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사 - 중세부터 현대까지
아담 자모이스키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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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많다. 외세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 그렇고 강대국들에 의해 국토가 분할됐다는 점도 그렇다. 이들의 역사를 읽고 있으면 폴란드인들이 겪었을 분노와 원통이 고스란히 밀려들어와 감정을 깊이 이입하게 된다. 우리는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한때는 초강대국이었다는 점도 같을까? 싸움에 관한 한 우리 역사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고구려를 갖다 놓으면 얼추 짝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국가다. 중동부 유럽의 드넓은 평원이 모두 그들의 것이었고 귀족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볼 만큼 호화로웠다. 폴란드 귀족들은 서민을 위해 초호화 서비스를 제공했다. 말발굽에 금박을 입혀, 말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떨어지는 금 부스러기들을 사람들이 주워가게 했던 것이다. 외국을 여행하는 폴란드인에겐 이 골드쇼가 일종의 유행이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정치 체제는 참으로 신비했다. 세습 군주가 대대로 국가를 통치한 게 아니라 무려 투표로 선출했다. 18, 19세기의 얘기가 아니다. 중세를 이제 막 벗어난 시점부터 그랬다. 소수의 귀족들만 참정권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슐라흐타라고 불리는 귀족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심했고 직업상의 상하관계도 존재했다. 가진 건 몸과 괭이 밖에 없는 가난한 농부도 대지주도 모두 슐라흐타 일 수 있었다. 그들은 법적으로 완전히 평등했다.


물론 전 국민이 참여하는 오늘날의 선거와는 달랐다. 전체 인구의 8% 정도였고 그마저도 전부 참여하지는 않았으니 많이 모일 땐 수만 명 수준이었다. 선출되는 사람을 보면 더 재밌는데 전 국왕들의 후광을 입은 친척들도 있었지만 아예 외국인 군주가 뽑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쯤 되면 사실상 국왕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고 크고 작은 자치 도시들이 비슷한 문화를 기반으로 연합한 도시 국가 정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다는 사실은 다양성과 분열이라는 장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왔다. 당시의 폴란드는 현대의 미국과 버금가는 민족과 인종의 용광로였고 큰 박해와 장애 없이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삶을 추구할 자유가 있었다. 오죽하면 전 세계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이 한 몸이 되어 몰려들었겠는가? 한때 폴란드는 전 세계 유대인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국가이기도 했다. 아유슈비츠가 괜히 폴란드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빛을 잃고 만다. 각자의 이해는 너무나 달랐고 민족적 다양성은 오히려 그 민족의 침입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격변의 시간을 거치며 폴란드는 유럽 열강의 군침 돋는 먹잇감이 됐고 급기야 그 넓던 영토가 갈가리 찢겨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폴란드의 역사는 제삼자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너무 닮아 효과적인 교육자료가 된다. 특히 위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배울 것이 많다. 흥미로운 건 고금을 막론하고 민족을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배반하는 게 늘 특권층이었다는 사실이다. 잃을게 많은 그들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저항과 민족적 자부심은, 늘 서민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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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 직관하기 1 - 눈으로 푸는 미분의 비밀
박원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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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에 대한 나의 집착은 병적이다. 나는 그의 역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뜬구름 잡는 헛소리들에 비해 그의 말은 현실감이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매력이다. 진정한 역설이다. 실제와는 다르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지만 그의 역설은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오류가 없어 보인다.


처음으로 해답을 제시한 건 앙리 베르그송이었다. 그는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이 천재의 역설을 돌파해 나갔다. 이론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나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음을 고백한다. 사실 나는 베르그송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손에 잡힐 정도로 현실감 있는 천재의 역설을 뚫기에 그의 말은 지나치게 복잡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처럼.


나는 0.999... 같은 무한소수가 사실은 1과 같다는 수학적 증명을 보고 나서야 제논의 역설을 박살 낼 수 있었다. 내게는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증명을 다른 글에서도 지겨울 만큼 언급했다.


카를로 로벨리의 <화이트홀>을 읽고 난 뒤엔 그동안 이렇게 쉬운 해결 방법을 왜 찾지 못했는가를 두고 한탄하기도 했다. 공간은 양자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연속적으로 보이는 이 세계가 실은 아주 작은 픽셀, 한 없이 작은 모눈종이 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0.1 또는 0.5 픽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정확히 한 픽셀씩 전진한다. 공간은 무한히 쪼개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최소 단위를 '플랑크 길이'라고 부른다.


<미적분 직관하기>는 새로운 개념으로 풀이를 시도한다. 바로 정사각형을 한 없이 쪼개는 것이다. 그 작은 조각들을 모두 더했을 때의 넓이는 무엇이겠는가? 제논은 무언가를 무한히 쪼개 무한히 더하면 그 결과가 무한해지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지만, 쪼개지기 전에 존재했던 정사각형의 넓이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한다. 조각을 아무리 잘게 나눠도 그 모든 것의 합은 결국 원래 정사각형의 넓이다. 그보다 한 치도 더하거나 뺄 수 없는 바로 그 자체.


