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대 졸업식 축사. 2005년 6월12일.


 오늘 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의 한 곳을 졸업하면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이 내가 대학졸업식이라는 데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경우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내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그저 세 가지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얘기는 점(點)을 잇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리드 대학이라는 곳을 첫 6개월 다닌 후 그만 두었습니다. 그후 18개월 동안은 비정규 청강생으로 머물렀고 그 후 진짜로 그만두었습니다. 내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이 얘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내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는데, 나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생모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면 바로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되어있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입양키로 한 부부는 마음을 바꿔, 자신들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생모는 한밤중에 입양대기자 명단에 있는 다른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 생모는 나중에야 내 어머니(양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내 아버지(양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생모는 이 때문에 최종적인 입양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다가, 몇달후 내 양부모가 나를 나중에 대학에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17년이 지난 후 나는 정말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스탠포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였던 내 부모(양부모)는 저축한 모든 돈을 내 대학등록금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후 나는 그만한 돈을 쓰는 데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내 삶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내 부모들은 전 인생을 통해 저축해놓은 모든 돈을 내 학비를 위해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 그런 결정은 다소 두려운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한 가장 훌륭한 결정중 하나였습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는 그 순간, 나는 내게는 흥미가 없었던 필수과목을 들을 이유가 없어졌고, 내게 흥미롭게 보이는 다른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 낭만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나는 기숙사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방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음식을 사기위해 되돌려주면 5센트를 주는 콜라병을 모으는 일을 했고, 해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일요일밤마다 7마일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나는 그걸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가다가 부딪힌 것들중 많은 것들은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들로 나타났습니다.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이겠습니다.

 내가 다녔던 리드대학은 그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서예 교육 기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전체를 통해 모든 포스터, 모든 표지물들은 손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글씨체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정규과목들을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배워 보려고 서체과목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체를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알아내지 못하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나에겐 이런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실제로 응용될 것이란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그 모든 것이 되살아 났습니다. 우리의 맥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대학의 그 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맥 컴퓨터는 결코 다양한 서체를 가진 컴퓨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원도즈는 맥 컴퓨터를 단지 베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맥 컴퓨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만일 정규과목을 그만두지 않았고, 서체과목에 등록하지 않았더라면,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과 같은 놀라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잇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들에--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나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내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나의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의 이른 시기에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한 행운을 가졌습니다.  우즈(스티브 우즈니액, 애플 공동창업자)와 나는 애플을 우리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는 스무살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10년이 지난후 애플은, 우리 둘만의 차고에서 20억 달러에다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인 맥킨토시 컴퓨터를 1년 빨리 시장에 출시했는데 그 때 나는 막 서른 살이 될 때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느냐구요? 글쎄, 애플이 커가면서 우리는 회사를 운영할 어떤 사람을 고용했고 첫해는 그럭저럭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서른 살이었던 나는 쫓겨났습니다. 성인으로서 내 삶의 초점이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나는 참혹함에 빠졌습니다.

첫 몇달동안 나는 무엇을 할지 정말 몰랐습니다. 나는 앞서의 기업가 세대는 물러나게 된다는 어떤 느낌, 지휘봉을, 내게 전해진 것처럼 그렇게 내려놓았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나는 데이비드 팩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났고 그들을 그렇게 못살게 군 데 대해 사과했습니다. 나는 아주 공식적인 실패자였습니다. 실리콘 밸리로부터 도망쳐 떠나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내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에서의 일이 그것을 조금도 바꾸진 않았습니다. 나는 거부당했지만, 여진히 내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일은 내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중 최고의 경우였습니다. 성공에 대한 부담은, 모든 것에 확신은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벼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창조적이었던 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이후 5년동안 나는 NeXT라는 회사, Pixar라는 이름의 다른 회사를 시작했고, 나중 내 처가 된 한 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놀라운 반전 속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나는 애플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로린과 나는 함께 한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중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두려운 시험약이었지만, 환자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나를 이끌어간 유일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에서 처럼, 그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나는 이런 비슷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 그리고 여러날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는 것으로 이어질 때, 나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내 삶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모든 자부심, 모든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거의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벌거숭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약 1년 전 나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나는 아침 7시30분에 스캔을 받았는데, 췌장에 분명한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췌장이라는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 거의 확실하다면서 내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내게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의사들이 말하는 죽음의 준비입니다. 그것은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진단을 하루종일 생각했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나는 목구멍을 통해 내시경을 넣는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몇점의 세포를 췌장에서 떼어내 조사를 했는데, 의사들은 놀랍게도 나의 경우 매우 드물게도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췌장암임이 밝혀졌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아 졌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몇십년간은 그렇기를 바랍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유용하긴 하지만 지적 개념만으로 알고 있었던 때보다는 좀 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천국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조차 거기에 가기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은은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목적지 입니다.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가장 훌륭한 창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교체를 만들어 내는 매개체입니다. 죽음은 낡음을 청소하고 새로움을 위한 길을 열어줍니다.

