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사라진 총의 비밀 -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빼앗긴 M1900을 찾아서
이성주 지음, 우라웍스 기획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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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총을 찾아서>라는 프로젝트의 발상은 단순했다. "안중근 장군이 하얼빈 의거에서 사용한 M1900을 복각한다" 중국 하얼빈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는 전혀 엉뚱한 총(브라우닝 하이파워)이 전시돼 있었고, 한국 남산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 전시된 총도 정확한 복각품이라기보다는 플라스틱 모델에 불과했다. 우리는 직접 안중근의 총을 정확하게 복각해서 이를 전쟁기념관과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하는 것을 목표로 의기양양하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프롤로그' 중에



사라진 안중근의 총을 찾아서


책의 저자 이성주는 시나리오, 전시 기획, 역사교양, 밀리터리 등 어느 한 분야로 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문화콘텐츠 창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군사 분야 논객으로 활동 중이며 포스코의 ‘포레카 창의 놀이방’, SERI CEO 등 다양한 공간에서 역사와 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역사는 현실과 괴리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우리 일상과 함께 호흡한다'는 신조를 바탕으로 개성 있는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그 중 우리 역사 속의 숨은 이야기들을 재치 있게 다룬 <엽기조선왕조실록>(개정판 제목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조선왕조실록>)은 서점가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역사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밖에 지은 책으로 <모든 권력은 간신을 원한다>, <아이러니 세계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조선사 진풍경>, <역사의 치명적 배후, 성>, <아리스토텔레스, 이게 행복이다>, <파국으로 향하는 일본> 등이 있다.


복각複刻 프로젝트KBS 다큐멘터리팀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들은 미국으로 갔고, '총번 262336'이 새겨진 M1900의 행방을 묻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이런 복각 사례는 이전 국내에서 거의 없었기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도 없어서 이 프로젝트의 진행은 당초 예상과 역량을 뛰어넘는 순간들이 많았다.


최근까지의 정설아닌 정설은 안중근의 의거에 사용되었던 총은 육혈포(리볼버)라고 알려져왔다. 실제로 인터넷 상에도 이런 기사와 기록이 검색된다. 연발로 발사할 수 있는 총은 오직 리볼버뿐이라는 상식이 우리들에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들은 소위 '자동권총'이라는 신문물에 대해선 무지했다. 똑같은 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취재 결과, 자동권총 M1900이 아니라면 결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할 수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안중근 너머의 안중근을 알아가는 의미있는 역사 공부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누구인가?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관으로 평소 비스마르크를  매우 존경했다. 강성 기질로 알려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전쟁보다는 화합과 설득을 통한 해결책을 도모하는 외교술의 귀재로 독일을 통합한 지도자였다. 물론 때론 전쟁을 피하지 않았기에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보오전쟁을 통해 진정한 게르만 족의 최강자임을 보여주었고 또 1870년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을 통해 완전한 독일 통일을 이루었다.


지정학적으로 중부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한 독일은 서쪽으로 프랑스, 동쪽으로 러시아, 남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으로 포위된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당시 뛰어난 외교술로 러시아를 제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승리가 가능했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후 독일군부가 서쪽과 동쪽 양쪽 전선에서 전쟁을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무너진 전쟁이 1차 세계대전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런 비스마르크를 롤모델로 삼아 기본적으론 외교와 협상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데 있었다. 물론 그가 전쟁을 회피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토 히루부미가 참살당하자 영국 언론은 일본의 의사결정권자들 중 대한제국(한국)에 가장 우호적이고 유화정책을 펼친 인물을 한국인이 죽였다고 논평했다. 일본 또한 "안중근이 멍청했다.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이가 이토 히로부미였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죽고 7개월 만에 한일 병합 조약이 전개되었다.  


단순한 사실관계만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기 때문에 한일 병합이 빨라졌고 일본의 군국화를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던 일본이었기에 그들의 군국화는 이토 히로부미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미 착실하게 진행돼온 프로젝트였던 게 사실이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나이가 68세로 고령임을 감안한다면 그가 군부를 통제할 수 잇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든 제거하지 않았든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실질적인 효과를 생각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었을 경우 한일 병합은 이렇게 급속도로 거칠게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외교적 수순을 다 밟고, 정치적 안배를 다 마친 후 '확실하게' 병합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 경우 태평양 전쟁의 패전 이후 한국의 운명이 어찌되었을까?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오키나와(류큐국琉球國)가 지금까지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한국의 종속도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안중근의 총


총을 좋아하는 40대 남자 셋이 뭉쳤다. 그리고 밀리터리와 총기 분야를 전문으로 다루는 유튜브 채널 <건들건들>을 개설했다. 총을 가지고 콘텐츠를 만들다가 우연히 중국 하얼빈에 위치한 안중근 기념관에 브라우닝 하이파워가 전시돼 있는 것을 목격했다. 실제 안중근의 거사일에 사용된 총이 아니었다. 호기심은 계속 이어져 한국의 안중근 기념관, 독립기념관, 전쟁기념관 등 독립운동 관련 전시관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안중근의 총은 없음을 확인했다. 2018년 4월,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우리가 하나 만들어 볼까?" 


