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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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당신은 클래식을 즐겨 듣습니까? 그럼요. 제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쇼팽도 있고, 드비쉬도 괜찮고, 가끔은 바그너를 청하기도 합니다, 라는 수준으로는 곤란하다. 하루키의 LP 편력은 이미 범인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상태다. 비록 재즈가 70 클래식이 20 록과 팝이 10이라지만 총량 자체가 어마어마해 20만 얘기해도 책 한 권이 나온다. 총 100곡을 소개하는데 한 곡 당 적어도 4개의 앨범을 덧붙이니까 그 양이 평생을 들어도 남을 정도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는 나도 여태껏 들어본 앨범 수를 세면 글쎄, 100개를 넘기가 힘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요즘엔 단곡을 중심으로 들으니까.


그러니 하루키의 클래식에 공감하려면 웬만한 경험으로는 부족하다. 행여나 멋진 책 커버와 그동안 하루키 에세이가 보여온 특유의 무용함에 반해 이 책을 고른다면 정말로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하루키 책이라면 거의 빼놓지 않고 읽어온 사람이 진심으로 하는 충고다. 몇 가지 예시를 보여주겠다.


다음은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르슈카>를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 하에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이 녹음한 앨범에 대한 하루키의 감상평이다.


연주의 흐름은 둘 다 자연스럽고 조급한 구석이 없으며 적당한 유머가 감돌아 몇 번이고 편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앙세르메의 인덕 같은 것이 느껴지는 연주다.(p.17)


세상에, 스트라빈스키도 겨우 들어본 듯한데 1949년도에 활약한 지휘자 앙세르메의 인덕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게다가 연주에 유머? 음악이 어떻게 들려야 도대체 유머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을까?


다음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C장조 작품번호 15를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1958년에 녹음한 앨범에 대한 평이다.


지극히 성실하고 설득력 있는 베토벤이다. 그리고 그 피아니즘은 매우 긍정적이고 첨예하다.(p.153)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선 베토벤 음악이 어떠해야 한다는 자기만의 정의가 확실히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테니까. 피아니즘이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첨예하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끝없이 혁신하는 사업가가 떠오르는데, 그 어려운 베토벤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완성했다는 의미일까?


지금 보여준 예시는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단순히 하루키만 보고 들어왔다면 대화가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는 오히려 그 난해함으로 인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신기한 책이다. 나는 한참을 읽던 중 그냥 책을 덮고 그가 소개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유머와 긍정과 첨예의 소리가 도대체 뭔지 궁금했으니까.


물론 나는 실패했다. 유머가 무엇인지 알려면 진지함 또한 알아야 한다. 긍정을 이해하려면 부정을 이해해야 하고 첨예를 느끼려면 부드러움과 여유를 느껴봐야 한다. 이는 한 연주자의 여러 곡과 여러 명의 뮤지션이 연주한 한 곡을 수 없이 교차 청음 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지휘자나 연주자에 따라 같은 곡도 완전히 다르다는 건 알게 됐다는 점이다. 정말 신기하게 달랐다. 이게 진짜 같은 곡인가, 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검색했지만 워낙 구반이 많아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없는 것들이 많았다.(스포티파이로 가면 좀 나으려나?) 그래도 개중 몇 개를 찾아 여기에 올리니 직접 들어보길 바란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멜론을 이용했다. 해당 키워드를 그대로 검색한 뒤 앨범 커버로 찾으면 된다.


1. Stravinsky: The Firebird Ozawa Seiji

책에 소개된 건 파리 관현악단과 녹음한 아래 앨범이다. 하루키의 평은 이렇다.




소리가 보다 컬러풀하고 섬세해졌으며, 흐름에도 한결 강한 '스토리성'이 생겨났다.(p.132)


이는 오자와 세이지가 보스턴 교향악단과 녹음한 앨범과 비교하며 한 말인데, 내가 소개하는 보스턴 교향악단 버전이 당시에 녹음한 것을 2019년에 커버만 바꿔 다시 내놓은 것인지, 아니면 녹음 자체를 새로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2. Bartok piano concertos

하루키는 오자와 세이지 지휘에 피터 제르킨이 연주한 1965년 앨범을(아래) 최고로 쳤다.




두 사람의 연주로 이 곡을 듣다 보면 '맞아,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곡이었어' 하고 눈이 뜨이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p.164)


두 번째는 앨범 커버가 맘에 들어 내가 골랐다.




