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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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이 책에서 2,500년간 기록되어온 역사를 탐구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서 시작하여 사마천, 이븐 할둔, 랑케,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나아가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까지 열다섯명 가량의 역사가와 그들이 서술한 역사책을 소개한다. 유시민은 "그들이 왜 역사를 썼는지, 무엇의 역사를 서술했는지, 왜 하필이면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했는지 알고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고 말한다.


굴곡 많은 현대사를 살아온 그에게 역사만큼 위안이 되는 이야기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역사를 읽는 이유가 우선 재미있기 때문이고, 현재를 이해하고 싶어서, 또 미래를 전망하고 싶어서 라고 말한다. 그는 한때 자신이 처했던 고난을 위로하기 위해, 또 그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 나아가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역사를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는 사람은 어떨까? 역사가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광활한 백지 앞에 앉아 먼지나는 사실들을 꺼내 냄새 맡고 씹어보며 그 감정과 생각들을 기록하는 걸까?


"역사가는 존재의 유한성을 넘어서고 싶어한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가치를 유지할만한 사건과 사실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한다. 역사가는 또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해 타인의 이해와 공감을 받으려한다."


남자로선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당했으면서도 사마천이 끝까지 살아남아 '사기'를 집필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건 이 뛰어난 역사가에게 궁형을 내린 멍청한 왕이 아니라 사마천 그 자신이다. 죽간과 먹, 붓을 이용해 내린 우아한 복수. 그것이 바로 사마천을 구원했던 것이다. 유시민의 말을 곰곰히 듣고 있자니 그렇다면 유시민이 역사를 쓴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의 역사를 서술했는지, 왜 하필이면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역사보다 진위에 대한 시비가 첨예한 학문은 없을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반 논문의 데이터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람들은 역사의 왜곡을 훨씬 비윤리적으로 느끼며 거기에 훨씬 더 강하게 공감한다. 한마디로 분노의 크기가 다른 것이다. 이유가 뭘까? 역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전히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할 수 있을까? 사악한 당나라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역사인가 아니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주관적 역사인가? 객관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인가? 나는 가능하다고 본다. 역사가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라면 말이다.


랑케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 사실 그 자체만을 기록하려 노력했지만 그의 책에 실린 역사적 사실과 그렇지 못한 사실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걸까? 역사가는 왜 다른 사실 대신 '그' 사실을 기록했을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빠짐없이 기록한 비디오라면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총합이 아니다. 역사란 여기저기 퍼져있는 고엔트로피 상태의 사실들을 역사가의 관점과 해석으로 줄지어 세워 저엔트로피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가 없이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말은 인간이 존재하는한 역사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유시민은 어쩌면, 진보 지식인에게 부여되는 결벽적인 객관성에 피로를 느꼈을지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똑같은 생각을 갖고 일관된 주장을 펴고 있지만 그가 패자의 입장이었을 때, 그가 약자의 입장이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에서 더 많은 객관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사람들을 탓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당함을 느꼈을 수는 있지만 그는 충분히 그런 생각에 공감했던 것 같다. 그는 이제 대중과 한 발짝 떨어져 원래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무리한 추측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왜 역사가들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집중했는지 알 것 같다. 그는 역사적 진실을 획득한 현인도 아니고 그 진리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구원자도 아니다.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된다. 수천년 동안 존재해왔던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유시민 또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역사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인간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지지하거나,


