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과 다른 나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평점 :

평소에 영화를 그리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명세 감독의 <M>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강동원, 공효진, 이연희 주연의 이 영화는 감독과 주연의 명성에 비해 그리 흥행하지는 못했다. 영화의 주인공 한민우(강동원)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최근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면서 잦은 불면에 시달리며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찾은 바 루팡에서 보라색 옷을 입은 한 소녀를 만나며 잊고 지냈던 첫사랑 미미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이미지로 표현한 장면들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가 지닌 '기억'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나를 평생 고통스럽게 했던 기억은, 사실 사소한 사건이 크게 부풀어진 기억일 수 있으며, 우리가 아름답게 여기고 소중히 간직하는 기억(첫사랑, 첫만남 등등)은 미화되기 마련이라고. 이 영화 속 한민우는 루팡에서 만난 소녀를 통해 과거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복원해가며 아름다웠던 과거 기억을 보여주는 한편, 이를 소재로 글을 쓰며 보태진 상상과 합쳐지며 기억과 상상의 세계가 혼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한민우가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상상하는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변형되고 뒤바뀌는 과정을 영화라는 장르로 보여주며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지 보여주는 부분이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영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임현의 『당신과 다른 나』를 읽으며 동일한 충격과 쾌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신과 다른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부터 무너져가는 결혼생활과 마침내 내가 아닌 나의 삶과 만나는 순간 겪게 되는 정체성의 붕괴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기억'은 실존과 얼마나 동일한가?
실제로 거기에 무엇이 있었든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그런 게 아닐까요. p.70
이 소설은 홀수 장과 짝수 장의 화자가 다르다. 홀수 장의 화자 '아내'는 제약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최근 극도로 건망증이 심해져 자주 무언가를 잊더니 급기야 키운 적 없는 강아지를 잃어버렸다고 연락을 한다. 하지만 아내는 상황을 설명할 수록 남편은 오히려 아내를 아픈 사람 치부하고, 아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 다 소설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짝수 장의 화자 '소설가'는 어느 날, 자신의 남편과 닮았다고 말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남편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가짜였으며 보험금을 노리고 벌인 사기극이었다는 여자의 사연을 듣고 영감을 받아 소설로 써 낸다. 그러나 출간 몇 달 뒤, 소설의 내용과 대사를 그대로 적은 글과 남편(소설가)의 사진을 첨부하여 '내 남편을 찾는다'는 글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이 무얼 기억하든 그런 사람은 없어. 연구실 같은 건 없어. 당신이 기억하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그냥 그것 모두 다 이 소설일 뿐이잖아. 내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그렇다고 믿는 이야기들일 뿐이라고. p.109
아내는 건망증이 심해져가는 남편을 걱정했으나 실은 자신이 믿고있던 남편이 모두 허구였다.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 속 이야기라고 믿었던 기억이 자신의 실체와 혼동되어 간다. 계속해서 뒤바뀌어가는 실존과 가상, 삶과 허구의 경계가 옅어지는 과정이 이 소설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정말 '실존'했던 것일까? 영화 M의 한민우가 지닌 첫사랑에 대한 기억과 집필 중인 소설의 사이에서, 소설 『당신과 다른 나』에서 소설가인 내가 기억하는 자신의 삶과 자신을 닮았다는 남편의 사기극을 듣고 쓴 소설 사이에서 어떻게 기억의 경계를 정의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기로 결정한 것들일 뿐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