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불에 타 사라졌다.

몇 백년이나 된 문화재가 그렇게 쉽게 파괴되는 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

 



하지만 최근 일련의 모습들은 뜨끔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민족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떠들어 대고,

그 앞에서는 연일 제삿상이 차려져 수 많은 사람이 절을 한다.

삼보일배를 하며 주위를 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통곡을 하며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도 보인다.

불을 지른 사람은 반역자 취급을 받고,

덩달아 노숙자들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늘도 하루종일 사람들이 꽃을 가져와 그 앞에 두고 있다.

마치 사람이 죽은 것처럼.

 


 

무생물의 인격화.

그리고 사실 그 인격화의 대상은 국가, 혹은 국가정신.

참 무서운 전체주의, 국가주의의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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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본 칭기즈칸이 말했다.
 

"고양이를 어디에다 쓰지? 털도 못 쓰고, 젖도 못짜는데 말이야."

 

 

어쩌면 요즘 사람들은


단지 화사함을 위해
 

지나치게 많은 고양이들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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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사진은 아닙니다..;;


 

 배구 경기 중계를 보다가ㅡ

'비디오 판정'이라는 게 나왔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비디오 판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퍽이나 들어보이는게 아닌가.

사실 비디오 판정이란 게

심판이 눈으로 정확히 보지 못한 것을

영상을 이용해 정확히 판단하려고 만든 것.

그렇다면 얼마나 영상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그러면 비디오 전문가나,

적어도 눈이 좋은 젊은이들에게 맡기는 게 맞지 않을까?

물론 오랜 배구계 생활을 통해 '노련함'이 쌓일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차피 그 '노련함'으로 판결이 어려운 사안을 커버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면

아예 더욱 철저하게 하는 게 낫다.

 

 

 

선수들이 항의를 하니까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던

비디오 판정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당연히(?) 영상과는 반대로 항의하는 선수들에게 불리한 판정이 나왔다.

 

 

 

뻔히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건ㅡ

비디오 판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쁘던지,

그것도 아니면

일에서까지 자기 기분을 앞세울 정도로 고집만 부리는

자기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일 터.

 

 

 

연장자 대우도 좋고,

경력자 예우도 좋은데,

꼭 이런 식으로 한 자리씩 안겨주는 게 능사일까?

그 노련함과 완숙함, 경력과 공로를

좀 더 멋지게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어디 스포츠계 뿐일까.

우리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장(長)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물론 나이가 많다는 건 충분히 공경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만,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한 자리씩 가져가는 건

조직을 경직시키고,

원칙과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하며,

종종 정말 일하려고 하는 사람의 의욕을 꺾을 뿐이다.

 

 

 

논공행상 식의 자리 나눠주기가 아니라

연장자 예우 격의 처분이 아니라

정말 일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고 그 조직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될 사람이,

조금 더 바란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일 하는 자리에 앉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참 멋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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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당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의식 속에서

나의 존재가 제거되었다는 뜻이다.



무시는 인격적인 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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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라..

제목이 좀 선정적(?)이다.

저으기 걱정을 했지만,

몇 사람에게 물어본 결과 괜찮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용기를 얻어 글을 쓰기로 해 본다. ^^;






남극탐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큰 위협이 되는 것들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블리자드(귀에 익숙한 사람들도 있을 듯. ㅋ)라고 하는 것으로,

맹렬한 눈보라를 말한다.

눈보라니 만큼 당연히 차가운 바람.

속도도 상당히 빨라서 초속 14m를 가볍게 돌파한다.

일단 블리자드가 심해지기 시작하면,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탐험을 중지하고 서둘러 텐트를 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나마 텐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텐트가 순식간에 눈으로 덮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눈 자체의 무게도 엄청나다.

계속 눈을 치워내지 않으면 텐트가 무너지는 것도 잠시.






두 번째로 위험한 것은 크랙, 혹은 크레바스이다.

이것은 본래 같은 현상인데,

크랙보다 크레바스가 훨씬 규모가 큰 것을 가리킨다.

크랙은, 한 마디로 얼음의 균열이다.

약 30m 정도 까지의 균열을 크랙이라고 부르고,

그 이상의 것을 크레바스라고 하는데,

그런 크랙, 혹은 크레바스만 있다면 돌아가면 되지만,

대개는 그 위에 살짝 눈이 덮혀있다는 것이 문제다.

탐험을 하던 사람이 그 위를 걸어서 넘어가려고 하면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극지방에서는 물에 젖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영하 10도, 20도는 가볍게 넘어버리는 극지방이니만큼,

물에 젖는 다는 것은 몸이 얼어서 생명에 지장까지도 줄 수 있는 심각한 사태이다.

혹시라도 물에 젖게 되면, 바로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한다.






세 번째로 위험한 것은 화이트아웃(Whiteout)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남극은 온통 흰 색으로만 가득차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 그림자나 물체간의 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거리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바로 이 현상이 화이트아웃이다.








일단 이 화이트아웃이 발생하게 되면,

전후좌우, 상하가 온통 구별이 되지 않는다.

단지 중력에 의해 내 발이 붙어 있는 곳이 아래일 가능성이 높고,

내 눈이 바라보고 있는 쪽이 앞 쪽일 것이라는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감각 중 하나인 시각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내가 보는 것이 올바로 보는 것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 현상은 사람 뿐만 아니라 새들도 겪는 것으로,

화이트아웃이 발생할 경우에는 많은 새들이 얼음벽에 부딛혀 부상을 입기도 한다.





