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저씨는 11층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받아 냈다. 불길에 휩싸인 언니가 젖은 이불에 둘둘 말아 아래로 내던진 것. 아저씨는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었다. 오른쪽 다리뼈는 산산조각이 났고 오른팔은 골절상. 몸 전체에 타박상과 찰과상. 화물 트럭 운전사였던 아저씨는 직장을 잃고 일 년 넘게 재활 치료를 받았다. 재활 기간 동안 많은 매체에서 아저씨를 인터뷰했다. 적지 않은 성금이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를 도왔다. 아저씨의 다리는 끝내 원래대로 회복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38

"이상인, 이상인!"
내가 올 한 해 본 애들 중에서 가장 한결같은 학생인 이상인이 자다가 몸을 일으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인정머리 없는 애가 되지 않기 위해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85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옥상에서 아래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을 단순하게 불안함과 공포라고 여겼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건 잠재의식 속에 사고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절이라도 할까 봐 지레 겁먹고 놀이 기구는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이곳에 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나는 오히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설렘과 기대감, 혹은 전율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알라딘 eBook <유원> (백온유 지음) 중에서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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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움직이는 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니 그 속도는 하루에 한 바퀴, 360도를 24시간으로 나누면 한 시간에 15도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순한 계산. 천문학을 책으로 배운 내게는 그저 단위 환산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여러 숫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날, 돌고래가 내 마음속에서 뛰어오르기 전까지는.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99

지구 밖으로 나간 우주비행사처럼 우리 역시 지구라는 최고로 멋진 우주선에 올라탄 여행자들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의 생이 그토록 찬란한 것일까. 여행길에서 만나면 무엇이든 다 아름다워 보이니까. 손에 무엇 하나 쥔 게 없어도 콧노래가 흘러나오니까.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04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 선장은 착륙선의 사다리를 타고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디면서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곳의 환경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낯선 땅의 흙과 돌을 채집한 두 사람은 다시 달 궤도로 올라와 사령선과 재회하는 데 성공했고, 세 사람 모두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05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09

책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열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계절이 멀어지고 또다시 돌아오는 시간 중 대부분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이 ‘뭐라도’ 되었을 무렵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소모되었다. 그렇게 무척 쓸모없었고 대단히 중요했던 열 계절을 기꺼이 맞이한 끝에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작은 구두점이지만, 어느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에게는 또하나의 우주가 시작되는 거대한 도약점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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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위치를 경도와 위도로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게, 밤하늘에서의 위치는 적경과 적위로 표현한다. 적위는 지구의 적도면을 기준으로 한다. 북극성의 적위는 +90도, 지구 적도에서 머리 꼭대기에 있는 별의 적위는 0도다. 적경은 춘분날 태양의 위치인 춘분점을 기준으로 한다. 밤하늘에서 적경 0도, 적위 0도에 해당하는 지점은 물고기자리 근처에 있다. 별과 성운, 은하의 위치는 적경 적위로 표현할 수 있고, 항상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그 숫자가 변하지 않는다. 움직인다고 해도 너무 멀어서 우리가 보기엔 제자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해, 달, 행성과 소행성, 혜성의 위치는 적경좌표계 안에서도 변한다. 물론 무작위로 변하는 것은 아니라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각자의 궤도에 따라 성실히, 꾸준히 움직이고 있다. 별에 비하면 이들은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이웃이라서 그들의 움직임이 크게 보인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45

『종이달』의 리카가 처음으로 일생일대의 일탈을 저지르고 나온 날, 앞으로 도저히 되돌릴 수 없으며 스스로는 멈출 수도 없는 범죄의 눈덩이를 굴리게 될 미래의 기운을 막연히 감지하는 그 순간은 그믐달이어야 한다. 거대한 밤이 지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돌아온 일상의 아침을 맞이하는 달이 초승달이라고 잘못 불리운 것은 아무래도 서운한 일이다. 그믐달이 그런 달이다. 다행히도 『종이달』의 우리말 번역본 표지에는 그믐달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48

