄된 리듬이 두드러진 음악이며, 또 대위법적 수법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선 음악 취급에 의한 투철한 구성상의 단순성을 끝까지 관철시킨 음악이다.

「카르미나·부라나」에 의해 확립된 칼·오르프의 독자적인 양식은 이후의 그의 전작품을 규정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무대 음악으로서 모색을 계속하는 현대 음악의 한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 되었다.

「카르미나·부라나」는 1937년에 프랑크푸르트 가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3부작 전체는 1953년 봄 밀라노의 라·스카라좌에서 행하여졌다.

칼·오르프가 작곡한「카르미나·부라나」의 대본은 앞서 제3장에서 설명한 세속의 시가집「카르미나·부라나」에서 칼·오르프가 24곡을 골라낸 것으로, 라틴어로 적힌 중에 보헤미안의 술, 여자, 사랑의 노래가 대부분이고, 몇 개의 독일어 가사는 칼·오르프 자신의 작시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칼·오르프는「카르미나·부라나」의 작곡에서, 보이렌의 시가전「카르미나·부라나」의 가사는 차용했으나 선율은 사용하지 않았다.

전체 25곡은 제1부「봄의 노래」(8곡), 제2부「주막에서」(4곡), 제3부 줄거리를 갖는「사랑의 이야기」(10곡)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제1부의 앞에「서(序)」(2곡)가 있고 제1곡이 제3부의 마지막 25곡째에 반복된다. 곡의 중심은 합창에 있으며 소프라노, 바리톤, 테너의 독주자들은 부수적으로 설명을 보충하는 정도의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오케스트라는 대규모의 타악기(팀파니 5, 첼레스타, 피아노, 글로켄시필 3, 실로폰, 캐스터네츠, 크레셀, 그로탈, 트라이앵글, 심벌즈·안티기 3, 심벌즈 4, 탐탐, 종 3, 튜블라·벨, 탬버린, 작은북, 큰북)을 써서 강한 액센트의 합창 리듬을 산발적인 화음으로 강조해준다.

칼·오르프는 이 곡을 가수는 의상을 입고 노래의 내용은 발레에 의하여 상징적으로 연출되는 극음악으로 작곡하였지만, 단순한 연주 음악으로도 그 효과는 충분하다.

5. 곡의 해설

서(序)

제1곡 ;「운명의 여신이여」합창. 마지막곡인 25번째 곡으로 반복되는「운명의 여신이여」는 온음표에 의한 박자가 느린 서주가 있는 다음에 갑자기 템포가 빨라지면서 주제가 변함없이 집요하게 되풀이된다.

가사 ; 오 운명이여 / 늘 변하는 달과 같이 / 돌아오르다가 기우는 / 그대 운명이여 / 얄궂은 운명은 / 때론 가혹하게 / 때론 친절하게 우리를 대한다 / 우리의 욕망을 희롱하고 / 얼음과 같이 녹고 마는 / 권력과 빈곤을 주기도 한다 / ……
 
 


Carmina Burana 중 첫곡 O Fort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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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18~30
  배신자의 두 모습
 

하루 24시간 안에 낮과 밤이 있듯이, 인간의 내면에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충성과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 직장, 사회생활에서 항상 충성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배신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닙니다.

 

배신자의 두 모습

배신하는 사람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배신행위를 끝까지 위장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배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의지를 갖고 스스로 배신합니다. 배신하는 행위에 대한 집념은 아무도 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의지를 갖고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형의 첫 사람이 인류를 죄악으로 내몰았던 아담과 이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열두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다락방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십자가를 지게 되심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가룟 유다에게 배신의 길을 가지 않도록 배려하십니다.

마지막 만찬을 가지실 때 예수님께서 중요한 두 사람을 좌우에 앉히십니다. 곧 가룟 유다와 요한입니다. 가룟 유다를 옆에 앉히신 이유는 그의 배신을 아시고 마음을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도 가룟 유다는 아닌 척합니다. “내 떡을 먹는 자”라고 지적하셔도 ‘내니이까’라고 되묻는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에게서 예수님을 배신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룟 유다가 의지를 갖고 예수님을 배신하기로 결정한 점입니다. 배신의 궁극적인 이유는 예수님을 팔아서 십자가에 넘기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배후에 의지적 자기 결정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시편 41편 9절을 인용하셔서 구약의 예언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41편은 다윗이 기록한 것으로 악한 자에게 배신당하고 느낀 고통을 기록한 시가입니다. 다윗은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에게 신세를 지고 나의 녹을 먹던 사람들이 배신합니다.