혹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새롭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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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모든 순간의 물리학 -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물리학의 대답 카를로 로벨리의 우주 3부작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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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상대성이론에서부터 양자 역학, 입자 물리학, 우주의 구조, 공간과 시간, 블랙혹의 비밀에 대해 얘기하지만 이 중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이 책은 너무 짧다. 리디북스의 작은 크기 eBook으로도 고작 146페이지 밖에 안되는 책에 앞서 언급한 주제들을 담는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처음 이 책을 실행했을 때 나는 기기 오류인줄 알았다. 학술 세미나의 팜플렛 수준도 되지 않는 분량에 전 우주의 비밀을 몰아 넣으려다보니 사지 절단을 넘어 몸통과 머리까지 버린 뒤 한 줌의 머리카락만 담는 꼴이 됐다. 아무리 쉬운 대중서를 표방한다지만 대중을 너무 무시하는게 아닌가? <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쉽게 쓰는 것과 덜 쓰는 것을 완전히 혼동한 것 같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복잡한 공식과 전문 용어 없이도 훌륭하게 우주를 설명한다. 이 책이 쉬운 이유는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에 대해서만 수백 페이지를 할애하기 때문이다.


맛만 보여주고 이후의 심화 과정은 스스로 선택하게끔 하려는 의도도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라고 하면 한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질거라 생각한걸까? 그 세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테지만 이제 막 우주의 신비를 탐험하려는 초심자에게는 "일단 한번 만나" 보라는 소개팅 남의 외침처럼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나는 이 책이 내놓는 수많은 주제 중 그 어디에도 입맛이 동하지 않았다. 진도 빼기에 급급한 강사처럼 놀라운 사실을 열거할 뿐 그것이 왜 놀라운지는 효과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한 마디로 서사가 부족하다. 이렇게 어려운 주제를 다룰수록 서사는 더 풍부해야 한다. 사람들이 역사는 싫어하지만 역사 이야기는 좋아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건 물리도, 우주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장, 시간과 블랙홀의 비밀에 어느 정도 희망을 걸었지만 이마저도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내가 원서의 편집자였다면 각 주제 뒤에 더 읽어볼만한 참고 서적이라도 남겨 성난 독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겠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에게 그런 짠내나는 요청을 할 수는 없었나보다. 간만에 별들의 세례를 받으려던 내 꿈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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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검은 개가 온다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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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짜임새와 소소한 재미를 준 <달리는 조사관>을 읽은 뒤 같은 작가의 장편이 읽고 싶어진 이유는 연작 소설에서 보여준 짜임새가 장편에서 어떻게 유지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편만의 호흡, 장편만의 플롯. 엽기 살인도, 천재적 탐정도, 억지 트릭도 등장하지 않는 한국형 미스테리의 독자적 구현. 바로 이런것들이 검은 개를 쫓게 한 동기였다.


무관한듯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절정에서 만나 분수처럼 폭발하는 구성은 이 책의 역량을 평가하기에 아주 좋은 구성이었다. "전학수는 너무 수줍어서 라상표를 죽였다."는 첫 대사는 <검은 개가 온다>에 대한 기대감을 폭발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어떤 책에서도 본적 없는 강렬한 시작이었다. 수줍음 살인으로 물꼬를 튼 이야기는 어느덧 산에 묻힌 백골과 함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두 강물의 만나는 지점에서 물줄기는 비로소 막을 수 없는 대하가 될 것이었다. 나는 그 조류에 휩쓸려 미친듯이 페이지를 넘길 일만 기대하며 천천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세상에, 아무리 큰 뜻이 있다지만 강물은 좀처럼 속도를 붙이지 않았다. 기다리자. 저 멀리서 또 다른 강물이 이쪽을 향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 물이 이 물과 만나는 순간 필시 강물은 놀라운 기세로 나를 몰아세울 것이다. 그 바람이 두 손 가득 움켜 쥔 물처럼 부질없이 사라져버렸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줍어서 라상표를 죽인 전학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야기는 가뭄을 맞은 냇물처럼 서서히 말라가다 겨우겨우 산에 묻힌 백골의 강을 만난다. 그러나 두 개의 큰 강이 만나 대하를 이룰거라는 기대감은 이미 박살이 난 뒤였다. 전학수는 서브 플롯에 불과했고 목마름을 달래줄 백골은 고만고만한 형세를 유지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태풍 솔릭처럼 검은 개는 허옇게 털이 새고 있었다.