여행자의 고향은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대단히 춥고 어둡다. 그곳에서는 태양계 생성 초기의 물질들이 섞여 꽁꽁 얼어붙은 채 동면 상태로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근처 다른 천체의 사소한 섭동攝動이 ‘넛지’가 되면 태양 근처로 향하는 궤도에 올라서게 된다. 추운 곳에서 시작한 여정은 점차 따뜻한 곳으로 이어진다. ‘더러운 눈덩어리’로 비유될 정도로 얼음을 많이 품고 있는 혜성에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함께 포장해준 드라이아이스를 꺼냈을 때처럼 얼어붙어 있던 물질들이 기화되며 기다란 증기 꼬리가 생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53

혜성탐사선 지오토와 로제타를 통해 우리는 혜성이 메테인과 같은 탄소화합물을 풍부하게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혜성에는 다량의 물이 들어 있기도 하다. 소행성의 암석 속에서도 다양한 유기물질과 물을 찾을 수 있다. 태양계 초기의 열기가 한풀 가라앉은 뒤, 이제는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지구에 태양계 곳곳에서 물과 유기물질이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바다가 생겨나고 그 속에서 생명이 잉태되었다. 벌이 꽃밭을 날아다니며 수분하듯이, 혜성과 소행성, 그리고 작은 먼지 입자들이 지구에 생명을 가져온 것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54

브라헤의 관측자료는 다음 세대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넘겨졌다. 브라헤의 관측기록이 어찌나 정교했던지, 그 자료를 분석한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행성은 태양 근처에서는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태양에서 멀 때에는 느리게 움직이며, 공전 궤도의 장반경이 공전 주기의 3분의 2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 세 가지는 ‘케플러 법칙’으로 불리며,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기본 규칙이 되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61

빠르게 도는 팽이의 자전축이 천천히 변하는 것처럼 지구의 자전축도 약 2만 6000년 주기로 서서히 움직이는데, 이를 세차운동이라 한다. 세차운동 때문에 수백 년에서 천 몇 백 년 정도 지나면 별들의 위치가 천문도와 맞지 않게 된다. 거꾸로 말해, 천문도를 업데이트했다는 것은 대략 천년쯤 전에도 품질 좋은 천문도를 갖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중국, 일본에도 유사한 천문도가 전해지는데, 그 후예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것이 가장 정교하다고 알려져 있다. 별의 밝기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표시하고, 별들의 위치도 시대에 맞게 개정하는 등 우리 선조들은 천문도에 꽤나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68

그 생생한 공포의 끝자락에는 우울이 묻어나왔다. 갈 곳이 있어도 갈 곳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던 고등학생처럼, 폭주하는 고릴라 역시 거기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인원사에 울려퍼지던 기괴한 포효 소리, 그 큰 덩치로 온몸을 유리벽에 던질 때마다 강한 진동으로 전해지는 쿵쿵 쾅쾅 소리. 나는 그 앞에 조금 비켜서서, 동물과 동물원과 세상살이와, 공포와 불안과 분노와 우울과 텅 빔과 쓸쓸함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얻고, 또 많은 생각을 비워냈다. 쓸쓸함과 무시무시함이 교차하던 저물녘의 유인원사는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76

나는 고색창연하고 을씨년스러운 동물원을 좋아한다. 동물원은 쓸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인류원’에 들어가 있다면 그럴 것처럼.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 그런 사람이 나온다. 주인공 빌리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동물원에 갇힌다. 지구의 인간 서식처를 그대로 재현했지만 화장실만은 완전히 노출된 공간에서 알몸으로 전시된 채로 먹고, 싸고, 씻는다. 수천의 트랄파마도어 관람객은 그의 몸을 관찰하고 그의 행동마다에 환호한다. 그들은 남성인 빌리와 합사시킬 여성 지구인을 하나 더 납치해온다. 빌리는 인공 서식처에서 ‘짝짓기’에 성공하고, 동물원 안에서 아이가 나고 자란다. 동물원에 ‘전시된’ 동물을 한껏 가련하게 여기면서도 자꾸만 찾아가서 기꺼이 관람객이 되는 나는 트랄파마도어에서 온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랑꾼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76