지금 이순간, 그 새로움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날,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을 그때, 여러분들도 점차 낡음이 되고 청소될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통념, 즉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 "전세계 목록"이라는 놀라운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에게 그 책은 바이블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튜워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그는 시적인 면들을 가미해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책이 나온 게 1960년대로,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도 데스크탑 출판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타이프라이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종이책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전의 일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책을 여러번 개정했고, 결국 그 책의 역할을 다 했을 때 최종판을 내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바로 내가 여러분의 나이 때입니다. 그 최종판의 뒷표지에는, 여러분이 탐험여행을 하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타기 위해 손을 드는 곳과 같은, 이른 아침 시골길을 찍은 사진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그 밑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늘 배고프고, 늘 어리석어라"(Stay Hungry. Stay Foolish)

이것이, 그들이 책을 더이상 찍지 않기로 하면서 한 작별의 메시지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이러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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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의 귀환 신고

“포병 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국방부장관님께 무사히 귀환했음을 신고합니다.”

1994년 10월25일 오후 3시 국군통합병원 입원실. 43년 만에 돌아온 64세의 조창호 소위가 위문차 방문한 국방부장관에게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하며 귀환신고를 했다.

6·25전쟁 중 실종돼 북한에서의 숱한 세월을 수형생활과 광부생활로 병들고 노쇠한 그였다. 그가 연령으로나 임관 연도로 보나 한참 후배인 장관이 병실로 들어서자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황급히 일어나 군인적 기본자세와 예절을 갖춰 43년 만에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귀환했음을 신고한 것이다.

비록 왜소한 체구에 거동이 불편하고 목소리는 작았지만 노병 조창호 소위는 임관 당시 위기에 빠진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던 그때의 기백과 군인정신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짧은 신고식이었지만 우리는 모진 세월과 삶의 풍파가 아무리 거세다고 해도 군인정신만큼은 결코 녹슬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돌아온 사자(死者)

대한민국 국군 포병 소위 조창호.
1951년 9월10일 중부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 국립묘지에 위패까지 봉안돼 있던 그가 43년 만에 살아 돌아온 것이다.

대학교 1학년 재학 중 6·25전쟁을 맞아 자원입대한 그는 51년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포병연대 관측장교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 그해 5월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북한군에 인계된 조소위는 영어를 할 줄 알고 관측장교로 활동했다는 점을 이용하려는 북한군의 집요한 회유와 설득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제네바 협정에 따른 장교대우를 요구하면서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적에게 협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탈출하려다 잡힌 조소위는 ‘월남기도’와 ‘반동분자’ 혐의로 교화소(감옥)로 이송돼 오랜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13년간 서흥·덕천·함흥·아오지·강계 등지로 끌려다니며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탄광에 배치돼 14년간 광부로 막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71년 규폐증 2기 진단을 받고 탄광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에게는 강냉이죽과 같은 식량배급조차 끊기고 말았다. 생존하기 위해 그는 풀뿌리와 나무껍질, 뱀과 개구리, 심지어 쥐까지 잡아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조소위는 ‘기필코 조국에 돌아가고야 말겠다’는 신념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그는 은밀히 압록강변에서 북·중 국경을 넘나드는 보따리 장수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감행했다. 국경을 넘고 중국 밀항선에 몸을 맡긴 채 망망대해에서 77시간을 떠도는 사투 끝에 조소위는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다.

참군인정신을 이어받자

조창호 소위, 그는 전장포로가 된 후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쇠약으로 몸은 비록 병들고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자유로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비록 노구의 몸일지라도 필사의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고 중도에서 겪은 숱한 난관과 어려움을 인내하며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국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뜨거운 충성심, 포로가 돼서도 적의 설득과 유혹을 뿌리치고 군인의 명예를 끝까지 지킨 의연함과 당당함, 6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탈출을 결행할 수 있었던 신념과 용기 등 그가 조국의 품으로 완전히 귀환하기까지 보여준 행동은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우리가 계승해 나가야 할 바람직한 모습 그 자체였다.

