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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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렵다. 의미를 파악하기는 커녕 문장을 읽는 것 조차 힘들어 두 번을 내리 읽었다. 에세이 형식의 소고라고 생각했던 게 완전 실수였다. 라캉, 헤겔, 대타자, 주인 담론, 대학 담론, 세계 정신. 이 책을 살 생각이 있다면 두 번, 세 번 고민해 보기 바란다.


이 책을 이 천 자 내외의 짧은 리뷰로 정리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만 얘기하려 한다. 그것은 자칭 의식 있는 시민 혹은 진보라 부르는 이들이 보이는 위선과 무력함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 혁명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다. 가진 건 자식 밖에 없다는 의미의 무산 계급. 지금 이 무산 계급은 모두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 그럼 오늘날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이들은 누구인가. 일명 중산층이라 불리는 중간 계급. 이들이 혁명의 주체라는 사실은 매우 바람직하다. 혁명은 언제나 광범위한 중간 계급의 참여를 통해서만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들이 보이는 태도는 매우 이중적이다.


중간 계급은 대개 교육 수준이 높고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다. 항상 쥐꼬리만한 연봉을 한탄하지만 진짜 쥐꼬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회사원=미생이라는 공식이 잘못됐다는 걸 알지 못한다. 때문에 스스로 미생이라 자처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보수 정당의 정책, 부패한 정치인의 행동, 자본주의, 대기업의 횡포, 갑질 문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SNS에 "썩을대로 썩은 세상", "쓰레기같은 대기업", 좀 더 점잖게는 "국민을 아끼는 나라의 국민이고 싶은 건 지나친 욕심일까?" 따위의 냉소적 혼잣말을 쏟아낸다. 하지만 동시에 유명 CEO의 성공 신화를 공유하고 연봉 1억, 연 매출 100억 등등 대박을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스타 벅스, 커피빈, 슈퍼 커피, 맘모스에서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떼와 오렌지 비앙코를 마시고 노동자의 날과 어린이날이 만든 연휴에 해외 여행을 계획한다.


이런 부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 SNS 상에서 보이는 이들의 이중성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배트맨의 <투 페이스>를 능가한다. 이것은 혹시 중간 계급의 현실에 맞춰 변형된 신종 갑질 문화가 아닐까? 부자가 되서 권력자가 되서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고, 맘에 안드는 놈을 심판하고, 눈치 안보고 내키는대로 살고 싶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이들이 만들어낸 갑 롤플레이가 아니냐는 것이다. 최근 SNS에 폭로되는 다양한 갑질 고발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이 같은 주장에 힘이 실린다. 그들은 사실 관계가 명확치 않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이야기가 '가해자'로 지정한 사람을 물고 씹고 뜯는다. 그들의 분노가 멈추는 건 언제인가? 가해자가 자기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올릴 때 까지다! 그러니까 혼자서는 갑질이 불가하다는 걸 깨달은 개인이 SNS에 모여 갑질을 공동 구매하는 것이다이런 변태적 갑질이 가까운 시일 안에 사라지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집단의 갑질은 개개인에게 익명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이들의 행동을 정의로 포장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상 교육이 보장되는 복지 국가? 지옥에서조차 자국민을 구해내는 강력하고 안전한 국가? 그런데 이를 위해 당신의 세금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월호 사태와 맞물려 소방 공무원들의 열악한 현실이 공개된 적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금치 못했고 그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 했었다. 우리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소방관들의 연봉을 높이고 최고급 장비를 구해줬다고 치자. 그리고 이를 위해 국민 1인당 10만원의 세금을 더 냈다고 치자. 이렇게 한 5년이 지났을 때 당신은 '평균 연봉 1억, 귀족 공무원 소방관'이라는 기사를 클릭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물론 부자들의 세금을 줄이고 그 부담을 봉급 노동자들에게 몰아주는 현재의 조세 체계는 확실히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국가는 단순히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는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자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만 가능하다.


유토피아는 모두가 희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국가다. 그런데 분노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모두가 잘 사는 세계가 아니라 잘 사는 이들을 끌어내리고 본인이 그 자리로 오르려는 것이라는 게 명백해진다.


