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괜찮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 여행자MAY의 퇴사 후 세계일주
여행자메이 지음 / 더시드컴퍼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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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이 길 위의 수많은 꽃을 지나치며 단 한 번도 가까이 다가가서 꽃향기를 맡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꽃나무를 보면 “예쁘네” 하고 지나칠 뿐,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상사에게 “옆도 살피고, 아래도 내려다보고, 가끔은 뒤도 돌아보고 싶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떠나온 이 길 위에서 나는 겨우 앞만 보며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에서 늘 그랬듯 말이다. 오늘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이 길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이 향긋한 꽃향기를 맡지 못했을 것이다. _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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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이나 성격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들도 꽤 많이 있다. 나는 모험심이 강하고,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즐거워하고, 낯을 가리지 않는 편이고, 계획적인 것을 싫어하고 충동적인 성격이다. 나는 이러한 내 모습을 정말 사랑하는데, 이 모습들은 나도 작가처럼 '도망치듯' 떠났던 그 길 위에 발견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일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규칙과 계획에 얽매여 있는지, 나는 딱 두 가지, 여행과 독서만큼은 계획이 없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런 계획 없이, 잔고만큼 버티기’로 시작한 여행자MAY의 여행이 어떤 순간들을 만났을지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매여있던 많은 것들을 털어내고나면 그제야 '진짜 중요한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배웠던 시간이었다. 40일간 계획없이 떠났던 나의 첫 여행에서.

눈이 아주 많이 내리던 날, 스위스의 기차를 타고가다 아름다운 풍경에 이끌려 무작정 기차에서 내렸던 순간, 내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정말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 수 없이 눈물이 흐르던 순간이었다. 지금 아름다운 이 순간말고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어디있을까, 내 인생에서 반짝이던 순간이었다.

내가 사회초년생으로서 더 많은 매출을 내고, 그래서 인정받고, 세상에 꼭 필요한 일원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위해서 얼마나 아둥바둥 했는지, 그 지쳐버린 어깨 뒤로 내가 놓친 진짜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일상이 익숙해진 지금, 하루에 20분만 하늘을 봐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삶인가.

하늘 한 번 올려다 보지않고 같은 길을 매일 오가는 지금의 나의 삶은 어떤가. 여전히 삶에서 놓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여행에서 배운 '진짜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그 때처럼 무모하고, 용감하게 모험 할 자신이 없어진 것 같지만, 여전히 그 순간이 그립기는하다. 그 따뜻했던 햇살이 떠올라서, 그 아름다웠던 순간이 떠올라서, 길에서 만난 이가 반가워서 벅찼던 그 순간들이 아직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때때로 괜찮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이 말은 결국 삶의 무수한 길을 걸으며 나 자신을 알아가고, 사랑하게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꼭 여행을 가야만 자신을 알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지금'에서 조금 고개를 돌려서 누군가의 도전어린 여행을 본다면 잠깐은 내가 진짜 '행복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모두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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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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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는 다시는 다신을 방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고통 속에 떠내려가도록 놓아두지 않겠다.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마치 환영처럼 아주 단순한 일도 차마 하지 못해 무기력하던 어느 여름의 기억들이 먼지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에서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언니의 응원을 받아 겨우 문밖으로 나가 옥수수나 맥주를 사들고 왔던 시절, 생각해보면 경애가 파업 이후 회사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버틴 건, 버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멸 속으로.
때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시흥의 창고에서 생각했다. _p.307

 


 

 

이 책을 읽은 후 꽤 오랜 시간동안 '여운'속에서 지낸 것 같다. 마음을 쿵, 울리는 책이 있는가하면 가만히 마음을 두드리다가 끝내 왈칵 쏟아지는 눈물내게 하는 책이 있다. 경애의 '마음'이 꼭 나와 같아서 나는 끝내 눈물을 쏟았다. 그래서 이번 여름, <경애의 마음>을 만난 것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행운 중 하나일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사는 '견디다'라는 단어이다. 나는 그 '견디다'라는 단어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 어쩌면 모두가 각자의 무게를 견뎌온 삶에 대하여. 그리고 나의 '견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잘 견디고 있을까? 문득 외면하고 있던 내 마음, 폐기하고 방기했던 내 마음들의 무게가 견딜 수 없어서 지켜내지 못하고 내버려두었던 많은 시간들에 대해 생각했다.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나 자신에게는 최선이었던 그 시간에 대하여.


