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적 충동 -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조지 애커로프, 로버트 J. 쉴러 지음, 김태훈 옮김, 장보형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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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상과 탈근대 사상의 가장 큰 차이점은 행위 주체인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파악하는냐 비이성적 존재로 파악하는냐에 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기에 동물과 다르다는, 근대 교육의 진부한 도그마를 주입받아온 사람들에겐 생소할지 모르지만, 정치, 경제, 문화, 세상의 어느 부분이든 조금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라. 인간이 정말로 이성적 존재인지 심각한 회의에 빠져들테니.


<야성적 충동>은 근대 경제학의 대항마로 떠오른 '행동경제학'을 다룬다. 행동경제학이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다. 인간이 모든 일을 딱딱딱 판단하고 척척척 행동한다면 주식 시장은 왜 폭락과 폭등을 거듭하며 버블은 왜 발생하고 왜 우리 경제는 불황에 빠지냐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두 가지가 될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필요할 만큼 충분히 합리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좀 더 과학적으로 좀 더 철저하게 딱딱딱 판단하고 척척척 행동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 외견상 완벽한 혼돈으로 보이는 현상에서 패턴을 찾으려는 카오스 이론이나 빅 데이터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아마도 이런 사상적 조류에서 나온 것일테다. 그리고 두 번째 답이 있다. 그 답은 거시경제학을 창조해 대공황과 싸운 존 메이너드 케인즈로부터 들어보자.


"인간의 적극적인 활동의 대부분은, 도덕적이거나, 쾌락적이거나 또는 경제적이건 간에, 수학적 기대치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만들어낸 낙관주의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불안정성이 판단과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인간의 의지는 추측컨대, 오직 '야성적 충동'의 결과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며, 수량적인 이익에 수량적인 확률을 곱하는 식의 계산적 이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존 메이너드 케인즈


보통 사람들의 투자 행태를 보면 케인즈의 '야성적 충동'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보통 사람들의 주식 투자 행태를 살펴보자. 보통 사람들은 결코 투자 기업의 회계 장부를 들춰보거나 주당순이익을 계산하지 않는다. 주식 계좌를 개설하고 매매 버튼을 누르는 건 그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솔직히 말해 불타오르는 질투심이다. 어제밤 술자리에서 2천만원을 몰빵했는데 대박이 나 1억이 됐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투자 목적으로 부동산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복잡할 게 없다. 그들은 부동산 투자 수익률이 주식이나 기타 금융 자산에 대한 투자보다 더 낫기 때문에 부동산을 구매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가격이 많이 오를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부동산을 구매한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사둔 아파트 가격이 몇 십 배로 뛰었다는 경험이 투자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같은 기간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도 몇 십 배로 뛰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처럼 경제 행위는 다양한 심리적 요인, 즉 질투심, 착각, 자신감, 이야기(소문) 등 '야성적 충동'에 의해 이뤄진다.


이 책에 따르면, '야성적 충동'을 배제한 경제학은 결코 현대의 경제 위기를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기존의 경제학은 왜 그토록 '야성적 충동'을 외면해왔던 걸까? 나는 여기에도 일종의 야성적 충동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니까 경제학자, 이른바 사회 과학자인 그들은 정량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비과학적 현상이 자기가 다루는 학문의 핵심 요소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양자역학의 세계를 열어준 장본인이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양자역학을 믿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처럼 말이다. 


