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정지돈 지음 / 스위밍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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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소설의 아쉬운 점은 서사가 일상에 매몰됐다는 것이다. 그 바닥에서 이야기는 완전히 촌스러운 게 된 것 같다. 호환마마나 역병을 보듯 작가들은 이야기를 발로 쫓아낸 뒤 재미도 없고 착하지도 않은 계모를 안방에 들였다. 고통받는 건 계모 밑에서 자랄 독자니까 뭐.


정지돈을 처음 본 건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서 였다. 그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단편 소설로 대상을 받았는데,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힘을 쭉 빼고 내뱉는 덤덤한 문장들은 진지함과 농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고 대단한 지향과 목표가 없는 듯 부유하는 이야기 속에 본인이 추구하는 비전이 확실하게 들어있는 이중성은 하루 종일 잔소리를 하다 툭, 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내놓는 츤데레 대리님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의 장편을 꼭 한 번 읽고 싶었다.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가 길어졌을 때 단편과 똑같은 집중력과 재미를 유지할 수 있을까? 농담은 주제를 막론하고 길어질 수록 그 재미가 떨어진다. 정지돈이라면 농담의 긴장감을 몇 페이지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는 2063년의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다. 남과 북은 드디어 통일이 되었다. 국제 정세는? 일본 열도가 마침내 물 속으로 가라 앉았고 정부 혹은 국토를 잃은 전세계의 난민들이 아직 존재하는 국가를 향해 질주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중앙 정부의 치안 유지력과 행정력은 수도 서울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난민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한국은 총기 소지를 합법화했고 총격전은 일상이 됐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아파트 발코니에서 도로의 행인에게 총격이 가해지고 도로는 박살난 시체로 가득해졌다.


버스 기사 짐은 안드레아의 제안을 받아 만주까지 운전을 해주기로 한다. 매우 위험했지만 서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태워야 할 사람은 안드레아와 무하마드. 무하마드는 분단 시절 아랍인으로 가장해 남파된 간첩이었고 1996년 발각되어 무기징역을 받을 위기에 처했지만 그간 무하마드가 보여준 학문적 성과(아랍과 고대 한반도의 관계 연구)와 간첩 행위의 경미함으로 사면을 받는다. 올해 나이는 129세. 현재 직책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그러나 그 연구소는 국가 전복을 꿈꾸는 테러 단체의 한국 지부였고 안 그래도 위험했던 여행은 국가 공권력의 추격까지 받는 혈투가 된다.


자, 여기까지만 말해도 이 소설이 그간 한국 문학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린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현란한 총격전, 숨막히는 추격, 영리한 따돌림과 충격전 반전!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소설은 마치 독자의 바람을 외면하는게 일생일대의 미션이라도 되는 양 힘을 쭉 뺀 채 부유한다. 만일 이 책이 159페이지에서 끝나지 않았다면 나는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지돈은 이 위기를 분량으로 해결했다. 한 페이지에 540자, 159페이지면 8만 6천자가 넘는 분량이지만 수 많은 공백을 고려하면 8만자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단편 소설 5개. 어쩌면 이 분량이 바로 농담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정지돈은 주인공 짐의 입을 빌려 이런 얘기를 한다.


짐은 텅 빈 놀이터, 유원지, 공원을 걸었다. 아무런 의미도 기능도 없는 글. 짐이 걷기 좋아하는 곳이 그런 걸지도 몰랐다(23p).


정지돈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일까? 단순한 유희? 정신이 이상해진 알콜중독자 노숙자가 행인을 향해 내뱉는 얘기 같은, 의미도 의도도 없는 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정지돈 만큼 행복한 작가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유희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까. 그 놀이가 좀 더 지속될 수 있도록 내가 그의 책을 좀 사줘야겠다. 혹시 또 모르잖아, 언젠가 내가 그 바턴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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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끄기의 기술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마크 맨슨 지음, 한재호 옮김 / 갤리온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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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논조를 제대로 알리고자 공격적인 말투와 비속어를 섞어 썼으니 너그럽게 이해 바랍니다.


