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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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를 아주 코딱지만큼 읽어봤을 때 아무래도 주제 사라마구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철학적 은유를 대량으로 우겨 넣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지루함을 제공하는 게 그 책의 목표인 줄 알았다. 제목이 너무 거대했어, 내가 뭘 몰랐던 거지.


우연히 <카인>을 보고 첫 페이지를 읽는 데 그런 게 아니었다. 주제 사라마구, 대단하다! 신성모독 만큼은 니체, 러셀, 커트 보네것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여기 진짜가 있었다. 게다가 책도 210페이지 밖에 안된다. 온갖 미덕을 갖춘 완벽한 책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2010년 여든 일곱의 나이로 죽었고 <카인>은 2009년에 썼다. 여든여섯에 쓴 책이다. 86살 말이다. 창작욕엔 정말 한계가 없는 걸까? 인간은 대개 죽을 때에 이르면 마음이 약해지고 손과 혀 끝에서 뿜어져 나오던 독도 중화되기 마련인데 이 노인네는 끝까지 꼬장꼬장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삶의 커튼을 몰래 젖혀 그 너머를 봤을 것이다. 그리고선 확신을 한 거지. 거기엔 죄 지은 자를 벌하는 지옥도,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이도 없다는 것을.


<카인>의 주인공은 카인이다. 아벨을 죽이고 광야로 내쫓긴 인류 최초의 살인자 말이다. 하나님은 카인을 내쫓으면서 이마에 낙인을 찍었고 그 낙인이 있는 한 세상 무엇도 카인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선언한다.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신조차 몰랐으리라. 죽지 않는 카인은 이곳 저곳 세상을 돌아다니며 말썽을 피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물릴 수 없었으므로 카인의 만행을 보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전능한 신이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했던 말을 물리는 것 따위 호떡 뒤집기 보다 쉬웠겠지. 그러니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신은 왜 말썽꾸러기 카인을 죽이지 못했을까?


내 생각은 그렇다. 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 죽지 않는 카인은 시간을 초월해 아브라함을, 소돔과 고모라를, 노아를 만나 신께서 예비해 놓으신 미래에 똥 오줌을 범벅해 놓는다. 그 때마다 신은 멍청한 얼굴로 뒤늦게 나타나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너는 나의 아브라함을 나의 노아를 어떻게 했느냐?" 고 묻는다. 전지한 신에게 질문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신은 묻고 또 묻는다. 이유가 뭘까? 카인은 신의 딜레마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신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라면, 카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그로인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면 신은 스스로 자신의 전지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이 때 카인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시간을 창조할 수 있는 위대한 주체가 된다. 신은 전지하지 않다. 그조차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인간들이여 기억하라, 시간은 우리의 것이고 그가 예비해 놨다는 미래는 그의 욕망에 불과할 뿐이다.


반대로 신이 다 알면서도 묻는 거라면? 그는 음흉한 능구렁이가 된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음에도 손 하나 까딱 않고 있다 일이 터지고 난 뒤에야 나타나 멍청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인간의 실수를 방조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 받는 걸 즐기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신의 딜레마다. 자기도 몰랐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음흉한 능구렁이임을 시인해야 하는가? 카인은 이 딜레마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신은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신의 위대한 의도는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도망친다. 신은 아마 카인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훑어보면 하나님 만큼 권위에 집착하고 무자비한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모두를 잔인하게 죽였다. 그런데도 카인에게 부여한 영생을 거두지 못한 건 순전히 자존심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카인을 죽이면 하나님이 지는거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카인을 방치하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역사를 망칠 것이다. 자, 이제 신에겐 그 유명한 대사를 읊을 때가 왔다.


살리느냐 죽이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카인>은 신의 딜레마로 가득한 소설이다. 신은 딜레마에 빠져 인간처럼 허우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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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의 시대 - 세상에 없던 나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성공하는
알렉사 클레이.키라 마야 필립스 지음, 최규민 옮김 / 알프레드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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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주제를 배회하는 책이다. 괴짜들의 독특한 성공 사례를 분석, 소개하겠다는 컨셉인데 내용이 전혀 따라주질 않는다.


