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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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교육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신은 왜 일을 하나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지. 먹고 살 다른 방도가 있었다면 나는 일을 하지 않았을테니까. 하지만 이 대답은 정답이 아니었다. 꿈을 이루고, 성취감을 느끼고, 자아실현을 하는, 지금 들으면 조금 허황되고 추상적인 말들. 회사는 그런 마인드를 요구했다. 십여 년 전만해도 우리는 '일'을 성공과 성취의 수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2005년에 출간된 박민규 작가의 『카스테라』를 보면 '일'이란 생존의 수단으로 여겨진다. 출근 시간 신도림역에서 푸쉬맨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나.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중략) 영차, 영차, 무언가 물컹하거나 무언가 딱딱한 것들을 마구마구 밀어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찌 내 입으로 그것이 인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p.74) 실제 안전선은 지하철 밖에 존재했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봉급, 여전한 할머니의 약값, 발생될 엄마의 치료비... 아버지의 눈동자가 그토록 잿빛이었던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뭐랄까, 전지가 떨어진 계산기의 액정과 같은 그런 잿빛이었다. 이제, 계산이 안나온다. 나도, 계산이 서질 않았다.'(p.84) 해가 바뀔수록 자본주의 경쟁 체제는 극도로 심해졌고 IMF가 끝난 이후에도 이어지던 경제난은 끝날 줄 몰랐다. 당장 자신의 일자리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어 매년 새롭게 절망했다. 그런 시기들을 겪고나니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떠한 노력으로도 바뀌지 않을 자신의 계급에 대한 냉소적 인식,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고 인간을 굴욕적으로 만드는 세계, 어른들이 말하는 꿈이나 희망 열정 등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시대였다.


그러나 2019년 장류진 작가가 바라본 세상은 어떨까?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유명 뮤지션의 내한 공연을 성사시키고 특진을 약속받았으나 공연 소식을 개인 SNS에 가장 먼저 올리지 못해 토라진 회장의 심술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는 인물이 등장한다.


"굴욕감에 침잠된 채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억지로 출근해서 하루를 보낸 그날 저녁, 이상하게도 거북이알은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포인트로 모닝커피 마시고, 포인트 되는 식당에서 점심 먹고, 포인트로 장 보고, 부모님 생신선물도 포인트로 결제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더 보내고 나서 그녀는 모든 것을 한결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p.51)


열심히 노력하면 삶이 극적으로 나아지리라는 꿈 같은 건 아무도 꾸지 않는 시대, 그렇지만 완전히 절망하지도 않은 상태. 실제로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가 짠 코드랑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p.60) 지금 시대의 노동은 내 생활, 내 기호, 내 취미와 분리되어 철저하게 생계수단으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게 되었다. 일과 나 자신은 동일하지 않다고, 내 기쁨과 즐거움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일의 기쁨과 슬픔'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감정이다. 그래서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일을 하는 동안의 감정, 일의 댓가를 통해 얻는 기쁨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는, 내 아버지에게는,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일'은 무엇일까?


시대별로 다양한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노동문제를 들여다본다면 그 시대에 우리가 품었던 다양한 시선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2019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현 시대를 정확히 반영하는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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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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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1월, 켄터키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는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녀의 삼촌이자 노예 출신인 조 카이트의 집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추격에 나선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들이 집을 포위해 끝내 붙잡힐 지경에 처하자,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베어버리고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후 재판에 회부된 그녀의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마거릿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여 딸을 죽인 살인죄로 처벌해야 할지, 도망노예법에 따라 잃어버린 재산으로 취급하여 무죄방면을 해야할 지 논쟁이 일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거릿 가너는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재판받지 못하고 노예로 생을 마쳤다. 그리고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1983년, 토니 모리슨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빌러비드』를 썼다.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참혹한 기억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조차 박탈당한 채 살아갔던 'be loved'들을 위해서.