물론 억지를 부릴 수는 있다. 당신이 조각들을 모두 모아 넓이를 더할 수 없게 계속 정사각형을 쪼개겠다고 말이다. 더 있나요? 네 여기 하나 더 있습니다. 끝인가요? 아니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제 정말 끝인가요? 아니요 여기 하나가 더...


이 책은 미적분을 추상적으로 탐구하지 않는다. 저자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고, 시험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다. 책 속에는 무려 '수능 기출문제'가 거의 매장 등장한다.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문제를 직관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같은 수식끼리 나누고 곱하고 이항 해서 더하고 빼고가 아니라 공책에 그림을 그려 해결한다. 일찌감치 이런 방법을 알았더라면 나는 수십 년 전 수능 시험에서 수학 문제를 찍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인생은 비단길 위를 달렸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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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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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유는 인간 세상에서 재림 예수로 불렸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그는 감독관이었다. 예수와 상의해 이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 1999년의 소동은 나도 정확히 기억한다. 연도를 두 자릿수로 인식하는 옛 시대의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이것들이 기간 산업계에 두루 사용되고 있다 보니 99에서 00으로 넘어가는 순간 프로그램들이 1900과 2000을 구분하지 못해 시스템이 오작동, 비행기는 추락하고 핵미사일이 자동으로 발사되어 지구에 대혼란이 닥친다는 시나리오였다. 음모가 아니라, 뉴스에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밀레니엄' 혹은 'Y2K'라 불리던 버그.


종말론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1999년 7월에는 앙골모아 대왕, 일명 공포의 대마왕이 지구에 강림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의사로서 페스트 감염 원인을 정확히 알고 전염을 막았던,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었다. 그는 미래를 알쏭달쏭한 시로 표현했다. 그 시는 해석의 힘을 빌어 앙골모아 대왕의 강림을 1999년 7월로 확신했다.


대한민국에는 '휴거'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개신교의 종말론 중 하나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던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여 저리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행위였다. 산 자들은 당연히 예수와 함께 천국으로 가고 죽은 자는 필멸의 지옥행이었다. 한 교회는 1992년의 어느 날을 휴거일로 정했고, 이는 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왜 92년이었을까? 사실 1999년의 대재앙은 한 번에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7년에 걸친 환란의 피날레였다. 따라서 휴거는 1992년 이미 진행되고 이와 같이 등장한 파멸의 짐승들이 각자 고유한 기술을 발휘해 7년간 환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1992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999년도 마찬가지였다. 현대 기술이 이 속도로 발전한다면 나는 2099년까지 무리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종말을 예측하지 못한 사이비 종교들이 수명을 연장하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확한 날짜 예측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믿는 자들, 그러니까 자기들의 열렬한 기도에 응답한 하나님이 종말의 계획을 철회하여 온 인류를 구원했다는 것이다. <피와 기름>은 이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인간을 긍휼히 여긴 예수가, 그는 악한 자든 선한 자든 모두 사랑하는 대인이니까, 7년의 환란과 심판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그저 이 세계가 영원토록 계속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럼 이미 죽은 사람들과 앞으로 죽게 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종말과는 별개로 죽은 뒤에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다. 교리에 따르면 생물학적으로 죽은 인간들의 영혼은 심판의 날까지 잠들어 있다. 판결은 일상이 아니라 일괄 처리 되는 것이다. 바로 종말의 그날에.


대치동 논술 학원에서 보조 강사로 일하는 도박중독자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장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그 비정상성이 두드러지지 않고 착 붙어가는 게 이 소설의 매력이다. 사람들에게 신물이 나 도망치려는 이도유를 빼앗기 위해 두 세력이 충돌하고, 어릴 때 그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주인공이 소동에 빠져든다. 도박 중독으로 완전히 망가진 인생이었으나, 그래서 그는 과감했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모험 활극이라 부를만한 고속도로 추격전. 관리자가 내려주는 기적의 현현.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루한 교리 문답이 이어질 때도 있지만, 재미가 부족한 소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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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와 팩트 - 왜 합리적 인류는 때때로 멍청해지는가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 지음, 김보은 옮김 / 디플롯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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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다. 인간의 멍청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이 바닥을 좀 기어 다녀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사례들이 나오기는 한다. 그게 식상할 수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딱 200페이지만 줄여줬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핵심은 과학적 사고와 건강한 회의주의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사회생활이 어렵다는 점이다. 과학적 사고는 곧 비판이고, 건강한 회의는 말대꾸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모두가 다 좋다는 영화에 고고히 1점을 날리는 평론가를 떠올려보자. 정말 꼴 보기 싫지 않은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쓴소리를 싫어한다.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의 문제라서 바뀌기가 더 어렵다. 우리 뇌는 자기 신념과 맞지 않는 정보를 취득하면 이 부조화를 봉합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래서 괴롭고, 괴롭기 때문에 자기 신념을 더 강화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지각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정치적 극단주의자, 경제 사기에 지속적으로 말려드는 사람들과 얘기해 봤다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논리는 명제 자체가 허튼소리인 거짓의 세계에선 종이호랑이처럼 나약하다.