아주 단단했던 사람도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기도 한다. 경애처럼 사랑했던 E와의 이별, 그것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불이난 호프집에서, 돈을 내지 않고 달아날까 문을 걸어잠그고 도망친 사장에 의해 죽게된 연인에 대한 마음 하나라도 삶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자신에게만 주어진 행운이라는 것과 미성년자가 호프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죽어 마땅한 일이 된 시선 속에서 경애가 아주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을까?

혹은 상수처럼 아주 오랜시간 차곡차곡 쌓여 조금씩 마음이 붕괴되기도 한다. 삿뽀로에서 암으로 혼자 외로이 죽어간 엄마와 정치인으로 가족들때문에 구설에 오르내릴까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아버지. 그걸 견디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한 형과 그 무엇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

경애는 무기력한 시간 뒤로 자신을 숨기고, 상수는 '언죄다'페이지를 운영하고 소통하며 위안을 얻는다.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그들에겐 최선이었던 회피였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여겼으나 사실은 그저 내 마음을 외면하고 버려두었던 적이 있다. 누구나 성장하면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그 슬픔과 상황에 마주하기보다는 내 마음을 폐기하고 내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기 시작했다. 일렀던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인한 엄마의 방황도, 그래서 마주할 수 밖에 없었던 가난과 조금더 가보고 싶었으나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꿈도, 견디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어리숙했던 직장생활까지.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내 마음을 속였던 댓가는 반드시 왔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를 선택했을 때 얼마나 망가지고 마는지를.

 

자신의 연인이었던 E의 죽음으로 마음을 폐기했던 경애는 그 무뎌진 삶을 겨우 일으켜 일상을 살았다. 하지만 직장 생활에서도 녹녹치 않았는데, 일부 인원이 감축되면서 경애는 파업에 참가해 시위도 하고 삭발도 하며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파업이 종료되고 경애는 다시 복직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많은 이들의 비난을 사게된다. 그 비난 가운데서 스스로를 방기하며 총무과에서 사무용품을 나눠주는 일을 하며 시간을 견딘다. 그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영업부로 이동하여 상수와 한 팀이 되고 베트남 발령이 나면서 경애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달라졌는가? 아니다. 경애가 스스로의 마음을 더이상 방기하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부당한 인사로 베트남 영업 도중 시흥의 물류센터로 발령이 나고 경애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결심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말라'는 언니의 말에 힘을 얻어.

마음을 방기하지 않는 일,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아주 거창한 것 같지만 주어진 시간을 견디는 것의 시작은 무엇일까?

경애는 자신의 마음을 버려두지 않기로 한다. 부당인사에 대응하여 회사 앞에서 날마다 일인 시위를 하고 있지만, 스스로 무기력에 빠지며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며 자신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경애는 알았다.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맞서보는 것.

상수는 자신이 선택하고 만들어 온 것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한다. '언죄다'의 언니로 살면서 늘 최선을 다해 그들을 이해하려고 했고, 그 시간들이 소중한 시간들이었기에 더이상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는 것, 거짓되고 만들어진 모습으로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멈추기로 결심한다.

우리가 흔히 누군가에게 '힘내세요'라고 말할 때 우리의 진심은 무엇일까? 나는 경애가 '힘'을 내기 시작한 부분에서 눈물이 참 많이 났다. 부당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그래서 스스로를 다시 침잠하게 하지 않고 구원하는 것이 우리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그래서 많은 시간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외면한다. '다 그렇게 살아', '어쩔 수 없어' 라는 말로 위로하며.

하지만 경애의 마음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사실 겉으로 볼 때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작은 행위인지, 하지만 온 우주의 힘을 끌어온 것처럼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슬퍼졌다. '힘'을 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긍정의 힘으로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작은 행동이지만 스스로에게는 엄청난 용기를 끌어내보는 것. 그래서 자신을 지켜내는 것.

경애의 마음이 꼭 나 같아서.
그 폐기되었던, 부스러졌던 마음이 꼭 내 것 같아서.
많이 슬펐고, 안아주고 싶었고, 그래서 나도 '힘'을 내보고 싶었던 시간이었다.