군진수칙에 명시된 ‘나는 조국에 신명을 바친 대한민국 군인임을 명심하고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나는 조국을 사랑하며 조국은 나를 보호하고 있음을 확신한다’라는 항목을 말로써가 아닌 행동으로 몸소 실천한 조창호 소위는 우리 군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 후배 장병들은 그가 보여준 참군인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이를 실천하는 군인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자.

[특별 기고] 국군포로 조창호 영전에- 빼앗긴 43년 삶, 인권운동 족적 남겨

토마스 정 국군포로송환위원회 회장

이제 유명을 달리하신 나의 사랑하는 전우 조창호 중위의 명복을 빌면서 삼가 영전에 추도의 염을 바칩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지난 1994년 4월 어느날, 저는 신문에서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 43년 만에 극적으로 귀환’이란 보도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국군포로가 아직도 북한에 있다니….”라며, 문득 저 자신은 한국전쟁에서 실종 당한 부하 장병들을 다시 기억했습니다.

1958년 미국에 유학 온 이후 바쁜 이민생활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당신의 북한탈출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전우를 일깨워 주어, 한편으로 부끄럽고, 또한 반가웠습니다. 그 후 저는 북한에 억류당한 국군포로들을 어떻게 하면 조국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로 고심했습니다. 지난 2003년 11월 저는 당신을 서울에서 만나 함께 국군포로 송환운동을 벌이자고 약속했지요.

조창호 전우여!
한국의 현정부가 무관심한 국군포로 송환문제에 전우께서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태평양을 넘나들며, 미국 조야에서 북한정권의 포로학대와 북한의 참상을 세계에 고발하는 인권운동의 웅대한 일념으로 크나큰 족적을 남긴 채 이 땅을 어쩌면 그렇게 훌쩍 버리십니까.

돌이켜보면 전우께서는 우리사회와 전세계에 ‘잊혀진 전쟁’에서의 국군포로 문제를 일깨워주는 활동 등 당신의 파란 많은 인생역정은 우리나라 국군포로 인권의 산 역사요, 산 증인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북한에서 43년 동안 온갖 감시와 학대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군인으로서 꺾이지 않았던 불굴의 의지와 과감한 용기로 북한 공산집단으로부터 탈출해 우리동포와 전세계인들에게 한국 군인의 표상이자 귀감이 됐습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지난해 4월 22일 워싱턴 연방의회 레이번 하우스 빌딩에서 디펜스 포럼재단과 미주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주최하는 포럼에서 당신께서는 ‘지옥 같은 악몽 속에서 보낸 반 세기의 삶’이란 제목으로 북한에서의 노예와 같은 삶을 증언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저는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범 수용소와 일반감옥 등에서 13년을 복역했으며 또 수년간 아오지 탄광 등에서 강제노역을 당했습니다. 치솔이나 마스크는 물론 담요나 이부자리도 없이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폭로할 때 제임스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 등 많은 참석자들은 신음을 토해냈습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지난 4월 미의회 국제관계위원회가 개최한 북한 인권청문회에서 당신께서는 지난해에 이어 다시 북한 공산정권의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인간살육의 참상을 고발했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노력으로 이제 우리사회는 국군포로 문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미 유명을 달리하신 전우를 불러보고 한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 전우들과 동지들은 국군포로 송환운동의 큰 별을 떠나 보내는 슬픔을 딛고 당신이 남긴 그 높은 뜻을 계승하여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부디 파란만장했던 지난 시절의 무거운 짐을 벗고 평안히 잠드소서.

오늘 당신의 전우요 동지인 정용봉(토마스)은 삼가 두 손 모아 당신의 명복과 영생을 기원합니다.

<편집자 : 서울에서 21일 국군포로 고 조창호 중위에 대한 영결식이 거행됐습니다.>

 

[책갈피 속의 오늘]1994년 조창호 소위 탈북 귀환



“죽어도 조국 땅에 묻히게 되어 여한이 없습니다.”

