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문학사상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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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실패가 많았지만 대신 금쪽 같은 작가 몇 명을 만났다. 사실 독서의 세계에선 단 한 번의 성공이 백 번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성공의 질과 파괴력이 높은 편이다. 이른바 인생의 작가를 만났을 때의 기분, 그들의 빽빽한 작품 리스트를 손에 들었을 때 전해지는 가벼운 떨림은 느껴본 사람만이 아는 환희일 것이다.


아직 2016년이 끝나진 않았지만 앞으로 읽을 책들이 뻔한 관계로 올해의 작가들을 결산해 보면, <카인>의 조제 사라마구, <밤의 파수꾼>의 켄 브루언,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 그리고 바로 이 책 <하이 피델리티>의 닉 혼비가 있다.


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다섯 번의 이별을 연대순으로 꼽아보라면 다음과 같다.


1) 앨리슨 애시워스

2) 페니 하드윅

3) 재키 앨런

4) 찰리 니콜슨

5) 세라 켄드루


모두 내게 정말로 상처를 준 여자들이다. 로라, 거기 네 이름 보여? 넌 10위 안에 어찌 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5위 안에는 절대 못 낄걸. 5위까지는 내게 굴욕감과 비통함을 안겨준 사람들에게만 할애되거든. 너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말하고 보니 의도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게 들리는군. 사실 상대방에게 비참함을 안겨주기엔 우리 둘 다 너무 나이 들었지.(p.9)


나는 이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이 책을 사야한다는 강력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물론 이 문장들이 이른바 '문학'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볍고 저질스런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롭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30대 중반의 음악광으로 세상의 모든 평범함을 응축해 단단히 채워 넣은 듯한 인간이다. 평범함. 말 그대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가치 중립적 단어처럼 보이지만 현대인의 마음 속에 뿌리 내린 방황의 씨앗은 모두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평범 이상인 사람은 그렇게 쭉 달려 만인이 바라마지 않는 목표를 쟁취하면 된다. 또 평범 이하인 사람은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를 듣는 순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달려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일으키는, 그래서 세상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면 된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은? 쉽게 말해 이도 저도 아닌 사람. 어느 방향으로 뛴다 해도 아무런 메리트를 갖지 못하는 사람. 방황은 못하거나 잘해서가 아니라, 못하지도 잘 하지도 않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은 당신이 스스로 채워 넣은 구속복일지도 모른다. 나에겐 아무런 특별함도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겐 단 한 번이라도 마음 속 끝까지 내려가 자신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묻고 싶다. 뚜껑을 열고 캄캄한 우물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밧줄을 타고 내려가 졸졸졸 뿜어져 나오는, 그 차고 반짝이는 물 한 모금을 마셔본 적 있냐고 말이다. 위로가 아니라, 인간은 모두 저마다 반짝 반짝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다. 때로 그 재능은 어둠에 쌓여, 때로는 넓디 너른 갯벌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이 피델리티>는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중년의 찌질함과 우울함을 그리고 있지만 닉 혼비의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엮여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는 책이다. 기가 막힌 반전이나 눈에 띄는 사건은 없다. 그저 소소한 해프닝, 농담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사소한 사건이 이어진다. 추운 겨울날 담요를 뒤집어 쓰고 소파에 누워 영국 영화(장르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온 몸이 나른하고 졸음도 오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촉촉해지는, 그런 기분 말이다.


이 책을 소장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음악에 있다. 레코드 가게 챔피언십 바이닐의 주인장 롭. 음악광 답게 그는 모든 상황과 사건을 음악에 빗대어 얘기하는데, 70~80년대를 주름 잡은 팝, 락, 디스코, 레게 음악의 선율이 문장 위로 날아다니는 게 보일 정도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새 그 노래를 모아 플레이 리스트를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 피델리티>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좋은 소설을, 소설 좋아하는 사람에겐 좋은 음악을 덤으로 쥐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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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미래는 있는가 -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가는 인문학 여정
로제 폴 드루아.모니크 아틀랑 지음, 김세은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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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세상에 희망을 얘기하는 건 대체로 비웃음을 살만한 행동일 것이다. 정치는 부패의 끝에 서 있고 빈부 격차는 인류 역사를 통째로 틀어 박어도 메꿀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진 지 오래다. 세상은 결국 바뀐다, 역사는 끝내 진보한다는 말도 캄캄한 미래 앞에선 무기력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희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당장의 고통을 잊게해 주는 아편에 불과할까? 근거 없는 미래가 전하는 달콤한 속삼임. 맞을 수록 효과는 떨어지고, 약에서 깨면 여전히 그대로인 현실로 인해 절망은 두 배로 늘어나는 중독의 묘약말이다.


