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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반양장) - 역사,경제,정치,사회,윤리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채사장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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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목 그대로다. 넓고 얕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편으로 나눠 빠르게 겉핥기를 한다. 시험 전 가까스로 복사에 성공한 모범생의 요점 정리 같기도 하고 논술 대비 쪽집게 주제 뽑기 같기도 하다. 짧은 분량에 워낙 방대한 양을 담으려다 보니 차 떼고 포 까지 뗀 장기판을 연상케 한다. 프로크루스테스 처럼 자기 침대를 넘어서는 다리를 싹뚝 잘라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편집과 기획의 승리다. 쪽집게 과외나 요점 정리, 세 문장 요약에 익숙한 한국이 아니었다면 아마 성공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지대넓얕>은 인문학을 꾸준히 접해왔던 사람들에겐 매우 지루한, 그러나 복잡한 건 딱 질색인 사람들에겐 구미가 당길 책이다.


정보는 넘쳐나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저자의 말처럼 정보가 폐품처럼 쌓여가는 시대다. 너무 많아서 뭘 봐야 할지 모른다면 너무 적어서 볼 게 없는 거랑 사실상 마찬가지다. 갈수록 편집과 기획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채사장은 일종의 정제소를 차렸다. 가공되지 않은 정보는 정보가 아니다. 이것은 데이터(Raw data)혹은 원재료에 불과하다. 이것을 쓸 수 있게 가공해야만 진짜 정보가(information) 된다. 최근엔 여기에 쉽고, 맛있게 라는 목표가 추가되야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 집밥 백선생이 뜬 이유를 생각해 보자.


백선생과 채사장의 공통점은 넓은 지식이다. 솔직히 백선생의 가게를 가보면 조미료 범벅의 거지 같은 음식 투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에 대한 그의 지식과 깊이를 무시해선 안 된다. 그는 자기가 가진 방대한 지식을 이용해 그저 대중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할 뿐이다. 고객이 원하고 즐거워한다면 일개 엔터테이너에게 그 이상의 책임을 묻기란 어려운 법이다. 나는 백선생의 음식에 대한 사랑과 지식을 존경하고 대중 요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존중한다. 채사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한 권의 책을 펴낸 인물이다. 아는 것과 쓰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조금만 해봐도 안다. 세상에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널리고 깔렸다. 그러나 습득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는 뭐 어디 대단한 교수도 아니고 인정 받는 외국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 온 사람도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눈 높이에 맞춘 책을 쓸 수 있었다.


채사장과 백선생의 차이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을 다음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느냐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백선생의 맛과 방법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새로운 맛, 새로운 방법, 그러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정반대의, 그러나 충분히 의미있고 즐길만한 뭔가를 발견하려 할까? <지대넓얕>은 지금 당장은 비록 넓고 얕은 지식서지만(의도한 대로) 그 속엔 독자를 더 깊은 세계로 안내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한 권으로 편안하게 즐기는 지식 여행서'의 끝에 다음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다. 그 열쇠를 넣고 돌려보자. 그리고 천천히 문을 밀어보자.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느꼈던 것보다는 확실히 묵직한 무게가 전해져 올 것이다. 그러나 겁 먹을 필요는 없다. 당신은 이미 발을 담궜으니까. 수심은 차근차근 깊어질 것이다.


