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사유
이상민 지음 / 바른북스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직장인과 작가로 살아가는 저자..

청춘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일기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무언가 말로 꺼내지 못하고 답답함을 풀어낼 곳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모여진 일기가 책이 되었다.

책으로 나올 정도의 일기라면 상당히 성실히 쓴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자는 바른 생활 사나이에 가까울 것 같은 느낌이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저자 인터뷰 : https://blog.naver.com/barunbooks7/222096127503


내 예상이 맞았다.

바른 생활 사나이의 기운이 느껴진다.

인터뷰 내용 중 '내가 한 말'의 책임과 무게를 느낍니다. 라는 말에서도 바른 생활 사나이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른 생활 사나이(내 멋대로 캐릭터화?) 이상민 저자의 사유()에 내 사유를 더해본다.



#1 사유 : 당신을 걱정에 빠트리는 것은 무엇인가?


"걱정을 안고 사는 이에게 내일은 희망이 아닌 또 다른 걱정을 가져다줄 뿐이다." -p.48

나의 경우 집에 갇혀(?) 지낸 시간이 많다보니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온갖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혀 지낸다.

집에 갇히고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 잡다한 생각들 중 1등은 걱정이다.

요즘은 내 거취에 관한(?) 걱정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메이커 아카데미가 끝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선은 공부를 놓지 않고 계속해야할 것 같아서 자격증 시험 하나를 접수했다.

이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내 외부 요인으로 그만두고 싶지 않다.

내 인생의 우선 순위가 내가 될 수 없는 상황들..

또 내 의욕을 강제로 꺽어야 할 상황이 발생할 것 같은 두려움..

주위에서는 너무 걱정이 많다 하지만,

결혼 이후 많은 곤란한 상황속에서 혼자서 버텨야했던 경험 때문에 원래도 많던 걱정이 어느 순간 정말 버릇이 되어버렸다.

걱정을 하느라 많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미뤄두고 결국은 부랴부랴 처리하다 실수를 연발하게 되고,

결국 더 많은 걱정을 하게 되는 악순환..

걱정은 계속하지만, 이제는 우선순위를 정해 걱정은 뒤로 미루고 있다.

가만히 앉아 고민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

고민하더라도 행동 한 후로 미루고 본다.

오늘의 고민은..내일 불편한 일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일 일어나서 결정하고, 우선 오늘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일단 오늘은, 만족스럽다.



#2 사유 : 당신은 몇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는가?

저자는 서른네 살 다섯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직 할 때마다 운이라고 하지만, 가만있지 못하는 저자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 생각한다.

운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경력단절녀이다.

한 동안 스스로를 '잉여인간'취급하며 괴롭혔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과 점심 후 토크 타임에서 경력단절이 아니라 경력절단이라며 같은 뜻이지만 다른 느낌의 우리의 답답한 현실에 씁쓸하게 웃어야 했던 전업맘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업맘들 중 어느 하나 능력이 없어 육아를 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겠다.

모두 뛰어 오를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요즘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산다.

어딘가에 있을 우리의 다음 직장을 상상하며..




#3 사유 :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수학 선생님을 좋아했다는 저자..

수학 선생님을 희망해보지만 현실과 타협해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이후 심리학을, 지금은 금융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바른 생활 사나이, 게다가 계속 공부까지..)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짐에 감사하며 자신도 그들에게 무엇인가 되길 희망한다.

나도 고등학교 때 한국지리 선생님을 동경했다.

여자였던 선생님은 작은 체구였지만, 당차고 카리스마로 학생들을 압도하던 모습은 너무도 멋져보였다.

많은 이유로 지리를 전공하지 못했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의 목소리 톤과 재밌던 수업이 생각난다.

검색해보니 아직도 현직에 계시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인기있는 교사일 것 같은 박금녀 선생님!

오래 오래 현직에 계시길 바란다.




#4 사유 : 당신은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괴로운 나의 인생..

주위에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전업맘 그 이상 무엇도 아닌 나를 벗어나고자 긴 시간 노력하며 살았다.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전업맘..

