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 기본적인 송가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38
파블로 네루다 지음, 김현균 옮김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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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다.” ─ 파블로 네루다


그저 나도 숨 쉬고 너도 숨 쉰다는

단순한 이유로 나 행복하게,

네 무릎을 만진다는

이유로, 그건 마치 하늘의

푸른 살갗과 그 싱그러움을

만지는 것만 같아서,

나 행복하게 내버려 다오.


―「행복한 날을 기리는 노래(Oda al dia feliz)」에서


'파블로 네루다'라는 시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속의 장면 중 하나인데, 네루다는 1969년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이슬라 네그라를 떠나있는 동안 우체부 마리오에게 부탁하여 녹음된 소리를 듣는 장면이다. 


지금부터는 원하시던 소리들입니다.

첫째,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바람 소리. (바람 소리가 일분쯤 계속된다)

둘째, 제가 이슬레 네그라 종루의 큰 종을 울리는 소리. (종소리가 일곱 번 울린다)

셋째, 이슬라 네그라 바윗가의 파도 소리. (아마도 폭풍우가 치던 날에 녹음한 듯, 바위에 거세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편집한 것이다)

넷째, 갈매기 울음소리. (이 분간 기묘한 스테레오 음이 난다. 녹음한 사람이, 앉아 있는 갈매기들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새들을 놀래 날려 보낸 듯하다. 그래서 새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절제미가담긴 무수한 날갯짓 소리 역시 들을 수 있다. 중간에 사십오 초 지날 즈음에 마리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염병할, 울란 말이야."라고 소리 지른다.)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이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호텔 책상에 앉아서 이 '소리'에 귀기울이며 생각에 잠겨있는 네루다의 모습을 상상했다. 격동과 파란의 칠레 현대사 앞에서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시인의 바람은 번번이 좌절되지만, '시'는 삶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나누어먹는 빵과 같다'고 말하던 그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는 올해 출간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작품 중 하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이 시집이 당시 지역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시라는 점에서였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라는 마리오의 질문처럼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시로 썼다. 옷과 토마토, 양파 등의 소박한 일상 사물에서부터 기쁨과 슬픔, 질투와 평온 등의 감정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시에 담았다. 그리고 자신의 시가 가족들과 빵을 먹는 식탁 위에서 읽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뉴스'면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시'로 노래하고, 자신의 시선은 늘 민중의 삶을 향했던 것, 그래서 지금도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그의 시를 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살아있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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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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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의 의미를 알아야 나의 역사도 시작될 수 있어서.


프랑스로 해외입양 되어 파리에서 배우이자 극작가로 살고 있는 '나나'는 생모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자신이 입양되기 전, 철로에 버려진 자신을 데려다 돌봐주었던 기관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멈춰 선 기차 앞에서 겁에 질려 울고 있던 신원 미상의 여자아이를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서나 고아원에 바로 보내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와 살던 집으로 데려가 문주라고 부르며 보호해주었다.


밥상 앞에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말해 준 유일한 어른,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안에는 팥이 들어 있고 겉에는 설탕이 뿌려진 납작한 만두 모양의 자줏빛 음식을 먹었던 기억. 한국의 대학생 서영은 나나의 입양 전 '문주'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하고, 나나는 임신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원을 찾고자 한국행을 결심한다. 자신을 '문주'라고 불렀던 사람을 찾기 위해.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내가 서영의 이메일을 끝내 복구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서영이 기획한 영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면 나는 한국에서 만난 그 모든 사람들을 모른 채 살아갔을 것이고 그 삶은 가장 중요한 페이지가 없는 책처럼 공허했을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어떤 현재를 살든, 이제 나는 그들을 만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_p.17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행복했던 기억들보다다는 불안하고 두려웠던 어떤 날, 외롭다고 느끼거나 상처받았던 순간들이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 속 주인공 나나는 프랑스로 입양되어 자신과 외모가 다른 양부모와 함께 자란다. 물론 그 부부는 기꺼이 사랑으로 키워주지만 나나에게는 기억나지 않는 생모에 대한 기억과 자신을 일 년여 시간동안 돌봐준 기관사에 대한 기억이 숙제처럼 남아있다.


