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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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지금보다 더 많은 걸 갖고 싶어한다. 일당 5만원을 받는 사람도, 연봉 1억을 받는 사람도, 재산이 1000억이 넘는 사람도, 현재를  만족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세상은 허무한 건가. 열심히 살아도 매일 굶주린 듯하고, 모자란 것만 찾아내면서 스스로 한심하게 여기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기 위해서 별별 짓을 일삼고. 책을 읽는 내내 노인과 함께 한 세 시간 남짓, 참 평온했다. 우리가 늘 동경하는, 보이지 않는 이상과 꿈에 대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욕심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제대로 배웠다. 인생을 이렇게 편안하게 즐길 수 있구나, 욕심없이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사는 삶이 더 빛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삶이 그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제대로 챙겨 먹을 거리가 없고, 곁에 함께 하는 이가 없는 쓸쓸해보이는 삶이지만 내면은 충만하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그의 마음은 꿈으로 가득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낚싯바늘에 걸린 큰 물고기와 나흘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보여주었던 그의 끈기와 열정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나이가 팔 십이 넘었다고 해서, 삶에 대한 여유가 생기지는 않는다. 낚시는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다. 답답해서 어떻게 앉아 있을까 싶지만, 낚시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자신을 돌아보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라고 한다. 산티아고 노인이 커다란 물고기와 팽팽하게 맞서면서 예민하게 서로를 탐색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끌려가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야하는 의무도 존재했다. 찌릿한 손맛에 긴장하고 상대에게 헛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픈 것도 꾹 참아야했다. 도대체 뭘 얻기 위해서 그랬던 걸까?

 

물고기를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던가. 84일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면서도 스스로의 가난을 원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소년에게도 당당했고, 노인 자신에게도 떳떳했다. 언젠가 찾아올 희망의 날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노인은  물고기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것을 죽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사랑하는데 왜 죽일까? 노인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 그 애가 곁에 있으면 좋으련만"

노인은 소년을 그리워한다.  순간 순간 그의 존재를 필요로하고 진심으로 소년을 바란다. 하지만 쓸쓸한 기다림은 아니다. 노인의 마음속에는 이미 소년이 자리잡고 있다. 늘 누군가 떠올릴 수 있다면, 내가 힘들 때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마음이겠지.  소년의 인생을 위해 놓아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욕심내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억지쓰지 않는 마음이 그가 열심히  사랑하는 방법이다.그래서 사랑하는 물고기가 떠났을 때 절망감도 그다지 깊지 않았다. 비록 내 곁으로 오지 못했지만, 물고기의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노인은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난 그건 죄악이라고 믿어.(109쪽)

노인이 물고기를 붙잡고 있었던 힘은 바로 그곳에 있다. 비록 상어에게 물고기를 빼앗기고,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보이지만, 그가 버틴 '4일의 열정'은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일상의 힘이다. 시도해 보고, 다시 시도해 보고, 또 시도해 보고, 안 되는 게 뻔한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산티아고 노인이 찾는 이상은 뭘까?  분명 돈은 아닌 듯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그는 행복했기 때문이다. 사랑인가? 소년을 사랑했고, 죽은 아내를 사랑했고, 또 미끼에 걸린 큰 물고기 조차 사랑했다. 그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가 찾았던 꿈은 순간을 즐기는 마음과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중을 위해 희생하고 참는 건, 현재를 괴롭게 만든다. 비록 내 손에 더 많은 것을 쥘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해도 ...그것은 노인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노인은 '지금 이순간'을  귀하게 여겼다. 과거를 떠올리며 미워할 사람도 없었고,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남들이 하찮게 여기든 말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충실했다. 성실하고 당당했다. 미끼를 물고 있는 물고기와 밤낮을 함께 보내며 지낸 그시간을 즐겼을지도. 그에게는 외로움 조차 삶의 일부분이었다.

 

노인은 바다를 건너다보고는 자기가 지금 얼마나 외롭게 혼자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어둡고 깊은 바닷속에 비친 무지갯빛 광선들과 앞으로 쭉 뻗은 낚싯줄과 묘하게 일렁이는 잔잔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무역풍으로 인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고, 앞을 바라보니 한 떼의 물오리가 날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물오리들은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한 줄무늬를 이루었다가 넓게 흐트러졌다가 또다시 선명한 줄무늬를 이루었다가 하면서 바다 위를 날아갔다. 노인은 바다에서는 그 누구도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63쪽)

 

너무 큰 것을 쫓다보면 작은 것의 소중함을 놓치기 마련이다. 얼마전 TV에 나온 스님 한 분이 말씀하셨다. 행복하고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즐거운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겪으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인생인데, 그것을 느낄 때마다 행복과 불행을 확인하며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즐거워도 슬퍼도 늘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하고, 감정의 기복에 휘말려 쓸데없는 에너지를 써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노인에게서 그런 마음을 배웠다.  기다리면서 짜증내지 않고, 잃어버리고 슬퍼하지 않으면서, 부족하다고 짜증내지 않는, 초연함을 말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는 말씀을 남기신 박경리 선생님이 생각난다. 비록 현재 '없는 것''부족한 것'은 더 소중한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고 기다림이다. 85일, 86일...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더 얻을 것이 없을 듯한  쓸쓸함을 겪으면서도 또 다른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여유로움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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