선곡 과정에서 지구인들의 추천도 받았는데, 가히 지구 최강이라 할 만한 팬덤을 보유한 BTS의 곡이 일찌감치 우주 디제이의 목록에 올랐다. 단순히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아니었다. 많은 후보곡 가운데 〈소우주〉와 〈134340〉, 그리고 멤버 RM의 〈문차일드〉. 이렇게 우주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선택되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88

2019년에 두번째 공모전이 열렸다. 이번에는 이름 지을 대상을 나라별로 나누어 투표를 진행했다. 우리나라에 배정된 것은 작은곰자리의 별 ‘8 Umi’와 그 주위를 도는 행성 ‘8 Umi b’였다. 우리나라 천문학자들이 보현산 천문대의 1.8미터 망원경으로 발견한 첫번째 외계행성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특별한 대상이다. 당신의 지갑 속 만 원권 지폐 뒷면에 나오는 바로 그 망원경이다. 요즘은 지갑에 현금은 없고 신용카드만 있는 경우도 많은데,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만 원짜리 한 장은 가지고 다니도록 하자. 소개팅에서 특별히 할말이 없을 때 이런 얘기하면 시간 잘 간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92

별이 움직이는 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니 그 속도는 하루에 한 바퀴, 360도를 24시간으로 나누면 한 시간에 15도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순한 계산. 천문학을 책으로 배운 내게는 그저 단위 환산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여러 숫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날, 돌고래가 내 마음속에서 뛰어오르기 전까지는.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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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벽과 북벽, 절벽에 해가 잘 들고 덜 들고 하는 장면을 자주 상상하다보니 에베레스트 조난 사고를 다룬 존 크라카우어의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가 떠올랐다. 똑같이 가파른 산이라도 해가 잘 들어서 오르기가 비교적 수월한 곳이 있고, 해가 잘 들지 않아 일 년 내내 눈이 쌓여 있는 절벽이 있다고 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절벽에 매달려 있는데 바람까지 세차게 몰아치는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팟캐스트에서 그 책을 읽어주던 김영하 작가의 목소리와 말투를 머릿속에 잔뜩 담은 채, 적당한 크레이터 1800여 개를 골라 남벽과 북벽의 특성 차이를 모조리 계산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10

누구에게나 각자 인생의 흐름이 있는 것이고, 나는 삶을 따라 흘러 다니며 살다보니 지금 이러고 있다. 어느 분야로 가든 대학원은 다닐 생각이었기 때문에, 평행우주 속 나는 지금쯤 생물학자거나 영문학자거나 고고학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박사네 떡볶이’ 가게 사장일 수도 있다. 그 모든 ‘나’들도 사람들에게 들려줄 그럴듯한 전공 선택 계기가 없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16

두 대의 탐사선 보이저 1, 2호는 1977년 지구를 떠나 멀리 있는 행성들을 향해 떠났다.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모두 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손짓하고 있었다. 우선 목성까지만 가면 되었다. 그다음에는 타잔이 커다란 넝쿨 줄기를 바꿔 잡으며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듯 보이저도 행성들의 ‘중력 그네’를 타고 다음, 또 그다음 행성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목성의 중력을 받아 휙 돌아서면 토성으로 향하게 되고, 토성의 중력을 밧줄 삼아 좌회전을 하면 천왕성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천왕성의 중력 그네를 타고 해왕성까지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구에서부터 준비해가야 하는 연료와 에너지원, 그리고 여행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절약할 수 있는 궤도, 176년에 한 번씩만 가능하다는 그 최적의 경로를 따라 보이저는 질주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0