‘돌아온 사자(死者)’ 조창호(趙昌浩) 소위는 1994년 10월 24일 오후 서울 중앙병원 입원실에 모인 기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뇌중풍의 후유증으로 발음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는 ‘꿈만 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연세대 교육학과 입학 직후 6·25전쟁이 터지자 네 달 만에 국군 장교로 자원입대했다.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했다가 후퇴하던 중 부상한 부하를 구하려다 북한군에 잡히고 말았다. 탈출하려다 다시 붙잡혀 노동교화 수용소에 갇혔다.

1964년 수용소를 나온 뒤 13년 동안 탄광에서 일했다. 국군에 포로가 됐다가 귀환한 인민군 출신 처녀와 결혼해 아들 둘도 낳았다. 규폐증에 걸려 탄광 일을 면한 뒤에는 자식들이 몰래 일군 화전(火田)으로 연명했다.

1992년 성신여대 총무과의 한 직원은 겉봉에 ‘대한민국 성신여자대학 조창숙’이라고 쓰인 편지를 받았다. 수소문 끝에 성신여고 가정과 교사로 재직했던 조 씨의 누나 창숙 씨를 찾아냈다. 편지는 북한을 방문했던 중국 조선족이 조창호 씨의 부탁을 받고 중국에서 부친 것이었다.

은밀한 서신이 오간 뒤 1994년 10월 3일 새벽 그는 뗏목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에서 어선을 타고 공해로 나온 그는 23일에야 조국의 흙을 밟았다.

그 뒤 11년, 조 씨를 시작으로 조국의 품에 안긴 탈북 국군 포로는 40여 명에 이른다. 정부가 파악한 북한 생존 국군 포로만 540여 명. 휴전 후 납북된 민간인도 400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귀환 문제를 북한과의 대화 의제에도 포함시키지 못하고 있다. 2000년 당시 통일부 장관은 ‘포로 문제는 1953년 정전협정으로 일단락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귀환한 그해 중위로 예편한 조 씨는 올해 2월 재향군인회관에서 열린 ‘6·25 참전 국군포로 가족모임 발족식’에 명예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축사를 했다. 그는 “이북에서도 천대와 서러움을 받았던 국군포로 자녀들이 여기 와서까지 그런 대우를 받는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국가를 위해 온전히 삶을 바친 구성원을 그 국가가 불행하게 만든다면, 또는 그 불행을 방치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국가일까.

유윤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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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 예비역중위 별세



“나는 돌아온 사자(死者)입니다.”

43년 만에 북한을 탈출한 뒤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던 ‘첫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사진) 씨가 19일 지병으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4월에만 해도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위원회 합동청문회에 나가 “북한에 있는 540여 명의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한국 정부와 국제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던 그였다. 이후 7개월 사이 암과 뇌중풍(뇌졸중)이 조 씨의 몸을 덮쳤지만 고인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귀환시켜야 한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연세대 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에 소위로 자원입대했던 그는 1951년 8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됐다.

북한의 전향 회유를 끝내 거부하자 1952년부터 그는 북한 내 악명 높은 덕천, 서천, 함흥 등지의 노동교화수용소에서 12년 6개월간 갇혀 지냈다. 고인은 다시 13년간 구리광산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규폐증 판정을 받고서야 탄광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고인은 1994년 10월 3일 뗏목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고, 중국 어선을 타고 20일 뒤 한국 땅을 밟았다.

귀환 직후 병상에서 이병태 당시 국방부 장관을 맞은 그는 “육군 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귀환 신고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잊었던 ‘조국’을 울렸다.

고인은 그해 11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역했다. 1995년 윤신자(66) 씨와 결혼했고 같은 해 모교에서 학위도 받아 대한민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신을 다시 찾은 듯했다.

그러나 고인은 안락한 생활에 머물지 않고 정부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침묵할 때마다 집회 등에 참여해 정부에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해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 씨가 있으며 북한에서도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조창호 중위의 장례식은 재향군인회의 첫 향군장(鄕軍葬)으로 21일 오전 7시 반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치러진다. 시신은 화장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의 영현봉안시설(납골당)인 충혼당에 안장된다. 031-787-1503

성남=이동영 기자

 

지금으로 부터 14년전 성산여대 총무과로 1통의 편지가 배달 된다.

겉봉에는 투박하게 쓰여진 글씨의 <조창숙 귀하>

수소문 끝에 그 편지의 주인공은 성신여고 가정담당 선생님이시던 조창숙 교사였다.

