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1 세미콜론 코믹스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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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변에 잘 정돈된 공원들이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주변에 산이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배낭에 물통을 가득 넣어서 심부름으로 약수물을 뜨러 산에 올라가곤 했다. 태어나서 초등학교 저학년때까지는 '인왕산'이 곁에 있는 홍제동에서 살았는데 할머니와 함께 약수터에 자주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그 산길이 무척 높고 가파르다고 생각했는데, 크고나서 생각해보니 아마 야트막한 동산 높이에 약수터가 있었던 것 같다. 추석이면 약수터를 지나 인왕산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솔잎을 따오기도 했다. 내가 딴 솔잎이 가득붙은 송편을 가족과 나누어 먹으며, 기특해하는 어른들의 칭찬 한 마디에 내 마음만큼은 풍성한 한가위를 보냈다.

 

어릴 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에 우리 식구까지 대가족이 함께 살다가 2학년 때 분가하여 개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개봉동에는 '매봉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약수터가는 길에 있는 미나리밭에서 친구들과 올챙이를 잡으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이면 가족과 함께 산에 올라가 밤과 도토리를 줍기도 했고, 겨울에는 물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얼어붙은 길에서 포대자루를 썰매삼아 하루종일 놀곤했다. 아빠가 밤나무를 마구 흔들어 떨어트린 밤송이를 발로 밟아서 알맹이만 주워모아 삶아 먹었던 따뜻한 밤이 아직도 생각난다.

 

이 작품이 만화뿐 아니라 영화로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은 것은 아마도 잊고 살았던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만화에는 모르는 일본 요리들이 많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정서는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단단한 토마토를 설탕에 절여 먹었던 간식, 엄마가 추운 겨울에 밥통에 찹쌀을 넣고 오랜 시간 정성들여 만든 후 밖에 놓아둔, 살얼음이 동동 떠있던 식혜. 이번 설에 시장에서 오랜만에 식혜를 사먹으면서 '우리 집도 식혜 안만들어 먹은지 오래되었네'하고 이야기했던 게 생각난다. 이제는 예전처럼 명절마다 왁자지껄 모여드는 가족들도 없고, 편리한 것이 최고로 여겨지지만 지금껏 나의 뼈대를 세우고 나의 살을 찌워 지금까지 자라게 한 것들은 아마도 할머니가 빚어주신 만두,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냉면, 세상에서 요리를 가장 잘하는 줄 알았던 엄마의 요리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할아버지 등을 꼭 붙잡고 타던 자전거에서 맞은 바람, 열심히 물을 주며 옥상에서 키웠던 상추와 고추가 상에 오를 때의 뿌듯함, 봄이면 꼭 심었던 봉숭아꽃을 빻아 손톱 위에 올려놓고 잤던 밤이 '나'라는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낸 모든 시간들일 것이다. 어쨋든 나는 토마토처럼 때론 연약하지만 단단하게 잘 자랐다.

 

<리틀 포레스트>가 그런 소중한 순간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 내가 으레 당연하게 먹고 자란 그 음식들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깨닫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의 이치코도 코모리에서의 생활이 그런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나저나 나는 엄마의 레시피를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바쁘게 산다고 또 잊어버리고,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다고 느껴지는 어떤 날 꺼내보면 좋을 것 같아서 눈에 잘 보이는 책장에 꽂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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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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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는 너무 어려서 이들이 역사의 심복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다. 계산을 분명히 하고, 역사의 법칙을 깬 사람들에게서 벌금을 걷기 위해 보내진 자들일 뿐이다. 원초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완전히 비인간적인 감정에서 행해진 일일 뿐이었다. 이제 시작 단계인, 아직 인정되지 않은 두려움 ─자연에 대한 문명의 두려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 힘없는 자에 대한 힘있는 자의 두려움에서 생겨난 경멸감.

 

에스타펜과 라헬이 그날 아침에 목격한 것은, 비록 그때는 몰랐지만, 지배권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이 보여주는, 통제된 조건(어쨌든 전쟁도, 집단 학살도 아니었다)에서 진행된 임상 실험이었다. 구조, 질서, 완전한 독점을 추구하는 본성. '신의 의도'로 가장한 채 어린 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역사였다. _p.422

 

 


 

 

이 책을 읽으면서 수 년전 방문했던 파키스탄이 많이 생각났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남북한처럼 인도라는 한 나라였다가 대다수를 차지했던 힌두교인들의 이슬람교를 박해하면서 독립 전쟁을 통해 분리된 국가가 파키스탄이다. 그러므로 인도는 힌두교, 파키스탄은 이슬람교라는 종교의 아래있는 종교 국가이다. 이 전에도 크고 작은 내전과 다툼은 끊이지 않았지만 지난 주 26일, 48년만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이 발발되었다. 여전히 내전과 외전이 끊이지 않고, 관습과 계급을 중심으로 사회가 움직이고 있다.

