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서울대 교수진이 추천하는 통합 논술 휴이넘 교과서 한국문학
공지영 지음, 황미옥 그림, 방민호 논술 / 휴이넘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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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005)

공지영 / 소설 / 푸른숲



   
  "산의 빛깔이 달라졌어요.
모든 건 그대로인데 노란빛이 어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공기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이게 봄인가봐요.
제가 다시 이 봄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제 인생의 마지막 봄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제게는 이게 제 인생에 첫 번째 봄인 것만 같은 착각이 자꾸 듭니다."

윤수의 편지 p.179
 
   

가슴이 저린다는 표현을 이런 때 쓰면 적절할까.
책을 읽으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이미 유명해질대로 유명해 진, 영화까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지 1년도 훨씬 넘은 지금
새삼스레 뒷북을 치고 있는 것도 웃기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어보지 못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 지금이라도 읽은 게 다행이다 싶다.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을 가진 두 사람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서로의 상처와 치부를 드러내고 교감하게 되기까지,
그들이 거기에 그렇게 있게 되기까지 작용한 수많은 요소들은
분명 '운명'이라고 하기엔 억울한 여러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을 것이다.
궁색스레 글로 풀어낼 필요조차 없는,
하지만 '몰랐다'는 말로 그냥 묻어버리기엔 너무 뾰족하고 자잘한 문제들이
그들의 주변에, 우리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어찌 보면 또 그 덕분에 세 사람을 살해한 남자와, 세 번 자기를 죽이려고 시도했던 여자가 만날 수 있었고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지만.
이미 단단하게 굳어져 있어 한 인간의 '진실'만으로 녹일 수 없는 이 사회 속에서
그들이 함께 맞이하는 봄은 다시 찾아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살아있다 보면 언젠가는 변화하기 마련이다.
생애 마지막 봄과 생애 첫 봄이 같은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든 움직여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걸 다 가져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남들 다 가진 것을 빼앗겼어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부르고, 가난은 또다른 가난으로 이어진다.'
해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이같은 명제의 사례를 보이기 위해 소설에 등장한,
잘 나가는 집안의 막내딸인 젊은 여교수, 남들 다 가진 목숨 마저 내놓은 젊은 사형수의 삶의 대비는
비교조차 어려운 대상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앓았던 병명은 '애정결핍'이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마음이 치유할 수 있는 병의 종류는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마음을 발동시키고 전이시키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지만
인간의 마음이 부족해 발생하는 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든다.
이것을 과연 우리가 '몰랐기' 때문에 실천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여력'이 없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을 뿐.
누추한 내 마음을 부끄러워 하거나 무능한 사회에 분노하는 것이
기껏 '위선'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위선'이 '위악'보다는 낫다지 않은가.
겸손한 위선자라도 되어 마음 속으로 매일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서하며 살아갈 일이다.

영화 이야기도 역시 빼놓을 수가 없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는,
강동원과 이나영이라는 비현실적 신체비율을 가진 두 배우가 출연했던 그 영화는,
소설이 가진 미덕을 해체하고 그저 보기 좋게 다듬어진,
알 수 없는 트렌디한 분위기를 풍기는 영화로 둔갑했었던 것 같다.
물론 소설을 보기 전이어서 그 영화를 볼 당시에도 엄청 울어대긴 했지만
역시 스크린에 전부 보여질 수 없는, 입 밖으로 내뱉는 대사에 전부 담길 수 없는,
그 이상의 절절함과 묻혀진 사연들, '진짜 이야기'가 소설 안에는 있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내내 윤수와 유정의 얼굴에 강동원과 이나영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현상까지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소설은 진했고 또 깊었다.
문장과 대사 사이의 빈틈을 영상을 회상하는 것으로 훌륭하게 메울 수 있었으니
그건 또 영화를 먼저 본 것 나름대로의 장점이라고 할까.

영화는 그저 윤수와 유정의 영화였다.
하지만 소설 속 메시지를 완성하는 것은 윤수와 유정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었던 모니카 수녀와 이주임,
삼양동 할머니, 셋째올케 서영자, 큰오빠, 외삼촌, 김신부님 모든 주변인물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미처 얼굴이 주어지지 않았던 그들에게서
삶의 진정한 다양한 표정들이 나오고
그들로 인해 윤수는 그의 말대로 '단풍처럼' 아름답게 갈 수 있었고
유정은 자신의 삶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인간의 감각은 눈을 통해서, 그 중에서도 이성은 글을 통해서, 또 문장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 같다.
윤수가 남긴 블루 노트처럼
사실보다는 진실이 담긴 글이 보는 사람에게 더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선해지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하나보다,
라는 생각도 해 본다.