한 사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무엇보다 단단하고 방어적인 마음을 해체할 수 있는 잠잠하고 커다란 사랑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상처를 직면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고, 그 고통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스러워 차마 기억할 수 없었고 잊을 수도 없었던 고통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치유될 수 있다. 외면하고 묻어둔 고통과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빌러비드』는 이렇게 시작한다. '124번지는 한이 서린 곳이었다. 갓난아이의 독기가 집안 가득했다.' 누구도 말하지 않지만 124번지에는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잠재되어있다. 세서는 그저 모른 척 유령의 장난을 감내하며 18년이란 시간을 묵묵히 견뎌왔다. 그러다 도망치기 전 노예로 생활하던 '스위트홈'에서 함께 일한 폴 디와 재회하게 되고, 젊은 여자의 육신을 입은 죽은 아기 '빌러비드'가 돌아온다.



당신과 헤어진 후에, 남자들이 찾아와서 내 젖을 빼앗았어. 그 때문에 왔던 거야. 날 눕혀놓고 젖을 빼앗았지. 가너 부인에게 그 얘기를 했어. 목에 혹이 나서 말은 못했지만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 그 남자들이 내가 자기들 얘기를 했다는 걸 알았어. 학교 선생이 남자 하나를 시켜서 내 윗옷을 벗겼어. 다시 옷을 입었을 때, 등에는 나무가 생겼지. 그 나무가 여태 거기서 자라고 있어. (p.36)



아프리카에서 사냥되거나 팔려온 미국 흑인 노예들은 남부농장에 투입되어 강제 노동을 하였고 흑인 노예들은 자유인의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야만적이고 진화되지 못한 존재로 취급되어 살해, 매질, 낙인 찍기, 신체 절단, 쇠 재갈과 쇠사슬 착용 등으로 학대당하고 희생되었다. 더욱이 흑인 여성들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이중 억압에 노출되어 성적착취를 당하거나 번식하여 주인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노동을 제공하는 '가치있는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세서에게 엄마의 기억은 일하는 뒷모습과 목이 메달려 죽은 모습 뿐이었고, 갖은 수치와 채찍질을 당하고나자 아이들만큼은 자신처럼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세서는 이십팔 일 동안 노예가 아닌 삶을 살았다. 어린 딸아이의 맑고 순수한 침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진 순간부터 끈끈한 피 속으로 흘러들어가기까지의 이십팔 일이었다. 치유와 안락함, 진정한 대화의 나날이었다. 누군가는 바느질을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모두가 새벽에 눈을 떠 그 날 뭘 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기분이 어떤지 가르쳐주었다. (p.159)



세서는 폴 디와의 만남을 통해 스위트홈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과거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빌러비드에게 자신이 아이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게 된다. 124번지에 도착한 지 이십팔 일만에 자신을 찾은 노예사냥꾼을 마주한 순간, 자신이 어떻게 아이들을 보호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해.



세서가 자신의 과거를 직면하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자신이 아이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고통에서 치유되는 과정은 비단 세서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빌러비드』를 쓸 당시 '마거릿 가너'의 사건은 미국 사회에서뿐 아니라 흑인 사회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었다. 모두에게 잊혀진 고통스럽고 참혹한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어 상기시키는 것, 그리고 흑인들에게 과거의 노예제와 고통받던 시절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은 모두에게 상처를 헤집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묻어둔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빌러비드』는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남아있는 백인 중심적 가치관을 버리고 흑인들이 다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 바로 여기에 우리 몸이 있습니다. 웃고 우는 몸, 맨발로 풀밭에서 춤을 추는 몸, 이 몸을 사랑하세요. 열심히 사랑하세요. 저기 저들은 여러분의 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몸을 경멸합니다. 여러분의 눈을 사랑하지 않아서 당장 뽑고 싶어하지요. 여러분의 등가죽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저기 저들은 등가죽을 벗겨내지요. 오, 내 동포들이여, 저 자들은 여러분의 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멋대로 써먹다가 밧줄로 묶고 사슬에 채우고 자르고 빈손으로 버릴 뿐입니다. 여러분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세요. (중략) 이것이 내가 말하는 몸입니다. 사랑받아야 하는 몸, 휴식을 취하고 춤을 춰야 하는 발, 기대야 하는 등, 두 팔이 있어야 하는 어깨. 튼튼한 두 팔 말입니다. (p.149)



1993년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토니 모리슨은 "나는 혼자 몰두해서 자신의 상상력을 글로 옮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작품은 정치적이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이 작품은 누군가에게 치유의 시작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변화의 시작이 되었을 거라 믿는다.



