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게일 허니먼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평점 :
삼 년 전에 한 기도원을 찾아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곳은 깊은 산 속에 있었는데, 하루의 일과는 세 번의 식사와 두 번 면담이 전부였다. 그 외의 모든 시간은 자유였다. 그저 산책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생각에 잠기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나는 나를 향해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깊은 산 속 두 평 남짓한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에도 그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엘리너는 매주 수요일 엄마로부터 전화가 온다. 엄마는 다정한 듯한 목소리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어보지만, 엘리너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너는 영리하지 않아, 엘리너. 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사람이야. 신뢰를 주지 않는 사람. 실패한 사람. 오, 그래,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그리고 네가 어떻게 끝날지도 알고 있어.(p.173)' 엘리너는 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필요로 할 때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순간들을 감춰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기억들을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고, 문득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괜찮았다. 상담 시간이 되었고 목사님은 내게 '가장 행복한 기억'에 대해 들려 달라고 말했다.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한참을 망설이다 요즘, 이라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모른 척 웃어 주었다. 난 매일 두 번 찾아오는 그 시간이 두려웠다. 나에게도, 엘리너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직면하기 어려운 마음 속 깊은 곳의 어두운 방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엘리너는 완전 괜찮다. 나이는 거의 서른 살, 직장에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휴게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크로스워드 퍼즐을 맞추고, 금요일 퇴근 길에는 테스코에 들러 마르게리타 피자와 보드카를 구입해 라디오를 들으며 주말을 보낸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 수준을 갖췄고, 계획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을 살았다. 어느 날, 퇴근 길에 말을 걸어오는 동료와 함께 걸어가던 중 길에서 쓰러진 노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직장 동료 레이먼드는 노인을 구급차로 이송하고 엘리너에게 노인의 짐을 가지고 병문안을 와줄 것을 부탁한다. 엘리너의 빈틈없는 일상에 돌발적인 균열이 생겼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노인과 유쾌한 그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엘리너는 이런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엘리너는 어린 시절 화재로 엄마와 헤어졌고, 그후 위탁 가정을 여럿 전전하며 지내왔다. 마음둘 곳 없이 모든 것을 혼자 겪어야 했던 엘리너가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않고 완벽히 혼자만의 삶 속에서 편안함을 느껴 왔던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린 엘리너에게는 회피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을테니까.
이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 감정의 강렬함과, 감정이 변할 수 있는 빠른 속도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중이다. 지금까지는 감정과 느낌이 나를 흔들어 불안하게 만들 것 같은 위험이 감지되면 언제라도 그 감정을 훅 들이켜서 삼켜버렸다. 그 덕분에 내가 존재해온 것이겠지만, 이제는 내가 그 이상의 뭔가를 필요로 하고 또 원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_p.396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십 억 명 중에 한 명, 특별히 눈에 띄는 것도 없고 서툴기만 한 평범한 사람들이 이 땅에 함께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 각자는 불완전하지만 누군가에게 손 내밀어 주고, 누군가의 손을 붙잡을 때, 서로 함께 마음을 나눌 때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엘리너는 우연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사회와 단절하여 살아남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뭔가를 원하게 되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 상처받더라도 누군가와 교감하는 것, 누군가 내민 손을 잡아보는 것을.
도움을 준 노인의 퇴원 파티에 참석해 가족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고, 누군가를 위해 그의 필요를 고민하며 선물을 준비하기도 하고, 레이먼드와 종종 점심 약속을 잡아 함께 식사를 하고, 친구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모든 것들이 엘리너에게는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지만, 서툴게 조금씩 함께하는 기쁨을 배워간다. 그리고 레이먼드는 댓가 없는 진심어린 마음을 주며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목소리는 또다시 찾아온다.
아프고 슬펐던 기억은 그 무엇보다 강렬해서 때론 모든 기억을 지배하기도 한다. 나는 기도원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릴 때부터 '행복했던 기억'들을 되짚었다. 할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서 마을을 돌았던 기억, 동네 아주머니들이 자주 안아주며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던 기억, 어린 동생이 태어나던 때,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할머니댁으로 심부름을 가며 뿌듯해 했던 순간, 100점을 맞아서 가족들에게 시험지를 꺼내보였던 순간. 상처로 남은 기억은 진실을 대면하기 두렵게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상처는 내 두려움의 크기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고통스러웠던 사건들에 압도되어 행복했던 기억들을 잊었기 때문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조금은 달라졌음을 느꼈다.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의 작가 게일 허니먼은 신문 기사에서 한 젊은 여자가 금요일에 퇴근하면 월요일 출근할 때까지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 내용을 보고 엘리너를 구상했다고 한다. 당신의 이번 주말은 어땠는가? 그리고 당신은 정말 괜찮은가? 엘리너는 말한다. '우리가 이 녹색과 푸른색의 눈물 계곡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만큼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리 요원해 보일지라도 언젠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라고.
내가 느낀 건 이것이었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의 따스한 무게, 그의 미소에 녹아 있는 진심, 아침에 해를 보자마자 꽃잎을 펼치는 꽃처럼, 뭔가가 활짝 열리는 부드러운 열기.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내 가슴속에 남은 상처 입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저 약간의 애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작은 공감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_p.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