저자가 제시하는 또라이들의 성공 전략은 허슬, 복제, 해킹, 도발, 방향 전환이다. 허슬은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다. 사막 위에 카지노를 세우거나 캘리포니아에 실리콘 벨리를 만드는 것. 둘째는 복제. 자기 아이디어에 집착하지 말고 남의 것이 더 좋아보이면 과감히 베끼라는 것이지. 제록스 연구소에서 GUI를 훔쳐온 스티브 잡스나 기존  MMORPG에서 좋은 시스템만 싹싹 긁어모아 완성도 높은 게임을 만들어낸 Blizzard를 생각하면 된다. 셋째는 해킹이다. 기존 시스템을 갈기 갈기 분해해 재구성 하라는 얘기다. 딱 맞는 예시를 찾기는 좀 힘든데, 음악이나 영상을 소유한다는(다운로드) 개념에서 경험한다는 개념으로(스트리밍) 바꾼 Netflix나 Spotify, 멀게는 롱테일 마켓을 창조한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를 떠올리면 된다. 넷째는 도발이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과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것. 애플의 1983년 슈퍼볼 광고 얘기는 안 해도 되겠지? 마지막은 방향 전환이다. 책은 꼭 필요한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기술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이쯤되면 이 책이 거의 제정신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까지 든다. 방향 전환은 스타트업 비지니스에서 자주 보여지는 피벗이라는 개념이다. 애초의 기획 의도대로 제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놨더니 우리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더라. 이 경우 회사가 기존의 기획을 과감히 버리고 새 방향으로 컨셉을 트는 것. 이것이 바로 피벗이다. 스타트업의 경우 아예 업종을 전환하는 경우도 많다. 국내에서도 최근에 5Rocks라는 회사가 이 피벗을 제대로 보여줬는데, 이 회사는 원래 모바일 게임 회사였고 자사의 게임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해 툴 하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분석 툴이 의외의 반응을 얻자 게임을 접고 툴 제작에 올인해 외국 회사에 매각까지 하게 된다! This is Pivot!


어쨌든 이 책은 위에서 소개한 다섯가지 정신이 비주류 경제권에서 활약하는 B급 인생, 즉 또라이들의 성공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가 일부러 유명한 회사와 인물을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B급 인생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허슬로 따지면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를 따를 자가 없고 복제에선 스티브 잡스, 해킹에서 제프 베조스, 도발로는 이들 모두, 피벗으로는 마블(저작권 판매에서 자체 제작으로 방향을 전환해 최근 헐리웃을 휩쓸고 있다)이 최고봉이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이제 위대한 기업에게 배우는 성공은 지겹지 않나요?" 라고 물어보는데 본인이 그렇게 얘기해 놓고 위대한 기업의 성공 법칙을 그대로 베껴오면 어쩌자는 말인가? 복제의 원칙을 몸소 실천해 보인 거라고 해야 할까? 이목을 끌려면 뭔가 다른 내용이 있어야 하니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소개하는 건 좋다. 그런데 책을 읽고 있으면 이 사람들의 성과를 성공이라고 보는 게 맞는지, 좀 더 두고 볼 필요는 없는지 의심이 될 때가 많다. 자기 주장을 위해 현실을 지나치게 호도하는 건 문제의 소지가 있다.


차라리 이 비주류 인물들의 삶을 심도 있게 다뤘다면 나름 얻는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이미 또라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테니까. 본 모습을 감춘 채 조직에 숨어 할딱 할딱 숨을 몰아 쉬고 있거나 자신의 또라이 감성이 먹혀들지 않아 사사건건 조직과 충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심도는 개뿔, 너무 빠르게 겉핥기를 하느라 해가 아릴 정도다.


기존의 경영서들이 MBC의 <성공 시대>라면 <또라이들의 시대>는 SBS의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가깝다. 하지만 이 책은 <세상에 이런 일이>가 조명하는 소박한 특별함, 그 따뜻한 위로를 반에 반에 반도 담지 못한다.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그 제목에 있다. 원제는 <The misfit economy>. 직역하면 부적응자의 경제학이라는 말이다. 이 책이 한 달만에 3쇄를 찍은 건 오로지 그 제목의 힘이리라. 마케팅 만세! 마케팅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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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 맹자 : 유학의 변신은 무죄 지식인마을 3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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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말한 적 있는데 강신주는 말보다 글이 좋은 사람이다. <감정수업>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책으로 경력에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동양철학에 대한 강신주의 깊이는 정말 대단하다. 특히 해석의 독창성 이라는 면에서 강신주의 견해는 반짝 반짝 빛이 난다.


