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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플라이트 ㅣ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평점 :
얄궂게도 영훈과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에 자꾸 윤 대령 생각이 났다. 윤 대령을 생각하면 비정하게 쏘아붙이던 유나가 동시에 생각나고, 자신을 쫓아낸 군과 지숙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아 참담해진다. (……) 유나가 죽고 나니 모든 게 복잡해졌다. 정근은 유나가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지 이제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빠, 아직도 몰라요? 아빠가 잘못한 거예요. 윤 대령 아저씨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요. _p.189
아저씨, 나는 그것 때문에 헷갈렸어요. 그 아이가 내게 털어놓은 진심 때문에. 반 년 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그 아이가 알게 모르게 회사에서 받는 차별에 힘들어했다는 것도, 유독 면세품 판매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까닭에 압박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죠.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그대로라고. 옛날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회사에 다니는데도 여전히 마찬가지라고. 그 말을 하며 흘리던 눈물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어요. 아직도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_p.217
그날 아저씨랑 같이 병원에 갔던 일을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때도 분명 문병 가는 거라고 설명했는데 왜 불륜 관계라고 고발한 거야?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람을 감시할 수 있어? 회사에서 시키는 것 이상으로 나를 감시했잖아. 나는 두서없이 따져 물었고 그 아이는 오히려 내게 서운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떡해, 엑스맨 제도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나는 완전히 쫓겨나는데. _ p. 218
나는 아저씨를 믿지 않았어요. 아저씨 집에 있는 동안 잊어버리려고 했던 거예요. 아저씨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걸. 아저씨가 해 준 카레를 앞에 두고 그 사실을 다시 깨닫고 몸서리쳤어요. 나의 여러 가지 진심들 중에서 가장 우선하는 진심을 위해 다른 마음을 밀어둔 것뿐이었어요. _p.219
<미스 플라이트>는 '유나'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하다 딸을 다시 만난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하는 편지글 형태로 쓰여진 유나의 일기를 보게 된다. 그것은 성인이 된 후 만나지 못했던, 그리고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겪은 유나의 일기인 동시에 승무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폭로문이었다. 유나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수 년전, 그리고 올해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대한항공', 그리고 그것을 폭로했던 몇몇 직원들에게 여전히 가해지는 감시와 부당처우들, 그리고 강도 높은 물리적 노동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뉴스로 보아왔고, 들어왔던 한 '노동자'의 이야기이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멋진 조종자, 스튜어디스의 실제 삶은 살아남기 위한 절박함마저 느껴진다.
소설 속 유나도 마찬가지이다. 기내에서 습관적으로 맞닥뜨리는 탑승객의 성희롱과 물리적 폭력, 승무원 개인에게 면세품 판매를 할당하여 그 실적을 보고하도록 하는 사측의 부당한 압박, 비인간적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있어야 할 노조가 여전히 없는 항공사의 제도. 이 모든 불의 가운데 노조의 중심인물인 조종사 영훈과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로 사측의 요주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유부남인 부기장과 불륜 관계라는 추문에 휩싸인다.
유나는 어릴 적 공군 대령의 딸로 군대를 전전하며 자랐다. 유나의 아버지는 정근은 전직 공군 대령으로, KF-16 추락 사고와 관련하여 세간에 밝혀진 방산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 제대했다. 스스로도 ‘까라면 까’는 군대식 법과 상식을 끔찍이 믿었다. 군대에 입대한 운전병 영훈을 자신과 아내, 딸의 개인 운전사로 이용하고,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부하 직원들의 가족들마저 불려와 도와야했다. 평생 몸 담았던 군대의 일원으로서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제대를 3개월 앞둔 운전병 영훈은 자신이 모시는 상관들이 행차하여 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지는 날 혜진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는다. 하지만 정근은 근무 시간을 초과한 운전병의 뺨을 치며 그를 붙들어 두었다. 다급한 혜진의 전화에 초조해지지만 결국 영훈은 뒤늦게야 집에 도착하게 되고, 혜진은 유산을 하게 된다. 유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줌마(혜진)는 배가 불러 올 때까지 간호사 일을 했고, 우리 집에 와서 세차 같은 걸 하기도 했다는 것을. 그러는 동안 아저씨는 엄마가 동창회를 갈 때도 태워다 주었고, 학원 보충수업이 늦게 끝난 나를 태워다 주기도 했다. 만약 그 시간 동안 아줌마 곁에 있어 줬다면 아줌마가 이렇게 힘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유나는 미안해한다.
유나는 아버지의 눈을 맞추고 ‘똑바로 살라’고 말하고 정근은 그런 딸 유나를 죽도록 팼다. 그 결과, 그는 혼자 남았다. 살아 있을 때 유나가 묻던 수많은 질문이 정근은 사춘기 딸의 시비라고 생각했는데, 유나가 죽은 이후 정근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내가 '똑바로' 살았던가?
근무하던 항공사에서 노조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끝내 죽음을 택한 딸 ‘유나’와 평생 몸 담았던 군대에서 관성처럼 비리에 가담하고 침묵했던 아버지 ‘정근’의 이야기가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이다. 우리가 사회를 잘 꾸려가고 만들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여러 조직과 제도는 때론 우리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항공 승무원을 아무도 지켜줄 수 없는 사내 규정과 내부에서 암암리에 존재했던 엑스맨 제도, 군대에서 존재하는 억압적인 상하관계같은 '조직의 제도'가 때론 우리의 인간성을 스스로 잃게 만든다. 그래서 조직을 거스른 누군가는 그 댓가를 스스로 치루게 만든다.
'똑바로' 살고 싶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하는 누군가, 공군 KF-16 추락 사고와 관련된 비리를 폭로한 윤대령과 노조와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이 되고 엑스맨 제도로 인하여 억울하게 추문에 흽싸이게 되는 유나처럼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 무게를 감당해야한다.
유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비행을 하며 가장 가깝게 지내고 속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A는 사실 사측에서 유나를 감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나는 끝까지 A를 믿고 싶어한다. 함께했던 시간동안 나누었던 진심때문에.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끝내 거짓이라고 믿을 수 없어서. 그 진실이 주는 상처가 가장 아프게 하지 않았을까.
"병원에 갔던 일을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때도 분명 문병 가는 거라고 설명했는데 왜 불륜 관계라고 고발한 거야?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람을 감시할 수 있어? 회사에서 시키는 것 이상으로 나를 감시했잖아. 나는 두서없이 따져 물었고 그 아이는 오히려 내게 서운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떡해, 엑스맨 제도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나는 완전히 쫓겨나는데."
'똑바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관습적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일 뿐,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진심인지 스스로 속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들이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들일 것이다. 나는 똑바로 살고 있을까?
항공사, 승무원, 갑질, 인권 침해, 공군, 방산 비리, 내부 고발. 한국에 만연한 몰상식과 갑질 문화를 정면으로 바라보기에 유나의 죽음은 아버지 정근에게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가진 수많은 진심 중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작가는 질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