기회가 와도 도전할 수 없던 가장 큰 이유는 육아다.

나를 대신해 누군가는 지켜야하는 자리이기에 제약이 너무 많다.

지금도 많은 것을 포기 하고 산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조력자만 있었다면..' 이란 생각을 많이 한 과거와 달리 현재는 우선 행동하고 본다.

가다가 넘어져서 되돌아오더라도 우선은 출발해보자는 식이다.

메이커아카데미를 다니며 아이들과 같이 준비해야하는 아침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곳에서의 시간은 감히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또 다른 도전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도전으로 무언가를 얻지 못할 지언정 스스로를 잉여인간 취급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만족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오프라윈프리, 미셸오바마, 힐러리클린턴 등 성공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깨달은 것은

내적, 외적 힘든 환경은 나에게 고난을 주지만,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귀한 경험을 주고 그것을 극복했을 때 한층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직 가지 못한 길, 그 끝이 어디든 우선은 출발하고, 일단 출발했다면 쉬었다 가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결혼 후 긴 고난의 시간을 겪었다는 생각이다.

내 인생의 중심이 내가 아닌 삶을 살아가고, 해보지 못한 역할인데 잘하지 못한다고 비난(감히 비난이라 표현한다.)받는 고난말이다.

이제는 조금 면역이 생겨 비난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스킬이 생겼다.

내 인생에 조금 더 집중하는게 훨씬 도움이 된다는 깨달음도 함께 얻었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지못해 속상했다면,

지금은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내일이 설레여 행복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보지 못한 여러 길들이 너무 궁금하다.

나는 어서 빨리 험난할지도, 찬란할지도 모를 그 길들 위로 한 걸음을 떼어야겠다.

한 끝 차이로 행복해진 오늘, 더 늦게 깨닫지 않았음에 만족하기로 한다.


저자보다 나이가 쫌 많은 나의 고뇌는 저자 또래의 그것과는 조금 온도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나 역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며 사는 인간이기에 저자의 사유에 생각을 얹어보았다.

그리고 사회초년생의 마음가짐으로 다시 사회에 발딛일 내게 아주 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가만히 있지 못해 모자란 부분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성실함이 자꾸 생각나 바른 생활 사나이라는 말을 자꾸 붙이게 된다.


삼포, 오포세대의 청춘들에게 그래도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거창한 무엇이 되지 않았다 한들 실패한 인생이 아님을,

희망을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꼰대(?)의 대열에 들어선 내게도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살아 보라는 메시지를 준다.


바른생활 사나이 저자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저자에게 사건, 사고가 발생해도 왠지 바르게 잘 헤쳐나갈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많이 지나 중년이 된 저자가 들려줄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바른북스 출판사로 부터 무상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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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말 - 포스트코로나, 공자에게 길을 묻다
최종엽 지음 / 읽고싶은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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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자기계발 분야의 전문가 느낌의 저자..

살면서 한번은 읽어봐야할 공자의 말..

너무 좋은 기회에 만나게 되었다.

학부시절 강의실에서 듣던 공자왈~을 그 때의 2배의 나이가 될 즈음 다시 읽어본다.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마흔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게 이 말은 마흔 이라는 나이에 대한 기준 쯤으로 여겨지는 말이었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올줄 모르고 마흔하면 이 말을 떠올렸었다.

어느덧 마흔을 지나고 있는 나는..

이 말이 마흔 나이의 기준이 아닌 '공자'라는 '대성인'의 이야기임을..

감히 나 같은 평균이하 인간에게는 닿을 수 없는 말임을 백번 인정하고 고개 숙인다.

차라리 '마흔살이라 마흔번 흔들린다.'라는 말이 내게 더 걸맞는 것 같다. ㅠㅠ

이제는 그만 좀...


發憤忘食 樂而忘憂 不知老之將至 (발분망식 낙이망우 부지노지장지)

분발할 때는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에 걱정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오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20대의 많은 시간을 '사진'에 미쳐있었다.