 

즉.... 고 조창호 중위의 친누나였던 것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의 소식을 40년만에 알게된것이다.

그후로 조창숙씨는 개인생활을 버리다시피 해가며 음으로 양으로 동생의 귀환을 돕게된다.

 

1994년 10,3일 새벽 2시.....드디어 뗏목에 몸을 실은 조창호..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에 성공한 조중위는 다시 중국어선으로 갈아탄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 수십차례....결국 23일 만에 조중위는 대한민국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된다.

 

허나 어설픈 민주를 부루짖던 YS와 빨갱이 정부 DJ를 만나며 조중위는 절망한다.

지금도 북에는 1,561명이란 납북포로가 있다....일반 납북자는 아예 제외시키고 말이다.

2005년에는 미하원을 방문하여 납북포로 송환촉구 운동도 창문회에서 호소했다.

당시 통일부장관이던 박재규>씨는 1953년 정전협정을 들이대며 조중위의 탄원을 묵살하고 말았다.

 

6,25발발 당시 조중위는 연세대학교 1학년으로 육군 제101 포병대대에 입대한다.

보직은 <관측 담당 장교>였으나 <인제전투>때 부상당한 부하를 구하던중 중공군에 포로가 된다.

13년간의 인간지옥 수용소 생활....13년간의 지하갱도 작업장 생활...

여기서 조중위는 <진폐증>을 얻게되었고 결국 이것이 <뇌종양>의 원인이 되었다.

 

북에는 두고온 아내와 아들 2명.딸 1명이 있었다.

물론 한국에 와서도 결혼은 하였지만 북에 두고온 가족에 대해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

내가 괘씸한건 당시의 정권도 정권이지만 요번 조중위의 장례식장에 열우당 측에서는 단 1명도 조문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데체 이게 대한민국 정부 맞는가?....어찌 좌빨들은 자진해서 보낼줄 알아도 우리 조국에 애국자는 어째서  데려 올줄 모른단 말인가?

내년 정권이 바뀌면 고 조창호씨는 다시 한번 재평가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창호씨가 북에서 26년간이란 장기간 핍박을 받은건 바로 좌익으로의 전향거부 였던것이다.

 

'영원한 국군' 조창호 중위, 하늘나라에 영원히 잠들다


'鄕軍葬'으로 영결식 엄수··· 오후에 동작동 현충원 안장
코나스


▲ 영결식이 끝난 후 영정을 앞세우고 식장을 떠나고 있다 (鄕軍葬)ⓒkonas.net

국화 향내 그윽함이 분당 서울대 병원 영결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전쟁영웅의 서러운 한평생을 그렇게 위무 해 주는 듯 했다. 그러나 영웅의 마지막 가는 길에 애통함보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더 크게 들려오는 듯 했으니.

그래서 일까, 아직도 조국 '자유대한민국' 을 그리며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오늘도 이름 모를 북녘 땅 오지에서 그 날을 그리워하는 국군포로들의 외침으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21일 오전 7시 30분. 분당 서울대병원에서는 6·25한국전쟁 참전 중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43년 동안 북한에서 모진 학대를 받아오다 1994년 탈출해 조국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북한실상 알리기 등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벌여오다 지난 19일 지병인 뇌졸중으로 사망한 故 조창호 예비역 중위의 영결식이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大韓民國在鄕軍人會葬)으로 엄수되었다.

박세직 향군회장을 비롯한 향군회장단과 임직원, 유가족, 황규식 국방부차관, 양원모(육군중장) 합참 인사군수본부장, 전주식 포병전우회 회장 등 참전친목단체 대표를 포함 300여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기독교식으로 거행되었다.

7시 18분, 향군 임직원들의 기립 영접아래 향군상조회원들의 운구로 태극기에 감싼 故 조 중위의 영현이 식장에 들어서고 그 뒤를 이어 유가족들이 입장하면서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식장은 평소 온화한 조 중위의 모습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국화로 둘러쌓인 영정사진 한편으로 고인이 귀환 직후 정부로 부터 받은 훈장(보국훈장 통일장)증과 훈장이 마치 고인의 지난했던 지난 삶을 돌이켜보게 하는 듯 했다.

고인 약력보고, 조사와 추도사, 종교의식 및 헌화·분향, 고인에 대한 경례 순으로 진행된 이 날 영결식은 시종일관 엄숙한 애도 분위기 속에 이어져 고인의 생애만큼이나 가슴을 저미게 했다.