이 작품에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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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게일 허니먼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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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 전에 한 기도원을 찾아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곳은 깊은 산 속에 있었는데, 하루의 일과는 세 번의 식사와 두 번 면담이 전부였다. 그 외의 모든 시간은 자유였다. 그저 산책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생각에 잠기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나는 나를 향해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깊은 산 속 두 평 남짓한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에도 그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엘리너는 매주 수요일 엄마로부터 전화가 온다. 엄마는 다정한 듯한 목소리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어보지만, 엘리너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너는 영리하지 않아, 엘리너. 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사람이야. 신뢰를 주지 않는 사람. 실패한 사람. 오, 그래,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그리고 네가 어떻게 끝날지도 알고 있어.(p.173)' 엘리너는 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필요로 할 때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순간들을 감춰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기억들을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고, 문득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괜찮았다. 상담 시간이 되었고 목사님은 내게 '가장 행복한 기억'에 대해 들려 달라고 말했다.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한참을 망설이다 요즘, 이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모른 척 웃어 주었다. 난 매일 두 번 찾아오는 그 시간이 두려웠다. 나에게도, 엘리너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직면하기 어려운 마음 속 깊은 곳의 어두운 방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엘리너는 완전 괜찮다. 나이는 거의 서른 살, 직장에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휴게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크로스워드 퍼즐을 맞추고, 금요일 퇴근 길에는 테스코에 들러 마르게리타 피자와 보드카를 구입해 라디오를 들으며 주말을 보낸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 수준을 갖췄고, 계획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을 살았다. 어느 날, 퇴근 길에 말을 걸어오는 동료와 함께 걸어가던 중 길에서 쓰러진 노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직장 동료 레이먼드는 노인을 구급차로 이송하고 엘리너에게 노인의 짐을 가지고 병문안을 와줄 것을 부탁한다. 엘리너의 빈틈없는 일상에 돌발적인 균열이 생겼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노인과 유쾌한 그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엘리너는 이런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엘리너는 어린 시절 화재로 엄마와 헤어졌고, 그후 위탁 가정을 여럿 전전하며 지내왔다. 마음둘 곳 없이 모든 것을 혼자 겪어야 했던 엘리너가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않고 완벽히 혼자만의 삶 속에서 편안함을 느껴 왔던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린 엘리너에게는 회피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을테니까.


이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 감정의 강렬함과, 감정이 변할 수 있는 빠른 속도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중이다. 지금까지는 감정과 느낌이 나를 흔들어 불안하게 만들 것 같은 위험이 감지되면 언제라도 그 감정을 훅 들이켜서 삼켜버렸다. 그 덕분에 내가 존재해온 것이겠지만, 이제는 내가 그 이상의 뭔가를 필요로 하고 또 원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_p.396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십 억 명 중에 한 명, 특별히 눈에 띄는 것도 없고 서툴기만 한 평범한 사람들이 이 땅에 함께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 각자는 불완전하지만 누군가에게 손 내밀어 주고, 누군가의 손을 붙잡을 때, 서로 함께 마음을 나눌 때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엘리너는 우연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사회와 단절하여 살아남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뭔가를 원하게 되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 상처받더라도 누군가와 교감하는 것, 누군가 내민 손을 잡아보는 것을.


도움을 준 노인의 퇴원 파티에 참석해 가족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고, 누군가를 위해 그의 필요를 고민하며 선물을 준비하기도 하고, 레이먼드와 종종 점심 약속을 잡아 함께 식사를 하고, 친구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모든 것들이 엘리너에게는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지만, 서툴게 조금씩 함께하는 기쁨을 배워간다. 그리고 레이먼드는 댓가 없는 진심어린 마음을 주며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목소리는 또다시 찾아온다.