당신의 마음도 부스러질지언정 폐기되지는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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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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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게도 영훈과 헤어지며 돌아오는 길에 자꾸 윤 대령 생각이 났다. 윤 대령을 생각하면 비정하게 쏘아붙이던 유나가 동시에 생각나고, 자신을 쫓아낸 군과 지숙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아 참담해진다. (……) 유나가 죽고 나니 모든 게 복잡해졌다. 정근은 유나가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지 이제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빠, 아직도 몰라요? 아빠가 잘못한 거예요. 윤 대령 아저씨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요. _p.189

아저씨, 나는 그것 때문에 헷갈렸어요. 그 아이가 내게 털어놓은 진심 때문에. 반 년 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그 아이가 알게 모르게 회사에서 받는 차별에 힘들어했다는 것도, 유독 면세품 판매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까닭에 압박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죠.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그대로라고. 옛날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회사에 다니는데도 여전히 마찬가지라고. 그 말을 하며 흘리던 눈물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겠어요. 아직도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_p.217

그날 아저씨랑 같이 병원에 갔던 일을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때도 분명 문병 가는 거라고 설명했는데 왜 불륜 관계라고 고발한 거야?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람을 감시할 수 있어? 회사에서 시키는 것 이상으로 나를 감시했잖아. 나는 두서없이 따져 물었고 그 아이는 오히려 내게 서운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떡해, 엑스맨 제도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나는 완전히 쫓겨나는데.  _ p. 218

나는 아저씨를 믿지 않았어요. 아저씨 집에 있는 동안 잊어버리려고 했던 거예요. 아저씨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걸. 아저씨가 해 준 카레를 앞에 두고 그 사실을 다시 깨닫고 몸서리쳤어요. 나의 여러 가지 진심들 중에서 가장 우선하는 진심을 위해 다른 마음을 밀어둔 것뿐이었어요. _p.219


 

 

 

<미스 플라이트>는 '유나'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하다 딸을 다시 만난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하는 편지글 형태로 쓰여진 유나의 일기를 보게 된다. 그것은 성인이 된 후 만나지 못했던, 그리고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겪은 유나의 일기인 동시에 승무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폭로문이었다. 유나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수 년전, 그리고 올해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대한항공', 그리고 그것을 폭로했던 몇몇 직원들에게 여전히 가해지는 감시와 부당처우들, 그리고 강도 높은 물리적 노동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뉴스로 보아왔고, 들어왔던 한 '노동자'의 이야기이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멋진 조종자, 스튜어디스의 실제 삶은 살아남기 위한 절박함마저 느껴진다.

소설 속 유나도 마찬가지이다. 기내에서 습관적으로 맞닥뜨리는 탑승객의 성희롱과 물리적 폭력, 승무원 개인에게 면세품 판매를 할당하여 그 실적을 보고하도록 하는 사측의 부당한 압박, 비인간적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있어야 할 노조가 여전히 없는 항공사의 제도. 이 모든 불의 가운데 노조의 중심인물인 조종사 영훈과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로 사측의 요주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유부남인 부기장과 불륜 관계라는 추문에 휩싸인다.

 

유나는 어릴 적 공군 대령의 딸로 군대를 전전하며 자랐다. 유나의 아버지는 정근은 전직 공군 대령으로, KF-16 추락 사고와 관련하여 세간에 밝혀진 방산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 제대했다. 스스로도 ‘까라면 까’는 군대식 법과 상식을 끔찍이 믿었다. 군대에 입대한 운전병 영훈을 자신과 아내, 딸의 개인 운전사로 이용하고,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부하 직원들의 가족들마저 불려와 도와야했다. 평생 몸 담았던 군대의 일원으로서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제대를 3개월 앞둔 운전병 영훈은 자신이 모시는 상관들이 행차하여 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지는 날 혜진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는다. 하지만 정근은 근무 시간을 초과한 운전병의 뺨을 치며 그를 붙들어 두었다. 다급한 혜진의 전화에 초조해지지만 결국 영훈은 뒤늦게야 집에 도착하게 되고, 혜진은 유산을 하게 된다. 유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줌마(혜진)는 배가 불러 올 때까지 간호사 일을 했고, 우리 집에 와서 세차 같은 걸 하기도 했다는 것을. 그러는 동안 아저씨는 엄마가 동창회를 갈 때도 태워다 주었고, 학원 보충수업이 늦게 끝난 나를 태워다 주기도 했다. 만약 그 시간 동안 아줌마 곁에 있어 줬다면 아줌마가 이렇게 힘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유나는 미안해한다.