한 권의 인문학이 두 번 째 인문학을 부르는 이유는 책장을 덮는 순간 새로운 의문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머리에 꽂힌 물음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거울을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똥을 쌀 때도 존재감을 과시하다 점점 커져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러면 두 번 째 책을 꺼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두 번 째 책의 책장을 덮는 순간 답은 커녕 더 큰 의문이 해일처럼 밀려드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럼 또 다시 세 번 째 책을 꺼내야 한다. 고백하건대 인문학은 답을 알려준다기 보다는 질문을 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주는 학문이다. 그래서 역사상 수 많은 통치자들이 금서 목록을 만들고 철학자를 사형대로 보낸 것이다. 왜냐고? 질문은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권력을 무너뜨리는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 이 세계에 한 번 발을 디디면 당신은 셀 수 없이 많은 책들로 둘러싸인 미로를 죽을때 까지 헤매는 벌을 받는다. 그러니 충고하건대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왔다면 앞으로도 모르고 사는 것을 추천한다. 행복은 무지에서 온다. 맹세코 비아냥 대는 게 아니다. 무지한 자만이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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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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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키리니는 
무성의하게 소설을 끝낼 때가 많다. 알렉산대 대왕의 매듭! 펼쳐 놓은 이야기가 수습이 안 될 땐 도마뱀 처럼 뚝 꼬리를 잘라 버린다. 아이디어가 참신할 수록, 독특할 수록, 황당할 수록 이럴 확률은 늘어난다. 원래 반짝 반짝 빛나는 원석은 그 가능성에 비례해 가공의 품도 늘어난다. 때로는 무한한 가능성이 도리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것. 그러니 명심하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건 언제나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가능성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를 읽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도 대단한 아이디어를 씹다 뱉은 껌처럼 퉤퉤 내다버린다는 점에선 <육식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남자는 아이디어가 무한히 샘 솟는 맷돌 하나를 책상 서랍에 숨겨둔 것 같다. 쓰고 버려도 넘칠 만큼 아이디어가 폭주하는 것이다. 애써 이야기를 다듬거나 장편으로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기엔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는 동안에도 아이디어가 터져나와 집필을 방해할 정도다. 가지에 가지를 치는 생각은 어느새 거대한 나무가 되어 머리 속을 가득 채운다. 그러면 쓰던 걸 얼른 끝내버리고 이 새로운 나무에 집중해야 한다. 이 때 소설가는 일종의 벌목꾼이다. 거대한 나무를 베어 종이 안에 담지 않으면 뇌는 무성한 나무들에 완전히 잠식당하고 만다. 의식이 숲에서 길을 잃고 혼잣말을 하게 된다.


대변은 여기까지 하자. 솔직히 <육식 이야기>는 별로다. 씹다 뱉은 껌이라도 마다않고 두 번 세 번 곱씹은 이유는 생각의 꼬리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수풀 사이로 살랑 살랑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 쫓아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침내 꼬리를 잡아 몸통을 끌어낸 순간 탄식의 한숨을 내쉴지라도 괜찮다. 그 꼬리를 보고 만진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육식 이야기>는 꼬리도 별로고 몸통은 더 별로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더 미약하리라! 좋은 아이디어를 모두 데뷔작에 쏟아 부었던 걸까? 아무튼 안타깝다. 훌륭한 소설가의 졸작을 읽는 건 본인 못지 않게 독자까지 무참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두시길. 이별의 아픔을 알아버린 사람이 새로운 사랑의 시작에 머뭇거리듯이 베르나라 키리니의 세 번째 책을 드는 게 망설여진다.


그나마 괜찮았던 작품이 뭐였는지 생각해 보자. <뒤 섞인 사랑>, <수첩> 그리고... 그리고 모르겠다. 나에게 세례를 준 책은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다. 아니 <육식 이야기>가 주인공인 글에서 왜 자꾸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얘기를 하는가?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아이디어 하나를 얻었다. 나를 실망시킨 <육식 이야기>를 모욕하는 방법 말이다. 어떻게? 제목을 그대로 놔둔 채 끊임없이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조연이 주연을 대체한다. 속편의 주인공이 시작하자마자 전 편의 주인공에게 목숨을 잃는다.


이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은 무성의하게 끝낸 소설을 읽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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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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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광활한 사막의 이야기다. 이노우에 야스시란 이름도 그의 <둔황>도 처음 들어본 것이라 반신반의, 미심쩍은 마음으로 손에 들었으나 몇 페이지도 지나지 않아 진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아주 즐거운 이야기를 읽었다.