아프고 슬펐던 기억은 그 무엇보다 강렬해서 때론 모든 기억을 지배하기도 한다. 나는 기도원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릴 때부터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짚었다. 할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마을을 돌았던 기억, 동네 아주머니들이 자주 안아주며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던 기억, 어린 동생이 태어나던 때,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할머니댁으로 심부름을 가며 뿌듯해 했던 순간, 100점을 맞아서 가족들에게 시험지를 꺼내보였던 순간. 상처로 남은 기억은 진실을 대면하기 두렵게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상처는 내 두려움의 크기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고통스러웠던 사건들에 압도되어 행복했던 기억들을 잊었기 때문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조금은 달라졌음을 느꼈다.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의 작가 게일 허니먼은 신문 기사에서 한 젊은 여자가 금요일에 퇴근하면 월요일 출근할 때까지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내용을 보고 엘리너를 구상했다고 한다. 당신의 이번 주말은 어땠는가? 그리고 당신은 정말 괜찮은가? 엘리너는 말한다. '우리가 이 녹색과 푸른색의 눈물 계곡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만큼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리 요원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라고.


내가 느낀 건 이것이었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의 따스한 무게, 그의 미소에 녹아 있는 진심, 아침에 해를 보자마자 꽃잎을 펼치는 꽃처럼, 뭔가가 활짝 열리는 부드러운 열기.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내 가슴속에 남은 상처 입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저 약간의 애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작은 공감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_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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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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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그날, 비가 내리던 2008년 7월 14일.

제야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버려진 컨테이너인 아지트로 향한다. 컨테이너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려던 찰나 제야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 늘 다정하고 친절하게 굴던 당숙을 만난다. 그는 사춘기 시절을 이해한다며 대화를 건네던 중 돌변하여 제야를 성폭행한다. 제야는 그 사실을 엄마에게 알리지만 '소문나면 네 인생 망친다'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제야를 탓했다. 제야는 당숙이 또다시 같은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산부인과와 경찰서를 찾아가 성폭행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지만, 제야의 호소에는 증거가 없고 당숙은 서로 합의하에 관계를 맺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남자가 큰 일하다보면 실수할 수 있다는 말로 부모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은 합의한다. 결국 제야는 버려지듯 강릉으로 도망쳐 혼자 사는 이모와 함께 지내게 된다.


우리는 왜 약자의 편에 서지 못했을까

그루밍 성폭력이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과 신뢰를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제야의 경우에도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당숙은 종종 선물을 건네기도 하고, 때론 친구들과의 문제로 주눅이 들어있을 때는 제야의 좋은 점을 말해주며 격려해주기도 했다. 제야는 당숙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당숙이 갑자기 돌변해 강간을 저질렀고, 그 후 제야는 길을 지나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 중 갑자기 돌변하여 공격할 누군가를 두려워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었다. 아무도 제야의 목소리를 믿어주지 않았다.


저항하면 죽을 것 같았다고 제야는 소리를 질렀다. 강간이 잘못이지 반항하지 않은 게 어떻게 잘못이냐고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학생. 학생 말하고 행동하는 거 보면 전혀 피해자 같지 않아. 그냥 당하고만 있었을 것 같지 않다고.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젯밤에 그 남자 앞에서 그랬어야지. p.116


2017년 기준 3,195명이 아동·청소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강간범죄 가해자 중 77.4%가 가족·친척 포함한 지인이라고 밝혔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집행유예 처분에 그쳤으며 아동 성폭행 형량 평균 5년정도 였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실제 사건이었다면 제야도 집행유예 처분에 그친 77.4%의 강간 사건에 속하는 수많은 피해 아동 중 한 명일 것이다. 제야와 같은 약 이천 여명의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는 무엇을 듣고 자라는가?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우리가 말하는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가치 있고 긍정적인 존재로 평가하는 개념을 말한다. 우리의 자존감은 어떻게 형성될까? 우리가 듣고 자란 말들이 우리를 형성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제야는 어떻게 자랐을까? 제야는 당숙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후 가족과 친척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평가하는 말들을 듣게 된다.


