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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평점 :
'문주'의 의미를 알아야 나의 역사도 시작될 수 있어서.
프랑스로 해외입양 되어 파리에서 배우이자 극작가로 살고 있는 '나나'는 생모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자신이 입양되기 전, 철로에 버려진 자신을 데려다 돌봐주었던 기관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멈춰 선 기차 앞에서 겁에 질려 울고 있던 신원 미상의 여자아이를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서나 고아원에 바로 보내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와 살던 집으로 데려가 문주라고 부르며 보호해주었다.
밥상 앞에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말해 준 유일한 어른,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안에는 팥이 들어 있고 겉에는 설탕이 뿌려진 납작한 만두 모양의 자줏빛 음식을 먹었던 기억. 한국의 대학생 서영은 나나의 입양 전 '문주'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하고, 나나는 임신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원을 찾고자 한국행을 결심한다. 자신을 '문주'라고 불렀던 사람을 찾기 위해.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내가 서영의 이메일을 끝내 복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서영이 기획한 영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면 나는 한국에서 만난 그 모든 사람들을 모른 채 살아갔을 것이고 그 삶은 가장 중요한 페이지가 없는 책처럼 공허했을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어떤 현재를 살든, 이제 나는 그들을 만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_p.17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행복했던 기억들보다다는 불안하고 두려웠던 어떤 날, 외롭다고 느끼거나 상처받았던 순간들이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 속 주인공 나나는 프랑스로 입양되어 자신과 외모가 다른 양부모와 함께 자란다. 물론 그 부부는 기꺼이 사랑으로 키워주지만 나나에게는 기억나지 않는 생모에 대한 기억과 자신을 일 년여 시간동안 돌봐준 기관사에 대한 기억이 숙제처럼 남아있다.
나나는 비어있는 자신의 기억을 상상으로 메워본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낳아 키워보지만 도저히 키울 수 없게 되어 청량리 철로 위에서 손을 놓고 도망치는 생모의 뒷모습과 자신을 문주라 부르며 돌봐주던 기관사가 자신을 고아원으로 보냈던 이유에 대해. 이 세상에 보호자 하나 없이 버려진 자신에 대한 연민과 그들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생애를 버텨온다. 그들을 다시 찾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당신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이유만으로.
테드 창의 단편 소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는 미래나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더 잘 알 수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혹은 미래로 간다고 해도 그것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인데, 나나에게 생모와 기관사를 찾는 일은 이와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서영은 나나에게 묻는다. "왜 철로라고 확신하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철로에 버려진 게 아니라 청량리역 근처를 헤매다가 철로까지 간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 살이나 네 살 아이라면 철로가 위험한지도 몰랐을 테니까요. 근데 애초에 버려진 곳이 철로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럼 어린 시절의 자신이 너무 가여워지잖아요."
수소문 끝에 찾아낸 기관사의 이름은 '정우식'이었다. 나나를 '정문주'라고 불렀던 것은 자신의 성을 딴 것이었다. 그는 이미 5년 전 지병으로 사망해서 만날 수 없었지만, 그의 딸과 연락이 닿았는데 딸의 이름은 '문경'이었다. 기관사는 '문경'의 이름을 지으며 '문주'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나를 데려와 키웠을 때 정우식 기관사의 나이는 서른 하나,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생판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결혼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전국의 고아원을 다니며 혹시나 아이를 학대하지는 않을지 잘 키워줄 수 있는 곳을 오랜시간 고르고 골랐다고 했다. 그리고 문경에게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정우식 기관사가 나나를 처음 발견한 곳은 철로가 아니라 대합실이었다.
어쩌면 철로는 생모를 미워하기 위해 내가 구축한 관념의 공간인지도 몰랐다. 그건,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를 봉쇄하는 근원적인 미움이었을 것이다. 철로라는 매정한 공간이라면 그녀의 순진한 악도 그곳에 남게 되니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은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미워하는 힘으로 살아왔으며, 그녀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버린 선택을 용서할까 봐 두려워했던 건지도 모른다. _p.193
얼마나 많은 손길들이 당신을 자라게 했는지.
나나가 한국에서 지내게 된 서영의 원룸 일층의 '복희식당' 주인은 나나가 어릴 적 먹었던 '안에는 팥이 들어 있고 겉에는 설탕이 뿌려진 납작한 만두 모양의 자줏빛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임신한 나나를 위해 수수 부꾸미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아기 가졌을 땐 무거운 거 드는 거 아니야.”라는 환대와 보호의 말로 나나를 위로한다.
복희는 내게 늘 음식을 해 주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녀만큼 내 입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가져 준 사람은 없었다. 복희의 음식은 하나같이 맛있었고 이곳이 나의 고향이자 친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_p.134
우리의 생애가 항상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상황적 환경적으로도 충만하게 보호받고 자란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단순한 진심』은 아픔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인생에서 그 '아픔'에 집중하느라 잊혀진 배려받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를 되짚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을 더욱 이해하게 된 것이다.
생모에 대한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단지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이유로 기관사와 그의 어머니가 일 여년의 시간동안 나나를 보호하고 호의를 베풀었던 것. 양부모 앙리와 리사의 보호와 사랑, 뱃속의 아이를 향해 음식을 해준 복희의 선의와 서영, 소율, 은의 배려들은 우리 또한 자라면서 셀 수 없이 받아왔던 것들이다. 우리가 단지 단지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내 이름을 짓고 같은 성을 붙여 부르며 기뻐했을 나의 가족, 길에서 넘어지면 번쩍 들어올려 울음을 달래주던 동네 아저씨, 부모님이 바쁘실 때 저녁밥을 챙겨주던 이웃, 우린 더 좋은 기억들을 선택해서 가질 수 있다. 당신을 아프게 한 기억보다, 당신을 자라게 한 수많은 손길들을 잊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