취직 후 주말도 없이 사진을 찍기 위해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나를 투자했다.

사진을 찍고 또 사람들과 서로의 작품(?)을 공유하며, 그 속에서 배우고 깨닫는 그런 과정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내 나름의 사진에 대한 철학(?)을 가지게 되었고, 더 많이 공부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어떤 이윤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내 시간과 체력, 정신까지 몰두한 스스로 만족이외의 무엇도 남지 않았다.

젊었기에 체력은 금새 충전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쫓았기에 투자했던 그 무엇도 아깝지 않았다.

일주일을 쉬지 않고 몇 달을 보내도 너무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진을 업으로 삼지 않아 지금은 그때 출력한 사진만이 남아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가끔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젊은 날의 내가 되고 싶어서가 아닌 그때의 열정을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많은 것이 달라진 지금의 나지만, 그 때의 열정을 되살려줄 무언가가 내 인생에 나타날 거라 믿는다.


不患人之不己知(불환인지불기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먼저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늘 답답한 내 마음을 누구라도 알아주기를 바라며 살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답답한 사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위로를 건넬 주제는 못되지만, 내 마음을 봐주지 않는다는 불평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마라.


머리속에 맴도는 말이 많으면서도, 또한 할 말이 없는 말이다.

남이 나에게, 내가 남에게..

반대로 내가 하고 싶으면 남도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15명 중 6명을 뽑는 경쟁이 눈 앞에 닥쳐오고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공자에게 현답을 받고 싶다.

나는 어떤 인간이여야 하는가..

현자의 선택을 하지 못할 것 같아 고개 숙여진다.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빈이무원난 부이무교이)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무식자인 내가 이해하기엔 불공평한 말이다.

부유하니 가난을 원망하지 않아도 되고, 그 여유로운 마음으로 교만을 이기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가난에 처한 자는 부유하지 못한 상황을 탓하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지는 않아보인다.

로열패밀리, 금수저라는 말과 반대로 흙수저, 팔포세대, N포세대라는 말도 있다.

물론, 이와는 상관없이 배경이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낸 사람들도 있다.

나는 평수저쯤되는데, 요즘 붙들고 있는 생각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다.

부유를 논할 수준의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조금은 여유있는 삶을 살고 싶다.

이외에도 자식의 도리와 리더십에 관한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아직은 부담스럽지만, 언젠간 공자의 말, 원문 한글자 한글자를 필사해보려 한다.

눈으로 읽고 소리내어 말하는 것에 더해 직접 써보기까지 한다면, 지금은 깨치지 못한 공자의 뜻을 조금 더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날 공자의 말을 학문으로 깊게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린 시절 무지해서 심취하지 못한 게 아쉽다.

읽을 수록 새롭게 해석되는(내 주관적) 공자의 말을 곁에 두고 자주 되뇌일 것 같다.


好學近乎知(호학근호지)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혜에 가깝다.


내게도 지혜가 생기길 바라며..

공자의 말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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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를 마음이 여기 있어요
강선희 지음 / 시크릿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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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마음을 간직한 저자..

하지만 용기내어 그 마음들을 글로 탄생시켰다.

아무도 몰랐던 저자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



첫번째 이렇게 남겨둔 마음


오래오래 널 생각했어.

부치지 못할 편지란 걸 알기에

이렇게 너에게 못다 한 말들을 적어.

이렇게 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까 싶어서.

(p.20, 첫 편지)


저자는 편지를 쓰고 나서 마음이 가벼워졌을까?

전하지 못한 말은 머리속을 맴돌다 사라지거나,

일기장이나 플래너의 낙서처럼 존재한다.

어릴 적 누군가를 향한 나 혼자만의 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아무 의미없는 열쇠가 달린 일기장에 몰래 적는 것으로 답답함을 달래곤 했었던 기억...

나만 아는 이야기로 남겨두고 영원히 혼자 추억하는 선택을 했다.

슬프고 기뻤던 추억을 가진 내 젊은 날로 돌아간다해도,

내 선택은 같다.

