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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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이야기에는 두 명의 소설가가 등장한다. 삭스와 피터다. 삭스는 단 한 권의 소설을 출판했다. 출판 년도는 정확히 언급된 적이 없으나 1945년 생인 삭스가 23살에 집필을 시작해 5년 동안 썼다고 했으니 1973년 즈음일 것이다. 집필을 시작한 해는 삭스가 징병을 거부해(베트남 전쟁) 감옥에 간 해이기도 하다. 징병을 거부한 자유가 자유의 구속으로 귀결되는 아이러니. 사건이 일어난 곳은 '자유의 나라' 미국이다.


피터가 삭스를 만난 해는 1975년이다. 당시 피터는 예닐곱 편의 단편을 발표한 변변찮은 소설가였다. 그러나 피터는 촉망 받던 한 소설가가 테러리스트로 변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삭스는 1990년에 폭사했다. FBI는 산산조각 난 삭스의 몸에서, 신비하게도 온전하게 남아 있던 지갑을 발견한다. 지갑에는 피터의 명함이 있었다. 피터는 자신을 찾아온 FBI를 보자마자 신문에서 읽은 폭사의 주인공이 삭스였음을 직감하지만 자기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며 시치미를 뗀다. 대신 피터는 1975년 부터 1990년까지, 그러니까 삭스를 만나 우정을 나눈 15년의 시간을 한 권의 소설로 써낸다. 소설의 제목은 <거대한 괴물>이다.



미국의 현대사


<거대한 괴물>에는 공통된 해석이 존재한다. 촉망 받던 소설가에서 테러리스트가 된 한 남자의 급변을 통해 삶의 추진력이 자기의지나 명백한 인과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들이닥치는 사건에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므로 안전한 비평의 주제가 될 수 있지만 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은 아니므로 오늘의 이야기에선 제외할 것이다. 대신 나는 196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미국의 현대사와 삭스의 변화를 병치함으로써, 사실은 삭스의 변화가 미국 현대사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은 다소 피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너무 어설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오리지널리티에는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생경함이 있기 마련이다.


삭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1968년에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다. 전쟁은 극심한 반대에 직면해 있었다. 패배의 그림자가 짙었음에도 미국은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을 베트남에 쏟아 부었다. 베트남 전쟁은 이전의 양차 세계대전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전쟁이었다. 겉으로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사실은 비지니스였다. 사람들은 악취가 나는 전쟁을 자유의 비단으로 포장하려는 국가에 분노했다. 자유는 존 F. 케네디와 함께(1963년에 암살 당함) 죽었음이 밝혀졌다. 


피터가 삭스를 만난 건 1975년이고 피터가 삭스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건 1979년다. 페니(삭스의 아내)는 삭스의 여성 편력을 고백하며 자신의 불륜이 공평하다고 주장했다. 피터는 삭스가 외도를 했다고 해서 페니의 외도가 정당되는 건 아니라고 유혹을 거부했으나, 결국엔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후에 만난 삭스를 통해 삭스가 자신이 집을 비운 몇 주 동안 페니와 피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터는 당황했지만 삭스는 침착했다. 삭스는 자신의 여성 편력은 모두 페니가 지어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터의 불륜을 탓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삭스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진심으로. 피터는 삭스의 말이 맞는지 페니의 말이 맞는지, 정말로 삭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삭스는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삭스의 말이 맞다면 세상은 도덕과 비도덕이 너무나 엉켜 있어 무엇이 도덕이고 무엇이 비도덕인지 알 수 없는 세계였다. 


1970년대의 미국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국가기관을 이용해 상대 당의 기밀 문서를 훔치고 회의 내용을 불법 도청했다. 불법은 너무 자연스럽게 행해져 법과의 구분이 혼동될 지경이었다. 세계 도처에선 반미 데모와 미국 시설에 대한 테러가 들끓었다. 1979년에는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이 습격당해 90명의 외교관들이 인질로 잡혔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의아해 했다.


