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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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손이 안가는 책들이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지나치게 설교연하는 책일거라 지레 짐작하고 볼 생각도 안하고 있다가 필요에 의해 읽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어렴풋하게나마 고민하고 있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확인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자기 성장'의 중요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성장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며, 그것의 원동력은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자신을 훈련시키면서 성장을 이루어 신(神)의 마음에까지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훈련을 통한 성장은 한계가 있다. 그 때 우리는 신의 은총을 경험한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완성에의 길로 들어선다. (갑자기 단테가 떠오르네, 스캇 펙은 20세기의  단테인가? ㅋㅋㅋ) 

 훈련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변화의 과정이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기존의 세계관을 유연하게 확장하거나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기존에 가진 세계관 즉 지도를 수정하는 과정의 고통과 수고스러움 때문에 기존의 지도를 합리화하는데에만 에너지를 소모한다. 나 또한 그런 것 같다. 처음에 생각했던 방향과 벗어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생각을 수정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기보다 기존생각을 합리화하고 결국 뭔가 불편한 느낌속에서 힘들어한다. 그 '지도를 수정하는 방법'의 하나로 저자는 정신치료를 이야기한다. 사실 몇 년 전에 나도 정신치료를 한 번 받아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 너무 비싸다는 핑계로 포기했었다. 용기있게 내 주체성을 확장해야 누구 말대로 내 삶의 주인공이 될텐데, 용기내기가 쉽지 않다.^^

 스캇 펙은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또는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사랑은 나의 성장을 위해 나 자신을 확대시켜나가는 의지이다. 나는 나 자신을 확장시켜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사고하고 성찰하는 노력을 기꺼이 하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자신있는 대답은 안나온다. ㅜㅜ 
 

타인에 대한 사랑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성장을 돕기 위해 나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다. 나는 내 이웃의 성장을 돕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기꺼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이해하고자 하고 있는가? 나는 책임감을 가지고 그를 대하고 있는가? 다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다.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내 이웃에게도. 그가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지나친 의존과 감정의 과잉을 합리화해왔을 뿐이다. 내 감정이 어떻든간에 규칙적으로 일정하게 그리고 예측이 가능하게 보조를 맞춰야한다는 말에 공감이 되었다. 그랬어야만 했다. 그게 같이하는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자기훈련과 사랑, 그 다음 단계는 은총이다. 은총은 내 노력과 무관하게 주어진 축복이다. 우리는 은총이 내게 오도록 만들 수는 없다. 다만 그 은총이 왔을 때 예민하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은총의 의미를 이해하고 내 마음 속의 신(神)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은총에의 부름은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고 수고하는 삶에의 부름이며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에의 부름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어린이 상태에서 어른의 상태로 나아가라는 부름이며, 인류의 부모가 되라는 부름이다. 

 내게 그 은총이 허락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주는 책임을 기꺼이 짊어질 용기를 가질 떄 우리는 다른 차원의 성장을 하게 된다. 개인적인 나를 넘어선 역사속의 나로? 어쩌면 역사 그 이상일 수도^^ 

 고전적 느낌의 책이었다. 넘치는 재기는 없었지만 진지한 통찰이 있는 책이었던 것 같다. 겸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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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
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 김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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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또 다른 관점' 을 보여준다. 우리가 믿었던 사실들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우리가 비난해 마지 않았던 대상들이 과연 그렇게 큰 잘못을 했는지,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인 일들이 과연 그만큼의 결과물을 가져다 주는지, 혹시 우리 모두 뒷북을 치거나 소용없는 곳에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특히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내용이나 이미지 사진의 함정 등의 이야기는 매우 와닿았다.   

복지정책에 대한 현재의 철학은 수혜자가 의존하지 못하도록 한도를 정해 일시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몸을 망칠 정도로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채찍이나 당근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포스트의 말에 따르면 가장 어려운 사례는 거리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리에서 지내도 크게 힘들지 않은 여름이 오면 규칙을 따르지 않으려 한다.