유나는 아버지의 눈을 맞추고 ‘똑바로 살라’고 말하고 정근은 그런 딸 유나를 죽도록 팼다. 그 결과, 그는 혼자 남았다. 살아 있을 때 유나가 묻던 수많은 질문이 정근은 사춘기 딸의 시비라고 생각했는데, 유나가 죽은 이후 정근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내가 '똑바로' 살았던가?

 

근무하던 항공사에서 노조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끝내 죽음을 택한 딸 ‘유나’와 평생 몸 담았던 군대에서 관성처럼 비리에 가담하고 침묵했던 아버지 ‘정근’의 이야기가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이다. 우리가 사회를 잘 꾸려가고 만들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여러 조직과 제도는 때론 우리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항공 승무원을 아무도 지켜줄 수 없는 사내 규정과 내부에서 암암리에 존재했던 엑스맨 제도, 군대에서 존재하는 억압적인 상하관계같은 '조직의 제도'가 때론 우리의 인간성을 스스로 잃게 만든다. 그래서 조직을 거스른 누군가는 그 댓가를 스스로 치루게 만든다. 

'똑바로' 살고 싶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하는 누군가, 공군 KF-16 추락 사고와 관련된 비리를 폭로한 윤대령과 노조와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이 되고 엑스맨 제도로 인하여 억울하게 추문에 흽싸이게 되는 유나처럼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 무게를 감당해야한다.

유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비행을 하며 가장 가깝게 지내고 속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A는 사실 사측에서 유나를 감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나는 끝까지 A를 믿고 싶어한다. 함께했던 시간동안 나누었던 진심때문에.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끝내 거짓이라고 믿을 수 없어서. 그 진실이 주는 상처가 가장 아프게 하지 않았을까.

"병원에 갔던 일을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때도 분명 문병 가는 거라고 설명했는데 왜 불륜 관계라고 고발한 거야?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람을 감시할 수 있어? 회사에서 시키는 것 이상으로 나를 감시했잖아. 나는 두서없이 따져 물었고 그 아이는 오히려 내게 서운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떡해, 엑스맨 제도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나는 완전히 쫓겨나는데."

'똑바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관습적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일 뿐,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진심인지 스스로 속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들이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들일 것이다. 나는 똑바로 살고 있을까?

항공사, 승무원, 갑질, 인권 침해, 공군, 방산 비리, 내부 고발. 한국에 만연한 몰상식과 갑질 문화를 정면으로 바라보기에 유나의 죽음은 아버지 정근에게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가진 수많은 진심 중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작가는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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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황선미 지음 / 비룡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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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부모는 장미를 할머니에게 떠맡기고 사라졌다.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장미를 보았고, '애가 예뻐야 부모가 돌아온다'며 버려진 것이 장미의 탓인 것처럼 말했다. 장미는 쫓겨날까 잘못한 것도 없이 빌며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장미는 고모네에 다시 맡겨진다. 고모는 장미를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가족들에게 밀려난 장미는 자기 안의 태생적 구멍을 감추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애써 웃고,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친구들과도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장미의 마음에는 어느새 가시가 돋아나고, 스스로를 어리석고 “자꾸 오답만 찍는 애” 같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느낀 설렘만으로 장미는 J에게 고백했고, J는 길거리의 아무라도 되는냥 장미를 성폭행했다. 장미는 성폭행을 당하고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는 처지로 임신한 채 도망쳐야 했고, 그것 마저도 자신만의 잘못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 하티. 출생신고조차 못한 유일한 장미의 것. 장미는 아이를 키우지도, 입양을 보내지도 못한 채 보호시설에서 도망쳐 진주의 집에서 얹혀지낸다. 보호시설의 원장님은 엄마에게는 아기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으로 생겨나는 거라고 했지만, 장미는 모성애가 무엇인지, 하티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일 벌리길 좋아하는 사진관 사장은 영화 동호회는 물론 입양 가는 아기들 사진 찍어 주는 일부터, 버려진 아기들의 성장 앨범을 찍어 주는 일까지 하는데, 그 모든 일들을 보조하며 사진관을 찾아오게 된 말투도 외모도 어딘지 낯선 입양인들과 자꾸만 얽히게 된다. 모든 이들이 장미는 하티를 키울 수 없다고, 입양을 보내야한다고 했기에 장미는 관심이 그 사람들에게 관심이 간다. 그러다 장미가 일하는 사진관 건물의 청소부가 우연찮게 장미에게 도움을 주고, 장미는 그 도움조차도 의지할 수 밖에 없이 절박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히 혼자였고, 자기가 나빠서 이렇게 된 거라고 자신을 탓하는 데에만 익숙한 장미이지만, 이번만은 절실하게 붙들고 싶다. 청소부의 외면하지 못하는 어떤 마음 때문에, 머나먼 나라에서 자신을 버린 곳을 다시 찾아온 낯선 사람들 때문에 장미는 처음으로 사람들 속에 섞인다.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는 장미는 단지 행실이 불량한 청소년일까?