김영사의 <지식인 마을 시리즈>는 이제 막 인문학을 접한 사람들에게 보석같은 전집이다. 어렵고 두려워 엄두도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시리즈로 인문학을 공부해 볼 것을 추천한다.


내 기억에 강신주는 이 시리즈에서 두 권을 집필했다. 하나는 <노자&장자>, 또 하나가 이 <공자&맹자>다. 처음 읽은 건 <노자&장자>였는데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노장 사상을 송두리째 찢어발기는 충격적 경험이었다. 그래서 <공자&맹자>의 저자가 강신주라는 걸 보는 순간 곧바로 집어 들었다.


<공자&맹자>를 강신주가 썼다는 건 공맹의 말씀에 "네네"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특히 나와 타인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자, 그래서 장자의 사상을 소통의 철학으로 해석한 강신주에게 공맹의 무자비한 자기 중심주의는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난번 <맹자>의 리뷰에서 나는 유학이 전란을 평정하기엔 너무 이상적이지만 평화의 시대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쓴 바 있다. 왜일까? 그것은 유학이 신분의 차별을 정당화함으로써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전통적 관습 규범인 삼강을 살펴보자. 군위신강, 군주는 신하의 법칙이 되야 한다. 부위자강, 아버지는 자식의 법칙이 되야 한다. 부위부강, 남편은 아내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이게 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가부장지수가 10점 만점에 8점은 나올 것이다.


유학은 근본적으로 군주, 아버지, 남편 중심적 사유 편향을 보여 준다. 가진 사람, 힘 있는 사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다워야 하고, 남편은 남편 다워야 한다. 신하가 군주 다울 순 없고 자식이 아버지 다울 순 없으며 아내가 남편 다울 순 없다. 고상한 척 얘기하지만 사실은 절대 내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엄포가 숨어 있다. 누구든 이 규범을 거스르면 예를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고 예를 모르는 사람은 금수와 같은 자니까 마을에서 내쫓든 때려 죽이든 상관 없다. 유학의 예는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 시키는 마력을 갖는다.


공자의 예와 맹자의 인은 인류의 역사를 꿰뚫는 보편적 윤리 규범이 되기 어렵다. 특히 공자의 예는 주나라 시대에 정립된 예 즉 '주례'의 복원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은 당시에도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춘추. 수 많은 제후들이 쏟아져 나와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상황에서 옛 나라의 법도를 복원하자니, 그 어떤 군주가 따를 수 있었겠는가? 공맹의 사상이 당시에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 마음을 갈고 닦으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한 모두에게 군자의 길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나름 보편성을 갖췄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과연 선함이 인간의 본성일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맹자는 우물에 떨어지려는 아이를 봤을 때 사람들이 하나 같이 달려가 아이를 구한다는 예시로 성선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우물 앞에 성인이 아닌 아기가 있었다고 해보자. 아기는 우물에 떨어지려는 아이를 보고 달려가 구해줬을까? 오히려 재미있는 피카부(Peekaboo) 놀이라고 생각해 박수를 치며 웃지 않았을까? 어른이 아이를 구한 건 죽음의 의미와 그 고통의 크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본성이 선해서가 아니다. 같은 예시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공감의 철학을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거기서 성선을 봤고 오늘날 세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공맹 이후의 유학이 그들의 사상을 신성화해 창의적 논의를 말살하고 반대자를 잔인한 방법으로 숙청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맹의 사상은 자기가 임의로 설정한 준거가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라 믿는 착각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폭력적 오만이 내재되어 있다. 흔히 기독교가 지배한 유럽의 중세를 다크 에이지라 부르며 조롱하는데, 과연 그 다크 에이지가 유럽에만 있었을까? 아주 오래 전 부터 유학은 혁신적 사상가들을 사문난적으로 찍어 끔찍한 형벌로 죽이는 야만을 부렸다. 유럽의 중세는 천 년, 동양의 유교는 이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유럽을 보고 웃을 일이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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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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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아웃라이어>를 지금에서야 봤다. 물론 그 내용은 풍문으로 들었고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재능이란 기나긴 인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20대의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나는 무언가를 잘 할 자신은 눈꼽 만큼도 없었는데 그 일을 끝까지 해낼 자신은 누구보다 충만했다. 이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꾸준히 시간을 적립하고 있다. 땡큐 모파상.