멱함수분포를 보이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정규분포를 보이는 사회문제와 완전히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즉 극단적인 사례에 속하는 대상자는 정부지원에 의존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체제 밖에서 떠돌던 사람들을 끌어들여 삶을 재건하도록 감독할 수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일이 까다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정책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형평성에 어긋나 보인다.

 사회복지정책이 지나치게 형평성과 도덕성을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효율적으로 대상자들을 관리하지 못하고 그 결과 막대한 사회자금의 소모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복지 예산의 대부분을 갉아먹는 사람들은 '거리에 익숙해진' 극단적인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일반적인 복지 정책을 들이밀어도 그들은 우리가 의도하는 것처럼 따라와주지 않는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리에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다른 기준과 방침을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도덕적 형평성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 아무런 의욕도 없이 하루 종일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어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사람들은? 그런 그들에게 차라리 무상으로 아파트를 줘서 살게 만들어주자고?  그게 오히려 복지비를 줄일 수 있다고? 그렇다면 죽어라 일해서 입에 겨우 풀칠하는 우리는? 결국 그들을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납득할 수 있을까?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결국은 우리 모두가 세금을 아낄 수 있는 효율적인 제도라고 말을 해줘도 모두 주저할 것이다. 우리의 억울한 감정은 늘 이성을 앞지르니까
 한가지 인상깊은 것은 이미지의 해석문제였다. 우리가 보는 사진이 진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전에 어떤 책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는 의학적 사진들 - 엑스레이 사진이나 혈관촬영사진-이 사실은 병의 그림자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맹신해서는 안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진에 안나와도 병이 있을 수 있고 사진에 나와도 그게 허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사진을 맹신한다. '엑스레이나 CT에서 이상 없네요. 괜찮습니다." 그런 얘기를 우린 병원에서 얼마나 많이 듣는지. 과연 괜찮은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검사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이진 않지만 안하는것보다 더 나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기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제 일은 유방 엑스선 사진으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찾을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살아갈 수록 기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진단 검사장비가 발달했지만 기본적인 시진이나, 촉진, 청진은 여전히 중요하며 첨단 기기들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할 일들을 많이 대신해주지만 절대로 완전하지는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포한 함정들에 대해 꽤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정보와 그 해석에 대해 전혀 다른 차원-다른 주체의 입장, 해석의 정당성에 대한 재인식 등-이 가능하며 그 과정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억울한 피해자를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천안함 사건은 어떻게 될까? 그 안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여지는 정보 너머의 이야기들을 생각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에서 시작해서 정보를 모으고 반론을 이해하고 결과를 통합해가는 과정이 이 책에는 상당히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조사해서 주변과 의견을 나누는 삶이 꽤 재밌을 것 같다. 작가 프로필의 사진속 남자가 정신없는 머리를 하고 웃고 있는게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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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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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법에 대한 책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이후 처음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나는 사실 독서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싫다.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가 나서서 방법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었다. 도대체 '제대로 읽는다'는게 어떤 거란 말인가? 

 이 책은 워낙 서평들이 많아 왠지 관심의 초점이 되는 책인 듯 보였고 책 표지가 훌륭했으므로 - 이유에 대해 뭐라고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표지를 보는 순간 내 속에서 설레임과 동시에 뿌듯한 감정이 밀려왔다- 읽어보기로 했다.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었다. 몇 가지 참고가 될만한 독서의 팁도 있었고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마쓰오카씨의 개인적 견해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편집 공학' 이야기도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 내가 독서를 하면서 막연하게 느꼈던 것에 대한 구체화를 도왔다는 면에서 좋았다.

독서는 저자가 만들어 놓은 글쓰기 모델을 향해 독자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편집 모델을 올가미처럼 던져 놓고 그 곳에서 읽기 모델을 걸어 자기 쪽으로 당겨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나가는 행위입니다. 한권의 책을 만나고 독서를 하는 행위는 거대한 역사가 지속해 오며 전해준 '의미의 시장'에서 이러한 체험을 재현하고 재생하고 또다시 창조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이를 위한 패키지 미디어입니다.

