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벽과 북벽, 절벽에 해가 잘 들고 덜 들고 하는 장면을 자주 상상하다보니 에베레스트 조난 사고를 다룬 존 크라카우어의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가 떠올랐다. 똑같이 가파른 산이라도 해가 잘 들어서 오르기가 비교적 수월한 곳이 있고, 해가 잘 들지 않아 일 년 내내 눈이 쌓여 있는 절벽이 있다고 했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절벽에 매달려 있는데 바람까지 세차게 몰아치는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팟캐스트에서 그 책을 읽어주던 김영하 작가의 목소리와 말투를 머릿속에 잔뜩 담은 채, 적당한 크레이터 1800여 개를 골라 남벽과 북벽의 특성 차이를 모조리 계산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10

누구에게나 각자 인생의 흐름이 있는 것이고, 나는 삶을 따라 흘러 다니며 살다보니 지금 이러고 있다. 어느 분야로 가든 대학원은 다닐 생각이었기 때문에, 평행우주 속 나는 지금쯤 생물학자거나 영문학자거나 고고학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박사네 떡볶이’ 가게 사장일 수도 있다. 그 모든 ‘나’들도 사람들에게 들려줄 그럴듯한 전공 선택 계기가 없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16

두 대의 탐사선 보이저 1, 2호는 1977년 지구를 떠나 멀리 있는 행성들을 향해 떠났다.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모두 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손짓하고 있었다. 우선 목성까지만 가면 되었다. 그다음에는 타잔이 커다란 넝쿨 줄기를 바꿔 잡으며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듯 보이저도 행성들의 ‘중력 그네’를 타고 다음, 또 그다음 행성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목성의 중력을 받아 휙 돌아서면 토성으로 향하게 되고, 토성의 중력을 밧줄 삼아 좌회전을 하면 천왕성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천왕성의 중력 그네를 타고 해왕성까지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구에서부터 준비해가야 하는 연료와 에너지원, 그리고 여행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절약할 수 있는 궤도, 176년에 한 번씩만 가능하다는 그 최적의 경로를 따라 보이저는 질주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0

캐럴린 포코와 칼 세이건이 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했을 때, 미항공우주국의 결정권자들과 보이저 담당 엔지니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를 설득하기까지 7~8년이 흘렀고, 그러는 동안 보이저와 지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마침내 보이저의 모든 과학 탐사가 끝난 후에야 고향을 잠시 돌아보는 위험한 응시가 허락되었다. 너무 멀어지기 직전에 건진 사진 속 단 하나의 픽셀에,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이 찍혔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2

보이저는 창백한 푸른 점을 잠시 응시한 뒤, 다시 원래대로 기수를 돌렸다. 더 멀리, 통신도 닿지 않고 누구의 지령도 받지 않는 곳으로. 보이저는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전진할 것이다. 지구에서부터 가지고 간 연료는 바닥났다. 태양의 중력은 점차 가벼워지고, 그 빛조차도 너무 희미하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춥고 어둡고 광활한 우주로 묵묵히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4

책이라는 것은 선물하기가 은근히 까다로운 물건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자의 독서 취향이 있고,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책 좀 읽으라는 뜻이냐며 발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권은 선물할 데를 찾지 못해 내가 읽던 책 옆에 나란히 꽂아두었다가, ‘무소유’를 이중으로 소유하는 게 영 머쓱해서 한 권만 남겨두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5

누구나 다 알다시피 미국이 정오일 때 프랑스에서는 해가 지지. 단숨에 프랑스로 달려갈 수만 있다면 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불행히도 프랑스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러나 너의 조그만 별에서는 의자를 몇 발짝 뒤로 물려놓기만 하면 되었지. 그렇게만 하면 맘 내킬 때마다 해 지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던 거야.*
* 생텍쥐페리, 김화영 옮김, 『어린 왕자』, 문학동네, 2007, 35쪽.

『어린 왕자』를 읽을 때면, 안타깝게도 나는 이 대목에서 집중력을 잃고 만다. 나도 법정 스님만큼이나 『어린 왕자』를 사랑하지만, 책 읽기를 멈추고 잠시 고개를 들어 다른 데를 봐야 한다. 문학의 범주에서 직업병의 영역으로 하릴없이 흘러가버리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서다. 그게 잘되는 날은 숨을 크게 몇 번 쉰 다음 책을 마저 읽고, 안 되는 날은 책을 덮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태양과 소행성과 어린 왕자의 개략도槪略圖다. 천체와 관측자의 크기 및 거리는 실제 비례와 다름에 유의.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6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어 두었다가 님이 오시는 날 굽이굽이 펴지 않아도’ 퍽 괜찮을 것 같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29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31

내게 있어 우주와의 랑데부는 완전한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서점에 갔다가 무심결에 다양한 성운과 은하 사진으로 가득한 과학 잡지를 집어들었다. 그것이 랑데부의 시작이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우주를 담은 사진들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어느 순간 천문학의 세계에 도킹해 있었다. 친구의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캐스팅된 배우나 세찬 장맛비에 우산을 빌려주었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커플에게도 그런 환상적인 랑데부가 있었을 것이다. 혹여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별에서 태어나 우주 먼지로 떠돌던 우리가 이 지구를 만난 건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멋진 랑데부였으니까.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35

남향 창문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곳은 또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 남미 대륙 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같은 곳이다. 여기서는 해가 잘 드는 곳에 살고 싶다면 북향집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죽은 자를 묻는다면 망자의 머리를 북쪽 대신 남쪽에 두어야 할까. 아무튼 남반구에서 보는 하늘은 한반도에서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호주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엔 북두칠성이 있을 법한 자리에 남십자성이 있다. 생일 별자리를 따질 때 쓰는 황도 12궁이나 행성, 그리고 달은 북극성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어 계절에 따라 지평선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남반구에서도 잘 보인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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