역사는 그 자체가 이야기다. 그렇다면 역사 소설은 이야기를 이야기로 만든 셈인데 애초에 이야기였던 것을 어떻게 또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할 수도 있다. 따지자면 전자의 이야기는 뼈대고 후자의 이야기는 살이다. 역사는 큰 나라와 큰 인물과 큰 시간을 기록하지만 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했던 철수와 영희와 민수와 그리고 그들이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부부 싸움을 했던 것은 쓰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의외로 추상적이다.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그저 건조한 사실의 나열로 느껴질 뿐. 사람들이 역사는 싫어해도 역사 드라마는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조행덕이 진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향인 호남 시골에서 수도 개봉으로 상경한 것은 송나라 인종의 재위 기간인 천성 4년(서기 1026년) 봄의 일이었다(p.7). 행덕의 공부는 깊었고 그래서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과신하는 게 아니라 일전에 치뤄진 제반 시험에서 행덕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던 것이다. 그랬던 행덕이건만 정작 시험장에서 깜빡 졸아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걸 놓치고 만다. 이 절망의 순간 인생이 그대로 끝나버리고 만다면 차라리 행복한 일이지만 그럴 일이 없기에 사는 게 고달픈 거다. 원하는 것을 얻었든 얻지 못했든 삶은 계속된다. 행덕, 이 안타까운 남자도 절망을 맞이한 순간 벼락을 맞아 죽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시장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체로 누워 있는 여자 한 명을 목격한다. 여자는 자신이 불륜을 저지른 죄를 갚는 중이라며 누구든지 자기 살점을 원하는 사람에게 돈을 받고 팔겠다고 한다. 여자는 서하 사람이었다. 행덕은 신비로울 정도로 황홀한 여자의 기개에 반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의문을 품는다. 도대체 서하의 무엇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행덕의 마음 속에 새로운 의지가 싹튼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서하로 떠난다.


이후 행덕의 삶은 지금까지 상상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방향으로 급격히 물꼬를 튼다. 서하의 한족 부대에 강제로 편입된 행덕은 그 지대를 장악한 토번, 위구르와 전투를 벌이고 심지어 한족의 국가이자 본인이 관리가 되어 다스리고자 했던 송나라에 까지 창끝을 겨누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형덕에게 내면의 갈등은 없다. 그는 휘몰아치는 역사의 광풍에 매몰되지 않고 조행덕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겐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하는 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가 이기든 결국엔 시간의 파도에 밀려 산산히 바스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영원에 집중한다.


행덕은 불교에 귀의해 역사를 다스린다. 그는 자신이 모셨던 한족 부대의 대장 주왕례가 반란을 계획하자 망설임 없이 뜻을 같이 한다. 역사의 바람은 서하의 깃발을 맹렬히 흔들며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친절히 가르쳐주지만 두 남자는 그 흐름에 당당히 맞선다. 예정대로 주왕례는 목숨을 잃는다. 조행덕은 도망치는 대신 죽음을 각오하고 불교 경전을 천불동에 숨겨 놓는다. 미약한 반란을 제압한 서하는 감주, 숙주, 과주, 사주 일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이 된다. 서기 1042년 서하는 송나라와 강화를 맺는다.


사주 일대는 그 후 수 백년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이나 소속과 명칭이 바뀌었다(p.245). 행덕이 경전을 숨겨둔 천불동 지역도 둔황으로 이름이 바뀌어 둔황석굴로 불렸는데 1900년 대 초반 왕윤록이라는 도인 하나가 이곳을 찾아 우연히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 거주하며 돌보게 되었다. 왕도인은 석굴의 한 쪽 면이 부풀어 오른 것을 보고 조심히 파들어가다 어마어마한 수의 경전을 발견한다. 1907년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경전의 일부를 헐 값에 사간다. 다음 해에 프랑스인 펠리오가 그 다음엔 일본과 러시아의 탐험가들이, 그리고 그 다음엔 북경의 군대가 나타나 남은 경전을 모조리 싣고 떠난다. 보물을 가져간 그 누구도 처음엔 그 진가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 말릴 수 없는 시간이 흐른다. 그러자 4만여 점에 달한 경전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조행덕이 목숨을 걸고 숨긴 동굴 속의 보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조행덕을 슬픔과 고통 회한과 절규 속으로 몰아 넣은 역사가 그의 덕분에 현대에 살아나 영원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자기가 기록할 가치도 없었던 한 인간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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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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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번도 해외 여행을 꿈꿔본 적이 없다. 스페인의 태양도 아이슬란드의 얼음도 프랑스에 대한 낭만적 환상도 내게는 아무런, 정말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랬던 나에게 해외로 떠나야만 하는 강력한 이유를 제공한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밀란 쿤데라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쿤데라 전집을 손에 든 순간 그런 생각이 쏜 살 같이 머리를 지나갔다. 여행을 떠나 가장 유명한 서점에 들러 내가 사랑하는 작가의 책을 원서로 구입해 돌아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시작한 내 여행은 체홉의 단편을 들고 폴란드로 떠난다. 그곳에서 아이작 B. 싱어의 <쇼샤>를 품에 안고 체코로. 바로 거기서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사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쿤데라의 장기는 숨쉴 틈 없이 빽빽히 들어찬 허무의 박력이다. 존재가 가벼울 수록 허무의 무게는 큰 법. 인간이 꿀 수 있는 가장 원대한 꿈이었던 공산주의의 부패와 타락, 폭력을 몸으로 느낀자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리라.