재향군인회 창설이후 54년 만에 첫 향군장(鄕軍葬)으로 치러진 이 날 영결식에서 재향군인회 김규 호국안보국장은 약력보고를 통해 "고인은 1930년 10월 2일 평양에서 출생 후 연세대 재학 중 전쟁이 발발하자 애국충정과 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신념으로 국군에 지원, 육본 직할 101포대 관측장교로 참전, 1951년 5월 강원도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탈출 모의죄로 13년간의 수감생활과 자강도에서 14년간 광부생활 등으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고 고인의 행적을 소개했다.

김 국장은 이어 "그럼에도 고인은 조국에 대한 불꽃같은 귀환의 소망을 안고 1994년 탈출 귀환, 중위로 전역 후 북한 독재체제 실상과 국군포로 생활을 알리는 등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종신회원으로서 안보강사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수행해 왔다"고 보고했다.

박세직 재향군인회장은 조사에서 "여생을 오직 북한 억류 국군포로들의 조기송환을 위해 바치신 고 조창호 예비역 중위님의 영전에 750만 향군회원과 더불어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며 "불굴의 투혼을 불태운 참 군인으로서, 국군포로 송환과 그 가족 돕기 운동의 선구자로 신명을 불태웠던 큰 발자취가 더욱 고귀하게 느껴진다"고 애도를 표했다.

박 회장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함은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처럼 오늘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나가신다 할지라도 불굴의 투혼과 국군포로 조기송환을 위한 발군의 업적들은 아름다운 밀알이 되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싹이 트고, 꽃을 피워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며 "전 향군회원은 조용히 옷깃을 여미고 참 군인으로, 뜨거운 조국애로 일생을 바치신 위대한 노병에게 불멸의 찬가를 보내며, 삼가 명복을 빈다"며 떨리는 음성으로 낭독해 식장을 숙연케 했다.

고인이 속했던 예비역 포병장병으로 구성된 포병전우회 전주식 회장은 추도사에서 "조창호 중위는 진정한 6·25전쟁영웅"이라며 다시 한번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하고 "병마와 투병하면서도 북에 억류된 국군포로를 데려와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며 다른 사람은 침묵하고 있을 때 님은 집회 현장에 나와 햇볕정책만으로는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하고 나섰다고 강조했다.

전 회장은 목이 메인 음성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바친 조 중위의 영전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며 "이제 무거운 짐 모두 훌훌 털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라"고 기원했다.

이어 고인이 평소 다니던 분당 새문안교회 주관으로 종교의식이 이어졌다. 교인들은 기도를 통해 "지옥 같은 북에서 탈출해 꿈에도 그리던 자유대한에서 신앙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이 했으며, 좌익이 날뛰는 이 시기에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북한주민과 국군포로 참상을 알리는데 전력을 기울여 왔다"며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달라"고 소원했다.

종교의식이 끝난 후 박세직(향군회장) 장례위원장을 필두로 유족 및 유가족 대표, 참전 친목단체 대표, 황규식 국방부차관 등의 순으로 분향 및 헌화가 이어지고 고인에 대한 경례를 마지막으로 영결식이 마무리되었다.

영결식이 끝난 후 영현은 전체 참석자들의 애도와 경례를 받으며 국방부 헌병대의 호송아래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故 조 중위의 유해는 이 날 오후 화장되어 4시 30분 국립현충관에서 안치식이 거행된다.

이 날 귀환 국군포로 1호인 조창호 (예)중위의 영결식이 거행된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행사장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비롯,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윤광웅 국방부장관, 박유철 보훈처장, 김관진 합참의장 및 육·해·공군 참모총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 정 관계와 참전 친목단체에서 보낸 조화가 식장을 가득 메웠다.

한편 20일에도 故 조 중위의 빈소에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조문을 하고 갔으며, 이 날 저녁 8시 50분에는 박근혜 전 대표가 조문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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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호씨는 한국전쟁 때 포로로 북한에 끌려가 13년 동안 감옥에 감금되고 30년 동안 광산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생활을 견뎌야 했습니다. 조씨는 장기간 지하막장에서의 강제 노동으로 규폐증에 걸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돼 자강도 산간 마을로 보내집니다.