그래서 이 책의 주제는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준다. 내 삶의 방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웃라이어>는 성공이 타고난 재능에서 오는 게 아니라 1만 시간의 노력과 엄청난 운의 조합으로 탄생한다고 말한다. 설득력 있는 사례와 통계가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데, 이를 읽고 있으면 저절로 고개가 끄떡여지기도, 때로는 "와 진짜 성공은 그냥 걸려드는 거에 불과하잖아?"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혁신적 주장은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상의 파격은 상당 부분 과대 포장된 케이블 광고 상품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1만 시간의 법칙을 생각해보자.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을 조사해 봤더니 대부분 1만 시간의 연습이 끝난 시점부터 두각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재능이란 일정한 시간의 노력이란 공식이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조사 방법을 바꾸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러니까 1만 시간의 노력을 달성한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공했는지 조사해보자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1만 시간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면 1만 시간을 노력하면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통계의 함정이다. 캐나다 아이스 하키 팀의 베스트 플레이어들이 대부분 1월 생이라는 통계도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들 중에 1월 생이 많은 건 사실이야. 그렇다면 캐나다의 1월 생 남자들이 모두 하키 선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말콤 글래드웰은 재능이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시아 청소년들의 수학 성적을 거론한다. 아시아 청소년들이 수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이유는 언어 체계(동양은 11을 십+일로 인지하지만 서양은 그냥 eleven. Ten으로 부터 eleven을 추론할 근거가 없다는 한계가 수에 대한 이해를 느리게 한다)에 있기도 하지만 쌀 농사를 지으면서 몸에 밴 인내와 성실의 결과라는 것이다(물론 인내가 수학 능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선 제시된다).


일단 인과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서양인 특유의 태도에 주먹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나는 것도 나는 거지만 근거 자체도 터무니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수학을 잘하는 국가는 싱가포르, 한국, 대만, 홍콩 그리고 일본이다. 이것이 과연 쌀 농사의 영향일까? 이들 국가는 대부분 최근에 비약적 산업 발전을 이룬 나라들이다. 가난한 국민들이 좋은 직장을 얻어 중산층이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지옥과도 같은 학구열이 형성됐다. 그래도 아직 쌀농사의 영향을 믿고 싶다면 똑같이 쌀 농사를 짓는 베트남, 라오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이집트, 브라질은 왜 순위에 없냐고 묻고 싶다. 한가지 더, 말콤 글래드웰의 말이 맞다면 아시아 청소년들은 대학에 간 뒤 모두 자신의 수학적 DNA를 논 밑에 파묻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위대한 수학 연구가 대부분 미국에서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성공이 때마친 조성된 시대의 흐름 때문이라는 주장엔 어느 정도 동의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토록 오랜 세월 최고의 전문직으로 롱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수 많은 기업이 탄생하고 공업 노동자가 급증하고 이로 인해 대도시가 형성됨으로써 아주 복잡한 사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변호사가 만든 건 아니잖아. 이같은 생각은 분배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시대의 혜택을 입었던 건 아니다. 역사를 보면 분명 시대 자체를 만들어 내는 창조자들이 있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스티브 잡스가 때마침 형성된 실리콘 벨리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하이테크 제조업 회사를 창업하는데 유리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리콘 벨리는 저절로 생긴걸까? HP가 처음으로 그곳에 발을 디디지 않았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캘리포니아에 실리콘 벨리가 생겼을까? 스마트폰 혁명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은 시대의 요구가 아니었다. 시대는 그 존재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는 건 오히려 우리를 시대의 수동적 대응자로 만드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시대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의 멱살을 잡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성공을 보장하는 게 1만 시간이아니라 개인의 특출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1만 시간을 노력했어도 그 중에서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온다면 성공의 진짜 조건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시간은 똑같이 주어진다. 그런데 왜 우리 중 일부 만이 그 시간을 뭔가를 열심히 연습하는 데 사용하는 걸까? 진정 1만 시간의 법칙이 맞는 말이라면 국가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가둬 놓고 하루에 3시간 씩 딱 10년 만 교육하자. 그러면 최초로 천재를 대량생산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뭔가 데자뷰가 느껴지는가? 당신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교육 제도를 가진 나라를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바로 우리가 나고 자란 국가다.


