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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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정조의 시대는 발군한 걸출한 인물들이 유난히 많았다는 것도 관심의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북학파의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과 같은 인물들 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같은 예술가들, 그리고 촉망받는 인재였던 다산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다산과 연암은 묘한 양립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어쩐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정조의 문체반정에서 연암은 50대의 배후조정자로 지목된 데 반해 다산은 전도유망한 젊은 관료로서 정조의 입장 편에서 문체반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을 보면 연암과 다산은 그 삶에서나 문학적 취향과 견해에 있어서나 대조적인 상반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다산의 긴 유배생활과 연암의 권력 외부에서의 쓸쓸한 삶이 겹쳐지면서 같은 그늘 아래에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서있는 고독한 두 선비를 보는 것만 같기도 하다,

한편 다산이 아무리 서학에 관심이 있었고, 그 형제들이 천주교에 심취했으며, 실학과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골몰한 인물이었고 정조가 죽은 후 유배의 길에 오르는 불운의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일단 중앙정계의 성공한 인물이었던 경력은 그가 극히 체제에 순응하는 성품을 가졌을 거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  (정도를 걸어 출세한 인물보다는 조금 삐딱한 인물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관심을 두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나를 정당화하고 싶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다산어록청상>을 펼치면서도 ‘고리타분함’이라든가 ‘경직성’과 같은 낱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만 저자 ‘정민’이라는 이름에 신뢰를 보내며 그가 그 ‘고리타분함’과 ‘경직성’을 다루면서 내가 소화하기 쉽도록 요리과정에 심혈을 기울였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그나마 내가 다산에게 친근함의 끈 하나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몇 해 전 강진에 들렀을 때 아이들과 다산초당을 방문했던 기억, 그것 하나였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생각해보니 그저 ‘무지몽매한 저를 용서하소서’하고 다산에게 사죄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참 당연하게도(?) 다산의 글들은 연암의 글과는 다른 분위기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연암의 글이 마치 한바탕의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면(물론 내가 연암의 글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다산의 글은 마치 유리처럼 맑고 잔잔한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17년이라는 긴 유배기간을 다산은 학문의 대성기로 전환하는 업적을 세웠다던가.  그만큼의 막강한 자기관리능력이 글 곳곳에 배어나온다.  경세(정신을 맑게 하는 이야기), 수신(몸과 마음을 닦는 공부), 처사(대인접물의 바른 태도), 치학(공부의 방법과 태도), 독서(책을 어떻게 읽을까?), 문예(시문 창작과 문예론), 학문(학문의 엄정함, 토론과 연찬), 거가(거처의 규모와 생활의 법도), 치산(재산 증식과 경제활동), 경제(경국제세와 경세치용)로 분류된 글들은 말 그대로 청상淸賞하게 만드는 글인 동시에 무척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다. 

거가 편에서 집안 식구들 중에 누구라도 다섯 살이 넘으면 각자 할 일을 나눠 주라는 글이라든가 치산 편의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채마밭을 가꾸고 뽕나무를 기르며 과수를 심어 경제활동에 보탬이 되도록 하라는 글은 양반 관료로서의 고리타분함과 체면의식을 벗어던지고 실용과 경제에 밝은 인물로서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 뿐 아니라 연암과 상반된 인물로만 보았던 다산에게서 연암과의 동질적인 부분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한 예가 문예 편에서 “옛날에 글을 짓는 사람들은 글자마다 그 뜻을 헤아려 이치에 맞게 썼다.  하지만 후세에는 만들어진 구절을 외워다가 그대로 표절한다.  그래서 글이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p.146)라는 부분이 나온다.  또 “깨달은 바를 유추하여 이를 축적하고, 축적된 것을 펴서 글을 짓는다.  이를 본 사람이 문장이라고 여기니, 이것을 일러 문장이라 한다.  문장이란 것은 갑작스레 얻을 수가 없다.”(p.158)라고도 한다.  연암이 주장하던 심사心似와 형사刑似,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과 비슷하게 통하는 것만 같다.


궁금한 김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음/그린비)이라는 책을 뒤적였다. 그 책 뒷부분에 연암과 다산을 비교하여 쓴 글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었을 때에는 다산의 글을 접해보지 않은 터라 공감하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그 책에서 고미숙님은 “다산의 글은 투명하고 진지하다 못해 냉각수를 끼얹는 느낌이다”(P.376)라고 했고 또 ‘연암이 표현형식을 전복하는데 몰두한 데 반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P.388)'였으며 “비장미를 특징”(P.393)으로 하고 “의미의 명징성을 추구한다.”(P.395)고 했다. <다산어록청상>을 읽고 나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다산도 연암만큼이나 혁명적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 예로 백성이 아들을 낳은 지 사흘만에 군보에 등록되어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자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스스로 베어낸 이야기를 시로 지은 ‘애절양’이라는 시(이 시는 <다산어록청상>이 아니라 위에 인용한 책에서 나오는 시다) 는 다산의 비장함과 백성의 고통에 대한 안쓰러움이 절절히 묻어나온다.

이렇듯 중앙정계를 향해 서 있고 늘 그 곳에 흡수되기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올곧음과 백성에 대한 걱정과 측은지심을 버리지 않았던 청아한 선비정신을 이 책에서 만난 것 같다.  다산에 대한 나의 오해를 거둘 수 있어 흐뭇했다.  한편으로는 우리 옛 선비정신이 번득이는 이런 글들이 서양에 소개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외국 철학자와 문호들의 경구들도 좋지만 우리 옛선비들의 맑고 청아한, 그러면서도 정신이 곧게 살아 번뜩이는 글들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세계화니 자유경제체제니 하는 것들의 부작용에 대한 대안으로 동양의 유교적 도덕관이 물망에 떠오르고 있는 마당에..

 

 

****  이 책에 연암에 대한 글은 단 한 줄도 없다.  내가 서평에 연암을 언급하는 바람에 이 책이 연암과 다산을 비교할 수 있는 책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기를..  그저 연암에 대한 책 몇 권 읽고서 다산의 글을 읽고 있자니 자연스레 연암과 견주어졌을 뿐이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다산의 남긴 짤막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정민 선생님의 짧은 해설이 있어 읽기에 더욱 편안하다. 

이 서평을 쓰면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은/그린비)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정옥자 지음/현암사)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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