지금도 그 때도 용기는...없으니까..



두번째 비워지지 않는 것들


비움에는 언제나 또 다른 채움이 있다는 걸

난 여전히 알면서도 알지 못해요.

이 끝이 없는 마음이 더 이상의 헤아림을 모르기를.

내가 잠시 그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기를.

기울어가는 마음이 그렇게 깅루다가 저물기를.

오늘도 나는 그렇게 기도해요.

(p.51, 비워지지 않는 것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비워낸다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저자는 바다에서 누군가를 보내려하지만,

바다는 그 누군가의 거침과 닮아있고,

해질녘의 바다는 또 그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닮았다.

비워도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마음..

시간에 흘러 비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세번째 짙어지는 말들


너와 대화를 나눌 때 스쳐지나갔던 말들이

어느 순간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멈추게 해.

시간 사이사이에 숨어 있다가

원래부터 나를 위해 준비된 말인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버려.

그러면 나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네가 보고 싶고 그래.

난 아직 너만큼 깊은 사람과 마음을 나눠본 일이 없어.

(p.93짙어지는 말들)


문득 문득 나를 멈추게 하는 말들이 있다.

가슴 설레어 문득 미소 짓게되는 순간들..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었음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그 미소는 분명 사랑 받아 행복하던 시절 속에 존재한다.

과연, 저자를 멈추게 한 그 누군가의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네번째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전부인


내 안에서 내가 사라질 뻔했던 그 수많은 시간 속 당신이

나에게 건젠 한마디.

그 한마디로 나는 순간들을 보내고 또 지나갑니다.

"그런 날도 있지요."

(p.119, 그런 날)


가끔 거창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말들이 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어찌해야할 지 모르고 고개 숙인 나에게

"그런 날도 있지요."

그 한마디에 한 시름 놓던 순간..

그런 한마디를 던진 그 누군가는 내 고뇌를 이해한 것이었겠지..

그런 날이 계속된다해도, 내 곁에 그 누군가가 함께 한다면 두렵지 않다.

그런 날도 있다.



다섯 번째 모든 마음엔 다 이유가 있다.


모든 선택엔 모든 마음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나는 여전히 모든 것에 이유가 있고

이유가 있기를 바라며 살아.

이 마음 놓지 말자.

(p.153, 이유)


이틀 전에도 내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 나는 괴로워야했다.

이해 받기를 포기하고, 그 어떤 말이든 마음에 담지 말자 다짐했었다.

그 다짐은 번번히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나 역시 그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바라는 나를 내어주지 않기에

나를 이해하지 못할 말들과 눈빛으로 대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분노로 가득찬 마음을 조금씩 비워내려 노력한다.

이해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해 받기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강요하지도 않는다.

나 조차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저 내 마음에 이런 저런 이유가 있고,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면 된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니까!

저자는 그리운 누군가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기도,

답답함을 전하기도 하고, 힘겨움을 위로하던 누군가에게 감사를 전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하지 못한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책을 읽으며 내게 남겨진 아무도 모를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아프기도 했고, 예쁘기도 했던 마음들이었다.

남들과 나눌 수 없을지라도 내 소중한 마음을 들여다 보는 기회가 되었다.

가끔 마음이 가는 책의 한 꼭지를 펼쳐들고 내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될 것 같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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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베트남 성장하는 곳에 기회가 있다
이정훈 지음 /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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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디지털 금융 전문가인 저자!

베트남에 핀테크 기업 핑거비나를 설립해 베트남의 핀테크 발전에 힘쓰고 있다.



1부 베트남 어디까지 알고 있나


베트남에 대해 알아야할 8가지

베트남의 정식이름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수도는 하노이, 호찌민이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베트남어를 공식으로 사용하고 화폐 단위는 동(VND)이다.

대기업들은 포스트 차이나로 베트남을 인정하고, 글로벌 투자자들도 베트남 투자를 더욱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베트남 비즈니스에 성공하려면 아래 그림과 같은 8가지를 알아야 한다.