그리고 1980년대가 온다. 삭스는 이 시기에 아파트 추락 사고를 겪어 거의 죽을 뻔한다. 삭스는 이 사고를 계기로 지금까지 알고 있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레이건이 집권한 1980년대는 자유가 부활한 시대였다. 당시 레이건이 주도하던 경제 정책은 오늘날 '신자유주의'라 불린다이 사조의 이름이 왜 '자유'를 포함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1981년은 또한 AIDS가 나타난 해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아이를 갖거나 갖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은 피임약을 합법화했다. 합법화된 피임약에 성은 더 문란해졌고 문란해진 성이 AIDS로 귀결됐다. 사람들은 자유가 무엇을 의미했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국가가 약속한 자유의 부활은 익히 알고 있던 자유가 아니었고 우리가 자유라고 믿었던 것은 재앙으로 도래했다. 자유의 여신은 자기가 수호하는 게 무엇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삭스의 선택은 자유를 테러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믿는 자유는 더이상 우리가 알던 자유가 아니었다. 자유는 파괴되야만 했다. 삭스는 자유의 여신상을 폭파하는 것 만큼 자유의 파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을 찾아 모든 주를 돌아다녔다. 1990년 6월 29일 삭스는 여신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조립하다 폭사하고 만다. 위스콘신 주 북부의 어느 도로변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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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오늘날 닥쳐온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로 규정할 수 없다"고 했다. 가속화의 시대, 즉 근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근대 이전의 인간들은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삶의 의미란 계급, 왕,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지 자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계급은 몰락하고 왕은 사라졌으며 신은 죽어버렸다. 그러니 이제 누가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나, 나 자신이다.


자유가 있다고 의미를 만들 수 있으면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방황하는 현대인들은 과연 자유가 없어서 삶의 의미를 못 찾는 걸까? 오히려 너무 많은 자유가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닐까? 혁명은 급작스러웠고 근대는 불시에 들이닥쳤다. 자유가 폭포수 처럼 쏟아져내렸다. 하마터면 이 급류에 휩쓸려 모조리 떠내려갈 뻔 했지만 다행이 진보에 대한 믿음, 언젠가 우리 모두가 풍요와 평화 속에 살게 되리라는 '시대의 희망'이 이들에게 주어진다. 근대인들은 이 희망을 구심점 삼아 미래로의 행진을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구원이(근대의 희망) 미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미래를 앞당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속도에 대한 무한 긍정! 이리하여 근대는 가속화 시대가 된다.


근대에 대한 한병철의 설명은 탁월하다. 그는 정확하게 근대의 본질을 꿰뚫는다. 문제는 이 멋드러진 해석 뒤에 느닷 없이 '목적이 사라진 후근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왜 목적이 사라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이 무작정 후근대를(현대) 가속화 시대(근대)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후근대는 가속화의 결과가 아니라 의미를 잃은 시간, 즉 목적이 사라진 시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 않은가? 현대가 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신은 죽어있었단 말이다.


근대를 움직인 원동력은 시대가 부여한 사명이지 개개인이 설정한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의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에 현대의 문제가 도래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온당치 않다.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왜 근대를 지탱하던 시대의 사명이 사라졌는가? 



멈춰버린 기차


근대의 믿음은 역사의 전진이 곧 우리 삶의 나아짐이라는 믿음이었다. 가속화하는 기차에 올라탄 최초의 근대인들은 조금씩 변화하는 세상을 토대로 그 믿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세상이 의도한 대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빈부격차는 풍요를 배신하고 권력의 집중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믿음에 상처를 입힌다. 이제 기차의 방향은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데다가 그 속도는 너무 빨라 멀미까지 난다. 사람들은 꽉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는다. 기차는 차가운 땅 위로 우리를 내동댕이 친 뒤 순식간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낙오자들의 선택은 두 가지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떠나간 기차를 쫓는 것. 텅 빈 선로에 서서 또 다른 기차를 기다리는 것. 이들에게는 모두 자기 스스로 기차를 만들고 그 목적지를 정할 자유가 있지만 이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전무하다. 현대인은 자신의 무궁한 능력을 잊은 채 끝없는 방황을 시작한다.


흔히 현대의 삶을 서사가 사라진 삶이라고 한다. 삶에서 서사가 사라진 이유는 시간이 목적을 잃었기 때문이다. 시간은(사건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특정한 목적에 따라 꿰어 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이야기) 가질 수 없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시간은 파편화되어 그저 흩뿌려질 뿐이다.


시간이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인의 인생은 언제나 공허하다. 사람들은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새로운 경험에 집착한다. 오늘날 폭발적으로 생산되는 페스티발, 폭증하는 해외 여행, 주말과 휴가를 불태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뭔가 씐나고, 펑키하고, 흥미로운 경험을 끊임 없이 찾아나선다. 그러나 의미로 꿰어지지 못한 경험은 허무를 더할 뿐이다. 현대인은 증발 된 삶을 증발하는 삶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다.