나나는 비어있는 자신의 기억을 상상으로 메워본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낳아 키워보지만 도저히 키울 수 없게 되어 청량리 철로 위에서 손을 놓고 도망치는 생모의 뒷모습과 자신을 문주라 부르며 돌봐주던 기관사가 자신을 고아원으로 보냈던 이유에 대해. 이 세상에 보호자 하나 없이 버려진 자신에 대한 연민과 그들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생애를 버텨온다. 그들을 다시 찾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당신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이유만으로.


테드 창의 단편 소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는 미래나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더 잘 알 수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혹은 미래로 간다고 해도 그것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인데, 나나에게 생모와 기관사를 찾는 일은 이와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서영은 나나에게 묻는다. "왜 철로라고 확신하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철로에 버려진 게 아니라 청량리역 근처를 헤매다가 철로까지 간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 살이나 네 살 아이라면 철로가 위험한지도 몰랐을 테니까요. 근데 애초에 버려진 곳이 철로라고 단정해 버리면, 그럼 어린 시절의 자신이 너무 가여워지잖아요."


수소문 끝에 찾아낸 기관사의 이름은 '정우식'이었다. 나나를 '정문주'라고 불렀던 것은 자신의 성을 딴 것이었다. 그는 이미 5년 전 지병으로 사망해서 만날 수 없었지만, 그의 딸과 연락이 닿았는데 딸의 이름은 '문경'이었다. 기관사는 '문경'의 이름을 지으며 '문주'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나를 데려와 키웠을 때 정우식 기관사의 나이는 서른 하나,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생판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결혼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전국의 고아원을 다니며 혹시나 아이를 학대하지는 않을지 잘 키워줄 수 있는 곳을 오랜시간 고르고 골랐다고 했다. 그리고 문경에게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정우식 기관사가 나나를 처음 발견한 곳은 철로가 아니라 대합실이었다.


어쩌면 철로는 생모를 미워하기 위해 내가 구축한 관념의 공간인지도 몰랐다. 그건,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를 봉쇄하는 근원적인 미움이었을 것이다. 철로라는 매정한 공간이라면 그녀의 순진한 악도 그곳에 남게 되니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은 내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미워하는 힘으로 살아왔으며, 그녀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버린 선택을 용서할까 봐 두려워했던 건지도 모른다. _p.193


얼마나 많은 손길들이 당신을 자라게 했는지.


나나가 한국에서 지내게 된 서영의 원룸 일층의 '복희식당' 주인은 나나가 어릴 적 먹었던 '안에는 팥이 들어 있고 겉에는 설탕이 뿌려진 납작한 만두 모양의 자줏빛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임신한 나나를 위해 수수 부꾸미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아기 가졌을 땐 무거운 거 드는 거 아니야.”라는 환대와 보호의 말로 나나를 위로한다.


복희는 내게 늘 음식을 해 주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녀만큼 내 입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가져 준 사람은 없었다. 복희의 음식은 하나같이 맛있었고 이곳이 나의 고향이자 친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_p.134


우리의 생애가 항상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상황적 환경적으로도 충만하게 보호받고 자란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단순한 진심』은 아픔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인생에서 그 '아픔'에 집중하느라 잊혀진 배려받은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를 되짚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을 더욱 이해하게 된 것이다.


생모에 대한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단지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이유로 기관사와 그의 어머니가 일 여년의 시간동안 나나를 보호하고 호의를 베풀었던 것. 양부모 앙리와 리사의 보호와 사랑, 뱃속의 아이를 향해 음식을 해준 복희의 선의와 서영, 소율, 은의 배려들은 우리 또한 자라면서 셀 수 없이 받아왔던 것들이다. 우리가 단지 단지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내 이름을 짓고 같은 성을 붙여 부르며 기뻐했을 나의 가족, 길에서 넘어지면 번쩍 들어올려 울음을 달래주던 동네 아저씨, 부모님이 바쁘실 때 저녁밥을 챙겨주던 이웃, 우린 더 좋은 기억들을 선택해서 가질 수 있다. 당신을 아프게 한 기억보다, 당신을 자라게 한 수많은 손길들을 잊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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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의 여름
이윤희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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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마음속을 괴롭히는 게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마. 그 마음하고 막 싸우고 왜 그런지 물어보고 따져 보고. 그래야 네가 거기서 배우게 될 거야.