   
  고모의 손은 평생을 쓸어내린 빗자루처럼 거칠었다. 흰 면양말을 신고 있는 발은 아기처럼 작았다. 고모는 저 발로 많은 곳을 걸어다녔을 것이다. 팔십에 가까운 생애 동안 우리들이 ‘몰랐다’라는 말로 간단히 외면해버린 어두운 뒷골목과 버려진 숲, 공포의 골짜기와 진리의 사막, 그리고 도도하고 가혹했던 강들을......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다른 이름을 가진 작은 개울물로 시작하지만 흘러흘러 도달하는 곳은 바다라는 한 이름의 장소라는 것을......

-p. 306쪽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이토록 오래되어도 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이다지도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 성 아우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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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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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아르까디오가 침실문을 닫자마자 권총 소리가 집 안을 진동했다. 한 줄기 피가 문 밑으로 새어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거리로 나가, 울퉁불퉁한 보도를 통해 계속해서 똑바로 가서, 계단을 내려가고, 난간으로 올라가, 터키인들의 거리를 통해 뻗어나가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다른 길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 부엔디아 가문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닫힌 문 밑으로 들어가서, 양탄자를 적시지 않으려고 벽을 타고 응접실을 건너, 계속해서 다른 거실을 건너고, 식당에 있던 식탁을 피하기 위해 넓게 우회해서 베고니아가 있는 복도를 통과해 나아가다, 아우렐리아노 호세에게 산수를 가르치고 있던 아마란따의 의자 밑을 들키지 않고 지나, 곡식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르술라가 빵을 만들려고 달걀 서른여섯 개를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부엌에 나타났다.
 
   


 위의 문단은 단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끊어질듯 끊어질듯 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
한 문장 안에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내는,
이것이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의 문장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

정말 오랫동안, 마치 백년동안 읽었던 책.
이건 마치 성석제 소설의 비극과도 같이
한바탕 유희와도 같은 '신명나는' 죽음의 노래와 같은 것이었다.
발칙하고 부질없으면서도 피식 웃어버릴 수 있는 옛날 이야기 같고
페넬로페의 수의처럼
아마란따가 수의를 짓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황금물고기를 빚는,
신화와 우화의 지혜와 어리석음의 뒤섞임이 대대로 반복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성찰이 담긴 네버엔딩 스토리.

신선하다.
또 하나의 '유토피아'를 발견했다.
비극이지만, 분명 폭발적인 생명력이 꿈틀대는,
그래서 징그럽기도 하지만 경이로운 세계.

그리고 페이퍼에도 쓴 적이 있는 '나선형'에 대한 언급 부분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백년의 고독> : 삶과 문학에 대한 진정한 화두

<백년의 고독>은 라틴아메리카의 창세기이며 묵시록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을 통해 가장 라틴아메리카적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더욱 넓고 깊게 바라봄으로써 라틴아메리카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초월적 지역주의, 다시 말하면, 좁게는 콜롬비아 넓게는 라틴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지역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즉 <백년의 고독>은 '우리의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인 상황하에서 '삶의 새롭고 활짝 개인 개인 유토피아이며,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인 진정한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결과물, 즉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타파하기 위한 지난한 시도인 것이다.

 - 조구호 역자 후기 -
 
   

 


역시 역자의 글 늘이는 솜씨도 만만치 않다.
즐겁다.
이런 '표준'을 벗어나는 시도.

흠, 내 소감 한 마디는
'섹시한 소설'이라는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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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 드라마를 아직 끝까지 안 봤으며, 긴장감을 잃고 싶지 않은 분이라면 이 글을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다소 긴 여정이었지만 어찌됐건 시즌 4를 끝으로 그들의 모험은 무사히 종결되었다. 아..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감을 결코 놓을 수 없게 만든 드라마.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몇몇 드라마 버금가는 막장드라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드라마 첫회에서 마이클 스코필드가 형을 구하기 위해 감옥에 일부러 수감되어 폭스리버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이 드라마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전쟁까지 일으키려 했을 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 전반을 맴도는 '친자+가족 콤플렉스' 기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즌 4에서는 그간 죽은 줄 알았던 인물들이 하나둘씩 살아돌아오더니(새라, 크리스티나, 켈러맨 등등) 수많은 관계 속에서 적인지 아군 간에서 쉼없이 로테이션을 반복하고 엄마와 아들이 서로 총을 겨누질 않나 다양한 유형의 패륜이 판을 치고 살인과 성희롱, 배신과 음모, 자해와 공갈, 탈취, 폭탄제조, 마약, 자살, 권력욕, 혼전임신(!), 공무원 사칭 사기 등 그 종류도 버라이어티한 유해 요소들이 등장하더니만, 시즌 1부터 갖은 고생을 하며 팀을 이끌었던 정신적 지주였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는 결국 불치병으로 죽고 말았다.




왜 그들이 행복해 지도록 놓아두지 않은거야!