<야성적 충동>은 경제학의 초점을 어려운 통계와 수학에서 우리의 심리로 옮겼다는 점에서 막연한 친근감을 풍기지만 실제 그 내용은 친근감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 책을 원활히 읽고자 하는 사람은 화폐 착각, 재정 정책, 통화 정책, 자연실업율, 비자발적 실업 등 기존 경제학의 주요 개념을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특히 통화 정책중 하나인 공개시장조작, 지급준비율 조정, 재할인율 조정 등을 알아둔다면 독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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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견문록>을 지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상인 마르코 폴로를 칭하는 또 다른 이름은 일 밀리오네(Il milione)다. 이 말은 백만장자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또한 대단한 허풍쟁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일 밀리오네 마르코 폴로가 몽고 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자기가 여행한 55개의 도시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처음에 칸은 일 밀리오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한다. 그러나 칸은 곧 그 도시들이 실재하는 게 아니라 일 밀리오네의 환상으로 창조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칸은 마르코 폴로를 꾸짖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칸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전략, 나아가 일 밀리오네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간파하고 거기서 놀이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다양한 도시를 묘사하고 거기에 서로 다른 이름(기호)를 붙여 그 존재를 명확히 하지만 오히려 이름은 실체를 가리기 위한 장막일 뿐이다. 이름을 떼고 그 모습을 곰곰히 들여다 보자 칸은 55개의 도시가 사실은 한 도시의 55가지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서야 황제는 마르코 폴로가 아무 곳도 여행하지 않고도 모든 곳을 여행할 수 있었던 이유, 아무 것도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닫는다. 마르코 폴로는 하나의 도시를 낱낱이 해체한 뒤 그 구성요소들을 다시 조립해 한 도시가 취할 수도 있었던 다양한 형태의 도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일 밀리오네의 비밀을 밝혀낸 칸은 이제 자기 스스로 도시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마르코 폴로에게 그 도시들을 여행한 적이 있냐고 물어본다.


당신은 말장난처럼 보이는 이 대목에 사실은 탁월한 반전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도시를 창조할 수 있게 된 순간 칸은 마르코 폴로를 대신해 일 밀리오네가 되지만 여기서 일 밀리오네는 백만장자도, 허풍쟁이도 아니다. 그것은 화자, 즉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추가로 지시하는 기호가 된다. 그러니까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대목이 바로 화자와 청자, 작가와 독자의 위치가 뒤바뀌는 극적인 반전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마르코 폴로인가 아니면 칸인가? 이 질문이 유효하다면 아마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인가 아니면 독자인 우리인가?


칸이 도시를 창조할 수 있게 된 뒤부터 마르코 폴로와 칸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일 밀리오네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서로 화자가 되기 위한 묘한 긴장감이. 이탈로 칼비노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독자가 자신을 밀어내고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 그는 작품이 작가가 의도한 길을 따라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졌다 다시 결합하고 완전히 분해됐다 재조립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운동이라고 믿는다. 자기를 몰아내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길 원하는 왕, 자기를 몰아내고 새로운 믿음을 세우길 원하는 신. 


포스트 모던은 이래서 참 재미있다.



 
 
 
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시리즈 60 나남신서 1157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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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길


하이에크는 복지 사회와 사회주의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나치즘과 파시즘을 만들어낸 주된 동력이라고 믿었다. 복지 사회와 사회주의는 계획과 통제를 강화하는 큰 정부를 필요로 하고 이렇게 집중된 권력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집단을 폭력적으로 제압함으로써 결국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은 정부와 시장의 절대적 자유를 옹호한 이 초자유주의자는 1980년대 대처와 레이건의 경제 정책을 통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2014년의 대한민국을 사는 나는, 이 초자유주의자의 말이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어떻게 어디로 선을 그을 것인가?


하이에크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민간 사업체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투자를 꺼리는 분야 예컨대 도서 지역에 대한 도로, 전기, 수도 시설은 정부가 직접 개입해 공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부의 개입을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최소한의 개입'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인육 캡슐 시장에 대해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하이에크는 '거래 상대방을 찾을 수 있는 한 어떤 것도 생산하여 팔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기에 인육 캡슐을 사고 파는 걸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기존의 의견에 '기본적인 인권을 저해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다'는 단서를 추가하겠지. 그럼 이제 대리 임신 시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난한 나라의 여성은 한 번의 대리 임신을 통해 하루 20시간의 중노동과 질병이 창궐하는 주거환경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부는 이 대리 임신 시장을 규제해야 할까? 규제를 옹호하는 사람은 대리 임신이 출산이라는 고귀한 행위를 생산의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둥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운운할 것이다. 하지만 대리 임신 서비스의 규제 때문에 한 여성이 평생 동안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 받지 못하는 환경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정부는 대리 임신 시장을 규제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저하되는 인간의 존엄성의 양을 측정해 판단해야 할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도덕적 딜레마와 가치의 첨예한 갈등이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최소한의 개입'이란 모호하기 짝이 없는, 아니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제공해 주지 못하는 무의미한 원칙일 뿐이다. 이 원칙이 동작한다면 아마 갖가지 단서와 예외 조항이 포함되 더 이상 '최소한의 개입'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규제로 변했을 때 뿐일 것이다.