이야기를 묵직하게 만들기엔 캐릭터들이 너무 단편적이었지 않나 싶다.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숯검댕이 눈썹 박열은 그 부리부리한 눈썹을 제외하고는 거의 보여준 게 없었다. 범인의 말마따나 그는 그저 성실하고 똑똑한 모범생에 지나지 않았다. 복잡다단한 사바 세계를 헤쳐나가기에 그의 사상은 너무나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그렇다고 범인이 입체적이었던 건 아니다. 범행의 동기는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았고 범행 자체도 너무 손쉽게 이뤄지는 경향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예찬과 독특한 사상은 그 자체로는 충분히 매력적이긴 했지만 빨갛게 익은 사과에서 떫은 맛이 나는 것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범인은 타인의 감정을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 있는 천재 싸이코패스였을까? 범행 대상이 아무리 중등도 우울증을 앓는 환자라지만 말 한마디로 손쉽게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지나고 보니 단편 소설에선 장점이라고 생각됐던 소소한 재미와 단순한 캐릭터가 장편에 와선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장편은 장편 나름의 구성과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마치 단편 소설을 쭉 늘려 놓은 것처럼 이야기는 긴장감을 갖지 못했다. 수줍어서 라상표를 죽인 것 치고는, 꽤나 아쉬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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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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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의 불모지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한국의 작가들의 심중을 살펴보자. 그들을 쓰게 하는 동기는 뭘까? 장르에 대한 애정? 문명을 떨치려는 야망? 큰 돈을 벌어보려는 속셈? 어떤 생각을 품었던 좌절할 가능성이 크다. 불모지는 괜히 불모지가 아니다. '미스테리' 장르가 아니라 '장르' 문학 자체가 설 자리가 없는 한국에선 숨이 턱이 찰 때까지 달려도 오아시스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달리는 조사관>이 두 배로 의미 깊은 이유는 이 소설이 미스테리 장르인데다 지극히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거창한 트릭도, 사건도 없이 평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당연히 기벽의 탐정도 천재적 악당도 엽기적 살인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호불호를 나눌 수는 있겠다.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미스테리란 거의 이런 것들을 주무기로 삼고 있으니까, <달리는 조사관>을 읽으면 에이 싱거워, 이게 무슨 미스테리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그런 양념 투성이 잡탕보다는 이쪽이 훨씬 깔끔하고 맛있었다. <비밀의 숲>이나 <라이프>처럼 이야기를 쫄깃하게 만드는 배후의 거대한 음모가 없는 건 아쉬울 수 있지만 그건 단편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다음 책으로 송시우의 장편을 고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윤서, 이달숙, 배홍태. 인권증진위원회의 세 조사관이 때로는 각각, 때로는 또 같이 인권위에 진정된 사건의 실마리를 파헤쳐 나간다. 돌다리도 두드리며 나가는 한윤서과 다혈질이지만 추진력이 있는 이달숙, 그리고 약자의 편에 선다는 자의식이 지나쳐 때로는 객관적 시비를 가리지 못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조사에 열정적인 배홍태. 세 사람의 케미는 잘 짜여진 캐릭터 드라마를 이룬다. 여기에 몇몇 양념들, 그러니까 조사관들의 개인사와 정부 조직간의 알력, 큰 사건을 일으킨 VIP와 조사를 막으려면 배후 세력이 추가된다면 웰메이드 드라마 각본으로 각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조사관>의 작가 송시우는 지극히 대중적인 글쓰기를 지향하면서도 본인의 신념을 펼치는데는 주저함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선과 악의 분명한 경계를 좋아한다. 사람은 악인에게 벌을 내리며 쾌감을 느낀다. 쾌감은 악인이 악할 수록 더 커진다. 그래서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인들은 대부분 구역질이 날 정도로 피상적이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때로 선악의 경계를 넘나든다. 단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보호하는 건 옳은 일인가? 가해자는 관점에 따라 피해자가 될 수는 없는가?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화를 내야 할 대상을 잃고 방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한 사람을 가리키며 저자가 절대악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세상엔 절대악이 존재할 수 없다(정말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절대악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기는 한다).


