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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판타지, 호러, 스릴러, 모험 등 한 장르의 범주 속에 가두어 두기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소설은 조금 복잡하다. 그의 작품들은 모든 장르의 특징을 망라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 모든 장르의 관습을 배반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환상적이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는 작품마다 일관된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다른 소설들과 함께 '안개' 3부작'의 하나로 칭해지는 <한밤의 궁전> 또한 그 장르적 복잡성과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도 캘커타의 한 고아원, 주인공 벤을 비롯한 7명의 동갑내기로 구성된 '차우바 소사이어티' 멤버들은 16세를 맞이하여 고아원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들은 고아원을 떠나기 직전 우연히 어떤 미스터리하고 괴기스러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자신들을 공격하는 존재의 정체조차 모른 채 7명의 멤버들은 고아원을 찾아온 또 다른 소녀 쉬어와 함께 그 존재에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 각자는 자기만의 용기와 지혜, 인내를 발휘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줄거리에서 대체로 기대되는 바와 같이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바람의 그림자>의 훌리안 카락스와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 행해지는 악은 좀 더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주인공 벤과 쉬어에게는. 작가는 공포의 대상에 세대를 잇는 인물과의 밀착관계를 설정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러한 딜레마는 주인공들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준다. 막 고아원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할 벤에게 자신이 마주해야하는 악의 존재는 단순한 악이 아니라 대면해야만 하는 진실인 것이다.  

인물들이 악한 존재를 대면하는 것이 왜 꼭 성년의 문턱을 넘어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시기여야만 했을까. 고아원은 그 어떤 존재로부터도 위협받지 않는 안전지대이다. 그 곳을 벗어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대면해야 함을 의미하고, 익숙한 모든 것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들이 나아가야 할 세계는 저주 받은 뜨거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식민 도시이거나 머나먼 미지의 제국(이언의 경우)이다. 이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악의 존재는 바로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가 때를 맞춰 표면화된 것이다.맞서 싸울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인 악령은 그 공포의 근원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막연한 불안감보다 오히려 덜 공포스럽다. 아이들은 좀 더 명확한 공포의 실체와 마주함으로써 내면의 불안과 맞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꿈이든 사랑이든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며칠 동안의 모험은 결국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다. 이 시기가 떠올리기 힘들만큼 '무서운' 시기로 기억되는 것은 성장의 험난한 과정에 대한 일종의 상징화일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이 지배하는 인도 캘커타. 저주받은 듯한 뜨거운 더위.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소설로는 이례적인 배경을 통해 펼쳐지는 이 독특한 미스터리는 그래서인지 조금 더 다층적으로 읽힌다. 8명의 소년 소녀들이 겪게 되는 단 며칠 간의 모험담 속에는 괴담과 전설, '악'과의 대면, 용기, 사랑, 우정의 가치에 대한 해명이 골고루 나타난다. 이러한 시공간적 보편성을 지니는 스토리 라인은 사폰의 기존 작품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한 음습한 공간을 선택해 전개되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선택한 배경은 인물들의 성장담을 위해 좀 더 풍부한 장치를 제공해 준다. <한밤의 궁전>은 차가운 물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던 <9월의 빛>이나 <안개의 왕자>와는 달리 뜨거운 불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캘커타의 찌는 듯한 더위, 기차 화재, 불멸의 상징 불새 등. 소설 속의 불은 전체적으로 재앙이라는 부정적 상징으로 쓰인다. 이 부정적 상징은 쉬어가 들려주는 시바의 저주와도 맞물리며 캘커타의 뜨거운 더위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런 한편 불은 원형적으로 정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악령이 불과 함께 산화되어 사라지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은 부정적인 모든 것들이 소멸하는 순간이다. 악령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시바의 저주가 풀린 캘커타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쉬어의 운명은 희생적 제의의 성격을 보여준다.   

<한밤의 궁전>은 다소의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모든 특징과 분위기를 모두 담아내고 있다. 판타지와 스릴러적 요소를 차용하고 있지만 복합적인 구성이나 풍부한 복선, 명쾌한 결말에 기대기 보다 삶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특징적이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은 고딕풍의 괴담과 청소년적 감성의 조합으로 세대를 아우르는 재미를 준다. 이것이 사폰의 작품들이 장르적 정체성의 모호함과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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