일반적인 리볼버 권총을 사용할 경우 4초란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총탄을 다 쏟아낼 수 없다. 격발 간격이 자동권총보다 훨씬 더 길기 때문에 세 발을 쏘기 전에 안중근이 체포됐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당시 리볼버 권총은 위력이 강하기 때문에 탄막 사격(부대 단위로 일제히 한 지점을 향해 가하는 포격)은 가능할지라도 개인의 정밀한 조준 사격용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안중근이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M1900을 가지고 거사를 치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안중근은 사전에 치밀한 계산에 의해 M1900을 선택했다. 현대 권총 사격법으로도 상식 밖이라 할 수 있는 '한 손 격발'로도 매우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던 이유는 M1900과 7.65밀리미터 탄이 한 손으로도 충분히 반동을 받아낼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을 찾아가 리볼버와 M1900 모델로 실제 사격까지 점검했다. 결론은 사격선수도 M1900이었다.


사진 아래가 M1900

안중근의 재판


군사법정에서 미조부치 다카오 검찰관은 끈질기게 안중근 장군의 역사관과 항일활동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안중근의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을 개인적 동기에 의한 것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안중군의 답변은 놀랍게도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가지와 동양평화론, 그리고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다는 논리를 펼쳤다(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가지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논리정연하게 말했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재판장에서 말했다는 것이야말로 안중근 장군의 담력을 확인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조부치가 안중근의 의견에 수긍한다는 것이다. 공판이 진행되면서, 검사 측에서도 안중근의 인물됨과 논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안중근의 <안응칠역사>에 잘 기록되어 있다.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동양의 열사라 하겠소. 당신은 열사니가 사형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검찰관이 말했다.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일본의 논리를 한마디로 반박하자면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인 것은 범죄가 아니다"이다.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겠지만, 국제법상으로 혹은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보자면 이것은 정당한 행위다. 1907년 당시 안중근은 연해주에서 의병을 이끌고 있었고, 이후 북간도로 망명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곳에서 독립운동가 이범윤을 만나고 엄인섭, 김기룡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이때 이범윤이 대장으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임명됐다.


이렇게 엄연히 의병이자 군인으로서 활동한 안중근 장군은 법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밝혔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하얼빈에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지방재판소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인즉, 만국 형법과 국제공법으로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

안중근 장군의 신문기록에서 FN사의 M1900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발사한 탄환의 숫자를 확인하고 있다. 7연발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7+1이다. 탄창에 7발이 장전되고, 1발은 약실에 넣었다. 처음 8발을 장전했는데, 안중근은 마지막 1발을 쏘지 않고 총을 땅에 던졌다. 이 1발에 대한 집요한 추궁이 있었다. 일본 측은 '자살'을 염두에 뒀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었냐는 질문을 계속 던졌지만, 안중근은 무덤덤하게 대응했다.

목표로 했던 이를 다 쐈으니, 총을 더 쏠 이유가 없다는 간단한 답변, 이는 테러가 아니라 의거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진술이다. 무차별적인 살육이 아니라 목표로 했던 이토 히로부미만을 제거하고 총을 버린 것이다. 수행 인원들에 대한 총격에 관해서 안중근은 계속 유감을 표현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알았다면 피할 수 있었던 희생이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일본의 총포사에서 발견한 단서


1895년(메이지 28년)에 설립된 아키하바라에 위치한 한 총포사의 사장은 M1900 권총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존 브라우닝 상이 만든 총임을 말하면서 개략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이 총이 안중근과 관련 있음을 알고 있었다. 프로젝트팀이 이 총을 찾고 있다고 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혹시 "쓰치우라에 있지 않을까요?"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육상자위대 무기학교가 쓰치우라시에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이 총을 감췄다면, '쓰치우라 자위대'로 유명했던 바로 그곳이 유력한 후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총포사 사장은 '자위대'라는 말을 덧붙여서 다시 쓰치우라를 언급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일본 정부가 M1900을 숨길 수 있다면, 이곳이 가장 적합하다. 태평양 전쟁 당시부터 쓰치우라와 그 주변 지역은 일본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일본제국 시절에는 가스미가우라 해군 비행장과 비행학교가 있었지만, 현재는 육상자위대 무기학교가 있다.


하지만 안중근의 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안중근의 총에 관심을 가질리가 없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법적으로 보자면 그 총은 증거품이었고, 그 효력은 재판이 종료된 후 소멸되었다. 굳이 증거를 따진다면 '안중근의 자백'과 수많은 이들의 증언이 있었다. 시한이 종료된 압수품은 빼돌려지고 외부로 판매된다고 한다.



인간 안중근의 길


안중근 장군은 명사수였다. 미국의 사격선수조차 안중근의 성공적인 의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민족과 대한국민의 적인 이토 히로부미를 반드시 척살하겠다는 일념 하에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를 부단히 연구하고 점검하면서 거사일을 준비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얼굴도 모르는 목표물로의 접근성과 신속한 사격을 위해선 심지어 한 손 사격을 해야 명중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실제 수많은 사격연습을 통해 터득했으니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존경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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