스펙타클에 취약한 삶은 또한 문화 산업의 먹잇감이 된다. 미디어가 이끄는 대로 한때는 힐링, 한때는 인문학, 또 한때는 멘토에 열광하면서 여행을 가고 책을 사고 특강에 참여한다. 이 중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문화 산업의 덫에 걸린 어리석은 소비자가 될 뿐이다.



머무르는 삶


저자 한병철은 서사가 사라진 삶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나는 삶을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무엇이 우리의 삶에 향기를 더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색, 바로 머물러 생각하는 능력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활동적 삶은 오히려 허무를 더하고 더해진 허무는 또다시 활동적 삶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활동은 축적될 새도 없이 다른 활동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사색은 이 끝없는 흐름의 중간에 웅덩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춘다. 늦춰진 속도는 웅덩이에 의미를 남긴다. 웅덩이가 깊을 수록 의미는 더 많이 쌓일 것이다. 


그러나 이걸로 충분할까? 


사색은 파편화된 시간에 질서를 부여해 개인의 삶을 향기롭게 만들 수는 있지만 결국 세계 속에 파편화해 존재하는 개개인을 하나로 묶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사색은 개인적 문제의 해결책이지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끝없는 토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이상을 논하기에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이완용 평전 - 한때의 애국자, 만고의 매국노, 개정판
윤덕한 지음 / 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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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의 매국노


매국노는 1858년 6월 7일에 태어났다. 1905년의 을사조약에서 1910년의 한일합방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 매국의 길을 달린 남자의 이름은 이완용이다. 


그런데 평전이라니?


읽는 내내 주변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오해의 대부분은 평전의 말뜻을 잘못 이해한데서 온 것이리라. 평전이란 비평을 곁들인 전기란 뜻이다. 그러니 그 평가의 대상을 어찌 훌륭한 사람들로만 한정하겠는가? 악인의 길을 되짚어 보는 건 선인의 인생을 곰곰 들여다보는 것 만큼이나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악이 동작하고, 그 치부를 숨기고, 역사와 한 몸이 되 영원히 지속하는 법. 악의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하는 민족은 동일한 악인에 의한 동일한 역사를 반복한다. 



매국의 자격


우리는 흔히 매국노가 나라를 팔았기 때문에 권력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매국노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완용은 대한제국 황제가(고종) 총애에 총애를 거듭하던 '대신'이었다. 국가가 총애하는 사람, 국가가 임명한 사람, 국민이 선택한 사람일 수록 더 크게 눈을 뜨고 감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완용은 총애의 권력을 업고 나라를 팔았다. 


이완용은 원래 반일, 친미파였지만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치고 미국 정부가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기로 천명하자(당시 극도로 친일적이던 미국 정부는 일본에 조선을 주고 필리핀을 가져갔다) 일본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당시 이완용의 논리는 차가웠다. 동북아 정세의 흐름상 '대세는 일본'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세순응은 냉정한 사실 판단과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동일한 마음가짐이 난세에는 매국의 자격으로 평시에는 성공의 조건으로 나타나는 섬뜩함.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돌로 쳐야 할 텐데 우리 중 누가 죄 없는 자인가?


순응하는 자가 대신이 된다는 점에서 얼마전 낙마한 문창극 총리후보자와 이완용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문창극 후보자는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데에 '신의 뜻'이 있다고 간증했다. 그는 우리가 말씀에 순응해 그 뜻을 헤아리길 바랐다. 이완용도 조선인이 한일합방의 숙명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잘 살 방법을 찾길 바랐을 것이다. 대신의 마음이란, 이처럼 한결같은 법이다.



매국의 전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은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인 각축장이었다. 고려 범위를 정치인으로 한정한다면 조선에서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립을 꿈꿨던 인물은 전무했다. 그들은 모두 나라를 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완용만이 매국노가 되었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완용이 지지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승리는 필연적으로 패배를 낳는 데 아이러니한 건 이 패배가 똑같이 나라를 팔 준비가 되 있던 친청, 친러, 친미 매국노들은 순식간에 애국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일합방을 저지하기 위해 - 외세의 힘을 빌려 - 있는 힘을 다한 애국자로.


패배한 매국노의 전략은 매국이 아니라 친일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전략은 유례없이 성공해 국민의 분노가 매국이 아닌 친일로 향한다. 분노의 불길은 언제나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눈먼 자들이 매국노를 감싸안는다.