캐럴린 포코와 칼 세이건이 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했을 때, 미항공우주국의 결정권자들과 보이저 담당 엔지니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를 설득하기까지 7~8년이 흘렀고, 그러는 동안 보이저와 지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마침내 보이저의 모든 과학 탐사가 끝난 후에야 고향을 잠시 돌아보는 위험한 응시가 허락되었다. 너무 멀어지기 직전에 건진 사진 속 단 하나의 픽셀에,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이 찍혔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2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더 멀리, 통신도 닿지 않고 누구의 지령도 받지 않는 곳으로. 보이저는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진할 것이다. 지구에서부터 가지고 간 연료는 바닥났다. 태양의 중력은 점차 가벼워지고, 그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4

책이라는 것은 선물하기가 은근히 까다로운 물건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자의 독서 취향이 있고,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책 좀 읽으라는 뜻이냐며 발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권은 선물할 데를 찾지 못해 내가 읽던 책 옆에 나란히 꽂아두었다가, ‘무소유’를 이중으로 소유하는 게 영 머쓱해서 한 권만 남겨두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5

누구나 다 알다시피 미국이 정오일 때 프랑스에서는 해가 지지. 단숨에 프랑스로 달려갈 수만 있다면 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불행히도 프랑스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러나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려놓기만 하면 되었지. 그렇게만 하면 맘 내킬 때마다 해 지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던 거야.*
* 생텍쥐페리, 김화영 옮김, 『어린 왕자』, 문학동네, 2007, 35쪽.

『어린 왕자』를 읽을 때면, 안타깝게도 나는 이 대목에서 집중력을 잃고 만다. 나도 법정 스님만큼이나 『어린 왕자』를 사랑하지만, 책 읽기를 멈추고 잠시 고개를 들어 다른 데를 봐야 한다. 문학의 범주에서 직업병의 영역으로 하릴없이 흘러가버리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서다. 그게 잘되는 날은 숨을 크게 몇 번 쉰 다음 책을 마저 읽고, 안 되는 날은 책을 덮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태양과 소행성과 어린 왕자의 개략도槪略圖다. 천체와 관측자의 크기 및 거리는 실제 비례와 다름에 유의.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6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어 두었다가 님이 오시는 날 굽이굽이 펴지 않아도’ 퍽 괜찮을 것 같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9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31

내게 있어 우주와의 랑데부는 완전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서점에 갔다가 무심결에 다양한 성운과 은하 사진으로 가득한 과학 잡지를 집어들었다. 그것이 랑데부의 시작이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우주를 담은 사진들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어느 순간 천문학의 세계에 도킹해 있었다. 친구의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캐스팅된 배우나 세찬 장맛비에 우산을 빌려주었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커플에게도 그런 환상적인 랑데부가 있었을 것이다. 혹여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별에서 태어나 우주 먼지로 떠돌던 우리가 이 지구를 만난 건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멋진 랑데부였으니까.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35

남향 창문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곳은 또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 남미 대륙 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같은 곳이다. 여기서는 해가 잘 드는 곳에 살고 싶다면 북향집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죽은 자를 묻는다면 망자의 머리를 북쪽 대신 남쪽에 두어야 할까. 아무튼 남반구에서 보는 하늘은 한반도에서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호주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엔 북두칠성이 있을 법한 자리에 남십자성이 있다. 생일 별자리를 따질 때 쓰는 황도 12궁이나 행성, 그리고 달은 북극성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어 계절에 따라 지평선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남반구에서도 잘 보인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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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크레이터만 골라서 보자는 것이었다. 달에 별똥별이 떨어질 때 크레이터가 하나씩 생겨난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하나의 크레이터 안에 있는 흙은 생성 연대와 기원이 같다. 그런데 크레이터 안쪽의 경사면은 해가 드는 방향에 따라서 조금씩 성질이 다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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