"나조차도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걸. 무슨 뜻인지 알겠니?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이 쌓일수록 나는 나를 의심하게 되었어. 내가 그럴 만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몰아세웠어. 내가 겪은 사건만큼 나란 존재 자체가 끔찍했지."(p.223)

  

제야의 상처는 언제 치유될 수 있을까

범죄를 저지르면 재판을 통해 징역형이 내려진다. 하지만 대중의 심리와 법리적 해석은 다른 경우들이 있다.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가 그런데, 아동 청소년 성폭력 사건의 절반이 집행유예를 받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우리가 범죄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범죄를 잊지 않고 반복적으로 회자하며 스스로 자신의 죄를 잊지 않고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형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피해자를 향하여 그러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제야의 마음을 치유하는 첫걸음은 우리의 시선이 범죄자를 향하는 것이다. 사업을 하고 결혼을 하며 아무일 없는 것처럼 지내는 당숙과 달리 가족들에게서 멀어진 것은 제야였다. 적어도 우리는 약자와 한 편에 서서 날카로운 비난의 시선을 범죄자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은 피해자가 아니라 범죄자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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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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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영화를 그리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명세 감독의 <M>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강동원, 공효진, 이연희 주연의 이 영화는 감독과 주연의 명성에 비해 그리 흥행하지는 못했다. 영화의 주인공 한민우(강동원)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최근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면서 잦은 불면에 시달리며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찾은 바 루팡에서 보라색 옷을 입은 한 소녀를 만나며 잊고 지냈던 첫사랑 미미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이미지로 표현한 장면들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가 지닌 '기억'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나를 평생 고통스럽게 했던 기억은, 사실 사소한 사건이 크게 부풀어진 기억일 수 있으며, 우리가 아름답게 여기고 소중히 간직하는 기억(첫사랑, 첫만남 등등)은 미화되기 마련이라고. 이 영화 속 한민우는 루팡에서 만난 소녀를 통해 과거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복원해가며 아름다웠던 과거 기억을 보여주는 한편, 이를 소재로 글을 쓰며 보태진 상상과 합쳐지며 기억과 상상의 세계가 혼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한민우가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상상하는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뒤바뀌는 과정을 영화라는 장르로 보여주며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지 보여주는 부분이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영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임현의 『당신과 다른 나』를 읽으며 동일한 충격과 쾌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신과 다른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부터 무너져가는 결혼생활과 마침내 내가 아닌 나의 삶과 만나는 순간 겪게 되는 정체성의 붕괴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기억'은 실존과 얼마나 동일한가?


실제로 거기에 무엇이 있었든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그런 게 아닐까요. p.70


이 소설은 홀수 장과 짝수 장의 화자가 다르다. 홀수 장의 화자 '아내'는 제약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최근 극도로 건망증이 심해져 자주 무언가를 잊더니 급기야 키운 적 없는 강아지를 잃어버렸다고 연락을 한다. 하지만 아내는 상황을 설명할 수록 남편은 오히려 아내를 아픈 사람 치부하고, 아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 다 소설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짝수 장의 화자 '소설가'는 어느 날, 자신의 남편과 닮았다고 말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남편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가짜였으며 보험금을 노리고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여자의 사연을 듣고 영감을 받아 소설로 써 낸다. 그러나 출간 몇 달 뒤, 소설의 내용과 대사를 그대로 적은 글과 남편(소설가)의 사진을 첨부하여 '내 남편을 찾는다'는 글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이 무얼 기억하든 그런 사람은 없어. 연구실 같은 건 없어. 당신이 기억하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그냥 그것 모두 다 이 소설일 뿐이잖아. 내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그렇다고 믿는 이야기들일 뿐이라고. p.109


아내는 건망증이 심해져가는 남편을 걱정했으나 실은 자신이 믿고있던 남편이 모두 허구였다.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 속 이야기라고 믿었던 기억이 자신의 실체와 혼동되어 간다. 계속해서 뒤바뀌어가는 실존과 가상, 삶과 허구의 경계가 옅어지는 과정이 이 소설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정말 '실존'했던 것일까? 영화 M의 한민우가 지닌 첫사랑에 대한 기억과 집필 중인 소설의 사이에서, 소설 『당신과 다른 나』에서 소설가인 내가 기억하는 자신의 삶과 자신을 닮았다는 남편의 사기극을 듣고 쓴 소설 사이에서 어떻게 기억의 경계를 정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기로 결정한 것들일 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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