정치에 대해서도 이들은 상당히 위험한 태도를 갖는다. 현 정부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100% 정당하다. 정치인들이 모두 썩었다는 말도 옳다. 그런데 그 다음은? 중간 계급의 갑질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나는 의식있고 똑똑한 사람이야.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진짜 깨끗하고 똑똑한 놈 하나만 데려와바. 내가 진심으로 지지해 줄 테니까. 바로 이런 태도가 독일 국민에게 히틀러를, 한국인에게 박정희를 선물해줬다고 하면 그들이 믿을까?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그 자유의 투사, 그 용감한 시민, 그 의식있는 사람들이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박정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정말 의식 있는 시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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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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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의 힘은 대단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진 한낱 몸짓에 지나지 않던가. 특히 과학, 그 중 의학의 영역에선 이 힘이 더욱 도드라진다. 의학이 곤란을 겪을 때는 대개 알 수 없는 증상과 싸울 때다. 도대체 무슨 병인가? 


미드 하우스의 천재 내과의 닥터 하우스가 천재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가진 명명의 힘 덕분이다. 그는 내과의다. 수술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책상에 앉아 환자의 증상을 보고 받는 일이다. 이제 보고가 끝나면 그의 팀은 해당 증세를 발현시킬 수 있는 병명을 모조리 꺼내 놓는다. 이 브레인 스토밍이 끝나고 나면(혹은 중간 중간) 하우스는 신랄한 비판과 함께 소거법을 진행한다. 이게 암이라면 이런 증상은 없었겠지, 이게 뇌출혈이라면 이런 증상이 같이 나와야해, 그리고 마침내 짜잔 병의 정체가 드러난다. 투명 망토를 벗은 병을 때려잡는 건 일도 아니지.


스캇펙이 맞닥뜨린 문제도 이것이었다. 그는 오랫 동안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일부 증상에 대한 새로운 정의 없이는 치료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진찰되는 강박증, 자기 기만, 우울증 등이 본질적으로는 새롭게 명명되야 할 어떤 원인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일반적인 강박증, 자기 기만, 우울증 치료법으로는 환자를 낫게 할 수 없다. 증상이 같을 뿐 이는 완전히 다른 병이기 때문이다. 스캇펙은 이 막다른 골목에서 아주 위험한 도약을 시도한다. 그 원인을 '악'으로 규정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책을 덮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약간의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를 '악'으로 정의하는 것은 결코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니까 단순히 이러이러한 증상을 갖지만 이러이러한 방법으로는 치료가 불가한 특정 환자군에 대해, 마치 우리가 무궁화 반, 민들레 반, 개나리 반이라고 이름을 붙이듯 '악'이라는 명패를 달아주는 것 뿐이다라고 말해도 납득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주 오랫 동안 축적되어 고착화된 우리의 언어 관습에 따라 우리는 이 말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진 한낱 몸짓에 불과했다고 했잖아. 이름엔 신비한 힘이 있다. '악'이라 이름 붙인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악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 때문에 그들은 불필요하게 악해진다.


변명을 해도 모자랄 판에 스캇펙은 강을 건너온 배를 불태워 버린다. 그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예전에 나는 오랫동안 불교와 이슬람교에 관심을 갖고 뭔가를 추구해 보려 애썼으나 결과는 늘 모호했었다. 그러다가 뒤늦게서야 기독교의 본질을 깨닫고 거기에 온전히 귀의했으며, 1980년 3월 9일 마흔셋에 세례를 받았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 일이 있기 오래 전이었다."(p. 11)


스캇펙은 그래도 비겁한 사람은 아니다. 자신의 종교를 숨기지 않으니까. 그 때문에 편향된 과학자, 사이비 정신과 의사로 비난 받을 수 있는 여지를 겁내지 않는 것이다. 비록 마지막 문장으로 소심한 변명을 시도하기는 하지만.


스캇펙은 책의 말미에 "악이란 사랑에 의해서만 정복될 수 있다"(p.356) 고 썼다. 이것은 그가 머리말에서 인용한 성 어거스틴의 말과 연결된다. 성 어거스틴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한다. 이 말은 사랑으로 죄인을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게 사랑이기만 하면 죄인에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상관 없다는 의미다. 중세 시대의 마녀 심판관들은 하나 같이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고한 인간을 불에 태워 죽였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지극히 숭고한 사랑으로 악인의 머리를 철퇴로 짓이겨 터뜨리는 스캇펙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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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과의 인터뷰
로버트 K. 레슬러 지음, 손명희 외 옮김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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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롬 홈즈의 추리 기법은 프로파일링과 비슷하다. 주변을 관찰한다. 단서를 수집한다. 단서에 숨긴 의미와 단서 간의 관계를 해석한다. 해석을 통해 단서는 정보 거듭난다. 정보는 사건의 전말(이야기)를 드러낸다. 