자기 삶의 진심을 듣지 못하는 사람에겐 늘 허무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인간은 다른 삶을 찾아 떠난다. 언제나 <삶은 다른 곳에>. 주인공 야로밀의 어머니는 야로밀을 잉태하는 순간 그 아이가 자기 삶의 구멍을 메워줄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야로밀의 존재를 눈치 챈 순간 그것을 조용해 제거해 줄 사람을 안다며 비겁한 제안을 한다. 사랑! 육체적 욕망을 탕진하고 나면 무서운 속도로 쪼그라들고마는 이 더러운 감정은 역시 인생의 허무를 메울 만한 재목이 아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좀 더 고차원의 사랑, 즉 야로밀에게 자기의 삶을 온전히 던져 넣는다.


"야로밀이 처음으로 단어 하나를 발음했을 때 그리고 그 단어가 엄마였을 때 그녀는 미칠듯이 행복했다. 아직은 단 하나의 유일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아들의 두뇌에 오로지 자기만이 들어가 있다고, 그리고 이제 이 두뇌는 점점 자라나 가지를 치고 풍요로워질 테지만 그 뿌리에는 언제나 자신이 남아 있게 될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p.24) 그리하여 그녀는 석류빛 수첩을 하나 사서는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사랑의 대가로 조만간 절망이 지급될 거란 사실을 안다. 왜? 야로밀에게도 삶을 찾아 떠날 이유, 어머니가 남편을 거쳐 야로밀에게 안착했듯 야로밀 또한 어머니를 거쳐 다른 여자의 품에 안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자신이 오래 전 깨달았으나 결코 그 깨달음을 전해줄 수는 없는 그 더러운 감정의 흐름을 쫓아 야로밀은 떠나리라. 그리하면 어머니는 또 어디에서 자기의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으로 야로밀은 태어날 때 부터 시인이었다. 야로밀은 자신이 시인을 흉내낼 때 엄마가 행복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시인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진짜 시인이 되기에는 한 여자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깨달음으로 인해 시인으로서의 자아는 위축 된다. 그 공백을 메우는 건? 바로 혁명이다. 야로밀은 철저한 혁명가가 되어 자기와 함께 육체적 욕망을 탕진하던 여자의 오빠를 반체제 행위로 고발하기 까지 한다. 이 철저함으로 야로밀은 자기 앞에 새롭게 나타난 흑발의 매력적인 영화학도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꿈은 박살나고 만다. 야로밀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파티에 시인이자 혁명가로 참석한다. 그는 거기서 한 남자와 가벼운 논쟁을 벌였는데 그것이 결국 육체적 싸움으로 번져 싸늘한 한기가 올라오는 발코니 바닥에 내던져진다. 모든 이의 웃음거리가 된 야로밀. 그는 죽음만이 자신의 복수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집으로 돌아온 야로밀은 폐렴으로 목숨을 잃는다.