친일의 전략


일본의 패망 이후 친일파들이 보인 전략은 친일 이외의 매국노들이 보여준 자기 숨기기 전략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친일파들의 전략은 가장 뜯어 먹을 게 많은 고기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이완용이라는 거대한 고기를. 눈먼 개떼들은 던져주는 고기에 정신이 팔려 자기 뒤로 도망치는 도둑놈들을 놓쳐버린다.


매국노 이완용이 묘까지 파헤쳐지며 부관참시를 당할 때 일본으로 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는 휘문 학교를 세워 훌륭한 교육인으로 거듭났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법무대신 이하영의 장손자는 '해방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냈으며(이종찬) 한일합방의 공로로 자작이 된 궁내부대신 민병석의 아들 민복기는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을 두 차례나 지냈다. 이 뿐인가?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해 조국에(일본)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를 쓴, 만주군관학교출신 소위 다카기 마사오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16년간 독재를 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어느 매국노는 죽은 뒤 묘까지 파헤쳐지며 멸시를 당하는 데 또 다른 매국노들은 대대손손 부귀화 영화를 누리는 걸까? 



평전의 전략


바라건대 이 책을 친일파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정당화하는 책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완용 평전>은 한 명의 매국노를 무소불위한 절대악으로 만들어 역사를 왜곡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국의 수치를 벗기 위해 혹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죄과를 오직 한 사람에게만 돌려왔다. 그렇게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명심하라. 역사의 왜곡은 타국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더 치명적인 역사 왜곡은 언제나 자국민이 이룬다.


1910년의 대한 제국은(한일합방의 해) 나라는 아랑곳 없이 끔찍한 권력투쟁을 벌인 대원군과 민비(민비 시해는 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졌다)개인의 영달을 위해 각종 이권을 팔아 넘겼던 매국노, 오직 자기 목숨을 연명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 무능력한 황제, 그리고 매국의 가면을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국민, 이 모두가 만들어낸 악몽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망국의 수치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군자란 2014-08-07 15:30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다보면 저절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다가온 팩트가 과연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의 팩트일까? 회의가 듭니다. 조용한 침묵이야 말고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 아닐가 싶습니다.

WiredHusky 2014-08-08 13:17   URL
무엇이 사실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조용한 침묵이, 아직 저에겐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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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라 불리운 사람들


흔히 장르 문학의 대가라 불리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해당 장르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된 세계관, 혹은 테마의 원형을 창조했다.

둘째, 바깥의 의견은 관심 밖. 오로지 자체의 형식과 체계를 단단히 해 범접할 수 없는 장르의 성벽을 쌓아올렸다.

셋째, 심오한 주제 혹은 독특한 문체를 더해 장르 문학을 순수 문학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첫 번째에 속한 작품을 현대에 와서 읽는 건 상당한 실망을 유발할 수 있다. 당신은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라는 의문을 수 없이 되뇌이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을 만든 사람입니다'라는 틀에 박힌 평가를 내놓을 뿐이다


두 번째에 속한 작품은 읽는 건 상당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성벽은 까마득히 높고 또 낯설어 감히 올라갈 엄두 조차 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올라가 성 안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곳이 긱과 괴짜들의 소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게 세 번째에 속한 작품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바로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소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한 마디로 말하면 -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지만 - 로저 젤라즈니는 심오한 베르베르 이자 문학을 전공한 테드 창(<내 인생의 이야기>의 저자, 공학을 전공함)이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SF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가 방점을 찍는 곳은 과학 기술이 아니다. 그는 종교와 신성, 인간의 정복욕과 자기 파괴욕, 불사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이중성, 판타지와 신비주의 등 철학적, 신화적 관념을 적극 흡수함으로써 쇠 맛이 전혀 나지 않는 SF를 만들어낸다. 이는 'S'에 천착하려는 골수 팬들에겐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풍부한 상징과 상상력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선 가히 장르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특히 소설이 드러내는 강한 판타지적 요소에서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술했듯 젤라즈니가 관심을 갖는 영역은 종교와 신화, 신비주의 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러한 소재를 다루기엔 아무래도 전통적 'S'F 보단 판타지가 결합된 새로운 서사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이유야 어떻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젤라즈니의 작품이 단순한 장르 문학에 그치지 않고 위대한 신문학에 이를 수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SF에 바치는 장미


흔히 오타쿠들의 소설, 머저리 괴짜들의 이야기로 알려진 SF는 많은 사람들의 경멸을 받아온 장르였다. 과연 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SF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독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할 지식인 박경철은 자기 인생을 통털어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 중 하나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꼽은 적이 있다. 특정인의 권위에 힘 입어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니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유명인이 있다는 게 일말의 안도감을 주는 건 사실이니 거기에 힘 얻어 한 마디 하겠다. 로저 젤라즈니의 SF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장르다.