3. Strauss four last songs

소개된 음악 중 유일한 가곡이다. 책에 실린 건 조지 셀 지휘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버전이다. 하루키는 슈바르츠코프의 가창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음악을 구석부터 구석까지 빈틈없이 향유하는 가창으로, '마음으로 노래한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p.179)


이 외에도 키리 테 카나와, 리자 델라 카자, 아넬리제 로텐베르거, 군돌라 야노비츠를 소개하지만 키리 테 카나와의 것만 간신히 찾았다. 그것도 하루키가 픽한 앨범은 아니다. 하루키는 그녀의 가창이 슈바르츠코프에 비해 훨씬 드라마틱하며 '고요한 체관'이라기보다는 '그럼에도 강하게 맥박 치는 감정' 같은 것이 느껴진다(p.179) 고 했는데, 과연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하루키는 슈바르츠코프 쪽이라고 했지만,


나는 카나와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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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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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분류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매우 정치적인 동시에 개인적이고, 에세이면서 과학책이고, 전기이면서 미스터리 스릴러 기도하다. 틀에 매이지 않는 이 책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유유자적 고정관념의 바위를 피해 다니며 자신만의 독자적 장르를 만들어간다. 정말로 독특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데이비드를 빼고 보면 마이클 조던의 별칭인가 싶을 정도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이 남자는,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 스탠퍼드의 초대 학장이다. 물론 당시의 스탠퍼드가 지금 같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설립자는 캘리포니아에서 매우 수상한 방법으로 떼돈을 번 부부였고 대학을 설립한 취지에도 약간 구린내가 풍겼다. 심지어 남편 릴런드 스탠퍼드가 사망하자 아내 제인은 스탠퍼드 대학이 강신술에 대한 과학적 연구 같은 분야로 확장해나가길 원했다. 제인은 과학자들이 대기 중의 X선을 활용하여 망자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열어주기를 요구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래도 과학자였다. 제인의 생각을 쓰레기라고 치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든 조던은 물고기 분류에 관한 한 미국 일인자였고 그가 세계에서 최초로 발견해 명명한 종들만 모아도 대학 연구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이 관심의 충돌은 이 책을 돌연 미스터리 스릴러로 이끄는 복선이 된다.


이 책의 줄기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생애다. 일종의 전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저자 룰루 밀러는 불행했던 개인사를 중간중간 끼워 넣어 자신이 왜 조던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게 됐는지를 밝힌다. 밀러가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조던이 평생을 놓지 않았던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였다.


조던은 강신술을 과학이라 믿는 무지한 고용주와 함께 일하면서도 자기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사나이였다. 가정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두 번째 부인과는 궁합이 잘 맞았지만 사랑했던 자식들을 불운한 사고로 잃었다. 치명타는 1906년 캘리포니아를 강타한 대지진이었다. 그 끔찍한 지진은 조던이 30년 동안 일군 업적을 단 몇 초만에 박살 내버렸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절망에 사로잡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대사건 앞에서 조던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는가? 그는 부서진 연구실로 달려가 에탄올과 시체 냄새를 헤치며 터지고 찢어진 물고기 표본들을 손에 쥐고 다시 그 위에 이름표를 꿰매 넣었다.


조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좌절과 분노를 어떻게 제압했을까? 그에겐 감정이란 게 없었던 걸까? 그릿(Grit)이라고도 부르는 이 근면 성실은 조그만 바람에도 휘청이던 삶을 살았던 룰루 밀러에게 성배와도 같았다. 어떻게 하면 조던처럼 살 수 있을까?


감동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흔하고 뻔뻔한 아메리칸 성공 스토리 기도 한 이 책은, 그러나 종반에 이르러 눈에 띄게 궤도를 이탈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이 되어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다. 그 순간 사소하고 같잖았던 이 이야기는 인류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힌트는 제목에 있다. 마지막 문장을 다 읽고 나면 이 모든 게 페이크 다큐는 아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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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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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를 선택한 건 '아작'과 '부커상'이라는 미스 매치 때문이었다. 아작에서 나온 소설이 부커상에 노미네이션 되다니, 내가 아는 아작은 그런 데가 아닌데... 물론 아작의 책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읽어온, 이 임프린트에서 출간한 책들은 대개 SF였기 때문이다. SF가 뭐 어때서? 흠, 그것도 맞는 말이군.


<저주토끼>는 SF가 아니었고 얼마 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수상한다면 한강 이후 한국 문학계가 내디딘 또 하나의 중요한 발자취가 될 것이다. 한국 문학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다. 그들의 심사평에 동의하든 말든. 그 의도가 어쨌든. 하지만 그 사람들이 왜 이 소설에 주목했는지에 대해선 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왜 이런 책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서와 문화와 전통이 다른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배움을 위한 의문이다.


<저주토끼>는 10편의 소설로 엮은 단편집이다. 공포 또는 환상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들로 전부 지독하게 쓸쓸하고 우울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갑자기 임신해 여기저기 핍박을 받다 사람이 아닌 핏덩이를 낳고 안도한다거나, 자신의 똥오줌으로 만들어진 괴물이 변기 뚜껑을 열고 나타나 '어머니'라고 부른다거나, 자기를 초기화하려는 주인을 살해하는 안드로이드들의 이야기들.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해 죽은 자리를 뱅뱅도는 지박령의 사연이나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저주를 건 벌을 받아 죽은 뒤 매일 밤 가족을 찾아오는 유령의 이야기 정도는 이 책에서 꽤 밝은 축에 속한다. 사는 게 힘들어 희망을 얻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절대 피하시라 말하고 싶다. 아니, 아픔의 공유를 통해 오히려 치료의 기회가 생기려나?


