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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엄마가 돌아가셨을 무렵에는 온 동네가 회색으로 칙칙하게 보였고, 그 동네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나는 어디를 가든 엄마의 흔적을 찾고는,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렸다. 최근에야 겨우 세계에 아름다운 색이 돌아왔다.
어느 겨울 아침, 어머? 동백꽃 색이 이렇게 진하고 예뻤구나, 이파리도 진한 초록색이네, 하고 생각한 것이 계기였다. 동백꽃이라는 조그만 창문을 시작으로, 세계는 점차 색을 되찾아갔다. 매일 똑같이 걷고,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도, 보이는 세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그 색채감을 눈이 알아보게 되었다. _p.22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하느라 바빴다. 내 안에서 시간이 멋대로 오락가락해서, 숨이 막혀 왔다. 하지만, 엄마가 같이 와 줬다는 걸 떠올리자, 눈물이 똑 떨어지면서 무언가가 녹았다. 엄마는 내게 아이가 생긴 것도, 유산한 것도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병원에 같이 와 주었고, 신이치와 함께 데릴러 와 주기도 했다. 힘겨워하는 너 자신을 외면하면 안 돼, 하고 엄마는 말했다. _p.102
아직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나도 이제는 없어진 가족…… 신이치와 만들려 했던 가족과, 엄마가 없는 지금의 우리 집과…… 더 멀게는 신이치가 철저하게 실망해서 멀어진 신이치의 가족까지 포함해서, 마음속에 애매모호한 것과 뒤죽박죽인 것을 모두 껴안은 채로 천천히 자기 가족을 만들어 가자고 생각했다.
흐름이 나아가는 속도를, 아무리 세상의 속도가 빨라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눈앞의 매일에 차분하게 참가해서, 조금씩, 그래, 그가 말한대로, 달팽이처럼. _p.150
“어떻게든 되지 않는 일들뿐. 그런 것이 인생.”
미쓰코는 태어나서부터 '주주'라는 레스토랑를 운영하는 부모님을 도우며 자라 레스토랑을 자신의 가족이자 한 몸처럼 여기며 자랐다. 어릴 적부터 마당의 별채에서 지내며 함께 살아온 먼 사촌 신이치는 주주에서 고기를 구우며 가게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게 미쓰코와 신이치는 훗날 자연스레 결혼해서 함께 가게를 물려받아 평생을 함께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열일곱 살 무렵, 아이를 유산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관계가 깨져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지나 신이치는 결혼 후 가게를 물려받기 위해 돌아왔고, 얼마 전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와 신이치 셋이 레스토랑을 꾸려 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가게에 찾아와 김이 오르는 철판의 함바그를 보며 울을음 터뜨리는 남자, 그는 매주 수요일 '주주'에서 저녁을 먹던 서점 마야사키의 아들로 얼마 전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미쓰코는 왠지 통곡하며 들썩이는 그의 둥그런 등에 책임을 느꼈고, '앞으로 이 사람과 함께 하게 될 거'라고 직감한다.
색채가 사라지는 순간, 맛있는 음식은 위로가 되는 법
세상의 색채를 잃어버린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사실 그 때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 어느 순간 마주친 '하늘이 저렇게 파랬던가', '벌써 꽃이 피는 계절이었던가'하며 색채감이 돌아오는 순간에서야 깨닫게 된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게 인생'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미쓰코와 신이치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유산한 경험이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신이치에게는 어린시절 버린 후 찾지 않다가 가끔씩 찾아와 얼굴을 비추는 부모의 모습이, 미쓰코에게는 많은 것이 닮고 싶었던 엄마의 죽음이, 결혼 후 먼 곳에 살다 부모님이 죽고 서점을 물려받기 위해 돌아온 마야사키 또한 색채를 잃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주주'에서 맛있게 함바그를 먹으며 또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담담한 힘이 채워진다.
안녕, 나의 청춘. 그 가운데, 좀 슬펐던 부분이여.
색채가 사라진 흑백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으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요시모토 바나나는 '주주'를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맛있는 음식, 그 순간에는 미쳐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추억, 그리고 반복적인 일상이 주는 단단한 힘이라고 말한다.
미쓰코는 어릴 적 유산으로 찾았던 산부인과에 신이치의 부인인 유코와 함께 찾게 된다. 그리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당시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차오른다. 하지만 잊고 싶어 외면했던 그 기억 속에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가 같이 와 줬다는 걸 떠올리자, 눈물이 똑 떨어지면서 무언가가 녹았다. '힘겨워하는 너 자신을 외면하면 안 돼, 하고 엄마는 말했다.' (p.102) 힘들었던 순간 함께했던 엄마와의 추억들이 마쓰코에게는 새로운 힘이 된다. 어쩌면 유산의 아픔으로 인해 다시는 '가족'을 만들지 않을거라며 도망치게 되는 아픔이 아니라, 그럼에도 모든 것을 껴안고 나아가며 새로운 가족을 기대하게하는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아직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신이치와 만들려 했던 가족과, 엄마가 없는 지금의 우리 집, 더 멀게는 신이치가 철저하게 실망해서 멀어진 신이치의 가족까지 포함해서, 마음속에 애매모호한 것과 뒤죽박죽인 것을 모두 껴안은 채로 천천히 자기 가족을 만들어 가자고 생각했다. (p.150)
반복적인 일상이 주는 단단한 힘
내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일상의 힘'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일을 겪게 되면 스스로 반복했던 일상을 멈추고 도망치고 싶어한다. 하지만 마음은 혼란스러울지라도 단단하게 몸이 기억하고 있는 반복적인 일상이 힘도 존재한다. 매일 '주주'에 나와 가게를 쓸고 닦고, 손님을 받으며 세심하게 손님들의 마음을 살피는 것, 꼼꼼하게 가게를 정리하고 저녁에는 산책을 하며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남겨둔 만화책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것. 특별할 것 없지만 몸이 기억하는 반복적인 일상이 있기에 마쓰코는 무너지지 않고 견디며 마음을 추스른다.
사실 우리의 삶도 돌아보면 똑같은 하루하루의 반복이고 때로는 지루하다고 여기는 그 반복이 우리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다. 매일 먹는 식사에 집중하며 신선한 채소가 주는 신선함을 생각하고, 가끔하는 가족과의 외식을 기대하고, 또 내가 늘 해왔던 일을 오늘도 잘 해냈다는 만족감이 우리를 돌본다.
마음처럼 되는 건 원래 없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늘 반복되는 일상을 딛고 조금 다를 미래를 상상하며 살아가는 것, 이렇게 단순한 것이 우리가 모르는 진짜 '인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