1.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일당 통치 국가이다.

절대 권력자 한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체제에 의해 국가의 주요한 사항이 결정된다.

54개의 종족으로 이루어졌지만 89%가 베트남족이라 소수민족 민족과의 마찰을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오고 있다.

당의 이익은 민족과 국가의 이익이며, 모든 이익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슬로건처럼 전 국민에 대한 차별 없는 사명을 준수하고 있다.


2. 전쟁과 자존심의 나라

그늘의 역사는 오랜 기간 외세 침략으로 가난과 질병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호찌민의 민주공화국과 베트남 공화국으로 나뉘어졌다가 월남전의 결과 1976년 7월 2일 지금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하나의 국가로 통일 되었다.


3. 베트남 개방 개혁 정책 도이머이

도이머이는 '바꾸다(도이)'와 '새롭다(머이)'는 뜻의 순수 베트남어이다.

1986년 발표된 도이머이 정책은 시장 경제 체제를 수용한 베트남식 개혁 개방 정책이다.

대내적으로는 농업 개혁, 가격 자유화, 금융개혁 등을 통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모색했고, 대외적으로는 개방을 통한 해외 공적지원자금을 활용했다.

이를 통해 경제가 개방되고, 시장 지향적인 방식으로 큰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경제포럼 '2019 글로벌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은 세계 경쟁력 순위 67위로 전년도 대비 10단계나 올라섰다.


4. 베트남의 유교문화와 교육

근본적으로 연장자를 존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체면을 중시한다.

동시에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의도적으로 나이와 관련된 서열문화를 무시하려는 경향도 공존한다.

유교식 한자 성(姓)을 사용하고, 제사와 장례를 지낸다.

존칭어를 사용하고 항상 교육에 힘쓴다.


5.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술 소비가 늘고 있는 나라

베트남에서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회사에서 충실한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맥주를 즐겨 마신다.

베트남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면 관계 형성과 소통이 불편할 수도 있다.


6. 1,700km에 이르는 길쭉한 지형

베트남은 세로로 길며, 위성 사진을 보면 S자 형태로 되어 있다.

수도이자 정치, 행정도시인 하노이, 최대 상업도시인 호찌민 그리고 다낭, 하이퐁, 껀터를 포함한 5개 도시가 중앙직할시로 지정되어 있다.


7. 오토바이 천국, 베트남

베트남의 대중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이다.

이는 좁고 낙후된 인프라와 대중 교통이 부족하고 너무 더워 걸어다니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기오염이 심각하다.

기업들은 이를 비즈니스 모델에 적용하고 있다.


8. 남자는 나라를, 여자는 가족과 지역사회를 책임진다.

베트남은 전통 사회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국가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가족과 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강화했다.

헌법에서부터 가족법까지 남녀평등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어느 선진국 못지 않게 잘 정비되어 있다.



2부 포스트 코로나 시대, 베스탐을 주목하라


코로나19 대처 능력이 말해주는 사실

2020년 7월 초 기준 베트남 보건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베트남 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영증 확진자 수는 369명이고, 사망자는 한 명도 없으며, 확진자 중 341명이 완치 판정을 받았다.

또 2달 이상 신규 확진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강력하고 광범위한 격리와 봉쇄, 강제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펼친 결과이다.

베트남 사회는 건강에 관심이 많다.

무엇보다 큰 질병에 걸리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매우 크다.

이로 인해 정부와 국민 모두 전염병의 타격이 얼마나 클지 알기 때문에 전염병 확산 방지에 사활을 걸었다.

중국와 한국이 코로나 19가 심해지자 국경을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급기야 모든 외국으로부터의 입국을 막았다.

유입 바이러스를 막으려는 노력이었다.

그 와중 미흡한 외교적 대처로 한국 측에 통보도 없이 하노이로 향하던 한국발 비행기를 회항 조치하고, 이미 도착한 한국인들을 갑자기 시설에 격리시켜 불만을 야기시켰다.