전후좌우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

내가 보는 것조차 신뢰할 수 없는 상태,

바로 여기서 사람은 서서히 미쳐가게 된다.

전문가들이 아니라면 이런 화이트아웃을 직접 겪을 경우

매우 심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전문가들도 아니면서 남극탐험을 나설 각오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정신에 문제가 있을지도.. ㅡㅡ;)






수형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형벌은

소위 '먹방'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차피 똑같이 감옥인데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죄를 저질렀다고 가둬두는 곳이 교도소라면,

그 안에서 또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두는 곳이 먹방이다.

감옥 속의 감옥, 그 곳이 바로 먹방인 것이다.






왜 먹방이라는 곳이 그토록 무서울까.

이미 감옥에 갇혀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자리 하나를 옮긴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심각한 위협이 될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먹방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먹방은 우선 외부와의 일체의 연결이 단절되는 곳이다.

다른 재소자들이 있는 곳과도 완전히 분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 조차 듣기 어려운 곳이 바로 먹방이다.

보통 감옥 내에서 '사고'를 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면회를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밖과 연결시켜주는 것은 고작 가로, 세로가 25 X 20 cm 정도 되는 작은 식구통(식사를 넣어주는 통) 밖에 없다.

그 곳에서 하루종일을 몸조차 쭉 펼수 없는 채로 보내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 것은 둘째다.

가장 무서운 것은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것 이외의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온통 깜깜한 어두움 뿐이다.

교도소가 자유에 대한 형벌이라면, 먹방은 감각에 대한 형벌이다.






자신의 감각기관이 별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서서히 감각기관을 사용하기를 포기해버린다.

더불어 외부의 자극(자극이라는 것이 없으니..)에도 반응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와는 반대급부로 한없이 내부로 파고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지간히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가지 못해 매우 무력한 상태로 변해버린다.

심리상태는 매우 불안정하게 변하고,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이는 일도 있다.

결국 자신을 그 곳에 집어 넣은 사람들의 지시에 고분고분히 따르게 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요컨대,

인간의 감각을 무력화 될 때,

인간은 한없이 약해진다.

정신력도 서서히 소진되어 버리고,

말 그대로 서서히 미쳐간다.






정신병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얀 집'이다.

영화나 책 등에서 드러나는 정신병원의 이미지는,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방이다.

실제로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왜 흰 색으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환자의 정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색깔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온통 흰 색으로 도배를 한 곳에 사람이 있으면, 정신이 안정될까?

마치 앞에서 설명한 화이트아웃을 접하는 기분은 아닐까?

그것도 잠시만 참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환자의 감각 중 시각은 이미 그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그 것 뿐인가.

환자는 억압복을 입는다.

억압복은 소매가 아주 긴 옷으로, 그 긴 소매를 몸 뒤로 돌려서 단단히 고정시키는 곳이다.

억압복을 입는 순간 환자는 두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은 두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촉각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는 혀를 깨물어 자해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공이 붙어 있는 마스크를 씌우기까지 한다.

구속복을 입는 것 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정신병원에서는 환자의 안정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체의 소음을 없앤다.

청각의 상실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은 중증환자들에게 사용되는 방법이다. 모든 정신질환자들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감금상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자칫 정신병원 자 체에 대한 오해를 할 소지가 있어서 밝힌다. 정신질환은 뇌에 발생된 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이것은 위나 근육 등에 생긴 병과 마찬가지로 취급 되어야 한다. 따라서 약물치료와 함께 특정한 심리적 치료를 병행하면서 치료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정신병원이 얼마나 큰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모든 감각을 자극하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는 것 만으로도,

인간은 미쳐버릴 수 있다.






인간이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하얀 방 안에 아무런 소리도 없이 혼자 있다고 생각해보라.

또는 쥐죽은 듯 적막하고 깜깜한 빈 강의실에 혼자 남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공포 영화에서 가장 무섭고 긴장되는 순간은,

귀신이나 살인마가 스크린에 비췰 때가 아니라

그들이 나타나기 직전의 적막함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 반대진술도 가능하다.

인간이 미치지 않으려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말 말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오감을 통한 자극들은,

때로 우리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가시에 찔리고, 시끄러운 소음에 인상을 찌뿌리고,

짜고 쓴 맛, 신 맛을 보기도 하고, 온갖 벌레에 물리기도 한다.

정신적인 자극들도 때로 인간들을 힘들게 만든다.

갑자기 생긴 수많은 일들, 그로 인한 스트레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소중한 대상의 상실 등은

인간을 자살로까지 모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 안식을 갈구한다.

힘든일 하나 없는 그런 삶,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 하나 없는 삶,

내가 원하는대로 모두 술술 풀려가는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 평안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의 삶은 행복해질까?







어쩌면,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그 수많은 일들은,

우리를 미치지 않도록 만드는 고마운 이유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당신의 사고력이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찢기고, 긁히고, 찔리면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당신의 촉감이 아직은 정상이라는 반증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막게 만든다면,

아직 당신의 귀가 붙어있고, 제대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리타분한 말 같지만,

당신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우선 이 글을 지금까지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시각과 사고력은 어느정도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당신이 꿈꾸는 절대 평화로운 유토피아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딛히고, 각종 위험이 우리를 위협한다.

바로 그런 곳이 이 세상이다.

또, 만약 그러한 외부적인 자극이 전혀 없다면

당신은 정말 미쳐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현재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들에 대해 감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미쳐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면,

좀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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