이쯤에서 솔직해지자. 1만 시간 동안 무언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능력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모두 젊음이란 종잣돈을 쥐고 나왔지만 먹고 마시고 노는 새에 그 돈은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그 돈을 모두 어디에 썼니?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이거 하나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노력을 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노력하는 것 사이엔, 어마어마한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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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어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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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 이라는 생소한 작가의 책을 아무 고민 없이 집어든 이유는 역시 그 제목 때문이었다. <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어>. 하진도 알고 있겠지. 좋은 책을 찾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힘들다는 사실을.


1956년 중국 리아오닝에서 태어난 하진은 이십 대 후반까지 중국에서 살다가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논문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볼까 하는 찰나 "톈안먼 사태'가 발생하고 말지. 학생 한 명이 거대한 탱크 앞을 가로 막고 선 그 유명한 사진을 낳은 '천안문 사태'. 2,000명이 넘는 죽음에 분노한 하진은 미국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런 결정을 한 순간 평생을 이고 갈 작품의 주제가 결정된 걸지도 모른다. 이 책에 담긴 10편의 소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 비인간성과 비효율, 무지와 폭력 속에 빠져 허우적 대는 중국의 현대를 그린다. 쉽게 말해 공산주의의 최후를 그린다는 말이다.


당연히 중국은 하진을 싫어했고 미국은 좋아했다. 하진은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반중국적인 방식으로 미국 문학계에 스며들었다. 바로 영어로 소설을 쓴 것이다.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참으로 쩨쩨한 전략이로군 쌀과 반찬을 얻기 위해 모국어를 팔다니 하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한 작가에게 있어 모국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한 남자에게 자신의 남성을 잘라내는 것과 같은 강도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시길. 물론 미국 문학계에 편입할 방법으로 작품 활동을 영어로 하는 것 이상의 것이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로 중국과 미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두고 옥신각신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진이 중국어로 작품을 썼다 하더라도 너무나 반중국적인 그 내용으로 인해 미국 사회의 관심을 끌 기회는 충분했을 것이다. 단순히 방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선택한 건 일종의 미학적 결정이 아니었을까? 사실 하진의 문장은 <전미도서상>, <플레너리오코너상>, <펜/헤밍웨이상>, <펜/포크너상>, <푸시카트상>, <칸 문학상>, <타운젠트상>, <아시아아메리칸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고, 두 차례에 걸쳐 <퓰리쳐상> 후보에 오른 작가의 것이라고 보기엔 거의 아무런 특색이 없다. 그의 문장은 매우 간략하고, 평범하고, 밋밋하다. 뉴스 보도도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엔 아주 고차원적인 전략이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건 수 많은 단어가 서로 종이 위를 차지 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는 말이다. 작가 입장에선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담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래서 단어는 쓸데 없는 수식을 식객으로 들이고 문장은 그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너무 많이 알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는 이같은 실수를 생략하게 만들어준다. 남자가 죽었다. 이 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죽음이다. 이런 문장은 읽는 이를 거추장스러운 통관 없이 곧장 핵심으로 이끄는 위력을 발휘한다. 도정에 도정을 거듭한 쌀 한 톨이 최고의 사케로 변하듯 핵심을 향한 논스톱 질주가 우리를 묵직한 감정의 덩어리들과 충돌하게 만든다.


순도 높은 감정을 선사하기 위한 하진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적어도 스무 차례"에 걸친 교정을 통해 완성된다고 한다. 작가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순간은 어렵게 끝낸 글을 다시 꺼내 고쳐 쓰는 일이다. 퇴고를 거듭하는 작가의 고통은 가히 시지프스의 형벌과 비견할 만하다. 그러니 하진의 평범한 문장은 미학적 선택과 치열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의도된 산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호랑이 사냥꾼은 찾기 힘들어>에는 10편의 소설이 있다. 인간의 허위와 허세, 자존심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은 모파상의 단편을, 평범한 일상을 해학적으로 드러내는 점에선 안톤 체호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진은 두 위대한 작가가 쌓아 올린 현대 단편 소설의 초석 위에 자신의 작품을 올린다. 그것은 아주 반가운 일이기도, 아주 슬픈 일이기도 하다. 나는 단편을 아주 사랑하는데, 그 단편은 이제 세계에서 밀려나 까마득히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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