영리하며 정의롭고 용감하고 민주적이고 인간적이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았던 마이클 스코필드는 지금까지 보아온 영화나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남성상을 구현한 캐릭터로 손꼽힐 만 하다. 총도 여러 번 맞았던 것 같고, 병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또 폐쇄된 공간에 갇히긴 왜 그리 자주 잘 갇히는지... 그래도 역시 번번히 뛰어난 기지를 발휘해 살아났던 석호필. 하지만 그도 '코피' 앞에서는 무너졌다.;;

그의 죽음은 거의 순교 수준으로 승화되었다. 그의 덕분으로 자유를 되찾은 인생들이 모두 모여 추모하고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분신으로 남겨 놓았으며 세계평화를(!!) 지켜내었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도 그가 평화로운 삶을 되찾길 바랐건만 역시 작가들과 대중들은 너무나 완벽한 주인공에게 역시 영원한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심리가 있는 듯.





이 드라마에는 많은 남자 캐릭터들이 나오지만 남자들 못지 않게 몇 안 되는 여성 인물들 역시 무시무시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레첸과 크리스티나가 마녀 같은 생명력과 탐욕으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악마성을 지닌 존재들이었다면 그에 비해 새라는 지적이면서도 의리있고 순정적이고 인도주의적이며 작전시에는 대담한, 결국은 마이클과 동급을 이루는 완벽한 여성상을 보여줬다. 그야말로 완벽한 남녀의 결합이었건만 마지막 회에서 마이클과 새라가 여유롭게 해변가를 걸으며 행복감에 젖었던 것도 잠시, 마이클의 코피 한 줄기로 그들은 행복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동안 단 하루도 계획을 세우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그 모든 계획을 모두 성사시켰던 마이클이 단 하나 이루지 못한 계획은 새라와 함께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것이었다는!! (아.. 슬프다. 울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나라 드라마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되는, 주인공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하며 울고불고 하는 신파적 요소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은 무척 인상깊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엄청난 막장 코드로 도배가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시크하고 세련된 듯한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믿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미국 작가 연합의 파업 때문에 애간장이 녹는 시기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길고 긴 여정이 막을 내렸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옥상에서 총맞고 링컨네 팀에서 도태되었던 그레첸은 어떻게 되었나, UN이 실라를 옳은 용도로 사용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등등, ..), 또 한편으론 국내 막장 드라마 못지 않게 한숨 푹푹 쉬며 '이런, 또야' 중얼거리면서도... 결과가 궁금해서 계속 지켜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대본의 힘은 정말 굉장하다. 시즌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후덕해 지는 웬트워스 밀러를 보며 조금 안타깝기도... 더불어 <꽃보다 남자> 이후 이민호가 과연 어떤 후속작품으로 돌아올 것인가 하는 궁금증 못지 않게 <프리즌 브레이크> 이후 웬트워스 밀러가 과연 어떤 작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기대 반+걱정 반인 심정이라는.




대단원을 장식한 마지막 장면은 바로 마이클 스코필드의 '지(知)'의 상징, '종이오리'다.



왠지 그리워 질 것 같은 폭스리버 교도소 고공 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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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1 - 폭풍
손영목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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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9



1950년대 우리 민족의 가장 아팠던 순간,


그 때 거제도에선 어떤 일이 있었나.

수 만 명의 전쟁포로들이 드글거리는 포로수용소,

뼛속까지 공산주의에 물든 공산포로들과 매일 전쟁을 치르듯 살아가는 반공 포로들,

포로수용소 때문에 삶의 터전인 농토를 다 빼앗겨 버린,

도대체 누굴 위한 전쟁이었는지도 모르는 채 모든 걸 잃어버린 순박한 거제도 주민들까지.

역사는 개인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 이보다 더 서글프게 와 닿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소설로라도 누군가 부활시켜주지 않으면

애꿎은 그 전쟁이란 것 때문에 희생당한 수많은 영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 볼 기회나 가질 수 있을까.


점점 늘어나는 전쟁포로들을 감당하지 못해

미군이 거제도에 대규모로 지은 포로수용소.

그 안에서는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공산포로와 반공포로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경비대와의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그 때문에 땅을 뺏기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주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이장 옥치조의 집에는 징집되었다가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된 큰아들이 돌아오고

읍내로 돈을 벌러 간 딸 덕분에 온 가족이 먹고는 살지만

이런저런 충격으로 옥치조의 부인은 실성한다.

포로 중 서울 의용단 출신인 최윤학은 과연 자신이 선택한 공산주의가 옳은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괴로워 하며

수용소에서 탈출했다가 병원에서 만난 간호원을 만나 사랑에 빠진 윤석규는

그녀가 포로공작원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녀를 포기하지 못한다.