제목만 보면 60년대 미국 히피 문화의 쩐내나는 씨앗이 폭력적인 21세기 자본주의의 잔해에서 자라난 개수작 잠언서처럼 느껴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랜만에 이 출판사에서 제대로 읽을 만한 걸 내놓은 셈인데 제목을 번역하는데서 여전히 지진아의 흔적이 남아있다. 신경끄기의 기술이라니. 왜? 흰색 커버에 정자로 박아넣고 푸른 하늘을 그려넣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이라는 부제를 달아줬지만 애초에 제목을 잘지었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매력. 저자가 글을 잘 쓴다. 이런 류의 책에서 보여지는 요상한 멘탈 관리도, 쓸데없는 가르침도, 무의미한 자기 다짐도 없다. 그저 잡담인듯 농담아닌 농담같은 글들이 일필휘지로 종이 위를 달려나간다. 특히 대책없는 긍정주의자들이 하는 말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야, 웃어서 행복한 거지' 라던가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를 열번만 외쳐봐' 따위의 리얼 핫 울트라 개수작에 눈 하나 깜짝 않고 똥칠을 하는 저자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긍정적인 경험을 원하는 건 부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는 건 긍정적인 것이다. 철학자 앨런 와츠는 이걸 '역효과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 법칙에 따르면, 기분을 끌어올리려 할수록 더 불행해진다. 뭔가를 바라는 행위는 무엇보다 내가 그걸 갖지 못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p.26)


내 말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구렁텅이에 쳐넣어 매주 일요일 밤 우울증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과 나는 애초에 x밥이었고 50년 혹은 그 이상을(염병할 의학의 기적!) 개떡같은 직장 상사와 쥐꼬리만한 월급, 끔찍한 월요병과 함께 보내야한다. 괴로움은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진 삶을 살 수 있다는 망상에서 비롯된다. 노우! 우리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다. 음낭이라는 따뜻한 천국에서 정자로 살다 음란한 분출로 난자를 만나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지옥을 멀리서 찾지 말라. 우리가 선 이곳이 바로 지옥이니까.


우리가 이미 지옥에서 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괴로울 게 별로 없다. 우리의 고통은 당연한거다. 그러니 고통받는 건 신경쓰지 말고 그냥 살면된다. 우리가 평소에 감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들이 당연히 받아 마땅한 것들이라면 우리는 왜 거기에 감사를할까? 우리가 감사해 한다는 건 평범하지 않은 것, 일상적이지 않은 것, 한 마디로 특별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감사할 일은 애초에 많이 생기지 않는 게 당연하다! 온갖 못과 압정, 가시가 박힌 길 위를 맨발로 걸어가다 가끔 따뜻한 족욕탕을 만나는 게 인생이고, 그건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원래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한 거라면 그 따위걸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공감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내 꿈은 사실 보도를 덮친 트럭에 치여 즉사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단명회라는 모임도 만들뻔 했다. 그러나 고통없는 급작스런 단명은 로또 당첨 만큼이나 얻어내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빌어먹을 정도로 발전한 의료 기술에 힘입어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살아야 한다. 그럼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당연히 하고 싶은 일을 해야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잖아. 무슨 문제?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걸?


고통의 뫼비우스 띠 위에 올라온 걸 환영한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떤 동기나 감정이 생겨야만 특정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동해본 사람들은 안다. 


행동은 동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p. 184)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놀랍게도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라도 해봐라. 그렇게해도 찾지 못했다면? 그러면 어쩔 수 없다. 또 다른 걸 찾으러 갈 수 밖에.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새로운 일을 찾는데 들인 노력, 그리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실패의 쓴 맛과 바꾸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당신과 나는 애초에 x밥이었고 무언가로 성공하기엔 극히 어려운 사람이었거늘. 그러니 뭔가를 할때마다 가슴을 찔러들어오는 실패의 비수를 느낀다면 이 말을 기억하라. 실패는 당연한거고 성공은 희박한 일이다. 눈먼 암퇘지도 때때로 도토리를 줍듯, 숲으로 나가라.