<셜록>을 보며 누구나 셜록이 되는 꿈을 꿔 봤을 것이다. 그럼 프로파일링을 배우면 셜록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는 프로파일링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셜록 홈즈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참고서, 심지어 프로파일링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참고서도 아니다. 다음 사례를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자.


사건 일지

새크라멘트 북부의 한 작은 마을. 22세의 임산부가 복부를 깊이 베인 채 살인 당한다. 현관문에서 침실에 이르기까지 난투의 흔적이 있었고 탄피도 두개나 발겨됐다. 죽은 여성은 블라우스와 브래지어, 바지 등이 벗겨져 있었으며 복부는 난자당한 채였다. 성행위는 없었다. 훔쳐간 물건도 없었다.


프로파일링

1. 쾌락 살인이다.

: 성행위는 없더라도 이번 사건 역시 성충동에 의한 쾌락살인으로 분류된다. 강도에 의한 '일반적' 살인은 '보통' 이렇지 않다.


2. 백인 남성이다.

: 쾌락살인은 가해자가 '대개' 남성이며 백인이 백인을, 흑인이 흑인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3. 20~30대다.

: 연쇄살인범의 연령 '비율'은 이 나이대가 가장 높다.


4. 마른 체형에 극히 지저분한 거주지. 정신 병력 있음

: 이는 범인이 편집형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으리라는 '추측'과 저자가 배운 심리학적 지식에 따른 논리적 결론이다.


5. 독신 남. 군 복무 경험 없음

: 이런 사람과 기꺼이 같이 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군 복무를 '했을리도' 없다.


자 그럼 이제 내가 작은 따옴표로 묶은 단어들을 모아보자. '일반적', '보통', '대개', '경우', '비율', '추측', '없을 것', '했을지도'. 눈치챘는가? 프로파일링은 기본적으로 통계에 의한 추론이다. 막대한 범죄 사례(케이스)를 축적해 일반적인 패턴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말이다. 이건 셜록을 꿈꾸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좀 다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쓱 훑어 본 뒤 뜩, 뿅, 짠하고 추리해내길 원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수한 범행 현장에서도 말이다.


저자가 고백하듯 프로파일링은 아직 '기술'이지 '과학'은 아니다. 진행자의 경험과 숙련도에 크게 좌우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는 정말 '인터뷰'에서 그친다. 셜록이 되가는 흥미진진한 과정은 없다. 다소 지루한 사례가 400페이지 넘게 반복된다. 어쩔 수 없다. 프로파일링이라는 것 자체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패턴을 수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프로파일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재밌게도,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명한 소설가가 아닌 이상 범죄자들과 인터뷰하고 경찰을 통해 범죄 자료를 얻어 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 책에 실린 사례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싸이코패스', '반사회적 인격장애', '연쇄살인마' 등의 소재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는 아주 훌륭한 사례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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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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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토대는 적이고, 적 중의 적은 빨갱이다. 


정적을 쉽게 죽이려면, 반대자의 입을 쉽게 닫게 하려면 빨갱이로 만들라. 그리하면 사람들은 살인자를 탓하지 않을지니, 보아라 이것이 빨갱이의 힘이다. 빨갱이라는 말은 비현실을 현실로 만들고 거짓을 진실로 바꾼다. 이 말은 일종의 마법 주문과 같다. 아브라 카타브라나 아멘. 듣기에 신은 사탄을 만들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Let there be RED

빨갱이여 있으라. 