수용소 안의 공산포로들은 당에서 지령을 받고 계속해서 경비대를 자극하여

공작활동을 벌인다.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던 그 시대,

나약한 국가와 터무니없는 이데올로기 전쟁 안에서 모든 개인은 초라했다.


손영목 작가가 탄생시킨 소설 '거제도'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기구한 수많은 운명들이 등장하는 장엄하고 구슬픈 드라마다.

작가의 말처럼

미국만 해도 '남북전쟁, 세계대전' 등등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소설과 영화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가 '전쟁' 관련 컨텐츠 하면 떠올리는 건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액션영화 정도 뿐.

이념 때문에, 가족 때문에, 돈 때문에, 생존 때문에, 의리 때문에, 명분 때문에, 무지 때문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숱한 애환이

꼭 산업적인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자꾸 씌여지고 읽혀지고 보여지고 되새겨질 수 있어야

그나마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시도와 도전이 없다면 젊은 사람들 중 그 누가 그 시절을 기억하려고 할까.

요즘처럼 찰나적 즐거움과 유흥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지금 내가 얼마나 좋은 세상에 태어난 사람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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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서울 - 한국문학이 스케치한 서울로의 산책 서울문화예술총서 2
김재관.장두식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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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4. 20

'문학 속의 서울 (한국문학이 스케치한 서울로의 산책, 서울문화예술총서 02)'

김재관.장두식| 생각의나무| 2007.02.20

'서울'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일까 생각해 본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매일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으며
같은 길을 수없이 오고가는 동안
나의 고향 파주과 주요 업무(?) 터전인 서울에 대해 이런저건 감상을 많이 품었던 거 같기도 하다.
내가 나고 자란 고장과.. 어른이 되고 난 다음의 내 모든 꿈을 실현시켜주는(아직 멀었다만) 도시 서울.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변변한 극장 하나 없는 촌동네를 떠나
결혼이라고 하고 하면 반드시 서울에서 살아야겠다고 굳건히 다짐을 하곤 했었지만
이제 내게 서울은 연민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 안에 몸을 우겨넣고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피로한 군상들과 함께..
내가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면,
매일 아침 터질 듯 붐비는 2호선을 타고, 어딜 가든 사람이 없는 곳이 없는 도심, 거리, 건물, 도로 등을 매일 바라보며
원래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 다 그렇게 생겼으려니...
하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해 왔었더라면
내가 감히 일을 접고 이렇게 배뚜들기며 쉴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난 서울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알고 있다면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성공한 사람일 거라고
언젠가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지금 파주에 있는 건 성공해서라기보단
일종의 도피, 혹은 부모님에게의 기생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렇다면 문학 속에 나타난 서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니나 다를까.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이라고 노래하는 일부 대중가요의 가사를 빼고 나면
서울은 행복한 유토피아와 상당히 거리가 멀다.
정신없이 달리던 근대화 속에서 전셋집값 걱정에 허리가 휘는 아버지들의 한숨과 피땀으로 건물을 올리고 시골에서 상경한 언니들의 성(性)으로 그 노곤함을 씻어내던 곳.
지금은 퍽퍽하고 개별적이며 물욕적이고 가식적이고 안타깝고 피곤한 개인들이 등을 마주대고 위아래로 모여 사는 아파트로 가득찬 곳.
이렇게 변해버린 곳이 바로 우리의 수도 서울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으나 역시 희망을 가지기엔 너무 메말라 버린 도시.
애정이 아닌 연민,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이율배반적이게도 나도 책을 고르려면 광화문으로 가고
병원에라도 가려면 강남의 이름난 병원을 찾아가고
가끔 호사를 부리기 위해 서울에 있는 레스토랑에 일부러 갈 때도 있다.
그렇게라도 가면 서울에는 그래도 청계천이 흐르고 따뜻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숨을 쉬고 있고 재미있는 볼거리, 놀거리가 넘쳐나지만
그 뿐.
이쪽에서 공사가 끝났다 싶으면 또 저 쪽을 죄 뜯어내고 있고
매연과 소음, 인파에 밀려다니다 보면 얼른 집에 가서 씻고 눕고 싶은 마음 뿐이다.
물론 내가 묘사할 수 있는 서울은 책에서도 거의 비중이 없는 2000년대의 서울의 모습에 불과하지만...

서울 뿐만 아니고 파리든 멕시코 시티든 어디든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뭐가 별 다를 게 있으랴마는.
우리 구보 씨의 공허한 발길을 붙잡아 둘 길 없는 우리의 서울은 왠지 슬프고 지쳐 보인다.
하지만 서울이 그만큼 한국과, 한국인의 고통받아온 역사를 닮아 있어서 더욱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우리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안에 미래의 우리가 있기 때문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서로 다독이며 함께 나아가야만 하는 나이든 친구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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