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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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의 대표작은 <살인자의 건강법>이나 <적의 화장법>이 아니라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사랑의 파괴>, 그리고 이 책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누차 얘기해 왔다.


25세에 데뷔. 이후 1년에 한 권씩 미친듯이 책을 써내는 노통은, 그러나 그 열망과는 달리 작품의 질이 고른 편이 아니다. 어쩔 땐 자기와의 약속(1년에 한 권)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책을 쓰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엉망인 작품도 많다. 그래서 노통의 책을 고를 땐 이 한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 소설이 노통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전자는 대개 '두려움과 떨림'을 안겨줄 만큼 압도적 재미를 선사한다. 후자는, 나 같은 나부랭이가 이런 위대한 작가에게 할 수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쓰레기다.


<두려움과 떨림>은 1990년대 초 일본의 '유미모토'라는 회사에 근무하게 된 노통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최강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1990년대 초의 일본을 보라고.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적의 항공 모함으로 달려들던 상명하복의 후예 답게 일본 국민은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에 묵묵히 따랐다. 아무런 의문도 갖지 말 것. 이 개미 군단의 질주가 패전의 핏물이 가득한 땅 위에 세계 최강의 경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상명하복, 무조건 적인 복종, 경직된 조직 구조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의 핵심은 자유와 자유와 자유의 가치를 누려온 백인 여자에게 개미 지옥과 마찬가지였다. 노통은 그곳을 지옥이라 말하지만 택도 없는 소리! 쇠락한 서구 사회의 백인 여자가 어찌 감히 최강의 일본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패배자가 숨겨온 복수의 칼날은 새디스트의 채찍이 되어 어리석은 백인 여자에게 태형을 선고한다.


노통은 이 수치스런 형벌을 받아들인다. 왜? 일본을 사랑했으니까.


일본 사람들에게 근대화의 역사는 서양 침략사와 일치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패배의 추억. 일본은 이 트라우마를 '텐노 헤이카 반자이'(2차 세계 대전)로 치유하려 했으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거대한 성기에 강간을 당함으로써 다시 한 번 무릎을 꿇는다. 수 십년간 부들부들 치욕에 떨었던 패배자들, 그들이 경제를 통해 비로소 세계 정복을 완수했으니 그 복수심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반면 노통은 1967년 생. 승자의 기억을 단 한톨도 공유하지 않은 전후 세대다. 그녀는 일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평생 기억하며 그 곳에서 매료된 압도적 미의식을 평생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운명. 고통을 받을 걸 알면서도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의 아이러니.


후부키는 이런 아이러니가 그대로 형상화된 캐릭터다.


180cm가 넘는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우아한 곡선이 아름다운 일본의 고대활을 닮은, 눈부실 정도로 예쁜 여자. 유미모토 사의 유일한 간부급 여직원 후부키는 처음엔 이 낯선 외국인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극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다. 건방진 백인 여자가 유제품 부서의 '덴시'씨를 위해 기가막힌 보고서를 써준 것이다.


입사한지 한 달도 안된 햇병아리가 감히 수 년에 걸쳐 쌓아올린 나의 커리어를 단번에 앞질러 가겠다고?


'눈보라'라는 이름의 후부키는 양눈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품고 이 건방진 백인 여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쯤에서 나는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제목이 갖는 다의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경험한 보통의 서양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은 할미꽃 사이에 핀 해바라키 만큼이나 명확하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두려움. 한 때는 보잘 것 없던 패배자가 어느새 거대하게 자라 과거의 승자를 잔인하게 짓밟으러 다가올 때마다 지표를 울리는 떨림이다.


그러나 노통에게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상 행동에는 대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연루되어 있다. 노통은 일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일본의 미에 완전히 매료됐다.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불가항력으로 뿜어져 나오는 우아함. 한 겨울 대나무 위로 소복히 쌓이는 눈 소리 같은 미. 그토록 필사적으로 '모던'을 추구했던 서구 문명이 결코 흉내낼 수 조차 없는 간결함의 정수들. 자라지 못한 정신에 새겨진 미의 얼룩은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남겼다. 이 무늬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답답하고 끔찍할 만큼 잔인한 나라에 몇 번이고 돌아오게 만든다.


노통은 결국 일본을 떠난다. 아픔을 잊으려 소설에 몰두했고 성공을 거뒀다. 다시 승자가 된 노통은 이제 모든 걸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옛 사랑의 이름을 듣는 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1992년, 내 첫 소설이 출간되었다.

1993년, 나는 도쿄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아멜리 상,

축하해요.


모리 후부키


이 말은 내가 기뻐할 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어떤 점 때문에 내 심장이 멎었다.


이 말은 일본어로 씌어 있었다. (p147~148)


이것은 상처 투성이 사랑을 닮았다. 이 사랑은 두려울 정도로 아픈 상처를 주지만 그 사랑이 살갗에 닿는 순간 전율이 일 정도의 떨림을 느낄 수 있다. 이 압도적 아름다움은, 두려움이자 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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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5-01-0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읽은 아멜리 노통브의 책이 <살인자의 건강법>이었는데 딱 손을 놓았어요. 아 이 작가는 내 취향이 아니구나...
이후에도 계속 책이 나오고 많은 사람이 찾는걸 보고 참 사람들은 나랑 다르네 했는데, 다른 책은 또 다르단 말이군요.
다시 한 번 노통브에 도전해볼까 하고 살짝 보관함에 책 담아갑니다.

한깨짱 2015-01-06 13:38   좋아요 0 | URL
헉! 그럼 사실 이 책도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으실텐데요... 굳이 노통에 입문하시겠다면 이 책 보다는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