<삶은 다른 곳에>는 파랑새는 자기 집 앞마당에 앉아 있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글쎄, 쿤데라의 작품엔 어디에도 안식이 없다는 서늘한 허무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에밀 아자르가 <자기 앞의 생>에서 비록 삶이 자기와의 동의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할당된 의무지만 그래도 사랑을 하며 꿋꿋이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쿤데라는 영원히 방황하는 방랑자의 삶을 그려낸다. 무엇이 더 좋은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가장 좋은 건 두 가지 모두를 가슴에 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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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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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기 앞의 생>은 에밀 아자르의 책이다. 동시에 로맹 가리의 책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는 <하늘의 뿌리>라는 소설로 1956년 콩쿠르 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년 뒤 <자기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 상을 수상한다. 공쿠르 상은 결코 같은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주지 않는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맹 가리가 두 번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유서 깊은 문학상의 위원회가 도저히 두 번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베일에 쌓인 신예 에밀 아자르가 설마 로맹 가리였을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는 30년 간 소설가로 명성을 얻고 부를 얻고 여자를 얻는 동안 너무 지쳤던 거다. 사람들은 로맹 가리의 실재가 아닌 자기들이 안다고 믿는 로맹 가리를 믿었고 이러한 부조화는 감수성이 예민한 소설가들에게 언제나 큰 상처를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이른바 가면의 생.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얼굴에 딱 달라 붙어 숨통을 조여오는 가면에 질식하고 말지만 이 모험심 넘치는 노인은 달랐다. 자기의 또 다른 자아, 에밀 아자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은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경쟁하듯 서로의 소설을 출간했는데 로맹 가리에게 이제 갈 때가 됐다고 혹평을 쏟아낸 비평가들이 에밀 아자르의 소설엔 도저히 신인이라고 볼 수 없는 대가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찬사를 늘어놨다. 얼마나 신이 났을까? 로맹 가리는 1979년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짧은 원고를 쓴 뒤 1980년 입 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겨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의 끝에 그 원고가 담겨 있다.


<자기 앞의 생>이 쏟아내는 절망은 너무 설화적이라 오히려 동화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뜬금없이 <어린 왕자>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파리의 창녀와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 받은 14살 소년 모모는 어린 왕자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쫓는다. 하지만 모모에겐 어린 왕자와 같은 수동적 태도가 없다. 이 작은 아이는 자기 동의도 없이 폭력적으로 내던져진 삶에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고 거리로 나가 구걸을 하는가 하면 상점에서 개를 훔쳐오고 그 개를 사랑하게되자 개에게 더 행복한 삶을 주기 위해 부자집에 팔아넘긴 뒤 그 거금을 하수구에 버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걸 떠나 보낼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붙잡을 자신도 없는 멍청이 어린 왕자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길러줬던 로자 아줌마가 치매에 걸렸을 때 그녀 곁에 남아 침대와 속옷에 싼 똥을 묵묵히 치우며 집안을 돌보기까지 한다! 어린 왕자였다면 "아줌마 아파요?", "이제 떠나는 건가요?", "길들여 지는 건 그런 거죠? 상처를 남기는 거죠?", "난 이제 어디로 가요?" 따위의 개수작을 벌일 상황에서 말이다.


모모는 아직 어린 아이였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누릴 자격이 충분한 아이였지만 삶은 그가 어른이 되기를 강요했다. 죽음이란 게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질병은 오히려 축복이다. 질병은 우리가 더이상 아무 것도 잃지 않아도 되고 아무 것도 걱정할 일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아직 어린 탓에 죽음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생' 뿐이다. 창녀에게서 태어난 고아 이슬람교도에겐 단 한톨의 자비도 내어줄 생각이 없는 삶 말이다.


모모를 도와주는 건 블로뉴 숲에서 남창으로 일하는 여장 남자와 뒷골목을 제패한 아프리카 흑인, 역시 아프리카에서 도망쳐 와 쓰레기 청소부가 된 일단의 무리다. 그들은 "아픈가요?", "산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거에요." 따위의 개소리를 하는 대신 바나나와 암탉과 망고와 쌀을 가져다 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린 왕자>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생떽쥐베리도 로맹 가리도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모두 전투기 조종사였다. <어린 왕자>가 추운 겨울 밤 따뜻한 침대에 들어가 켜켜이 저며드는 어둠과 함께 지독히 사치스러운 센티멘털을 느끼며 읽는 책이라면 <자기 앞의 생>은 똑같이 추운 겨울날 송곳처럼 피부를 찌르는 비를 맞으며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깜빡이는 가로등 불 빛에 의지해 읽는 책이다. 나는 침대 맡에 놓인 <어린 왕자>가 웬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나는 밖으로 나가 비를 맞으며 모모를 읽겠다. 비에 젖어 뒤틀린 책은 노랗게 변해 딱딱하게 굳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뒤틀린 책을 평생 팔 사이에 끼고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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