실제로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당하고 왕위에서 쫓겨납니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빼앗을 때 음모를 꾸미고 도와준 사람이 바로 아히도벨입니다. 그는 다윗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참모였습니다. 그가 배후에서 압살롬을 조종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위를 빼앗은 장본인입니다. 사무엘하 17장 23절에 아히도벨의 운명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버림을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자결합니다.
이와 같이 가룟 유다도 시편 41편 9절 말씀을 인용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일한다고 나의 편이 아니며, 나에게 신세를 입고 녹을 먹었다고 영원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그들은 배신의 칼을 빼들고 죽이며 모든 재산을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가룟 유다를 데리고 다니시며 많은 것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그 마음을 돌이키시려 여러 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24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데 최후의 만찬을 갖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아 회개의 기회를 거부합니다. 철저하게 위장한 배신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19절 말씀을 봅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일이 이뤄지기 전에 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의 배신을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스스로 선택한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배신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담이 스스로 선택한 일을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배신의 칼을 빼들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완력으로 얼마든지 유다의 행위를 제압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물리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완력으로 무릎을 꿇게 할 수는 있지만, 회개를 시킬 수는 없습니다. 겁을 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을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룟 유다가 회개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고독하셨을까요? 마치 자식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부모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비록 자식일지라도 방탕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부모인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성향이 아담에게, 가룟 유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될 일을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가룟 유다의 배신행위가 제자들의 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팔아넘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고, 제자들의 공동체가 풍비박산 나게 되는 일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또 나중에 제자들은 이런 반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엄청난 일을 모르고 계셨단 말인가?’ 19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하셨지만, 가룟 유다는 자신의 길로 갔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에 흔들림이 없도록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용서하시길 원하셔서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신 사실을 언젠가 제자들이 알게 되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인류의 메시아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믿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끝까지 품으시려 하신 이유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구원의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진리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장차 믿고 따를 사람들에 의해 구원의 진리는 계속 선포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해도, 천지가 뒤바뀌어도, 만인이 넘어져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 중에 하나는 바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잊혀진 구원의 메시지

예언을 마치신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 민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민망하다’라는 말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힘 있는 자가 고독할 때 힘을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그러나 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을 때 고독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독입니다.
돈도 많고 권력도 막강한 사람은 간단하게 상대방을 없앨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하지 않는 게 겸손입니다. 가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상대방을 살릴 수 있는데, 이를 외면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여기에 가진 자의 고독이 있고 힘 있는 자의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강구하십니다. 생각을 바꾸고 회개하여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저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음직하고 보암직해서 따 먹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의 범죄 현장을 보시고 얼마든지 막으실 수 있을 텐데 그냥 두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연관이 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1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지만, 실은 가룟 유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심적으로 너무 힘드셨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지막 성만찬을 갖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배신할 것에 대해 매우 힘들어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에 대해 괴로워하십니다. 타락한 자식이 가출해 돌아오지 않을 때 아버지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돌아가지 않겠다는데, 아버지는 어찌하지 못하고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독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재산을 상속할 때 옆집의 모범생 아들이 아니라 불효자일지언정 자기 자식에게 물려줍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아들이 조금만 잘해 준다면 아버지는 매우 좋아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몸만 살짝 돌려도 그분께서 너무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원해야 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가룟 유다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더욱 위장으로 일관했습니다. 22, 23절 말씀을 봅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당시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가룟 유다는 옆으로 누워 예수님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그때 유다가 ‘주님, 사실 제가 이런 마음을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찾으셨을 때 즉시 ‘하나님, 제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자존심은 항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선택의 순간

아직도 베드로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품에 안겨 ‘내니이까’라고 묻는 가룟 유다 한 사람뿐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24, 25절 말씀을 봅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마지막 선택의 기회가 지나가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종말과 심판이 오기 전에 다가온 구원의 기회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26~30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배신은 타락의 신호입니다. 배신은 불순종 때문에 오는 것이지만, 순종해야 함을 알면서도 하지 않을 때 배신하게 되고 마귀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찍어다 주시는 떡 한 조각을 가룟 유다가 받자마자 사탄이 그의 속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먼저 가룟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 수 있어도 그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즉시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지적 선택입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다면 사탄은 그 자리에서 미끄러져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불순종한다면, 곧 사탄이 들어오게 됩니다.
둘째, 구원 받기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믿을까 말까, 갈까 말까’로 갈등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의지를 갖고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주님을 거부하면 사탄의 세력이 봇물처럼 밀려와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모든 이론, 이성, 지식, 경험을 뛰어넘게 됩니다. 그런 것으로 예수님을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갖고 있지만, 믿지 않는 이유도 믿는 만큼 댈 수 있습니다. 샤르트르, 지드, 러셀 등 실존주의 지성인들은 그냥 신을 믿게 된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충분한 과정을 거친 후에 그 존재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성의 끝이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논리의 끝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순종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30절 말씀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아주 상징성이 많은 표현입니다. 저는 성도님들께 한 가지를 권면합니다. 하루 일과에서 밤이 되면 편안한 상태에서 속히 잠자리에 드십시오. 모든 나쁜 짓들은 밤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밤에 자도록 하셨습니다. 밤늦게 자는 사람은 정신병,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밤에 할 일은 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떡 조각을 가지고 나갔을 때 밤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이 말씀으로 어거스틴은 탕자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우리는 밤의 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벽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배신의 벽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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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4-17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개인적으로, 이 전에 가룟 유다에 대해 이 만큼 탁월한 분석을 한 설교는 들어보지 못 했다. 듣고나서 언젠가 가룟 유다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영화<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하고 있다. 내 후배는 그 영화 속의 유다를 정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난 안타깝게도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거기서 유다가 어떻게 그려졌을지 정말 궁금하다.
 