조창호: 제가 북한에서 몸이 다 망가지고 규폐증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니까 북한에서 자강도라는 산간벽지에 보냈습니다. 사회 문화와는 동떨어진 산속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생각도 했고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러시아가 붕괴되고 중국이 변화 되면서 북한에도 변화가 왔는데 그 변화 중에 하나가 중국의 상인들이 국경을 넘어 북한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국 상인의 도움을 받아서 한국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귀환은 물론 어렵고 생명을 내놓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내놓고 북한을 떠나는 것입니다.

조창호씨는 당시 죽어도 고향땅에서 묻히고 싶은 소원으로 중국 상인에게 남한에 사는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편지는 전쟁 전 남한 성신 여고에서 교사로 일했던 누나를 찾아 무사히 전달됐습니다. 조 씨의 가족들은 이미 6.25 전쟁 이후 전사자로 분류돼 서울 국립 현충원에 위패까지 모셔져 있었던 조씨의 생존소식에 기뻐하며 그때부터 조창씨의 은밀한 귀환을 추진했습니다. 그 후 조창호씨는 형제들의 도움으로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서 어선을 타고 공해로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조창호: 한국이 가장 그리웠을 때가 제가 병으로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했을 때 이미 죽을 것을 결심했을 때.. 그때 한국이 더 그리웠고 가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보니까 달라진 현실에 놀랐습니다. 국민들이 부유하고 좋은 생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기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못 오고 있는 전우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안타깝고 섭섭합니다. 국군포로는 이미 세월은 지나서 누구 책임을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국군포로들을 하루속히 송환해 줘야 합니다.

조창호씨는 북한에 2남 1녀를 두고 왔습니다. 그는 현재 탈북해서 남한에 입국한 국군포로의 자녀들을 보면 국군포로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북한에서 겪은 고통을 알기에 자식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조창호: 북한은 계급 사회입니다. 그 가운데 국군포로는 제일 하위 층 입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와 가족들은 거주의 자유가 없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고 자녀들의 교육에 제한이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 43년 살면서 가본 곳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본 것은 감옥 감옥으로 이동하면서 본 북한 뿐입니다.

남한에 입국한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는 조창호씨는 탈북 당시 나빴던 건강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현재 조 씨는 동생 처남의 소개로 부인 윤신자씨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지난 4월 말 워싱턴에서 열린 북한 자유 주간에 조창호씨와 함께 참석한 부인 윤씨는 남편이 최근에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며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윤신자: 보기 보다는 동심으로 돌아가서 편하게 지내요. 피아노로 동요도 치고 나한테 안 가르쳐 준다고 야단치고 산책도 가고 드라이브로 가고 그래요.

올해 76살인 조창호 씨는 마지막 죽기 전에 반드시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창호: 해보고 싶은 일은 북한에 남아있는 생존 국군포로들을 반드시 송환 시키고 싶습니다.

워싱턴-이진서

 

고 조창호 중위, ´고단한 육신´ 영면
첫 탈북 국군포로 고 조창호 중위, 21일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
박세직 향군 회장 "국군포로 송환 업적 밀알 돼 열매 맺을 것"
2006-11-21 18:53:31 기사돌려보기인쇄하기

◇ 21일 오전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탈북국군포로 故 조창호 예비역 중위의 영결식에서 조카인 조윤세가 발인을 하기 위해 영정사진을 들고 걸어 나오고 있다.

“참 군인으로 뜨거운 조국애로 일생을 바치신 위대한 노병에게 불멸의 찬가를 보내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첫 탈북 국군포로 고 조창호 중위가 21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고단한 육신’을 뉘였다. ‘돌아온 사자(死者)’가 이제는 ‘영원한 사자(死者)’로 영면한 것이다.

향년 76세. 한 많은 세월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애국충정 하나로 자원입대해 참전,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가 북한에서 끝끝내 ‘전향’을 거부하다 수십년간 수감생활과 탄광노역 등으로 인고의 생활을 보낸 고인이었다.