사람들은 <달리는 조사관>을 읽으며 한땀 한땀 생각의 고리를 엮어 나가는 한윤서에 답답함을 느낄수도 있다. 한윤서가 시원하게 악당을 쓸어버리려는 이달숙이나 배홍태, 오히려 그들을 방해하는 악당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이 사실을 염두해 두고, <달리는 조사관>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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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벤트로드 모중석 스릴러 클럽 42
로리 로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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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서스펜스니 미스터리니 하는 '장르'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는다. 오직 캐릭터, 배경, 플롯을 아름답게 직조하여 독자가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소설'을 쓸 뿐이다."


이 자신감이 다소 모호한 장르를 만들어낸 것 같다. 10부작 짜리 미드로 보면 <벤트로드>는 9화까지 변죽만 울리다 10화에 이르러 결국 끓지 못하고 식어버린 찻물 같다. 문장과 인물, 배경 그리고 이들을 엮어 넣는 솜씨가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마음'에 심각한 피로감을 만들어낸다. 소설 내내 착 가라앉은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펼쳐놓고도 이토록 흥미롭지 않은 소설을 읽은 건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과거에 한 소녀가 죽었고 가족은 그 비밀을 공유한다. 각자 그 비밀을 품은 채 떨어져 살았으면 좋으련만 소설은 그 평화를 용납치 않는다. 캔자스의 한 시골 마을, 가족은 다시 한 곳에 모인다. 가족을 파멸시킬 불씨에 기름을 부은건 주인공 아서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벌어진 한 금발 소녀의 실종 사건이다. 아서의 아내는 이사하는 날 밤 마을의 한 진입로, 벤트로드라 불리는 급격한 커브길에서 뭔가를 치고만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지만 아무 것도 없다. 사라진 것인가? 애초에 치지 않은 것인가. 엄마의 차에 타고 있던 대니얼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변태 성욕자 잭 마이어에 대해 듣는다. 최근 근처의 교도소에서 탈출한 정신병자. 잭 마이어는 얼굴이 칠흑같이 까매서 밤에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도주 중인 범죄자라면 반드시 연못이 있는 벤트로드에서 목을 축일 것이라는 아이들의 말.


사라진 금발 소녀와 잭 마이어의 탈옥, 벤트로드에서의 의심쩍은 사고, 그리고 수십년 전에 죽은 가족. 사라진 소녀와 수십년 전에 죽은 가족을 하나로 엮는건 '금발의 어린 소녀'다. 흉흉한 소문들 사이에서 아서의 딸 에비의 금발이 눈에 띈다. 에비는 오래전에 죽은 가족 '이브'의 얼굴과 똑 닮아 있다. 에비는 죽은 고모의(이브) 오래전 드레스들을 입고 캔자스의 들판을 뛰어다닌다.


만약 이 소설이 드라마로 나왔다면 소설 보다는 흥미로웠을지 모른다. 여기저기 걸쳐 놓은 것들이 워낙에 많아 예고편 만큼은 끝내줬을 것이다. J. J. 에이브람스의 드라마처럼. 곳곳에 숨겨 놓은 떡밥은 매 에피소드가 끝날때마다 의미심장하게 드러나며 마우스 위에 올려 놓은 검지를 기어이 다음 에피소드 보기로 이끌었을 것이다. 변죽만 울릴 뿐 도무지 깊어지지 않는 이야기에 투덜투덜대면서도. 이번에는 정말 진상이 드러날 거라는 믿음과 함께.


박력있는 도입부에 눈이 멀었지만 다시 눈을 뜨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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