왜 진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까? 과학적 사고는 근대 교육의 산물이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능력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생존에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자기에게 달콤한 말만 하는 아첨꾼만 주변에 뒀다 모가지가 날아간 인간의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난다. 그런데도 진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다.


생식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떤 짝을 선택하느냐를 돌아보면 답이 나올 것도 같다. 나한테 쓴소리만 하는 사람과 연인이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틀려도 공감하고, 나빠도 지지하는 게 관계 유지의 황금률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나. 매사에 똑 부러지고, 관계를 칼 같이 자르고, 뭐 하나 시원하게 응원하지 않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흠, 지금 내 집 거울에 그런 남자가 하나 서 있다.


현대 사회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는 '매스 미디어'는 '매스'라는 접두어를 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알고리즘 덕분이다. 누르기가 곧 돈인 세상에서 절대 누를 법하지 않은, 내 성향과 정반대의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화약보다 설탕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분노는 여전히 성황이다. 아니, 성황이 아니라 히스토리컬 하이, 치솟은 불기둥이 오존을 뚫고 하늘을 날아 우주를 불태우고 있다.


우리가 유튜브를 그만 보라고, 인터넷 뉴스를 없애라고, SNS를 끊으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이 허락하는 내에서 떠올려보면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회의주의자로 살아왔다. 지금의 나는 거의 비관론자에 가깝다. 물은 반밖에 남지 않았고, 그 누구도 채우지 않을 것이며, 머지않아 다 말라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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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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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은 카를로 로벨리가 쓴 책 중에 가장 읽기가 쉽다. 동양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라 안 그래도 어려운 물리학의 세계를 메타포로 덧발라 모호함을 가중하는 분인데, 어쩐 일인지 이 책은 쉽다. 물론 중간중간 사족이 등장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사족도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즐겁게 읽었다.


아인슈타인이 중력의 원인을 밝힌 방정식을 내놓은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해를 구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처음으로 답을 찾아낸 사람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독일에서 전쟁 중인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참호 위로 빗발치는 포탄의 선율을 들으며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풀어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슈바르츠실트의 해다.


슈바르츠실트가 밝혀낸 해에는 블랙홀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의 풀이가 맞다면, 블랙홀은 필연적이었다. 밝게 빛나던 별이, 그 광채의 연료였던 수소를 모두 소진한 뒤 자기 자신의 무게(중력)를 이기지 못해 작게 작게 수축하다가 결국 임계점을 넘어 빛마저도 빠져나갈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는 것. 아인슈타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 이론은 수많은 증명과 관측에 의해 사실로 드러난다. 이제 블랙홀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이트홀>이 던지는 질문은 그럼 그 블랙홀이 어디까지 수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엔 수많은 이론이 존재한다. 가장 쉬운 건 0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0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공간에서 사라진다는 걸까? 그 말이 맞다면 블랙홀이 빨아들인 그 수많은 물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질량은 보존된다고 배웠고 이는 블랙홀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수축의 어느 순간 블랙홀이 다른 공간과 연결되어 먹어치운 것들을 다 토해낸다고 주장한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카를로 로벨리의 화이트홀은 이것과는 좀 다르다. 우주에 대한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으면서도 내 생각은 왜 여기까지 닿지 못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공간에도 최소의 단위라는 게 존재한다. 마치 양자가 그런 것처럼, 공간은 플랑크 영역이라 부르는 크기보다 결코 작아질 수 없다. TV를 떠올리면 된다. 지금 시청 중인 드라마의 화면을 점점 줄인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리 해상도가 높은 3840 X 2048의 4K TV라도 결국 1 X 1, 즉 단 한 개의 픽셀 이하로는 줄어들 수가 없다. TV를 끄지 않는 한!


공간이 이 크기에 다다르면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양자적 요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는 말로는 형용조차 불가한 미시의 세계로 진입한 공간은, 그 순간 반전하여 비디오를 거꾸로 돌린 듯, 바닥을 치고 튀어나와 모든 것을 뱉어내는 화이트홀이 된다. 여기서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면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것은 빅뱅 아닌가?


우리가 사는 우주는 어쩌면 한 별의 소멸 이후 시작된 부활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잿더미 속에서 계속 되살아나는 피닉스처럼. 명멸을 반복하는 우주. 정말 신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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