역시 외교적인 문제보다 바이러스 유입 방지만을 고려한 조치였다.

이는 오로지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것일 뿐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었다.

심지어 잠시 외국에 나갔던 자국민의 귀국도 막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큰 위기가 닥치면 똘똘 뭉치고 자국을 가장 우선시 하는 문화로 인한 것이다.

무질서해보이는 모습은 대부분 베트남 사람들의 실용주의 성향에 기인한다.

규칙이나 규율보다는 임시통변으로 목적을 달성해나가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대기오염으로 평소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 되었던 점은 안정적 마스크 공급이 가능했고, 확산을 막는데 기여했다.

이로 인해 확산세가 멈추면서 빠르게 일상 생활로 되돌아올수 있었다.

이는 정부에 대한 믿은과 안도로 이어져 경제적 자신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3부 디지털 사회로 변모하는 베트남


변화하는 베트남 ICT 산업

코로나19 확산 이후 베트남 경제도 큰 타격을 입었다.

ICT 산업도 마찬가지로 전반적으로 매출 하락이 이어졌다.

하지만 화상회의, 원격 근무 등의 다른 ICT분야에서는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또한 과거 온라인 학습에 대한 관심이 일부 사립학교에만 국한되었으나 이번 사태로 교육계 전반에서 온라인 학습 이슈로 온라인 교육에 대한 투자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의 핀테크 시장

1억명에 가까운 인구와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 상승, 평균 연령 30세로 노동인구가 전체 인구 대비 60%, 빠른 도시화율 등으로 소비 시장으로서 매력이 넘친다.

무엇보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디지털 인구가 빠르게 증가함에 따란 전자상거래 등의 온라인 경제가 코로나19 이후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에 베트남 정보는 관련 규제 완화를 통해 베트남 내 디지털 금융을 지원한다.

현금 사용으로 인한 불법 자금 세탁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전자결제 장려 정책을 추진중이다.

아직 현금 선호도가 높지만, 코로나19 대유행은 온라인 거래 확대와 결제 방식을 현금에서 모바일로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베트남의 O2O산업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전개함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일원하는 O2O(Online to Offline)플랫폼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특히 오토바이가 O2O플랫폼에 적용되어 더욱 활성화 되고 있다.

2016년 12월 베트남 다낭을 가족 여행으로 다녀왔다.

겨울임에도 후덥지근한 날씨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으로 너무 힘겨웠다.

특히 비행이 너무도 힘겨웠다.

그렇게 다녀온 베트남을 책으로 만나니 너무도 새롭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국에서 출수하고 왜 베트남으로 진출하는지 알게되었다.

값싼 노동력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우리나라 1/3, 혹은 그 이상 싼 인권비를 지불하고 높아지는 교육열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할 수도 있고, 베트남 내수 시장에서 발생하는 소비도 무시못할 큰 시장이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인해 IT강국인 우리나라가 공략할 수 있는 분야는 더욱 많을 것 같다.

이 책은 베트남으로의 진출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라 추천하고 싶다.

여행 가이드 북에서 보던 베트남, 그 나라의 경제를 책으로 읽고 나니 뭔가 더 친숙한 기분이다.

베트남에서의 우리나라의 선전을 기원해본다.

그저 불편했던 여행의 기억이 앞으로 그 변화와 발전을 지켜보게 될 것 같다.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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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각자를 찾아서 - 서재필부터 박정희까지, 동상으로 만나다 더 생각 인문학 시리즈 14
이상도 지음 / 씽크스마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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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청와대 출입기자를 했고, 정치부장, 부도국장,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하였다.


선각자(先覺者) : 남보다 먼저 사물이나 세상일을 깨달은 사람.


제1장 광진·노원 권역

능동 어린이대공권 방정환 선생 동상

-백성이 아닌 국민이 된 어린이



방정환(1899~1931)

‘어린이’란 말을 처음 사용하고 어린이날을 만든 어린이운동 창시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했다.