제도의 개입 없이 노동의 가격은 공정하게 결정될 수 있을까?


하이에크는 최저 임금이 그보다 낮은 임금에 노동을 제공할 의사가 있는 집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에 특정 집단에 대한 일종의 특혜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는 파업을 무기로 임금 협상을 벌이고 각종 권리를 보장하려 한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에 심한 거부반응을 느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노동의 악다구니를 벌여보지 않은 자의 생각은 이토록 잔인하고 피상적이다.


하이에크는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는 노동자가 모두 자발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내리고 있다. 실업율이란 기업에 의해 조절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대체 인력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만큼 실업율이 유지되는 한 기업은 원하는 만큼 임금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노동의 가격은 그 노동의 가치에 의해 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유지되는 실업율과 가진게 오로지 노동 밖에 없는 노동자의 절박함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협상력을 갖춘 노동조합, 정부의 최저 임금제 같은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다면 노동자는 기업의 횡포에 끊임없이 낮아지는 임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복지는 정말 전체주의로 귀결되는가?


하이에크는 우리가 시장 체제에 간섭하여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려 노력할수록 불안정이 더 커진다고 했다. 고용 보장, 연금, 노동조합 등의 제도가 도입되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 생겨나고 이 특권층과 비특권층의 대비가 확연해지면서 사회의 불안정이 증폭된다. 더 큰 문제는 비특권층의 위험이 가중될수록 특권층이 누리는 보장이 더욱 소중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고 창의적 도전 보다는 이 특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만이 치열해 진다는 것이다.


'젊은이의 결혼 적합성은 스스로 성공할 수 있는 자신감보다는 연금을 탈 확실한 권리가 될 것이다. 한편, 젊은 시절에 봉급을 받는 지위의 도피처에 입장을 거절당한다는 것은 최하층 천민의 소름끼치는 상태가 평생 지속된다는 것을 뜻하게 될 것이다.' (p.197)


하이에크는 21세기 젊은이의 초상을 완벽하게 예언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선 끔찍할 정도로 잘못 짚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과 대기업 취업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아무런 안전도 보장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노후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한 대한민국에선 창의적 도전과 실패로 젊은 시절을 낭비할 시간이 없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직장을 구해 있는 힘껏 돈을 벌어둬야 하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이로 인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 팽배한 사회는 '잘 살아 보세'라는 정치적 주술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경쟁에 지친 개인은 하나하나 숙고해 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선전과 선동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다.


전체주의 국가로 가는 지름길은 복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덴 2014년의 대한민국 하나로도 충분할 것이다.





 
 
 
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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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이야기에는 두 명의 소설가가 등장한다. 삭스와 피터다. 삭스는 단 한 권의 소설을 출판했다. 출판 년도는 정확히 언급된 적이 없으나 1945년 생인 삭스가 23살에 집필을 시작해 5년 동안 썼다고 했으니 1973년 즈음일 것이다. 집필을 시작한 해는 삭스가 징병을 거부해(베트남 전쟁) 감옥에 간 해이기도 하다. 징병을 거부한 자유가 자유의 구속으로 귀결되는 아이러니. 사건이 일어난 곳은 '자유의 나라' 미국이다.


피터가 삭스를 만난 해는 1975년이다. 당시 피터는 예닐곱 편의 단편을 발표한 변변찮은 소설가였다. 그러나 피터는 촉망 받던 한 소설가가 테러리스트로 변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삭스는 1990년에 폭사했다. FBI는 산산조각 난 삭스의 몸에서, 신비하게도 온전하게 남아 있던 지갑을 발견한다. 지갑에는 피터의 명함이 있었다. 피터는 자신을 찾아온 FBI를 보자마자 신문에서 읽은 폭사의 주인공이 삭스였음을 직감하지만 자기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며 시치미를 뗀다. 대신 피터는 1975년 부터 1990년까지, 그러니까 삭스를 만나 우정을 나눈 15년의 시간을 한 권의 소설로 써낸다. 소설의 제목은 <거대한 괴물>이다.