43년만에 조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북한에 남은 500여명의 국군포로의 송환을 위해 한국 정부와 국제 사회에 호소했으며 병마가 온몸을 덮쳤을 때도 북한에 억류된 전우들 염려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고 조 중위의 영결식은 경기도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유가족과 박세직 향군회장 등 향군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향군장(鄕軍葬)으로 엄숙히 거행됐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고인의 영정사진 아래로 하얀 태극기로 싸여진 영현, 고인이 귀환 직후 정부로 부터 받은 훈장(보국훈장 통일장)증과 훈장은 고인의 파란만장하고 고단했던 생애를 상기시켜 조문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첫 향군장으로 치러진 이날 영결식에서 박세직 재향군인회장은 조사를 통해 “여생을 오직 북한 억류 국군포로들의 조기송환을 위해 바치신 고 조창호 예비역 중위님의 영전에 750만 향군회원과 더불어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며 “불굴의 투혼을 불태운 참 군인으로서, 국군포로 송환과 그 가족 돕기 운동의 선구자로 신명을 불태웠던 큰 발자취가 더욱 고귀하게 느껴진다”고 애도를 표했다.

◇ 참석자들이 고인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박 회장은 “‘오늘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나가신다 할지라도 불굴의 투혼과 국군포로 조기송환을 위한 발군의 업적들은 아름다운 밀알이 되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싹트고 꽃 피워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며 “전 향군회원은 조용히 옷깃을 여미고 참 군인으로 뜨거운 조국애로 일생을 바치신 위대한 노병에게 불멸의 찬가를 보내며, 삼가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고인이 6.25 참전 당시 속했던 예비역 포병장병으로 구성된 포병전우회 전주식 회장은 추도사에서 “고 조창호 중위는 진정한 6·25전쟁영웅”이라며 “병마와 투병하면서도 북에 억류된 국군포로를 데려와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며 다른 사람은 침묵하고 있을 때 님은 집회 현장에 나와 ‘햇볕정책만으로는 변화를 추구할 수 없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하고 나섰다”고 말했다.

한편 앞서 고 조중위의 빈소에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등 한나라당 의원들과 박근혜 전 대표가 조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당 소속 의원은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자신을 ‘돌아온 사자(死者)’로 표현했던 탈북 국군포로 1호 조창호 예비역 중위가 19일 0시 30분에 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고 조 중위는 1950년 연세대 1학년에 재학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 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담당 소위로 참전했다. 그러다 1951년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43년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

북한은 조 중위가 끈질긴 전향 회유를 거부하자 1952년 2월 ‘월남을 기도한 반동분자’로 몰아 12년 6개월간 덕천, 서흥, 함흥 등지의 수용소에 가뒀다가 1975년 중강진 구리광산으로 배치했다.

장기간 탄광노동으로 규폐증을 앓던 조 중위는 1994년 10월 3일 1994년 목선을 타고 서해로 중국어선을 타고 탈출해 귀환했다. 그리고는 그 해 11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하고 육군중위로 전역했다.

그는 지난 4월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위원회 합동청문회 참석해 “북한에 있는 540여 명의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한국 정부와 국제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후 7개월 사이 암과 뇌중풍(뇌졸중)이 조 씨의 몸을 덮쳤지만 고인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귀환시켜야 한다”는 말을 되뇌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 조 중위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재향군인회의 첫 향군장으로 치러진다. 향군은 지난 3월 향군육성과 국가안보에 공로가 큰 사람이 사망할 경우 향군장으로 치를 수 있도록 하는 ‘향군장 규정’을 제정했으며 고 조 중위가 첫 대상자가 됐다.

고 조 중위의 유족으로는 부인 윤신자(66세)씨와 2남 2녀가 남한에, 2남 1녀는 북한에 있다.

장례식은 21일 오전 7시 30분 분당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있을 예정이며 유해는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동작동 국립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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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귀대신고 왕태석기자 -31회 보도사진전 특별상, 1994년 10월 25일
국립묘지 전사잔 명단에 올라와 있던 조창호 소위가 포로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들어왔다. 25일 層?통합병원에서 문병온 후배인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43년만의 귀대신고를 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국군 포로로 북한에 억류됐다가 43년만에 극적으로 생환했던 ‘돌아온 사자(死者)’ 조창호(趙昌浩) 예비역 중위가 19일 오전 12시30분 별세했다.

북한에서부터 평소 규폐증을 앓아오던 조 씨는 이날 오전 생환한 지 12년만에 경기도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유족으로는 부인 윤신자씨와 북에 두고 온 선일·선이 등 2남1녀가 있다.

조 씨는 최근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 있던 국군포로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었다.

최우석기자 wschoi@chosun.com
입력 : 2006.11.19 09:20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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