독서는 나만의 자폐적 행위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독서는 작가와 나의 역동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관계는 독립된 관계가 아닌 세계 속의 관계, 역사속의 관계인 것이다. 내가 책을 읽는 순간 세상이 가진 의미의 흐름이 나를 관통해서 살아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추상적인가? 그래도 왠지 그런 것 같다. 그 과정이 흥미롭고 두근거린다.

독서를 할 때 차례를 꼼꼼히 살펴본다든지, 책은 2번 읽는다든지, 전집 독서가 유익하다든지, 다양한방법과 취향을 적용해서 책을 읽는게 좋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독서 팁이 있었지만 나는 인용노트를 통해 관통하는 흐름을 발견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 몇몇 소주제 별로 인용문들을 묶어서 파일을 만들다보면 다른 시대, 다른 작가의 다른 글들이 놀랄 만큼 유사한 흐름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이 갔다. 전혀 달라보이는 것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통하는 면이 있다. 표면 아래에 있는 그 흐름을 파악하다보면 다른 차원에서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세상은 여러가지 면면이 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책이 디지털시대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고민을 했던 부분이라 저자의 견해가 궁금했다. 저자는 맥락이 결여된 디지털 지식의 단편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듯 했다. 흐름이 결여된 의미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취사 선택된 필요에 의한 일부의 정보만 가지고는 작가와의 역동적 관계도 흐름도 역사도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다시 읽기'에 대한 저자의 견해 또한  마음에 와닿았다. 같은 책이라도 중학교 때 읽었을 때랑 대학에 가서 읽었을 때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다시 읽기. 실천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는 것에 도전할 예정이다. 흥미로울 것 같다. 그때 써둔 감상문이 있으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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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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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카 씨가 '창조적인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에서 언급한 '편집공학'을 온몸으로 보여준 독서가이자 학자가 다산 정약용이 아닐까 싶다. 마쓰오카씨의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었다.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에 가 본 적이 있다. 언제 갔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왠지 춥고 쓸쓸해서 나도 모르게 '다산 선생 우울했겠다'고 생각했다. 그 곳에서 그를 지탱해준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가 남긴 성과로 보면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그를 깊은 우울로부터 보호해주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산이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저작을 만들어 낸 건 사실이다.

 이 책은 다산의 엄청난 작업량에 대한 설명서이다. 다산이 자료를 선별, 분석해서 결과를 도출해내는 과정을 읽으면서 나는 요즘 우리들이 논문을 쓰는 그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산이 조선시대 실학자가 아니라 21세기 대학의 연구실에서 연구하는 학자 같다는 상상이 될 정도였다. 학문의 방법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것 같다. 

 인상적인 것은 다산이 정보를 장악하는 방법이었다. 다산은 맹목적인 독서를 배격하고 메모를 활용한 구조적인 독서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자료들을 분류하고 취합하여 정보의 우열을 가리고 그 중 긴요한 것들을 뽑아 목적에 받게 재배열했다. 마지막으로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공동작업을 통해 몇가지 주제에 따라 동시에 진행되었다. 말 그대로 열정적으로 지식을 경영하는 다산의 모습에서 초당의 을씨년스러움이 어느정도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 뜨거운 열정' - 스컬리가 멀더를 생각하면서 말한 대사다.^^- 그 열정은 어디에서 생겨서 어디로 향했던 것일까?  

다산은 학문의 종지가 큰 줄거리를 결정하는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효제를 바탕에 두고 예악으로 꾸미며 실용에 기여하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면 저술할 가치조차 없다고 잘라 말했다. 

쭉정이뿐 알맹이 없는 내용, 세상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문학은 시끄러운 빈 수레요, 재주부리는 광대놀음에 불과하다. 제 몸만 아끼고 제 식솔만 챙기는 공부는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학문의 근본은 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 마음을 바탕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들과 -공동의 가치기준- 우리의 감성을 살찌우는 것들을 세워나가되 뜬구름 잡는 탁상 공론이 아닌 실제적으로 우리의 생활에 기여 해야 하는 것이 학문이다. 나는 어떤 공부를 해왔는가?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과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부인가? 나 자신만 아끼고 나 자신만 살찌우는 것은 아닌가? 더 많이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읽은 것, 내가 공부한 것을 더 많이 나누고 나 자신을 성장시킴으로써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공부의 목적이라고 하면 될까?

