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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 시대의 철학
김정현 지음 / 책세상 / 2018년 1월
평점 :
피로와 불안 속에 ‘나’를 잃어가는 현대인의 삶,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내가 초등학생 때, 포스터나 글짓기에서는 상상하며 그렸던 21세기의 모습은 기술과 과학이 최첨단으로 발달하고, 기계화되어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시기를 상상해왔다. 그 시기에는 인간이 조금 더 노동에서 벗어나 쉼을 누리며, 부족함없는 평안함을 누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상상하던 현대 사회가 되었다. 자본, 정보, 네트워크…등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때가 도달했으나 우리의 상상과 달리 사람들은 우리는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와 욕구를 증명해야하고, 스스로에게 성과를 강요하고 자기를 착취하며 만성 피로에 젖어 탈진하거나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
우울증과 분노, 무기력이 만연한 이 시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지금 한국 사회는 상당한 '분노'를 분출하는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다. 때때로 나조차도 붐비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 어깨를 치고 가기만 해도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일 때가 있고,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는 이유로 사람을 폭행하기도 하는 기이한 사건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모두에게 내재된 분노를 지닌 채, 시한 폭탄처럼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낯설지 않은 물음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사상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당대 문명에 내재한 불안정의 원인을 ‘활동하는 자’, 즉 과도하게 일하며 부산하고 초조해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풍토로 적시했다.
엄청난 삶의 속도와 자기 성찰 결여, 과잉 활동, 피로 및 불안의 증대는 현대사회의 주요 특징이다. 이렇게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점차 무관심해지는 이러한 개인주의 경향을 그는 '자기 몰입'이라는 어휘로 표현한다.
이러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가? 아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타인의 삶과 사회에 무관심해지는 것, 과잉 활동으로 피로와 불안 가운데 놓여있는 이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
젊은 청년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 '자아 실현', '성공', '비전'이라고 하는 모호한 단어들로 삶의 목표를 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면 뭐든 할 수 있다."
"안되면 되게 하라."
"노력해서 안되는 것은 없다."
이러한 구호들을 통하여 세뇌된 우리는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향한 '닦달(몰아세움)'과 성과에 대한 강박으로 경쟁의 격화와 자기 생산성의 과열을 초래하고 있다. 또 인간은 성과적 자동 인간으로 자신을 태우며 피로와 존재의 소진을 경험하게 된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 또한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내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고자 애썼던 지난 날들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없겠지만) 그리고 나도 스스로를 소진시킨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바우만이 말하는 '이 시대의 고질병'으로 나타나는 '정신적 우울증'이나 무력감, 삶의 고난을 헤쳐나가기에 부적절하다는 느낌(부적절함) 또한 경험해보았고, 지금도 그 느낌 가운데 허둥대며 살아가고 있다. 분주하지만 활기없고 조급해하고 허둥대며 불안 속에서 부유물처럼 살아간다.
나는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고,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내 안에 소진된 존재와 불안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을 누군가에게 최근에 꽤 많이 했었다. 이렇게 바쁘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왔고 살아야하는데 이 삶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나요? 누군가 정답을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했다.
- 세상에 '삶의 의미'같은 건 없어.
- 그런 고민이 무슨 의미가 있어.
- 그런 생각할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해. 등등
삶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물음과 진실한 삶에 대한 물음 없이 허둥대며 살고 있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태도, 즉 '무정신성'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꽤 오래 고심했다.
나는 내가 번아웃을 경험하며, 삶의 방향을 잃어 오랜 시간 상담을 받았었다. 난 늘 물었다. 과연 이런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까지도 충분히 고단했고, 앞으로도 고단할걸 아는데.
어떤 말을 해주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삶의 이유는 스스로 찾아야하는 것임으로 그 누구도 정답을 제시해줄 수 없을테니까.
아마도 그런 물음에 누구보다 갈급하게 답을 찾고 있었기에 이 책이 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내가 왜 사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나의 삶이 타인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타인을 배려하는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물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도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진실하게 이끌어나가려는 실존적 의지는 오토 랑크가 말하고 있듯이 삶의 창조적으로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행복,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니체는 고요하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삶(비타 콘템플라티바)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색은 '한가로운 삶'을 복원함으로 열리게 되는데, 한가로운 사람은 무위도식하며 게으르고 나태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조급함에 저항하고 영혼의 살림살이를 통해 성숙한 삶의 태도와 존재의 동력을 획득한 사람이다.
니체는 부산한 활동의 가치가 과대평가되는 시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삶의 태도는 '사색적 삶'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허약함이나 정신적 염증, 무기력, 분노, 공격성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첫째, 잠시 멈추어 서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두는 능력. 삶의 시련, 고난, 고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부정적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고 이를 성숙한 의식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사고의 성찰뿐만 아니라 '일상의 성찰'이 필요하다. 매일 마음을 점검하고 다스리는 훈련으로 일상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습관, 즉 자기 성찰의 습관이 필요하다.
셋째, 영혼의 훈련은 '내려놓음'의 훈련이기도 하다. 내게 중요한 것과 가치가 덜한 것을 구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 이러한 분별이 필요한 이유,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내면을 돌보고, 약한 자에게 손을 내밀고, 조금씩 성숙해져가는 모습을 통해 모범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무런 생각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난 일들과 감정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삶을.
우리는 언제부터 방향을 잃었을까,
그리고 우리 사회는 회복할 수 있을까?
나에게 이 책이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어쩌면 내가 너무나 듣고 싶었던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스스로를 닦달하며 몰아세우고 있다면, 그래서 스스로를 소진하고 지쳐있다면 권해주고싶다. 우리가 진정 살아야하는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