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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 서적 출판 시장이 고사상태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굳건히 베스트셀러에 올라 일종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는 곧 한국 사회에 정의가 부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의에 목말라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인문학, 사회과학에 관심이 그다지 없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 읽으니까 읽는다던지 심지어는 어떤 드라마의 잘생긴 주인공의 독서 장면에 이 책이 보란 듯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대중문화적 기호품이나 타인에게 자신의 지성을 드러내기 위한 악세사리 따위가 되어 버린듯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얼마 전, 역시 샌델의 책인 <왜 도덕인가(원제 Public Philosophy)>가 번역출간되었다. 사실 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후속작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쓰여진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가치인 '도덕'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의 철학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등의 분야들이 도덕에 기반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개념들을 딜레마 상황을 통해 풀어냈다면, <왜 도덕인가>에서는 물론 예시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칸트와 듀이, 롤스 등의 절대 만만치 않은 철학적 이론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읽기에 녹록치 않은 면이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눠진다. 첫번째 파트인 '도덕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지난 20년간 가장 치열한 현안이었던 문제들을 예로 들며 공정한 시민사회와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는 '복권과 도박'의 예를 들며 공공의 책임을 외면하는 공적인 타락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스포츠와 시민 정체성'에서는 팀을 응원하는 지역사회의 시민과 돈만 추구하는 구단주 사이의 갈등을 살펴본다. 또한 사회 분야에서는 '온실가스배출권 거래'를 통하여 일부 선진국에게 면죄부를 주는 온실가스배출권 거래제도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데,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나왔던,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관한 이야기도 다시 등장한다. 교육 분야에서는 특정 브랜드에서 교육 자료를 협찬하며 학교를 광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의 유해성을 역설하며 또한 메릿장학금(merit scholarship : 성적이나 재능에 따라 지급하는 장학금)이 늘어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돌아갈 장학금이 줄어드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 분야에서는 존엄사 허용 문제나 배아복제, 낙태, 동성애 등의 화두를 통해 생명의 주인이 자신의 생명을 좌우할 권리가 있는가, 배아를 인간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찰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치 분야에서는 클린턴의 성추문, 공화당과 민주당, 핵문제 등의 주제를 다루며 정당화될 수 있는 거짓말의 범위나 도덕적 가치를 정치에 이용한 사례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번째 파트인 '도덕적 가치의 원류를 찾아서'는 이 책에서 가장 읽기 녹록치 않은 부분일 것이다. 칸트, 밀, 롤스, 듀이, 벤담 등의 학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공리주의, 자유주의와 같은 개념들을 비교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인간의 갖가지 다양한 욕구들을 하나의 욕구 체계로 융합시킬 뿐, 개개인에게 만족을 분배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은 행운의 임의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재분배를 반대한다.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자유, 평등, 인간의 권리 등이 침해될 수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옳음'과 '좋음' 중 어느 한쪽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염두에 두는 입장을 롤스의 <정의론>을 통해 이야기한다. 롤스는 모두에게 동등한 기본적 자유를 허용하고, 가장 불리한 사회구성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불평등만을 허용하는 정의의 원칙을 주장한다. 이는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을 촉발시켰다. 인상깊었던 것은 롤스의 <정의론>에 등장한 '무지의 베일' 사고실험인데 즉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재산, 인종, 성별, 종교 등)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계약을 맺는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평등한 기본 자유와 더불어, 사회에서 약자의 입자에 처한 구성원에게 이익을 제공하기 위한 불평등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항상 내가 가장 나쁜 제비를 뽑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가정하며 약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기 때문에 꽤 와닿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부자와 대기업에만 유리한 정책을 지지하기 전에 자신이 가장 나쁜 제비를 뽑았을 때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세번째 파트는 '자유와 공동체를 말하다'로, 자본주의와 경제논리에 침식당해 도덕적 가치를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그 해법으로 시민의식의 회복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는 이제 너무나도 거대하며 멀리 존재하고 있고 중간 수준의 공동체는 점점 쇠퇴해가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증대되고 애국심이나 민족의식 같은 것 역시 희박해졌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연루되어 있는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분리된 채 살아간다. 이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로, 학교나 가정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힘을 갖고 있지 못한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기본 토대를 재구축하고, 공공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롤스가 샌델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롤스와 달리, 샌델은 공동체주의 쪽에 가깝게 느껴진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일종의 개론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도덕적 가치에 대해 파고들며 공동체주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것들이라 읽을 때 약간 애먹었지만(그리고 이 글을 쓸때는 더 애먹었지만) 그의 다른 책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아마 <Liberalism and Limits of Justice>가 번역출간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의 원제는 <Public Philosophy(공공철학)>인데 한국어판의 표지에는 생뚱맞게도 <Why Morality>라는 제목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고, 진짜 제목인 Publilc Philosophy는 그 위에 작게 쓰여 있다. 독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하여 번역할때 제목을 손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적어도 원제를 병기할 때는 저자가 쓴 제목 그대로 병기하는 편이 더 나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