 백성을 사랑하는 그 뜨거운 열정, 그 열정이 다산초당의 쓸쓸함을 이겼던 모양이다. 그 열정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읽고 쓰고 사색할 수 있었던 힘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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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교양강의 - 사마천의 탁월한 통찰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 돌베개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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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내 장래 희망은 역사학자였다. '사랑이 뭐길래'라는 주말 드라마가 대히트를 칠 때도 나는 고원정이 진행하는 역사다큐 - 역사스페셜의 전신이 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때도 프로그램이름이 역사스페셜이었는지 확실치 않다-를 보며 뭔지 모를 설레임에 즐거워했다. 물론 6학년 이후로 장래 희망은 바뀌었다.^^

 오랜만에 가볍게 읽을 역사책을 찾던 중에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사기는 원래 꽤 방대한 역사책인데 이 책은 한(漢)나라 수립 전후의 인물들 중심으로 일부만 소개하고 있었다. 읽고 나니 왠지 모자란 기분에 다음에 날잡아 제대로 된 걸 읽어야겠다는 결심만 했다.

 인물에 집중해서 읽을 때 나는 장수나 군주 보다는 왠지 모사쪽에 더 흥미를 느낀다. 삼국지를 읽을 때 내 맘속의 주인공은 제갈공명이었고 열국지의 주인공도 나에게는 전반부에 나오는 관중이었다. 여기선 장량편을 즐겁게 읽었다.  

유가는 '아는 것은 모두 말하고 일단 말하면 남김없이 말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원칙을 견지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도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조차도 보존하지 못하면서 무슨 다른 가치를 따질 수 있겠냐는 것이 도가의 생각입니다. 도가는 나서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데 장량은 모든 언행에서 그런 가르침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조언을 하거나 건의하는 경우, 장량은 대개 유방이 먼저 물어야만 입을 열었습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도록 하고 장량은 상황을 봐가면서 보충할 것이 있는지 결정했습니다. 요컨대 장량은 신중했으므로 행동은 느렸지만, 일단 행동하면 반드시 성공했습니다. 또한 조언하거나 건의할 때도 적정선에서 그치고 말았지, 유방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로 끝까지 밀어붙인 적이 없습니다. 
 

역사 속에는 유난히 실패한 이상주의자들이 많다. 그들은 대개 급진적인 이상을 추구했고, 그들의 이상이 절대적이라고 믿었으며 그 과정에서 굽히거나 타협하는 것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했다. 목숨을 바쳐 지킬만한 신념이 있으면 족하다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왠지 마초의 그것을 본다. 사기 속의 장량은 좀 달라보였다. 장량의 처세를 보면 약간 페미나인하다는 느낌이 든다. 단단하고 굽힐 줄 모르는 영웅이라기 보다는 '쿼바디스'의 페트로니우스같은, '참기름 병모가지'처럼 매끈한 느낌이다.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드센 '조광조류'의 이상주의자보다는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속도를 조절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자신의 목표를 수정하고 살아있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듯 보이는 장량의 모습이 어쩌면 이 시대에 환영받는 인간상이 아닐까 싶다.변화가 빠른 시대에는 '유연성'이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가치와 관계는 물론이고 삶의 방식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낡은 가치에 매달려가는 사람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편협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런 면에선 역시 장량같은 유형이 경쟁력을 가질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겠다 싶다가도 불현듯 고지식하고 뻣뻣한 사람이 그립기도하다. 세상에 변하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는 '뻔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달려드는' 그런 우직스러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한쪽을 비난하는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결국 역사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모두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둘 다 옳다. 나는 어떤 쪽일까? 성향상? 나는 역시.. 살고 싶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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