잡지「어린이」를 발간하면서 수차례 기사 삭제, 압수 등의 조치를 당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P.16)


방정환의 동상은 남산에서 옮겨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설민선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방정환이 손병희의 사위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이전에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중 1명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그런데 방정환은 어린이들 뿐 아니라 옷을 만드느라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조선 여성들까지도 생각해준다.



조선여자들은 한평생 빨래만 하다가 죽는다고 할 만큼 빨래를 자주 합니다.

더구나 조선 옷과 옷감은 빨 적마다 뜯었다가 다시 재봉을 하게 되고 다듬이질과 풀 먹이기를 일일이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니 그 손해는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흰옷만을 입지 말고 연령과 성미에 맞춰 아무 색이나 염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p.19)


방정환은 개량한복 입기를 강조했다.

빨래로 허비해야할 시간을 줄여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음이다.

힘들게 세탁된 옷을 입던 것이 옛날 어른들의 권리쯤 되었을까?

그 때도 여성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구나..

방정환은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어린이에 대한 기초조건>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은 국제연맹이 발표한 국제아동권리선언보다 1년 빠른 세계최초의 아동권리선언이된다.

식민지시대를 살며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계속했던 것이다.

현재도 개도국 어린이들이 노동착취와 성문제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있다.

정말이지 어린이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

어른들이 보여주는 것, 말하는 것을 보고, 듣고 자란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보호받고 귀히 대접 받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나라는 잃었지만 그 나라를 되찾아줄 희망이 바로 미래의 어른, 어린이라는 사실을 방정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방정환의 이야기를 조금 더 알고나니 어린이 날인 그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변질된 요즘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2장 남산권역

숭의여대 운동장 안중근 의사 동상

-민주공화국의 씨앗이 된 안중근




안중근(1879~1910)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구한말 독립운동가.

인재 양성과 국채보상운동에도 관여했다.

러시아 망명 후 의병장으로 전투에 참여햇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체포되어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p.45)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여러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 숭의여대라는 곳에 왜 있을까 궁금했다.

숭의여대의 터가 과거 경성신사(대한제국 시절 한국 거주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가 있던 자리로 해방 후 미국선교사가 숭의여학교를 세운다.

3.1운동 때 교사와 학생들이 평양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6.25전쟁후 경내에 있던 8개의 신사 건물을 차례로 헐어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현재 숭의 여대 본관 앞에는 경성 신사 신전 주춧돌 4개와 석재 부재 등 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연유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세우겠다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커다란 업적은 이토히로부미의 처단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된 그는

"자신은 대한의군 중장으로 군인이니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

고 요구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도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라는 뜻으로 순직 직전 일본인 헌병에게 써준 것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기증되어 현재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보관되어있다.

무엇이 이토록 개인을 나라의 독립에 투신하게 했을까?

자산의 안위보다 나라를 먼저 걱정한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제3장 명동·서울역 권역

만리동 손기정 체육공원 손기정 동상

-올림픽을 제패한 영원한 한국인 마라토너





손기정(1912~2002)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해 금메달을 딴 마라토너이다.

이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을 이길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줬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부상으로 받은 그리스 청동제 투구는 독일의 결단으로 1986년 손기정에게 돌아왔고,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p.177)


아..저 표정..

나라를 잃고 일본인 신분으로 출전한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한다.

하지만,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은 울고 싶다.

동상은 가슴의 태극기와 투구를 가지고 있다.

가슴에는 원래 일장기를 달고 있었는데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을 보도하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다. 이로 동아일보는 탄압을 받지만, 국민들에게 더욱 애국심 고취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동상의 청동 투구는 고대 그리스 코린토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리스 올림포스 제우스 신전을 발굴하던 중 발견되었다. 그 후 그리스 최대 신문사인 브라디니사가 국제올림픽위원회에 이 투구를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에게 부상으로 줄것을 요청하지만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할 수 없다는 올림픽 규정으로 베를린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50년간 보관되었다.

그 후 독일 정부가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맞아 청동 투구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면서 손기정에게 돌아왔다.