미국의 현대사


<거대한 괴물>에는 공통된 해석이 존재한다. 촉망 받던 소설가에서 테러리스트가 된 한 남자의 급변을 통해 삶의 추진력이 자기의지나 명백한 인과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들이닥치는 사건에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므로 안전한 비평의 주제가 될 수 있지만 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은 아니므로 오늘의 이야기에선 제외할 것이다. 대신 나는 196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미국의 현대사와 삭스의 변화를 병치함으로써, 사실은 삭스의 변화가 미국 현대사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은 다소 피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너무 어설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오리지널리티에는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생경함이 있기 마련이다.


삭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1968년에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다. 전쟁은 극심한 반대에 직면해 있었다. 패배의 그림자가 짙었음에도 미국은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을 베트남에 쏟아 부었다. 베트남 전쟁은 이전의 양차 세계대전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전쟁이었다. 겉으로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사실은 비지니스였다. 사람들은 악취가 나는 전쟁을 자유의 비단으로 포장하려는 국가에 분노했다. 자유는 존 F. 케네디와 함께(1963년에 암살 당함) 죽었음이 밝혀졌다. 


피터가 삭스를 만난 건 1975년이고 피터가 삭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건 1979년다. 페니(삭스의 아내)는 삭스의 여성 편력을 고백하며 자신의 불륜이 공평하다고 주장했다. 피터는 삭스가 외도를 했다고 해서 페니의 외도가 정당되는 건 아니라고 유혹을 거부했으나, 결국엔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후에 만난 삭스를 통해 삭스가 자신이 집을 비운 몇 주 동안 페니와 피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터는 당황했지만 삭스는 침착했다. 삭스는 자신의 여성 편력은 모두 페니가 지어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터의 불륜을 탓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삭스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진심으로. 피터는 삭스의 말이 맞는지 페니의 말이 맞는지, 정말로 삭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삭스는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삭스의 말이 맞다면 세상은 도덕과 비도덕이 너무나 엉켜 있어 무엇이 도덕이고 무엇이 비도덕인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1970년대의 미국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국가기관을 이용해 상대 당의 기밀 문서를 훔치고 회의 내용을 불법 도청했다. 불법은 너무 자연스럽게 행해져 법과의 구분이 혼동될 지경이었다. 세계 도처에선 반미 데모와 미국 시설에 대한 테러가 들끓었다. 1979년에는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이 습격당해 90명의 외교관들이 인질로 잡혔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의아해 했다.


그리고 1980년대가 온다. 삭스는 이 시기에 아파트 추락 사고를 겪어 거의 죽을 뻔한다. 삭스는 이 사고를 계기로 지금까지 알고 있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레이건이 집권한 1980년대는 자유가 부활한 시대였다. 당시 레이건이 주도하던 경제 정책은 오늘날 '신자유주의'라 불린다이 사조의 이름이 왜 '자유'를 포함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1981년은 또한 AIDS가 나타난 해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아이를 갖거나 갖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은 피임약을 합법화했다. 합법화된 피임약에 성은 더 문란해졌고 문란해진 성이 AIDS로 귀결됐다. 사람들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했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국가가 약속한 자유의 부활은 익히 알고 있던 자유가 아니었고 우리가 자유라고 믿었던 것은 재앙으로 도래했다. 자유의 여신은 자기가 수호하는 게 무엇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삭스의 선택은 자유를 테러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믿는 자유는 더이상 우리가 알던 자유가 아니었다. 자유는 파괴되야만 했다. 삭스는 자유의 여신상을 폭파하는 것 만큼 자유의 파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을 찾아 모든 주를 돌아다녔다. 1990년 6월 29일 삭스는 여신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조립하다 폭사하고 만다. 위스콘신 주 북부의 어느 도로변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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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오늘날 닥쳐온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로 규정할 수 없다"고 했다. 가속화의 시대, 즉 근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근대 이전의 인간들은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삶의 의미란 계급, 왕,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지 자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계급은 몰락하고 왕은 사라졌으며 신은 죽어버렸다. 그러니 이제 누가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나, 나 자신이다.