빨갱이는 자유를 원하는 시민에게 내려지는 철퇴다. 빨갱이는 인간으로 살려는 시민의 발에 채워지는 족쇄다. 빨갱이는 정의를 말하려는 시민의 입에 물리는 재갈이다. 전세계 독재자들이 이 말 한 마디로 한 시대를 차지했다. 그 시대 중 하나가 1950년 이후의 대한민국이다. 그 시대 중 하나가 1950년대의 미국이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미국 소설이다. 당시 상원의원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는 미국 사회 곳곳에 공산주의자가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이 그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프 매카시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을 전복시킬 거라고 주장했다. 미소 냉전시대였다. 국민은 공포에 떨었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지목되 직장을 잃고 목숨을 잃고 추방을 당했다. 비이성과 광기, 배신과 고발, 음모와 의심이 미국 국민을 갉아 먹었다. 1954년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의 말은 완전한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는 1957년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미국은 그 붉은 폭풍을 고작 십년도 겪지 않았음에도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같은 소설을 가졌다. 70년 가까이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린 대한민국도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폭풍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그것이 그치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 필립 로스에게는 폭풍이 쓸고 간 폐허를 차갑게 관조할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리의 폭풍은 아직도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아이라 린골드는 뒷골목에서 태어난 가난한 아이였다. 엄마는 일찍 죽었고, 아버지는 쓰레기였다. 온갖 궂은 일을 하다 군대를 갔다. 그 곳에서 공산주의자 오데이를 만났다. 아이라 린골드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미국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유명한 라디오 성우가 되어 대중들에게 진보와 평등의 메시지를 전파한다. 파티장에서 만난 부루주아들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고 힘 있는 보수주의자들을 모욕했다. 그렇게 그는 붉은 폭풍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사지가, 정신이, 마음이 갈기 갈기 찢어졌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머리 린골드는 뒷골목에서 태어난 가난한 아이였다. 엄마는 일찍 죽었고, 아버지는 쓰레기였다. 그는 공수부대원이 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머리 린골드는 자유 시민이 되어 미국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영문학 선생님이 되어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머리 린골드는 아이라 린골드의 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공산주의라는 것 없이도 가난을 친구로 둘 수 있고 평등을, 사랑을, 자유를 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 네이선은 머리 린골드의 제자였다. 그를 통해 아이라를 만났다. 그리고 열렬한 추종자가 됐다. 열광은 길지 않았다. 네이선은 오래지 않아 아이라의 광기로부터 도망쳤다. 시간이 흘러 네이션은 육십대 중반의 노인이 된다. 그리고 아흔이 된 머리 린골드와 다시 만난다. 아흔 살의 노인은 붉은 폭풍이 휩쓸고 간 폐허를 모두 목격했고, 그보다 더 흉해진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가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청년처럼 활기가 가득했다. 그는 6일 동안, 네이선이 몰랐던, 네이선이 외면했던 아이라의 비극을 얘기한다. 공산주의가 어떻게 그의 삶을, 사랑을, 가정을 망쳤는지, 아이라가 기꺼이 돕고자 했던 가난하고 힘없는 대중들이 어떻게 그를 배반하고 죽였는지를. 네이선은 머리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밤 하늘을 올려다 봤다. 


네이선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했던 어린 시절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아이라의 추락, 아이라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은 거의 다 죽었다. 밤 하늘에 그들이 죽어서 된 별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거기엔 "반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p538).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모으고 편을 가르고 싸움을 일으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평등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자유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인간은 공산주의 없이도 타인을 사랑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자유를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건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우리의 심장이다. 우리의 진심이다. 우리는 갈기 갈기 찢긴 심장을 손에 들고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별이 될 것이다. 반목과 실수 따위는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저 광대한 우주의 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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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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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시민에게 항상 두 개의 감정을 갖는다. 그는 1959년에 태어나 스무살 때 독재자의 죽음을 경험했고 뒤이어 나타난 독재자와 싸우는데 그 이십대 전부를 할애했다. 민주화는 *1989년에 성공했지만 그의 승리는 **2003년이 되서야 찾아온다. 나는 그와 함께 승리를 만끽했다.


유시민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중요 내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한미 FTA 체결에 핵심 역할을 한다. 물론 그 때의 FTA는 지금의 FTA처럼 독소 조항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FTA(신자유주의)같은 보수적 가치를 왜 진보 정권이 앞장서 체결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훗날 유시민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기에 그 흐름 속에서 최대한 이득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 당시의 FTA라고 변명한 바 있다. 나는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죽을 힘을 다해 손에 쥔 민주화, 독재의 후계자들과 변절자들의 협잡을 이겨내고 세운 진보 정권이라면, 또 한 번 죽을 힘을 다해 막아내야 했던 게 바로 FTA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이후 유시민은 통합진보당 사태와 일련의 정치적 시련을 겪은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다. 


