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켈러를 지금의 나이에 만나게 된건 정말 창피스런 일이다. 설리번과
헬렌켈러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의 이야기를 접한건 이번이 처음이기에 더 열심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녀의 이야기가 절실히 느껴지지 않았고, 때론 따분하기 까지 했다. 나의 감수성이 혹은 타인에게 느낄 수 있는 마음 따위를
잃어버리거나 너무 무뎌져 버린게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덮고 헬렌켈러의 자서전을 다시 곱씹어보니 , 나는 어느새
그녀의 시선을 쫓으며 나와 다른 무언가를 찾고자 했던것 같다. 장애가 있음을 의식한 순간부터 생겨난 편견들이 책을 읽는 내내 그녀 삶에
도사리고 있을 힘든 여정을 찾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의 삶의 중심에 도달했을때 그녀는 나와 다를바 없는 사람이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헬렌이 살았던 집 주위를 감고 있는 덩굴, 풀과, 나무, 꽃들의 움직임을 느끼고 표현하는 탁월한
감수성은 생생한 표현력과 만나 마치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다가온다. 설리번 선생님과 산책을 하며 느꼈던 바람, 풀과 나무와 꽃의 냄새,
날씨가 변화함에 따라 공기중에 품고 있던 냄새,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종이의 냄새등의 표현력은 마치 눈 앞에 있는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손끝의 감각만으로도 같은 나무 잎사귀를 찾아낼 때 또는 망아지를 붙잡아 입에 재갈을 물리면 코끝으로 뿜어져 나오는 토끼풀 냄새를 맡는 그녀는
감각들은 마치 손끝만 닿아도 오므라들이는 미모사의 움직임 처럼 섬세하고 세심했다. 볼 수 있는 세상의 많은 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듯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백색 눈병으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잠제된 인간의 욕망을 그린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자들의 도시> 처럼.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은 헬렌켈러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보고 느낄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곁에 설리번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느낄 수 있었던 다양한 감각들은 얻기 힘들었을 듯 싶다.
래드클래프 대학에서 함께 수업을 받으며 헬렌의 손바닥에 일일이 수업의 내용을 적어주기도 하고, 읽기 어려운 책들을 손바닥에 적어주는 등의 그녀의
진심어린 노력은 단순히 교사와 제자의 사이를 넘어 신뢰와 사랑이 있기에 진정 가능했던것 같다. 허기진 손끝으로 점자로된 책을 읽고 또 읽어
나중엔 점자가 닳아져버렸다는 이야기는 나에 독서 습관을 꾸짖기도 했다. 공부하고 싶어도 점자로된 대학교재를 쉽게 구할 수 없어 힘들어했지만,
많은 이들의 도움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모습은, 의지와 열정만 있다면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교훈 또한 얻을 수 있는 부분 이고 후반부에
실린 '나의 낙관주의' 통해 확고한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