 

인도는 1947년 정부 수립 후 헌법에 의하여 '차별'이 금지되었으나 <작은 것들의 신>이 1997년에 쓰여진 이야기(배경은 1969년)라는 점을 생각하면, 여전히 인도사회에서 '카스트'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폐지할 수 없는 사회적 단위이자 체계로 봐야할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제도(계급)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이 여전히 그들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도(계급)와 관습이 한 가족의 삶을 어떻게, 얼마나 파괴해가는지를.

 

이 작품은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뀐’ 한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이 '단 하루'로 인하여 망가져 버린 가족의 모습을 먼저 보여준 후 그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들려준다. 영국에서 놀러온 외사촌 소피 몰의 익사, 누명으로 인하여 경찰에게 맞아 죽은 불가촉천민 벨루타, 집에서 쫒겨나 홀로 외롭게 죽어간 엄마 암무, 그리고 그 사건 속의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 이어지는 이별, 죄책감, 침묵. 결국 이 모든 사건이 카스트 제도에 억압받는 불가촉민과 남성중심적 사회에 억눌린 여성의 삶이 만나 관습에 의하여 처참하게 망가져버리는 인간의 삶이자 역사를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세습되어 온 관습에 지배되는 대수의 사람이 아닌, 불가촉천민 벨루타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친정에 얹혀사는 암무가 계급과 관습에 반하여 서로 사랑에 빠졌는지, 왜 다수와는 다른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인 파라반들은 가촉민의 집에 발을 들일 수도 그들이 만지는 것에 손을 댈 수 없었으며, 상대에게 오염된 숨결이 가지 않도록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해야만 했다. 가촉민이라 해도 여성은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았고, 상속권이 없기 때문에 있을 권리가 없는 곳에 머무르거나 폭력을 당해도 인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작은 것들의 신'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삶과 미래, 사랑과 죽음은 거대한 질서나 통념, 사회적 체면, 관습 같은 '큰 것(거대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이 행한 '작은 것'(그것이 옳은 것인지 상관없이)에 맞물려 결정된다는 것. 어쩌면 그들의 비극은 계급과 관습이라는 거대한 '큰 것'만이 아니라 베이비 코참마의 거짓 고발, 에스타가 엄마를 지키기 위해 했던 거짓말, 조의 죽음으로 영국에서 놀러 온 외사촌 소피 몰처럼 이들의 주변에서 행해졌던 '작은 것'들이 맞물리면서 이 비극이 필연이 된다.

 

카스트제도에 의하여 사랑할 사람과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 규정된다는 것, 공산주의, 종교, 카스트제도, 빈부라는 거창하고 무거운 역사 속에서 당시 일곱 살이었던 라헬과 에스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긴 시간이 지나 자신이 했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꿰어지고 또 살아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인하여 불가피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커다란 사건과 사랑, 죽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했던 그 작은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거지?

 

하지만 '작은 것들의 신'은 우리에게 비극만 가져다 주는걸까? 서로에게 '내일'밖에 기약할 수 없지만 사랑한 벨루타와 암무는 작은 것에 집착하며 그 순간들을 소중히했다. 자신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고, 미래도 꿈꿀 수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루는 기억의 조각들(에스타가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지며 기차에서 먹었던 도시락 샌드위치의 맛같은)처럼 이토록 작은 것들이 삶을 견디게 한다. 비록 거대한 권력과 힘같은 '큰 것'은 가지지 못했지만,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위무하는 벨루타와 암무의 사랑이 '작은 것들의 신'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나는 파키스탄에서 내가 배우고 겪어온 것들과 전혀 다른 문화들을 보았다. 세습되어 온 종교에 의하여 자신의 삶과 처지가 결정되는 관습, 혼자서는 집밖을 나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모습, 파키스탄과 인도의 전쟁으로 인한 위험과 이슬람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내전까지. 책상에 앉아 <작은 것들의 신>을 읽고 있는 나는 사실 상상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을 만큼 '다름'일 것이다. 이 작품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이 작품을 쓰고 부커상을 수상한 이후, 인도 사회와 도시 빈민, 카슈미르 분쟁, 환경문제 등 여러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그 시대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렇기때문에 아룬다티에게 이 이야기는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에게 이 이야기는 지구인이라면 '죽기 전에는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어떤 누군가는 지금도 이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당신의 삶, 미래, 사랑과 죽음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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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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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이 책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있기까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자서전이다. 1935년 헝가리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네 살때부터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자신의 모국이 독일과 소련에 의해 차례로 침략을 받게 된다. 독일이 지배할 때는 독일어를 배우고, 소련이 지배할 때는 소련어를 배우며 자란 환경은 그녀의 글쓰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이후 열아홉 살에 결혼해, 스물한 살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반체제 운동을 하던 남편과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의 뇌샤텔로 난민이 되어 이주한다. 가족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그녀는 생계를 위해 시계 공장에서 열 시간 넘는 노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유년기부터 청소년기, 그리고 헝가리를 떠나 스위스로 이주하기까지 끊임없이 ‘언어’를 잃고, ‘언어’를 배우는 경험을 한다. 『문맹』에서 그녀는 ‘문맹’을 벗어나고자 어떻게 끈질기게 글을 써왔는지를 보여주며, 적어’이자 새로운 언어인 프랑스어로 희곡과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글을 완성해나간다.