그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2014년 7월 유시민은 <나의 한국 현대사>를 들고 돌아왔다. 작가이자 한 명의 평범한 시민으로. 이 책의 첫 장은 '같은 시대를 숨 가쁘게 달려온 모든 벗에게'라고 시작한다.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이 책이 그의 벗 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마저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잠시후 나는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그가 말한 '모든 벗'에는 이미 그의 적들이 포함되 있었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역사가가 무엇을 기술하고 무엇을 기술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총합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역사는 사실의 폐부를 꾹, 찌르고 들어가는 날카로운 창이다. 그 창날에 꽂힌 일련의 사실들이 역사를 만든다. 그러므로 이 책이 객관적이냐 아니냐 묻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질문이다. '객관'대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어는 '균형'이다.


이 책에서 그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번민하는 당사자로서 우리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았다."(p.11)라고 썼다. 거짓말이다. 그는 번민하되 냉정을 잃지 않았고 자부하되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를 절대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바보 같은 정치인처럼 박정희 대통령을 자근자근 다진 뒤 물에 헹궈 다카키 마사오와 여성 편력으로 차려내지 않았다. 물론 그는 박정희가 아니라 전두환과 싸워온 사람이기에 상대적으로 그에게 관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부 진보 세력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여준 무조건적인 증오와 비난을 생각해 볼 때 박통에 대한 그의 인식은 충분히 성숙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보통 사람 노태우를 칭찬하고 영원한 박쥐 이인제 마저 재평가의 대상으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양극화와 고용 불안이(비록 김영삼 정권이 일으킨 IMF 탓이 크지만) 진보 정권 10년 동안 급격히 진행됐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악한 사람의 선한 면, 선한 사람의 악한 면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번민을 낳았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번민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 책이 반짝반짝 빛나는 또 한가지 이유는 '무림'이니 '부림'이니, 민혁당이니, 너무나 많고 복잡한,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군사 독재 시절의 끔찍한 시민 탄압을 잘 정리해놨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그는 균형을 잃지 않고 일명 진보라 자칭해온 불온 세력의 뿌리도 밝혀낸다. 학생 운동이 왜 NL계와 PD계로 나뉘어졌는지, NL과 PD는 도대체 무엇이며, 현재 그를 잇는 것이 누구인지를 가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유시민은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사실 이런 균형은 똑똑한 진보주의자들이 보여온 전형적 태도이기도 하다. 그가 정치인이었던 시절엔 그런 '이성적 태도'로는 승리할 수 없다며 그를 질타하는 사람도 많았다. 맞는 말이다. 옳게 살아가려는 의지, 흥분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힘만으로는 결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현실 정치는 똥통이며 이기기 위해선 온 몸에 똥이 묻는 걸 개의치 말아야 한다. 하지만 잊지 않으셨겠지? 유시민에겐 "더 이상 승리해야 할 선거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이 달려온 격동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역사를 거꾸로 돌린 어리석은 국민에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들고 왔던 불꽃을 앞서가는 세대에 전해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고보면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언제나 고군분투의 행진이었다. 유시민은 이제 묵묵히 자기 페이스를 지키며 그 대열의 끝에서 걷는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화내고 싶지 않다. "숨가쁘게 달려온" 그의 등을, 아무 말 없이 밀어주고 싶다.


*군사 독재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해. 드디어 군사 독재가 끝나나 싶었지만 어이없게도 전두환 정권의 2인자였던 보통 사람 노태우 씨가 당선된다. 국민이, 자기를 탄압했던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뽑아준 것이다.


**1998년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진보 정권이 탄생한 해였다.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투신한 김영삼은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패배하자 전두환, 노태우, 김종필 등 군사 독재자들과 합당을 추진해 오늘날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한다. 1993년, 그는 대통령이 당선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IMF 사태를 일으켰다.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 위기를 일으켰으나 그 위기를 일으킨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씨의 지지는 여전히 높았다. 이회창 씨는 조순 등과 결합해 거대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을 발족시켜 당시 김종필과 손 잡은 김대중 씨를 박빙의 차로 추격하지만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씨에게 패배한다. 2003년,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진보 정권이 탄생한다. 그 주인공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미 경제 의존도가 극도로 높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FTA 체결 압박을 견뎌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차피 체결하게 될 FTA. 그렇다면 보수 정권의 주도로 끔찍한 독소 조항을 포함하기 보다는 그래도 진보 정권이 나서서 최대한 국익에 도움이 되는 협약을 맺고자 한 것이 당시 노무현 정부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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