 전출처 : 카를 > 마카아벨리와 다른 사상들과의 비교

마카아벨리와 다른 사상들과의 비교

고려대 심재우교수

1. 韓非子와의 비교

흔히들 韓非子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비유하기도 하며, 일견 이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韓非子와 마키아벨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은 거의 흡사하다. 韓非子는 전국시대의 전쟁상태에서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고자 하였으며,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유럽의 혼전 양상 속에서, 조국 이탈리아를 지켜내고자 했다.

먼저 韓非子의 법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해보자.47) 韓非子는 전국시대 후기에 법가의 제학설을 집대성하여 법가이론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수세기에 걸친 전쟁과 혼란으로 점철된 천하대란의 상태를 안정으로 이끌기 위하여 강력한 군주중심의 국가체제를 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 하에서 전개된 韓非子의 법사상은 크게 法治, 術治, 勢治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하들과 백성의 일체의 언행을 통제하기 위한 法治, 신하들로부터 군주의 권한을 보호하기 위한 술책으로서의 術治, 신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천하를 호령하려고 하는 勢治 등은 하나 같이 군주 중심의 권력국가 사상을 대변한다. 韓非子의 최종목적은 군주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지 인민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 法治는 권력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術治는 군주를 위한 술책이다. 勢治는 천하를 호령하기 위한 전제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면, 韓非子의 법치주의는 모든 사람(특히 정치권력)을 법의 지배 하에 두고자했던 서양의 법치주의사상와는 무관하다. 한비자의 법치주의는 군주를 구속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인민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한비자를 마키아벨리과 비교해 보자. 흔히 마키아벨리의 여러 가지 비도덕적 정지지침과 한비자의 술치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둘은 그점에서 매우 비슷하다.

한비자 : 군주는 그의 의도를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군주가 그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면 신하는 자신의 표현을 달리 꾸밀 것이다..... 군주는 지략이나 지혜도 감추어야 한다48)

마키아벨리 :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군주론, 123쪽)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둘은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 한비자는 "군주의 이익"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하여 권력국가사상을 유지하였다. 전국시대의 천하대란을 평정하고 천하통일을 가져오게 한 권력국가론을 전개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맞는 것이었으나, 천하통일 후에도 (법치국가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권력국가를 계속 유지한 것은 문제였다. 이를 받아들인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긴 했지만 곧 망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49)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경우는 다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는 궁극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공화정"을 꿈꾸었으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일단 "무법의 자연상태"를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도덕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했으며, 다만 위기 상황 속에서는 "비도덕적 정치행위"를 사용해서라도 일단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일견 비슷해 보이는 "정치기술"들도 실은 그 이유가 전혀 다른 것인데, 한비자가 이를 "군주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면, 마키아벨리는 이를 "시민의 자유보호"를 위해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마키아벨리와 韓非子의 정치기술이 유사하다고 해서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마키아벨리는 韓非子 보다는 오히려 홉스와 유사한 점이 더 많다고 하겠다.

