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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학창시절 고전 한 권 읽기가 의무적 사항이 되었을때 권장도서 목록에 있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내가 첫 고전으로 선정했던 이유가 다른 고전들에 비해 사랑이야기라는 묘한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사랑이라는 개념과는 다른 사랑의 모습이였다. 도대체 에밀리 브론테는 왜 이런 글을 썼을까? 히스클리프 와 캐서린이 반
미치광이 처럼 보이기만 했던 이 소설을 왜 읽어야만 할까란 마음에 답답했고, 고전이란건 나와 맞지 않는 머나먼 세계의 이야기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줄거리를 따라 읽기만 했을뿐 행간에 숨어든 깊이를 느끼지 못해 열정적인 사랑이 반 미치광이의 몸짓에 지나지 않게 되었던듯
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책을 읽는 방법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란 물음들에 답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책들 속을 떠돌아다니며 얻은 결론은 천천히 깊게 읽어라 였다. 글자 속에 숨어든 깊이를 느껴야 진정한 책 읽기란
글을 접할때마다 도리어 답답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어떻게 깊게 읽으란 말일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겨지는 의문 앞에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저자를 만나지 못했었다.
박웅현님의 <책은 도끼다 > 역시 시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어떤 책은 찍어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흘려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문맥으로 읽어야 하는데, 그게 안 잡히면
책이 재미없는 겁니다"p16 책을 읽는 방법에 관한 수많은 책들에 의하면 책을 읽을땐 책을 읽는
목적을 정하고 , 빨리 읽을 책, 천천히 읽을 책, 훑을 책을 정하라 했다. 하지만 80%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할애하는 책들 속에서 건져
올린 20%는 다분히 이론적인 기준에서 설명될 뿐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줄 책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다를까 하는 은근한 기대심이 일었는데
' 인문학 강독회'라는 글귀가 그랬고,<여덟단어>라는 책을 통해 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창의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광고를 24년간 만들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인문학'이 있고, 그 인문학의 중심에는 '책'이
있었다는 저자 박웅현님은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기엔 '책'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독법으로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지, 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 바로 < 책은 도끼다> 이다. 책과 교감하며
자신에게 울림을 주고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드려준 책들과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올바른 통찰력을 만들 수 있는 책들을 소개 한다.
여덟 번의 강의 내용을 다듬어 묶어놓은 책이라 그런지, 여느 책처럼 딱딱하지 않고 강의를 듣고 있는듯 쉽고도 강하게
다가온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들보다도 생소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산문, 시, 기행, 고전, 미술 등 다루는 주제가 다양하면서도, 그
주제들에서 얻을 수 있는 울림들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울림은 툭 스치듯 “ 꽃 보내고 보니/ 놓고 가신 작은 선물 /향기로운 열매<이철수- 작은
선물>” 어떤 울림은 여운을 남기듯 “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녔으나 보지 못했네/ 짚신이 닳도록/ 먼
산 구름 덮인 곳까지 헤맸네/ 지쳐 돌아와보니/창 앞 매화향기 미소가 가득/ 봄은 이미/ 그 가지에 매달려 있었네”<- 작자
미상> 또 어떤 울림은 강한 충격을 남겨주기도 했다. “ 여행지에서
그렇게 만났다가 그렇게 떠나 보낸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 일생이 한갓 여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행길에서 우리는 이별 연습을 한다.
삶은 이별의 연습이다.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될 얼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한 떨기 빛. 여행은 우리의 삶이 그리움인 것을 가르쳐
준다.<김화영- 예술기행문>
이철수, 김훈, 알랭 드 보통, 고은, 김화영, 니코스 카잔차키스, 알베르카뮈, 앙드레지드 마리아 릴케, 밀란 쿤데라,
톨스토이, 손철수 까지 마치 느린 템포의 연주가 시작되다가 절정의 클라이맥스로 치닫을 때 처럼 한 호흡도 느슨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무릎을
치기도하며, 그간 어렵게만 느꼈던 깊게 읽는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다.
“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전혀 새로운 날들이
우리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김훈이 표현한 미나리에 관한 글귀를 읽고 작가 박웅현이
설명하기를 ‘우리가 이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이유를 설명하는데요. 단어의 선택을 보세요.
발랄, 선명, 비논리, 듣고보면 미나리의 특성을 잘 집어내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연의 특성을 인문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부분입니다.’라고 한다. 솔직히 김훈의 이야기만을 들었을땐 아 그런가 하고 말일을 박웅현님의
깊이 읽기의 독서법으로 풀어내니 미나리의 특성과 인문학적 요소들을 깨닫게 되는것이다.
마찬가지로
‘ 옷 깃 여며라 광주 이천 불구덩이 가마 속 그릇하나 익어간다’ 는 표현을 접하면 그릇이 익어가는건데 이게 뭐? 라는 생각으로 지나가며 별 볼일 없는 책이네 라고 표현했을것을,
박웅현님의 깊이 읽는 독서법으로 만나니 ‘8백도가 넘는 불가마 속에서 빚어진 흙덩이 하나’라는 행간의 깊이를
파악해보면 아! 그런 의미가 숨어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정신이 번쩍 띄었다.
“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가 아니라 걷는 속도로 봐야 보이는 것이 분명 존재합니다”p66 라 표현하는 박웅현님은 일상의 속도를 조금 늦춰서 책을 읽고 그 행간 속에 숨겨진 깊이를 파악할 때 울림이 시작
되는것이고, 그 울림이 삶을 풍요롭고도 즐겁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가끔 왜 책을 읽느냐고, 왜
음악을 듣느냐고 누가 물을 때, 이런 즐거움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때는 삶의 위안이 되니까요.p73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책을 왜 읽느냐, 읽고 나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게 많아지고, 인생이 풍요로워
집니다”p77 맞다. 풍요로움. 적막한 내 인생에 풍요로움은 일상에서 자연스레 얻어지는것이
아니였다. 관심을 기울이며 인생을 풍요롭게 해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야 했는데 저자는 일찍이 책에서 발견하였고 그 풍요로움을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다양한 시각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
비가 오는 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짜증을 낼
것이냐, 또 다른 하나는 비를 맞고 싱그럽게 올라오는 은행나무 잎을 보면서 삶의 환희를 느낄 것이냐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p346 라는 말처럼,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p123라는 표현처럼. 책들의 행간에 숨겨진 깊이를 찾아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가 아닌 걷는 속도로 천천히 거닐며,
깊이를 느낄때 즐거움을 만끽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 혹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등장 인물의 관계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회적 모순과 인간의 심리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인생의 지도를 선물 받았다는 박웅현님의 말은 깊은 공감을 갖게 했다.
“그래요. 제가 이 책에 빠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혹은 어떤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의연히 삶의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저는 지금도
때때로 내가 어디에서 있는지 돌아보며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받은 지도로 길을 찾습니다. 그러면 나를 더 이해하고 상황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p312
박웅현님의 책을 접하면 책과 미술, 음악을 한꺼번에 소개받는것 같아 좋다. 마치 다양한 교양과목을 수강한것처럼. 물론
너무 많은 책들을 소개받아 지갑이 얇아져 간다는 사치스런 비명을 질러야 할지라도. 그렇더라도 다음엔 어떤 책을들고, 내게 울림과 감동을 줄지
그날만을 손꼽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