<엑시트>는 태어나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본 적 없는 장미, 그래서 낳은 아이 하티를 입양보내자고 하는 어른들, 그리고 어릴 적 입양되어 해외에서 자라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싶어했던 우리의 아픈 속살같은 이야기.

이 책을 읽는 많은 순간 '막막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태어난 아이 하티는 안아달라고 손을 뻗어 버둥거리지만, 장미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하티는 '살아가야 할' 어떤 강한 동기일 뿐, 자신이 엄마인지에 대한 감정도 잘 모른다. 장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티의 우유와 기저귀 값을 벌기 위해 진주의 집에 하티를 눕혀놓고 사진관으로 일을 하러 가는 것, 그마저도 하티를 돌봐달라고 부탁할 곳이 없고 갈 곳도 없어 진주의 눈치만 본다. 그나마 진주를 믿고 하티를 '이모'에게 맡긴 후 찾지 못해 두려울 때, 얼굴도 모르지만 엄마, 아빠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장미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이 막막할 뿐이다. 세상에 혼자 남겨져 손내밀 곳이 없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 그래서 돌봄이 필요하고 도움을 청해야할 때, 누군가 단 한 명만 호의를 베풀어주길 바라는 순간에 우연찮게 도움을 주었던 청소부 아줌마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장미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말처럼 장미는 하티를 제대로 키울 수 없을까? 사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하티를 혼자서 키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하티를 '입양'보내는 것이 답이 될까? 입양간 하티는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TV에서 어릴 적 입양을 갔지만,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 돌아오는 많은 입양인들을 본다. 꽤나 안타깝고 뭉클한 사연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그들의 삶은 생각처럼 그렇게 뭉클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이유인지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헤쳐나가야 할 감정이 많을지도 모른다. <엑시트>에는 그저 왜 자신을 버렸는지 이유만이라도 묻고 싶다는 입양인, 다시 만나고 싶어 한국에 왔지만 부모가 만나기를 거절하여 두 번의 버림을 받은 입양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그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입양인까지 다양한 입장들이 보여진다. 꼭 '입양'이 정답인 것처럼 사람들은 권유하지만, 하티 또한 자라서 저런 원망 가운데 자신을 찾지 않을까 장미는 생각한다. (물론 입양되어 잘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전히 장미가 '나쁜 게 아니라 아픈 거라고' 여기는 어른이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없지만 그 인연으로 장미를 돌보고자 하는 청소부 아줌마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들이 조금씩 도와 한국으로 돌아온 입양인들과 장미를 도울 것이다. 장미는 사랑을 모르고, 돌봄을 받지도 못했지만 청소부 아줌마와 함께 하티를 키우고 성장하며 조금씩 그 감정을 배워가지 않을까?

돌아 갈 수 있는 곳, 위급할 때 누를 수 있는 전화번호 한 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장미는 어쩌면 우리 주변에 많을지 모른다. 그렇기때문에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에서도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 변두리로 쫓겨나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하지 않을까.