혹자는 신에 대한 고찰은 니체로 충분하고 신화의 세계는 이미 조 프레이저가(<황금가지>의 저자) 끝낸 바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며 SF 무용론을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이야기의 전달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컨대 신성이란 '신성'이라는 단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지닌 캐릭터가 특정한 세계 속을 헤집고 다닐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난 실체는 온갖 학문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표현한 개념을 초월한다. 개념을 초월해 실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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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림으로 빽빽히 둘러 쌓여 산 속은 컴컴했다. 컴컴한 그 산을 사람들은 흑산이라 불렀다. 오늘날 홍어로 유명한 이 섬은 1801년 부터 1816년 까지, 정약전이 16년간 유배를 산 섬이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큰 형이다. 김훈의 <흑산>은 정약전의 이야기다. 



익숙한 나라의 익숙한 백성들


김훈은 늘 역사적 인물을 그리지만 역사적 인물만을 그려본 적은 없다. 어쩌면 그는 민초들의 삶을 그리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빌려오는 걸지도 모른다. 김훈의 소설엔 이처럼 바글거리고 개미처럼 짓밟히는 민초들의 삶이 존재한다. 백성은 그의 소설 속에서 언제나 고통으로 실존을 증명한다.


정약전은 유학의 이념이 지고한 시절 사특한 학문(천주교)에 빠져 사직을 능멸하고 군왕을 욕보인 죄로 흑산에 유배됐다. 사학에 물든 양반은 유배를 당하지만 사학에 물든 백성들은 곤장에 맞아 엉치뼈가 뒤틀리고 척추가 깨져 죽었다(김훈은 원고지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눌러 적는다는 데, 그래서인지 민초들의 엉덩이에 내려지는 곤장의 무참함이 읽는 사람의 피부에까지 전달된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건 매를 맞고 죽어간 백성들이 아니다. 매를 맞고도 살아 목숨을 연명한 백성들이다. 


김훈은 역사를 옮겨 다니며 늘상 같은 고통을 늘어놨다. 따지고보면 신라의 철제 도끼를 머리에 맞고도 살아난 자들의 자식이(<현의 노래>) 충무공의 수군을 따라 피난지를 옮겼던 백성들(<칼의 노래>)일 것이며 울음이 잠시 그친 피난지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남한산성(<남한산성>)에 갇혀 신음한 백성들이고 그 신음 속에서 잉태된 생명 바로 곤장에 엉치뼈가 뒤틀리고 척추뼈가 깨진 <흑산>의 백성들일 것이다.


김훈의 소설 속에서 고통은 역사와 무관한, 그 어떤 변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영속적 실재이거나 혹은 역사의 본질이다. 안타까운 건 둘 중 뭐가 맞든 우리는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생을 이어가고자 하는 민초의 생명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젠가는 고통이 없는 곳에 이를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아니면 그 숙명을 깨닫지 못해 바둥거리는 어리석은 몸짓일까? 김훈은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에게 대답을 바라는 건 똑같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기자와 소설


김훈은 기자였다. 김훈은 소설가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은 기자가 쓰는 소설이다. 아니 소설가가 쓰는 기사일지도 모르겠다. 김훈은 곤장에 맞는 백성과 그 백성의 피와 똥으로 범벅된 형틀과 그 형틀이 놓은 끔찍한 형장을 무심할 정도로 담담한 문체로 훓는다. 그러나 담담함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 문체는 김훈의 태생적 한계이거나(뼛 속까지 기자) 사실을 온전히 사실로만 전달하고픈 강박의 산물인 것이다. 김훈은 여지껏 한 번도 소설을 쓴 적이 없거나 아니면 한 번도 소설가였던 적이 없다. "김훈은 언제나 '기사'만 쓴다'는 박경철(시골의사)의 평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역사적 사실에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공평한 것인가 비겁한 것인가? 공평과 비겁과 이쪽과 저쪽, 온갖 말이 말을 물고 말을 쫓는 허황된 말의 세계에선 오로지 지금, 여기에, 산다는 것만이 중요한 일일까? 나는 그가 견뎌온 역사의 무참함을 모르기에 그 침묵의 이유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나는, 너무나 외람된 말을 지껄인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