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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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베스트셀러를 보면 '위로'에 대한 키워드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현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정신적인 황폐함과 공허함으로 고통받고 있기때문이다. 부족할 것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정서적으로 소진되고 번아웃되어 고통스러워하고, 자살, 고독사 등 그 어느 때보다 인간 존재의 무게가 바닥으로 떨어진 시대에 살고있다.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국가에서는 '인적 자원'이라는 말을 즐겨 쓰곤 한다. 인간도 에너지를 담고 있는 하나의 자원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람'이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하나의 인격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다른 사람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에너지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리고 체계 속에서 철저하게 조직되어 자신의 에너지를 최대한 내놓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인간 개개인을 기술적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끊임없이 에너지를 내놓도록 몰아대는 현대세계를 '하이데거'는 '몰아-세움의 세계'라고 한다. 인류상 가장 이성적인 세계인 것 같지만 하이데거는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로 보았다.

광기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내몰리고 무거워진 우리의 삶은 어떻게 해야할까?

 

 '존재한다'는 것
여기에서 '존재한다'는 말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존재 자체의 고유하고 성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전락시킨 현재는 존재를 상실한 시대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떠한 비교대상에 의해 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고유한 존재 자체로 신비하고 경탄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의식이 일상을 지배함에 따라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자신의 권태를 메우는 수단이나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호기심으로 전락한다.

우리의 삶은 왜 이토록 공허한가
현대인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순간에 일상에 쫓겨서 살고 있다. 학생은 공부에, 어른은 직장에, 온통 이런 일들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우리는 그 일과 관련없는 것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일상에 늘 '존재하는' 아름다운 꽃이나 푸르른 산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세계는 원래 경이로운 것이었지만 우리는 일상에 쫓기고 호기심, 잡담에 빠져 세계를 피상적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한 송이 꽃이 '존재'하는 것에, 푸르른 하늘이 '존재'하는 것에 경탄한 적있는가?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우리를 둘러싼 경이로운 모든 것들을 하나의 에너지원으로 취급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은 사물들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면서 그러한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는 것에 의해서만 삶에 만족할 수 있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래 시인이며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해야 한다'말한다.

숲과 개울, 바위와 비, 바람처럼 우리를 둘러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경이로운 것으로 느끼고 그것들을 존중하며 살아야한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고 충만해지려면 이러한 사물들과의 관계가 참된 것이어야 한다.

 

장미는 이유없이 존재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사회에,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꿈'을 꾸기를 강요받고 자랐고, 강박적으로 '나의 필요'에 대해 의심하며 살아간다. 내 존재가 가치있는 사람인지, 내가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

과학도 마찬가지다. 한 송이 장미를 보고 과학은 꽃은 왜 피는지, 어떻게 하면 장미를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지 연구한다. 이렇게 근거를 파악함으로 장미를 인간에 통제하에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도 장미도 어떠한 '가치평가'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장미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꽃의 색이 유난히 예쁘거나 다른 꽃에 비해 꽃봉오리가 탐스러워서가 아니다. 단순히 그 존재 자체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우리의 일상이 타인과의 비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비교의식이 지배하는 삶은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타인들에게 예속된 채 그들의 자의와 변덕에 따라 휘둘린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타인의 시선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가 그들이 평가하는 대상으로 완전히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은 '나의 지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신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평온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가?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물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 특성으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러한 독특한 존재 성격을 '실존'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의 삶과 그 모든 일상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스스로의 존재와 세계 전체 앞에 불안해한다.
불안이라는 기분이 사로잡히면 '세상 사람'이 제시하는 가치와 나의 존재, 그리고 이 세계가 허망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존재'의 허망함이 아니라 세상 사람으로서 살아온 내 삶과 세상 가치에 따라 살아온 일상의 허망함일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어쩌면 우리가 꼭 지나야하는 연옥불 일지 모른다. 그 불안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깨닫고 세상의 가치대로 휘둘렸던 삶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짐스러워진 지금의 삶을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비교 의식과 불안을 내려놓고,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물들을 '존재'자체로 인식하고 소통하며 살아야한다.  ‘경이’란 길가에 피어 있는 풀 한 포기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자연과 사물 등 존재하는 모든 것에 기쁨을 느끼는 인간 고유의 감정이다.

우리는 언제나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어를 통해 존재의 소리를 구체화한다. 시인이 세상을 보듯, 세상 사람들의 잡담과 호기심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한 평정을 찾을 때 우리 삶은 은은한 기쁨으로 차오른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도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요즘말로 흔히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단어가 어쩌면 비슷한 의미일지 모르겠다. 자존감이 높다는 말을 대략 그 어떤 일에도 자신이 소중한 것을 알고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아마 그것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나 자체로 경이로운 존재이며, 누구보다 낫고 가치있어서가 아니라 그 존재만으로 경탄할 만하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도구화시켰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필요'와 '존재 이유'에 대해 의심했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필요하다는 인식인데, 이 질문부터가 나의 삶을 짐이 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이데거의 철학을 접하고, 일상에 묻혀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열심히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수준이지만 존재자체로 '경이'로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으로 살아야 내 삶의 무게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인처럼 살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 삶이 짐스럽다고 느낀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하이데거가 당신의 시선을 바꿔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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