이 때 손기정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것"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해방 후 손기정은 육상지도자로 꿈에 그리던 태극기를 달게 된다.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손기정의 우승당시의 올림픽 기록의 국적이 일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 조선인 청년의 우승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조선인 마라토너는 나라 잃은 설움을 잊고 나라의 독립을 소원하며 달리고 또 달렸을 것이다.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 동상의 표정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제4장 종로 광화문 권역

정동 이화여고 유관순 동상

-저항의 아이콘이 된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1902~1920)

3.1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서울 이화학당을 다니다 3.1운동이 일어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휴교령이 내려져 천안으로 내려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벌여체포됐다.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그때마다 고문에 시달리다 건강이 악화돼 옥에서 숨졌다.


이화여고의 유관순 동상은 18세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상을 만든 작가는 "독립투사 등 강성 이미지로만 인식되고 있는 유 열사에게 소녀 이미지를 강조했다."고 밝혔다.

18세..

저 어린 나이에 여자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서도 죽을 때까지 나라의 독립을 외쳤다.

유관순의 이화학당 시절 봉사정신과 함께 애국심을 키워준 사람은 스승인 박인덕이다.

또한, 이화학당 입학 부터 다니던 정동교회의 손정도(독립운동가) 목사의 가르침으로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시켰다.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가 제한되는 시절 18세 어린 소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게 여겼다.

이 소녀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제5장 종각·대학로 권역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김상옥 열사 상

-일본 경찰과 벌인 1대 1,000의 싸움



김상옥(1899~1923)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추격 중인 일본 경찰 1명을 죽이고 16명에게 부상을 입힌 독립운동가이자 중소사업가이다.

총독 암살계획 발각으로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해 종로 경찰서에 폭타을 던졌다.

이후 뒤를 쫓는 경찰과 효제동에서 결전을 벌이다 자결했다.

(p.293)


김상옥은 1922년 1월 12일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로 아수라장을 만들고 은신한다.

1월 22일 은신처가 발각되고 경찰은 투항할 것을 권유했으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다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한다.

김상옥은 총독 처단을 위해 조선으로 떠나는 날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라는 말대로 끝까지 소신을 지킨다.

사업가로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나라의 독립에 더 큰 뜻을 두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열사의 희생으로 나는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다.

제6장 서대문·성북·용산 권역

효창동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동상

-제국주의의 심장 도쿄에서 일왕을 떨게 한 기개



이봉창(1900~1932)

일본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 투신의 뜻을 품고 상하이로가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원이 된다.

일본으로 돌아와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지만 불량으로 처단은 실패한다.

이후 체포되어 사형당한다.

(P.345)


이봉창은 20대 중반까지 평범한 식민지 청년으로 살다가 철도국에 취직해서 일본인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본으로 간다.

그러나 일본에서 한글 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나 때를 기다리다 일왕 암살을 목표로 다시 일본으로 간다.

이봉창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암살 시도는 큰 반향을 일으킨다.

특히 중국의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된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국민들은 실패를 실패로 생각하지 않고, 그 시도만으로도 대한독립의 염원을 불태웠을 것이다.

저자는 동상이 위치한 장소와 의미, 동상의 형상 묘사와 동상 설립과정등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동상이 만들어진 후 정권 교체 또는 작가의 이력 논란으로 동상이 철거 되기도 한다.

어릴 적 초등학교에 있던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은 각종 놀이의 기준점 역할을 할 뿐이였는데

하나의 조각에 지나지 않고 그 분들의 업적과 생애를 함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독립 운동에 투신한 분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사 문제집에서 시험용 외우기 하던 내용보다는 동상의 주인공들의 삶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들이 공부할 때와는 다르게 마음가짐 부터 편하고 쉽 고 읽었고 , 또 문제집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도 담겨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태극기

억울하게도 그 태극기를 숨기고 살아야 했지만, 잊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이 목숨과도 바꿔 지켜낸 독립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이제 동상을 만날 때마다 마냥 지나쳐지지 않을 것 같다.

출판사에서 무료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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