노파심에 얘기하는데 이건 더러운 패배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이렇게 살아보라. 그러면 당신은 매일 20명도 채 방문하지 않는 블로그에 8년 넘게 꾸준히 글을 쓰게 된다. 불합격 조차 통보해 주지 않는 회사에 뻔뻔하게 이력서를 들이 밀고 실존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각종 문학 단체에 단편 소설을 보내게 된다. 저자는 이와 비슷한 충고를 마이클 조던의 입을 빌어 얘기했는데, 나는 문학 청년답게 필립 로스가 쓴 소설 <에브리맨>의 한 구절을 인용하려 한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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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개정판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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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 말은 지난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던 위대한 중립주의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진정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할 실마리가 되었다. 중립주의자들은 차분하고 지적이며 여유롭다. 고귀한 그들은 타인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문명인의 불문율을 지키려 짐짓 나의 말을 들어주는척 하지만 사실은 벌겋게 달아오른 두 볼, 주먹을 꼭 쥔 두 손,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유치하고, 감정적이며, 불확실하고, 편향적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그 모든 걸 온화한 미소를 곁들인 냉담한 눈빛으로 말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왜 중립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여기 우측으로 질주하는 기차가 있다.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이를 좌측으로 달리게 하거나 적어도 멈춰 세워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해보려한다. 그들은 이 의견을 전하기 위해 기관실로 향한다. 그런데 기관실에서 보내온 직원은 그들에게 이 기차는 우측으로 가고 있는게 아니며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기차에서 내쫓겠다고 위협한다. 꼬리칸 사람들이 창문을 가린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본다. 직원의 말이 뻔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챈다. 이제 꼬리칸 사람들의 행진에는 피의 대가가 따른다. 바닥에는 축 늘어진 부상자들이 즐비하고 죽음과 추방의 위협은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때 위대한 중립주의자들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당신들은 왜 이 기차가 우측으로 달린다고 생각하는가? 기관사는 분명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가? 설령 당신들의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 게 정당한가? 당신들은 그렇다고 하고 기관사는 아니라고 하니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중립을 지키겠다.


기관사 여러분, 우리가 당신들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꼬리칸 사람들이 맞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건 우리는 이 모든 소동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벌이든 우리는 객실에 앉아 조용히 독서를 하겠습니다.


말하고 그들은 자신의 의자에 얌전히 앉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중립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중립을 선언한다는 건 기차의 질주 방향에 몸을 싣겠다는 의미다. 무거운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아무리 꼼짝 안한다 해도 기차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정한 중립이란 기차에서 내리는 것, 즉 이 사회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중립주의자들은 기차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 걸, 그렇게 기차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지켜보는 게 중립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달리는 기차와 같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는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에 고삐를 채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인다따라서 중립을 선언한다는 것, 아무런 방향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건 '현재의 방향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단호히 중립을 선언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역사는 그들을 '특정 방향'으로 실어간다. 이것이 바로 달리는 기차 위엔 중립이 없는 이유다.


하워드 진은 1922년 뉴욕의 빈민가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이민자의 2세였던 그는 조선소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후 제대군인 원호법에 따라 뉴욕 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가난한 이민자의 2세가 미국 최고 교육기관의 혜택을 입었다면 대개는 그 혜택을 이용해 상류 사회에 편입할 꿈을 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 그것도 흑인 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되어 정든 뉴욕을 떠난다. 물론 그에게 대단한 인권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빈민가 출신답게 그는 유색인종과 친밀했고, 그래서 자기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며, 결정적으로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한 대학이 거기 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의 인생은 극심한 진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 진이 차별과 폭력, 전쟁과 비인륜이라는 가시밭 길을 맨발로 걸으며 기록한 에세이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미국을 휩쓴 각종 인권, 반전 운동에 이름을 올리며 만인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위해 싸웠다. 그 역사적 기록들이 사실 우리와는 그닥 관련이 없어 이 담담한 회고록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시사하는 바를 적어도 하나만큼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최근에 우리가 광장에서 이루어 낸 일을 돌이켜봤을 때 그 이해는 확신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소리내어 말하고, 그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면, 반드시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보(이 말이 불편하다면 변화)의 가시밭길은 나 홀로 걷는 외길이 아니다. 흐름 속에서 보면 우리는 때때로 웅덩이에 갇히고 바위에 부딪혀 길목에서 맴돌지만 역사적 관점에선 다양한 지류가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들이 비로소 거대한 바다에서 합쳐지는 형국으로 보여진다.


"투쟁의 과정에서 낡은 질서의 힘은 부식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변화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패배하지만 분쇄되지는 않으며, 결국엔 다시 일어나 반격을 재개한다.