자유가 있다고 의미를 만들 수 있으면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방황하는 현대인들은 과연 자유가 없어서 삶의 의미를 못 찾는 걸까? 오히려 너무 많은 자유가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닐까? 혁명은 급작스러웠고 근대는 불시에 들이닥쳤다. 자유가 폭포수 처럼 쏟아져내렸다. 하마터면 이 급류에 휩쓸려 모조리 떠내려갈 뻔 했지만 다행이 진보에 대한 믿음, 언젠가 우리 모두가 풍요와 평화 속에 살게 되리라는 '시대의 희망'이 이들에게 주어진다. 근대인들은 이 희망을 구심점 삼아 미래로의 행진을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구원이(근대의 희망) 미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래를 앞당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속도에 대한 무한 긍정! 이리하여 근대는 가속화 시대가 된다.


근대에 대한 한병철의 설명은 탁월하다. 그는 정확하게 근대의 본질을 꿰뚫는다. 문제는 이 멋드러진 해석 뒤에 느닷 없이 '목적이 사라진 후근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왜 목적이 사라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이 무작정 후근대를(현대) 가속화 시대(근대)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후근대는 가속화의 결과가 아니라 의미를 잃은 시간, 즉 목적이 사라진 시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 않은가? 현대가 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신은 죽어있었단 말이다.


근대를 움직인 원동력은 시대가 부여한 사명이지 개개인이 설정한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의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에 현대의 문제가 도래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온당치 않다.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왜 근대를 지탱하던 시대의 사명이 사라졌는가? 



멈춰버린 기차


근대의 믿음은 역사의 전진이 곧 우리 삶의 나아짐이라는 믿음이었다. 가속화하는 기차에 올라탄 최초의 근대인들은 조금씩 변화하는 세상을 토대로 그 믿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세상이 의도한 대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빈부격차는 풍요를 배신하고 권력의 집중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믿음에 상처를 입힌다. 이제 기차의 방향은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데다가 그 속도는 너무 빨라 멀미까지 난다. 사람들은 꽉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는다. 기차는 차가운 땅 위로 우리를 내동댕이 친 뒤 순식간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낙오자들의 선택은 두 가지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떠나간 기차를 쫓는 것. 텅 빈 선로에 서서 또 다른 기차를 기다리는 것. 이들에게는 모두 자기 스스로 기차를 만들고 그 목적지를 정할 자유가 있지만 이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전무하다. 현대인은 자신의 무궁한 능력을 잊은 채 끝없는 방황을 시작한다.


흔히 현대의 삶을 서사가 사라진 삶이라고 한다. 삶에서 서사가 사라진 이유는 시간이 목적을 잃었기 때문이다. 시간은(사건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특정한 목적에 따라 꿰어 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이야기) 가질 수 없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시간은 파편화되어 그저 흩뿌려질 뿐이다.


시간이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인의 인생은 언제나 공허하다. 사람들은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새로운 경험에 집착한다. 오늘날 폭발적으로 생산되는 페스티발, 폭증하는 해외 여행, 주말과 휴가를 불태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뭔가 씐나고, 펑키하고, 흥미로운 경험을 끊임 없이 찾아나선다. 그러나 의미로 꿰어지지 못한 경험은 허무를 더할 뿐이다. 현대인은 증발 된 삶을 증발하는 삶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다.


스펙타클에 취약한 삶은 또한 문화 산업의 먹잇감이 된다. 미디어가 이끄는 대로 한때는 힐링, 한때는 인문학, 또 한때는 멘토에 열광하면서 여행을 가고 책을 사고 특강에 참여한다. 이 중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문화 산업의 덫에 걸린 어리석은 소비자가 될 뿐이다.



머무르는 삶


저자 한병철은 서사가 사라진 삶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나는 삶을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무엇이 우리의 삶에 향기를 더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색, 바로 머물러 생각하는 능력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활동적 삶은 오히려 허무를 더하고 더해진 허무는 또다시 활동적 삶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활동은 축적될 새도 없이 다른 활동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사색은 이 끝없는 흐름의 중간에 웅덩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춘다. 늦춰진 속도는 웅덩이에 의미를 남긴다. 웅덩이가 깊을 수록 의미는 더 많이 쌓일 것이다. 


그러나 이걸로 충분할까? 


사색은 파편화된 시간에 질서를 부여해 개인의 삶을 향기롭게 만들 수는 있지만 결국 세계 속에 파편화해 존재하는 개개인을 하나로 묶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사색은 개인적 문제의 해결책이지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끝없는 토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이상을 논하기에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