BOOK. 《열세 살의 여름》


여름 방학을 맞아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일하는 아빠가 계신 곳으로 여름휴가를 떠난 해원은 바닷가에서 우연히 같은 반 남자아이 산호를 만나 수줍음에 숨어버리지만, 바람에 날아간 해원의 모자를 산호가 찾아주며 처음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키워간다. 고백하는 것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같은 반에 좋아하는 사람 있냐는 친구의 질문에 "응!"하고 숨기지 않는 해원, 짓궂은 남자아이들 장난에 축구공을 맞은 해원에게 밴드를 건네는 산호, 진솔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해원에게 건네는 우진이의 모습이 풋풋하고 사랑스럽다. 때때로 해원이었고, 때로는 우진이었고, 때로는 려희였던 우리의 열세 살.


열세 살의 '좋아하는 마음'은 너에게 가장 특별한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을지 모른다. 해원은 산호가 단지 같은 반이어서 잘해주는 것이 아닐까 심술을 부리다가도 고양이 하트를 통해 둘만의 공감을 통해 마음을 주고받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다. 해원을 몰래 좋아한 우진은 마음을 감추고 해원과 짝꿍이 되길 지목하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고작 짓궂은 장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진심을 담은 편지를 쓰고 해원의 성장을 지켜봐 주는 친구로 남았다. 때로는 해원과 우진의 사이를 질투하는 려희로 인해 따돌림을 당해야 했던 해원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비밀과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짝 친구와의 교환일기를 통해 주눅 들지 않고 마음을 다잡는다.


열세 살의 나에게는 수정이와 아영이가 있었다. 몇 가지 떠오르는 기억은 내 생일이 3월 초여서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떨리는 마음으로 초대했는데 흔쾌히 우리 집에 와서 엄마가 만들어준 피자를 먹고 생일 축하를 해줬던 기억이 난다. 학교를 마치고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수정이네 아파트 근처의 방방을 타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같이 있어 놓고 교환일기 밀린다고 서로를 독촉하기도 하고, 주번인 날에는 같이 기다려주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 '지금의 나'는 열세 살의 내가 누군가를 수줍게 좋아하고, 친구들이 내 생일파티 초대에 거절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선생님께 혼나는 게 억울했던 것들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교환일기에 적고 또 위로받으며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와 함께해 준 친구들이 있어 열세 살의 누군가를 공감하고 기분 좋은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것이 고마웠다.


​요즘 애들은 유치원생들도 연애를 한다는 언니의 말에 남자친구 있냐고 초등학생 조카를 놀리기도 했다. 아마 그 마음 한편에 '너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는 아니?'라는 마음으로 귀엽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진짜 '좋아한다'라는 순수한 마음은 나보다 이 아이들이 더 잘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좋아하는지 친구들과 소곤대고 용기 내 고백도 해보고 단짝 친구와 비밀도 나누어야 이 아이들도 자란다. 그래서 이제는 꼬마들의 연애를 진지하게 응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시간이 지나야 다양한 감정을 공감하고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랄 테니까.


​무료한 어떤 날,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야?라는 생각으로 지나가는 일상들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어린 날의 순간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니, 지금 내가 읽는 책과 생각, 만나는 사람들이 또 미래의 나를 만들 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 나와 함께하고 있는 당신이 '미래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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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클래식 컬렉션 세트 - 전4권 - 작은 아씨들 × 빨강 머리 앤 × 작은 공주 세라 × 하이디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이자 메이 올콧 외 지음, 고정아 외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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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짊어져야 할 작은 짐에 대해 조언을 해줄게. 때로는 짐이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짐은 우리에게 유익한 거야. 짊어지는 방법을 깨달으면 점점 가볍게 느끼게 된단다. ─ 「작은 아씨들」 중에서


기대하는 게 즐거움의 절반이에요. 원하는 일이 결국 안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걸 기대하며 누리는 즐거움은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 「빨강 머리 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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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예문으로 나오는 책들이 사실을 얼마나 다양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중요한 질문들을 품고 있는지 그 때는 조금도 몰랐던 것 같다. 선생님이 이 작품은 중요하니까, 이 부분은 꼭 알아야 한다, 라고 강조한 작품들이 그렇게 별 다섯 개로 외워서는 안되는 작품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후 알게 되었다. 왜 어른들은 '꼭 읽어야하는 문학 작품'이라고 강조해놓고 우리가 그 작품들을 진실되게 만나고 고민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했을까.