역사의 모든 일은, 일단 벌어지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됐을거라 믿는 필연성의 유혹에 직면한다. 결과를 보고난 뒤에는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상상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불확실성을, 뜻밖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바꾸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행동이 중요함을 확신한다." (본문 중)


하워드 진은 1922년에 태어나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7년이다.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변화를 목격하고 자신의 두 손으로 그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가 증명한바에 따르면 역사는 기필코 나아간다. 어디로? 우리가 향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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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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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책들은 대부분 지루한데 그 정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겠다.


미치도록 지겨움: 환상의 책

뭔가 있는 것 같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어쨌든 지겨움: 뉴욕 삼부작, 거대한 괴물, 보이지 않는

재밌지만 적당한 선에서 끝내줬으면 더 좋았을 지겨움: 공중곡예사

완벽하지만 뒤에 실린 부록 때문에 지겨움: 빵 굽는 타자기


자, 이 책은 뭔가 있는 것 같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어쨌든 지겨운 범주에 속한다. 이 범주에 속한 3권의 공통점은 모두 스릴러, 서스펜스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실종, 미지의 남자, 살인.


장르 문학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포스트모던 문학의 특징인데 이는 언젠가 보르헤스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며 쓴 것 같으므로 오늘은 생략하겠다. 보르헤스의 포스트모던이 신화적, 환상적 이야기에 뿌리를 대고 있다면 폴 오스터는 확실히 도회지 출신다운 세련된 면이 있다. 그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쓰지만 배경은 언제나 눈에 잡힐듯한 현실이다. 보르헤스를 아예 읽지 못하는 사람도 폴 오스터를 읽는 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지겨움을 잘 참아내야하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은 그 동안 내가 읽어온 폴 오스터의 책 중 가장 노골적으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포스트모던!)를 하는 이야기다. 작품은 과연 작가의 손에서 완결되는가? 작가가 결론을 내린 이야기는 거기서 생명을 잃고 박제된 채로 영원히 살아가는가? 독서란 행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독자는 독서를 통해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가? 독자는 작가가 박제한 진리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 문학에서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주제가 된다. 그들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야기가 발화자의 입에서 완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청자이자 동시에 화자이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독자는 이야기의 신전에 앉아 작가의 계시를 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스스로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가 그 계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자아를 두 개로 나눠 <보이지 않는>의 화자로 등장시킨다. 이 책의 1부는 대학 시절의 폴 오스터(작중 인물 워커)가 주인공이며 그가 보른이라는 정체불명의 교수를 만나 겪는 신비한 일을 다룬다. 2부는 성공한 소설가 폴 오스터(작중 인물 짐)의 시점으로 쓰였으며 한 때 대학 친구였던 워커가 자신이 쓴 소설 원고(이 책의 1 부)를 소포로 보내면서 시작한다. 둘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짐은 1부를 탈고한 이후 더 이상 진전이 없던 워커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 그가 다시 원고 앞에 앉게 한다.


3부는 워커가 죽기 직전 남긴 원고인데,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 일종의 개요였다. 아마도 3부가 온전한 문장으로 <보이지 않는>에 실린 이유는 짐이 워커의 개요를 토대로 3부를 완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4부는 짐이 워커의 누나를 만나 그의 원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누나는 짐에게 워커의 원고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해주길 원한다. 그리고 짐은 수락한다. 따라서 우리가 읽은 <보이지 않는>은 워커의 원고를 토대로 짐이 쓴 소설일 것이다.


그렇다면 잠깐만.


<보이지 않는>의 작가라고 소개되는 폴 오스터, 책의 표지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 뉴저지 출신의 신비주의자는 무엇을 한 걸까?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문학의 백미를 느낄 수 있다. 짐과 워커는 폴 오스터가 창조된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자기들을 창조한 작가를 제거해버린다. 이 책의 진정한 작가는 누구인가? 짐? 워커? 폴 오스터? 아니면 그들 모두? 내 말이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폴 오스터가 짐과 워커로부터 원고를 받아 <보이지 않는>에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작가의 권위는 사라지고 오로지 무한히 확장하는 텍스트만이 남는다. 진실을 확증해줄 절대 권력의(작가의) 부재로 인해 세상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파기함으로써 수백, 수천 만개의 새로운 진리를 획득한 것이다. 누가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말했는가? 끊임없이 원본과의(진리) 대조를 강요하며 진실인지 거짓인지 추궁하는 독재자는 포스트모던의 유희에 단단히 묶여 단두대의 칼날 앞에 목을 드러낸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포스트모던이 단순한 말장난처럼 느껴지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이 정치, 사회적으로 해석될 때 탄생하는 의미는 당신의 생각을 고쳐줄지 모른다. 작가라는 절대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화자가 되는 것. 권력에 짓눌리고 패배감에 젖어 수동적 좀비가 되는 것과 권위를 부정하고 이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고 믿으며 광장으로 나가는 시민. 포스트모던의 바보같은 말장난이 정말 이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을 갖고 꼭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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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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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다. 둘째는 캐릭터다. 훌륭한 캐릭터들이 위트있는 대사로 황당한 이야기를 만든다. 이것이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문장이다.