몇 년 전,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스위스의 동쪽은 독일어를 사용하고, 스위스의 서쪽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데 나는 여행을 하며 모국어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같은 나라의 사람이지만, 전혀 소통되지 않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독립적인 언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스위스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113p의 짧은 글이지만, 격동적이었던 그녀의 삶을 통해 작가에게 주어진 비극같은 현실 속에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난민의 언어로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사유에 대한 글이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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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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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베스트셀러를 보면 '위로'에 대한 키워드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현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정신적인 황폐함과 공허함으로 고통받고 있기때문이다. 부족할 것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정서적으로 소진되고 번아웃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자살, 고독사 등 그 어느 때보다 인간 존재의 무게가 바닥으로 떨어진 시대에 살고있다.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국가에서는 '인적 자원'이라는 말을 즐겨 쓰곤 한다. 인간도 에너지를 담고 있는 하나의 자원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이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하나의 인격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다른 사람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에너지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리고 체계 속에서 철저하게 조직되어 자신의 에너지를 최대한 내놓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인간 개개인을 기술적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끊임없이 에너지를 내놓도록 몰아대는 현대세계를 '하이데거'는 '몰아-세움의 세계'라고 한다. 인류상 가장 이성적인 세계인 것 같지만 하이데거는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로 보았다.

광기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내몰리고 무거워진 우리의 삶은 어떻게 해야할까?

 

 '존재한다'는 것
여기에서 '존재한다'는 말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존재 자체의 고유하고 성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전락시킨 현재는 존재를 상실한 시대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떠한 비교대상에 의해 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고유한 존재 자체로 신비하고 경탄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의식이 일상을 지배함에 따라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자신의 권태를 메우는 수단이나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호기심으로 전락한다.

우리의 삶은 왜 이토록 공허한가
현대인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순간에 일상에 쫓겨서 살고 있다. 학생은 공부에, 어른은 직장에, 온통 이런 일들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우리는 그 일과 관련없는 것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일상에 늘 '존재하는' 아름다운 꽃이나 푸르른 산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세계는 원래 경이로운 것이었지만 우리는 일상에 쫓기고 호기심, 잡담에 빠져 세계를 피상적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한 송이 꽃이 '존재'하는 것에, 푸르른 하늘이 '존재'하는 것에 경탄한 적있는가?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우리를 둘러싼 경이로운 모든 것들을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취급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은 사물들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면서 그러한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는 것에 의해서만 삶에 만족할 수 있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래 시인이며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해야 한다'말한다.

숲과 개울, 바위와 비, 바람처럼 우리를 둘러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경이로운 것으로 느끼고 그것들을 존중하며 살아야한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고 충만해지려면 이러한 사물들과의 관계가 참된 것이어야 한다.

 

장미는 이유없이 존재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사회에,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꿈'을 꾸기를 강요받고 자랐고, 강박적으로 '나의 필요'에 대해 의심하며 살아간다. 내 존재가 가치있는 사람인지, 내가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