장미가 한 말이지만, "모두 다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 내고 있다고. 나쁜 일을 겪고도 잘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라고. 앞으로도 그러면 좋겠다"고 장미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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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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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고, 계속 진화해나간다. 감염된 사람들은 삽시간에 죽어 가고, 살아남은 이들은 아이의 간을 먹으면 건강해진다는 유언비어에 무자비하게 죽어간다.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곳. 어딘가 안전한 곳이 있을거란 희망으로 목적지도, 도착지도 없는 끝 모르는 여정을 떠난다.

엄마는 죽으면서 아빠에게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했다. 아빠는 죽으면서 나에게 미소를 부탁한다고 했다. 미소는 전설 속 비밀의 열쇠처럼 엄마에게서 아빠에게로, 아빠에게서 내게로 부탁되었다. 나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동생 미소를 지키며 맨몸으로 러시아를 걸어 간다. 서쪽으로. 해가지는 곳으로.

도리는 밤을 보내기 위해 미소와 머물던 어느 마을에서 일가친척과 함께 탑차를 타고 떠돌던 지나와 만나게 된다. 지나의 덕에 탑차에 얻어타게 된 도리와 미소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목적도, 희망도 없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무너진 때에도 마지막까지 우리가 놓을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무엇일까?


요즘같은 더위에는 지구멸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생존을 위해 소중한 가치들을 포기해가는 시대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고,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인간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이 또한 내가 최근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던 것 중에 하나여서 무척 감명깊게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면 결코 버릴 수 없는 단 한가지, 그것은 무엇일까?

타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모든 감정이 죽어 버렸다고 생각한 지금 시대에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가져다주는 이 질문은 어쩌면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 질문일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어느 곳이 안전한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이들이 믿는 희망은 바이러스를 피할 완벽하게 안전한 벙커가 아닌, 불행에 지지 않고 살아가는 현재다. 이 사랑의 목표는 과거의 상처에 붙들리지 않고 미래의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

지나와 도리는 이 극한의 재난 속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지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류와 단의 돈을 버느라 대화를, 포옹을, 칭찬과 감사를 잊었다. 돈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들을 미뤄두었다. 재난 이후, 그들은 사랑하는 딸 해림을 잃고 남은 해민을 지키기 위해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일상이 무너지고 권태의 고리가 끊기자 류는 비로소 미뤘던 사랑을 돌이켜 본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우리. 사랑보다 먼저 우리가 해내야 했던 것들, 아이들의 교육과 적금과 내 집 마련과 집안 행사들. 이젠 그런 것이 없이 오로지 서로의 목숨만이 남은 순간 다음 기회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 못한 말을 하고, 듣지 못한 말을 들어야 한다.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건지에게는 엄마와 건지를 때리는 아버지가, 학교에는 건지를 때리는 동급생들이 있었다. 죽음같은 시간을 견뎌온 건지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마을에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죽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건지를 탑차에 태운 사람은 지나였다. 지나의 손에 이끌려 피난길에 오른 건지는 처음으로 '꿈'을 꾼다. 1년 내내 따뜻한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나무 열매를 따며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것.

건지는 재난 이후, 처음으로 마음속에 소중한 '꿈'을 품었다.

재난 이후, 많은 이들이 변했다. 두려움에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무자비하게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먹을 것과 돈이 되는 것을 약탈하고 전쟁을 일으키며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자 한다. '인간성'을 상실한 이들이 이 땅에 지어올리는 고통의 탑일 뿐이다.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불행에 지지않겠다는 희망, 죽고 사는 것보다 가치있는 사랑, 사람을 살게하는 유일한 '꿈'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아야한다. 재앙의 순간에도. 인간성을 잃고 목숨만 살아남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니까.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이들에게 닥친 재앙이 불가능한 가상의 일같겠지만, 우리에게 '죽음'은 늘 곁에 있다. 내가 지금 포기하고 있는 가장 가치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류처럼 돈 때문에 포기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건지처럼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다면, 미래의 불안에 잡아먹혀 있다면 죽음같은 내 인생의 재앙이 닥쳐왔을 때 내가 포기하지 않을 한 가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당신을 살게할테니까.

죽는 순간 나는 미소에게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을 부탁할 것이다. 내 사랑을 부탁받은 미소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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