<하이피델리티>만큼 현실감이 있지는 않지만 그건 이 소설의 등장인물과 상황이 <하이피델리티>보다 더 황당하기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총 네명으로 다음과 같다.


마틴: 전직 유명 토크쇼 주인공. 10대 소녀와의 섹스 스캔들로 사회에서 매장. 돈과 명예를 모두 잃고 나락으로 추락한 남자.


제이제이: 슈퍼 빅 밴드를 꿈꾸며 영국으로 넘어온 미국 락커. 한때 R.E.M의 매니저가 연락을 해 올 정도로 잘나갈 뻔 했지만(Almost Famous!) 팀은 해체, 피자 배달로 연명하는 남자.


모린: 중증장애 아들을 둔 50대 여자. 젊은 시절 딱 한번, 낯선 남자와 섹스 후 가진 아들이 바로 눈물의 씨앗이 된다. 단 한번의 실수로 평생 족쇄에 묶여 사는 불쌍한 여인.


제스: 언니가 행방불명된 후 소외감을 느끼고 방황하는 틴에이저. 타인에게 상처받기 전에 먼저 상처를 주는 전략으로 18년을 살아왔다. 그렇게 열심히 관계를 파괴하다 더이상 파괴할 게 없어지자 스스로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한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클라스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한 권의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을까? 그건 이 네명이 희망과 열의와 사랑과 우정과 온갖 종류의 다짐, 온갖 종류의 의지가 뒤섞여 광란과 흥분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신년 이브, 우연히 토퍼스 하우스 옥상에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처음엔 마틴 그리고 모린, 제스, 제이제이의 순서로.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찬바람 아파트 옥상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목표는 같다. 옥상 밑으로 뛰어내려 자신의 대갈통을 더러운 보도 위에 짓이기는것!


자살을 결심한 네 명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고 어느새 모락모락 피어오른 애정의 열기 속에 그들을 다시 한번 생에의 의지를 불태우고... 같은 뻔한 이야기가 예상되지만 그건 닉 혼비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다. 참신한 문장을 쓰지 않으면 자동으로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고문 의자에 앉아 집필을 하는 듯 닉 혼비는 혼신의 힘을 다한 블랙코미디를 발작적으로 전개한다. 때로는 그 강렬한 독설에 마음이 마비되기도 하지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후려갈기는 그의 문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갖고 싶은 탐나는 보물이다.


닉 혼비가 자살을 너무 희화화하는 건 아니냐고 느낄 수도 있지만 얘기를 들어보라. 사실 중증장애 아들을 둔 모린의 실제 모델이 닉 혼비 본인이다. 그는 첫 결혼에서 낳은 첫 아들이 생후 18개월 중증자폐아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절망을 이기는 방법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를 쥐게 된다. 하나는 고백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거란 걱정은 버리고 마음 속에 응어리진 고통을 입 밖으로 뱉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지나치게 희화화된다 하더라도 그건 조롱이나 좌절의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치유다. 유머는 사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 잉태되는 눈물의 열매인 것이다. 고난의 체에 거르고 걸러진 슬픔이 순도 높은 정수가 되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마침내 열어내는 꽃. 그것마저 시련의 바람에 떨어지고 나면 그 밑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황홀할정도로 새까만 빛을 내뿜는 열매 하나를 얻게된다. 그게 바로 유머인 것이다. 


고난을 당해본 사람들만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하지만 내 바람은 여러분들이 평생 이 말의 뜻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럴수만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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