과학도 마찬가지다. 한 송이 장미를 보고 과학은 꽃은 왜 피는지, 어떻게 하면 장미를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지 연구한다. 이렇게 근거를 파악함으로 장미를 인간에 통제하에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도 장미도 어떠한 '가치평가'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장미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꽃의 색이 유난히 예쁘거나 다른 꽃에 비해 꽃봉오리가 탐스러워서가 아니다. 단순히 그 존재 자체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우리의 일상이 타인과의 비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비교의식이 지배하는 삶은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타인들에게 예속된 채 그들의 자의와 변덕에 따라 휘둘린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타인의 시선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가 그들이 평가하는 대상으로 완전히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은 '나의 지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신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평온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가?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물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 특성으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러한 독특한 존재 성격을 '실존'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의 삶과 그 모든 일상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스스로의 존재와 세계 전체 앞에 불안해한다.
불안이라는 기분이 사로잡히면 '세상 사람'이 제시하는 가치와 나의 존재, 그리고 이 세계가 허망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존재'의 허망함이 아니라 세상 사람으로서 살아온 내 삶과 세상 가치에 따라 살아온 일상의 허망함일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어쩌면 우리가 꼭 지나야하는 연옥불 일지 모른다. 그 불안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깨닫고 세상의 가치대로 휘둘렸던 삶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짐스러워진 지금의 삶을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비교 의식과 불안을 내려놓고,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물들을 '존재'자체로 인식하고 소통하며 살아야한다.  ‘경이’란 길가에 피어 있는 풀 한 포기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자연과 사물 등 존재하는 모든 것에 기쁨을 느끼는 인간 고유의 감정이다.

우리는 언제나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어를 통해 존재의 소리를 구체화한다. 시인이 세상을 보듯, 세상 사람들의 잡담과 호기심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한 평정을 찾을 때 우리 삶은 은은한 기쁨으로 차오른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도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요즘말로 흔히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단어가 어쩌면 비슷한 의미일지 모르겠다. 자존감이 높다는 말을 대략 그 어떤 일에도 자신이 소중한 것을 알고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아마 그것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나 자체로 경이로운 존재이며, 누구보다 낫고 가치있어서가 아니라 그 존재만으로 경탄할 만하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도구화시켰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필요'와 '존재 이유'에 대해 의심했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필요하다는 인식인데, 이 질문부터가 나의 삶을 짐이 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접하고, 일상에 묻혀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열심히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수준이지만 존재자체로 '경이'로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으로 살아야 내 삶의 무게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인처럼 살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 삶이 짐스럽다고 느낀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하이데거가 당신의 시선을 바꿔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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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스릴러 - 스릴러는 풍토병과 닮았다 아무튼 시리즈 10
이다혜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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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으로서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심리가 여기 없는가 묻게 된다. 범죄물의 팬은 범죄를 소비하는가, 범죄의 해결을 소비하는가? 일상 미스터리 같은, 잔인함과 거리를 둔 듯 보이는 서브장르에서조차 ‘못된’ 심리를 전시하는 일을 종종 본다.

사건에 휘말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판단하는 일, 타인을 의심하고 자신의 명석함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일의 속성이 그렇다. 타인을 이리저리 재 판단하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이 장르의 독자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의심받는 사람들에 대한 온갖 정보가 작품 속에 나열되기 때문이다. _p.32


 

'스릴러'라는 장르는 누구에게나 호기심을 끌기 마련이다. 그것은 (살인과 같은) 자극적인 상황을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독자로 하여금 호기심어린 불안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도 <명탐정 코난>을 보고 자랐고, 추리소설을 꽤 좋아하며, <그것이 알고싶다>와 팟캐스트<크라임>을 빼놓지 않고 듣는 사람이지만 스스로에게 이 시대에 범죄물을 읽고 소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당연히)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예술'이라는 장르가 재미로 소비하면 그만이지만(그냥 즐기기만 해도 된다), 이다혜 기자의 말처럼 '스릴러'는 그곳의 사회문화적 풍토가 특정 방식의 사건을 만들고 사건 보도를 만들고 반응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스릴러 소설을 읽어가며 접하게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도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

나는 특히 '스릴러 소설'보다는 '논픽션 스릴러(실제 사건)'에 더 관심이 많은 편인데, 잔인한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에 특히 마음이 간다. 그리고 무력감이 든다.

얼마 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취재해 방송했던 것처럼 실제 일어나는 사건 중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경우 '우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로인해 감형되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는 경우는 지속적인 가정 폭력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정당 방위'로 인정된 경우는 아직 없다.

이러한 현실은 스릴러 소설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남성이 주인공인 작품에서는 법정 스릴러, 의학 범죄같은 전문적인 살인에 히어로같은 인물이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고,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정 폭력이나 외도가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실과 스릴러 소설이 전혀 무관하지 않기에, 우리는 문학이든 현실의 사건이든 바라보는 시선 뒤에 '사람'이 존재함을 기억해야한다. 자극적인 살해 방법과 시체가 아니라 그들도 우리 곁에 살아있던 누군가라는 사실. 그리고 '스릴러'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작품에 투영된 현실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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