작은 아씨들, 빨강 머리 앤, 작은 공주 세라, 하이디. 걸클래식 컬렉션은 예쁜 디자인에 혹해 읽고 싶다기보다는 갖고 싶다는 마음이 컸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이 책을 읽었던가? 어쩌면 이 작품을 축약본 줄거리로 밑줄 그으며 읽었던 것이 내가 아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주말 만화로 챙겨보며 나와 함께 자란 빨강 머리 앤이 말하는 ‘아침을 기대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앤의 말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자신이 공주라 생각하며 역경을 이겨내는 세라에게서 자존감을 지키는 법과 나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품는 데 물질보다 정신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프스에서 살아가는 그의 순수한 영혼과 삶 자체가 진짜 살아가는 행복을 알려준다는 것을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읽히는 작품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제목만, 줄거리만, 축약본으로만 읽고 그 책을 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그래서 나는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시작은 '하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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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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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고한 남성의 세계에 살던 한국 남성이 쓴  『두 번째 페미니스트』와 나이지리아라는 제3세계 국적의 한 여성이 쓴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남/녀의 다름이나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보다 우리는 어떤 생각과 의식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할까? 라는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에서 작가는 시의 세계를 사랑하는 문학지망생에서 시각장애인 애인을 사랑하며 결혼을 준비하고, 아기를 품에서 키우며 돌봄을 도맡는 ‘남성 아내’로 변화하기까지 과정 속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나 모두가 인지하지 못하는(못하는 척하는) '불편한' 지점들을 고민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작가는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성과, 수많은 타자들(LGBTQ, 장애인)과 함께 살 수 있게 도와준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고백한다.


여성들에게 '꽃'에 관련한 비유 사용하지 않기, 청소년들에게 '애들'이라든가 '친구들'이라는 표현 쓰지 않기, 식당이 가서 '이모'라고 부르지 않기, 외모와 관련해서 말하지 않기,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반말하지 않기. 머릿속에 금칙어를 넣고 다니면 일상에서 말들이 덜그럭거린다.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리고 정의한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경계는 내 세계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진술했다. 니체는 "언어의 감옥에서 사유하기를 거부하려면 사고를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언어를 돌보기 위해 혀를 멈추면서, 내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오늘도 탐색해본다. 


─ 『두 번째 페미니스트』 중에서


사실 나는 꽤 둔하고 이기적인 편이라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많이 고민해보지 않은 부분들이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불편함'들이 내가 지닌 이중적인 잣대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꽤 놀랍기도 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에서 아디치에는 인간 사회의 기본인 ‘차이’에 대해 ‘혐오’의 시선을 덧씌우지 않도록 가르치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차이에 대한 '불편한 지점'에 대해서, 수많은 타자들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들의 '다름'과 그 다름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


최근에 읽었던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남편이 아내를,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는 폭력적인 모습을 자주 마주하고 불편함을 느꼈다. 그 때마다 내가 읽던 책에 이러한 폭력은 늘 등장했는데 그동안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왔던 걸까, 생각했다. 주변 일상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인 상황들이 문제로 인식되지조차 못했던 때가 분명 있었으니까. 문학 작품에 묻어나오는 (전 세계적인) 시대상에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들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러한 '불편한 지점'들에 주목하고 문제시하는 누군가들이 있었기 때문일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불편한 지점들에 대한 생각들이 분명 긍정적으로 변화해가고 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고민했으면 하는 불편한 지점들도 있다. 이미 한국은 단일 민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혈 아동에 대한 차별이나 다른 인종에 대한 혐오, 국제결혼이라는 이름의 인신매매. 우리는 정말 나와 타자들 모두 동등하게 귀한 존재라는 시선을 가지고 있을까?


너의 페미니즘적인 전제는 이것이어야 해. 나는 중요하다. 나도 똑같이 중요하다. ‘~하다면 중요하다.’도 아니고, ‘~하는 한 중요하다.’도 아니야. 나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것으로 끝. 다른 수사 여구는 필요 없어. 


─ 『엄마는 페미니스트』 중에서


이 두 권의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여성과 장애인, 미성년자, 이민자에게 가해 왔던 ‘소수자’라는 차별적 시선에 대해 다양한 입장에서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에서 아디치에는 딸에게 말한다. "너의 페미니즘적인 전제는 이것이어야 해. 나는 중요하다. 나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 말은 곧 "너는 중요하다. (당신이 여성, 장애인, 미성년자, 이민자 등 '수많은 타자들' 일지라도) 너도 똑같이 중요하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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