2. 홉스와의 비교

홉스가 처한 상황(종교전쟁과 내란)은 마키아벨리와 거의 유사했으며, 그들이 내놓은 대안 역시 거의 일치한다고 보여진다. 먼저, 홉스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급선무라고 본 것과 마키아벨리가 일단 "국가 그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은 같다. 그리고 홉스가 "국가의 목적은 개인의 안전이다"50) (앞서 지적한 바대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공화정의 최대가치를 "시민의 자유 보장"(First Book, Chap.16, pp.162~163)에 두었다는 사실과 완전히 일치한다. 게다가 두 사람 "국가 그 자체의 존속"을 상당히 강조함으로서, 권력국가사상이 아니냐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그러나 두사람은 "전쟁상태"에서 일단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지, "권력국가사상"을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홉스나 마키아벨리는 모두 "인간의 존엄"이나 "인권"을 자연법적인 법가치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연법이 실정법의 우위에 있으며, 실정법이 이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는 못했다. 이점은 그들의 사상이 "실질적 법치국가"를 지향했다고 보기 힘들게 만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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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카를 > 마키아벨리와 정치기술

마키아벨리와 정치기술

고려대  심재우교수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나감으로서, 정치적 공동체의 확고부동한 토대, 즉 국가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치기술" 또는 "통치술"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악명높은 마키아벨리즘의 유래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는 정치를 기독교 윤리의 틀 속에서만 고려하던 중세적 한계를 벗어나, 군주의 세속적 행위기준을 제시하고 독립적 주권을 옹호함으로써 독립국가를 보존하고자 했다. 이제 군주는 더 이상 신법이나 자연법과 같은 상위법의 제약 없이 오지 국가의 보존과 유지만을 지상목표로 삼으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군주는 종교와 도덕이 명령하는 당위성에 따르기보다는 항상 본심을 감추고 운명과 상황변화에 따라 적절히 처신해야 한다.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군주는, 특히 신생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처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종종 신의 없이 무자비하게 비인도적으로 행동하고 종교의 계율을 무시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운명의 풍향과 변모하는 상황이 그를 제약함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바꿀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급적이면 올바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말고 필요하다면 비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은 마키아벨리가 정치현상을 도덕과 종교와는 분리되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상정했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마키아벨리를 "근대정치사상의 시조"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점은 다음에 계속되는 항목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1) 이익지향과 폭력의 문제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은 먼저 철저하게 이익지향적이다. 이익의 개념은 두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데, 한편으로 마키아벨리 이전의 시대에 만연되어 있던 도덕적인 원리나 규범으로부터 정치행위의 독립성을 선언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그 원리들은 군주에게 명료하고 건전한 지침을 제시하는 동시에 정념이나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의지를 표상하는 것이었다.32)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특정한 이익(민족국가의 건설)을 추구하는 정치야말로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의 핵심이었다.

이는 폭력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이다"라는 식의 견해는 전통적인 도덕원리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폭력도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적절하게 사용된다면, 오히려 이로울 것이라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폭력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감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차이는 잔인한 조치들이 잘 사용되었는가 또는 잘못 사용되었는가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믿는다. 그러한 조치들이 단번에 저질러졌다면 ... 잘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조치은 권력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이며, 연후에는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신민들에게 가능한 유익한 조치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못 저질러진 조치들이란 처음에는 빈도가 적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감소하기보다는 증가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군주론, 65쪽)

2) 외양과 상징, 가장과 위선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핵심을 "외양"과 "상징"으로 파악했다. 다시 말해, 정치는 본질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통치자는 능란한 위선자요 가장자여야 하며 성실함, 자비, 인간애 및 종교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 마키아벨리는 기만과 폭력이 횡행하는 정치상황에서 정치적 행위자는 정치적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색으로서 능숙한 가장과 위선을 필요한 한다는 의미에서 외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만약 정치적 행위자가 한결같이 기존의 도덕률을 채택하게 되면, 그의 행위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고 간파되어 정치적으로 파멸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는 내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만과 위장을 통해 외양을 조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볼 수 있는 반면에 당신의 진면모에 대해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 인간의 모든 행동에 관해서 특히 직접 설명을 요구할 수 없는 군주의 행동에 관해서 특히 직접 설명을 요구할 수 없는 군주의 행동에 관해서 인간은 결과에만 주목한다. .... 왜냐하면 보통사람들은 외양과 결과에 감명받기 때문이다. (군주론, 124쪽)

3) 목적과 수단의 문제

그리고 이렇게 외양과 상징, 가장과 위선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민의 지지를 확보하고 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의 위선"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던 것이다.33)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목적과 수단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흔히 마키아벨리즘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논증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마키아벨리는 일단 목적은 근본적으로 (가치판단을 해볼 때) 선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수단은 언제나 목적에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고 보는 것이다.34)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생명과 자유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단의 선악여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군주론, 123쪽) 정리하면, 수단은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며,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단이 되도록 통산의 도덕(선)에 일치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 또한 마키아벨리의 주문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결과주의적인 사고와도 관련이 깊다. 물론, 비상상황에서만 그러하다는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군주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라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다. 국가의 존립에 위기에 처해있다면,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즉, 군주의 행위의 결과)가 그 과정보다 훨씬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외양과 상징 같은 기만술이 정당화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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