만약 <저주토끼>가 부커상을 최종 수상하면 기뻐할 일이지만, 그 탓에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펼쳐 들고 느낄 곤혹을 떠올리면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직접 읽고 판단하시라.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좀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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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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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가 들려주는 최초의 사적인 이야기다. 그 수많은 수필을 발표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꼭꼭 감춰두었던 하루키다. 물론 위스키나 달리기 클래식 음악처럼 본인의 취향을 드러낸 적은 많다. 그러나 그 자신의 인간관계, 그러니까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친하고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한 적이 없다.


이 책에서 하루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아버지는 1917년 12월 1일 교토시 사쿄 구 아와타쿠치에 있는 '안요지'라는 정토종 절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불운한 세대였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전쟁을 치러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두 번이나 징집되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큰 부상 없이 종전을 맞았다. 어린 시절 하루키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매일같이 불상을 마주 보고 앉아 불경을 외는 모습이었다. 죽은 적군과 동료의 명복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학문에 큰 뜻을 두었던 것 같다. 문학, 특히 하이쿠에 깊이 빠져들었다. 동인들과 유명한 하이쿠 시인의 여행지를 답사하고 하이쿠를 짓고 출간도 여러 권 했다. 그 당시 하루키의 집 한켠에는 아버지가 출간한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아버지는 시인이 될 수 없었다. 결혼을 했고, 하루키를 낳았고, 교사가 됐다. 그런 시대였으니까. 꽃다운 나이에 다른 꽃을 죽이다 처절한 패배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얇은 뿌리 몇 가닥을 내릴 땅을 찾아 고군분투했던 세대. 그러니 그의 아버지가 이른바 단카이 세대로 불리는 하루키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아버지와는 다르게 단카이 시대의 아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들은 대학 입학 직전에 전쟁에 나가라며 등을 떠밀리지 않았다. 일본은 세계를 지배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하루키가 청년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획은 현실이 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방황과 고민의 새싹은 늘 풍요의 대지를 비집고 움튼다. 하루키는 공부에 큰 열정이 없었다. 정해진 답을 기계처럼 외우는 일에 이 아웃사이더가 어찌 흥미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의 아버지는 이런 하루키에게 적잖이 실망했던 것 같다. 뻔한 레퍼토리.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 방해하는 것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데, 왜 좀 더 면학에 열심히 정진하지 않는가'(p.60). 하루키가 서른 살에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 아버지는 무척 기뻐했지만 그 시점에 두 사람은 이미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자식은 결국 나이를 먹어 어느 정도 부모를 이해하고 화해를 시도한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건네는, 지극히 하루키다운 화해로 읽힌다. 책은 얇고, 그 어디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하루키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가슴 끝으로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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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1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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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조선을 떠나 다른 땅과 시간을 구경하니 흥미가 남달랐다. 이제는 남의 땅이 되어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분노가 집중을 더했을 것이다. 당시에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같을지는 미지수다. 땅의 모양과 크기, 산과 강의 구성, 기후부터가 다르다. 우리가 만약 그 시간대로 날아가 그들과 만날 수 있다면, 그럼에도 한 핏줄임을 의심할 수 없는 표식을 서로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드문드문 완벽하지는 않아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 있을까?


당시 지도를 보면 고구려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단 두 개의 나라와 마주 보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 숨이 막히는데, 그 많은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고 외교를 맺고 강토를 관리해왔을 그들을 떠올리면 절로 눈앞이 캄캄해진다. 어지간한 배짱과 지혜, 힘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총 700년에 달한다. 그동안 한반도는 삼한과 가야, 옥저 등이 일어났다 사라져 백제와 신라로 압축됐고 중국은 한나라를 거쳐 위, 촉, 오의 삼국시대, 5호 16국, 남북조를 거쳐 수와 당나라까지 수많은 국가가 명멸하였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할 때마다 이 북방의 맹주는 늘 목 앞에 드리운 칼날이었다. 고구려는 여러 나라가 난립할 때는 외교를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했고 하나로 뭉쳐 강해졌을 땐 힘으로 맞서 무너뜨렸다. 광개토대왕의 무력 덕분에 강력한 철기병으로 적진을 초토화하는 여포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위치에서 700년을 살아가려면 창과 칼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전쟁은 이기든 지든 국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 복잡했던 중국 대륙을 다시 한번 통일해낸 최강 수나라가 괜히 망했겠는가? 우리는 고구려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지만 특히 그들의 정치 외교술에선 무지가 더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 힘과 정치의 교묘한 균형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보다도 긴 고구려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보다 한참이나 얇은 두께로 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아있는 사료가 많지 않고, 너무 오래되었으며, 그나마 남의 땅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된 지역도 꽤 최근까지 청나라 왕조가 시발한 성지로 간주되었을 정도다. 심지어 그 비문은 일본과 중국이 독점하여 각각 역사 왜곡의 원료로 삼고 있다. 자국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타국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부조리. 그러니 그 후손들이 향수와 함께 깊은 분노와 아쉬움을 느끼는 거 아니겠는가?


이 책은 고구려의 역사를 정말 한 권으로 읽을 수 있게 잘 요약해놨다. 그러나 그만큼 아쉬움도 크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고구려의 문화와 제도, 정치를 좀 더 깊이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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