어쩌면 희망의 위기는 그것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희망찬 미래를 얘기하는 사람은 많아도 '희망 그 자체'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이 희망에 대한 오해를 가중시켰다. 오늘날 희망의 위기는 진짜 희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짜 희망이 차지한데서 온 걸지도 모른다.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는 바로 이 의문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희망을 역사적, 철학적 관점에서 다시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희망이 위기에 처한 진짜 원인을 찾아낼 것이며 그 원인을 제거할 해결책 또한 발견할 것이다. 우선 희망이 처음으로 탄생한 고대로 날아가보자.


우리는 흔히 희망이 없는 곳을 지옥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천국이야말로 희망이 없는 유일한 곳이다. 천국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지복의 성소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처음으로 희망이 등장한 것도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온갖 악들을 해방시킨 뒤였다. 이 신화는 절망에 빠진 인간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벽했던 세상이 악으로 오염됨으로써 그 전 까지는 전혀 필요 없었던 희망이 이제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에 희망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쓴 독약을 마시고 난 뒤에 내려지는 약에 불과했고 고대인들은 늘 완벽했던 태초의 세상을 그리워했다. 아담이 에덴을 떠올리듯,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푸스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천국은 과거에 있었다.


중세에 이르러 희망은 기독교라는 질병에 의해 현실 세계에서 멸종된다. 기독교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죽은 뒤에 천국에 가는 것이었다. 현실의 고통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니 그저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견고했던 중세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건 기술의 힘이었다. 측량과 항해 기술의 발달은 신대륙을 발견했고 대포의 힘이 성벽을 날려버렸다. 상업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등장은 신분 사회에 균열을 일으켰다. 중세인들은 내일이 오늘, 심지어 어제와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급변하는 세상은 오늘의 오후가 오늘의 오전과도 다를 수 있음을 알려줬다. 이제 미래는 얼마든지 개척가능한 미지의 대상이었고 그 불확실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희망은 현대에 이르러 대규모 인종 학살, 전쟁, 인권 유린, 빈부 격차의 다른 모습이었음이 드러난다. 기술의 발달은 중세를 무너뜨렸던 바로 그 힘으로 현대를 무너뜨렸다. 희망은 자신의 행동이 다가올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양분을 얻지만, 폭주하는 변화로 인해 세상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사람을 잘 살게 만들기 위한 자본주의가 빈부 격차를 낳았고 광산을 뚫던 화약의 불꽃이 전쟁의 포화로 옮겨 붙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선언은 일부 인종이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이용됐다. 


이처럼 현대는 원인과 결과를 짝맞출 수 없는 세상, 모든 의도가 예기치 않은 결과로 빨려 들어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희망은 살아 남을 수 없다. 남아 있다면 오로지 막연한 기대와 일확천금에 대한 욕망 뿐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압도적 무기력 속에서 좀비가 되버린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일말의 타개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여기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 희망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희망을 버린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니다. 희망을 버렸다는 건 희망이 원하는 현실로 귀결되지 않았을 때 따르는 실망과 분노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란 마음을 완전한 공(空)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고 그 안에는 나를 흔드는 바람도, 바람에 흔들릴 나무도 없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고요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 말을 패배자의 자기 위안으로 치부하려는 사람은 Carpe Diem이나 Seize the day 라는 말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부질 없는 미래를 희망하기 보단 오직 현실을 즐기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이 격언들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됐을지 생각해 보자.


둘째,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은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둘러보라. 요즘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시험 합격이나 연봉 인상 등 개개인의 소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사라지지 않는 거라면, 시시한 개인적 희망 따위 잠시 비워두고 그 빈자리에 대신 공동체의 소망을 담아 미래를 향해 던지는 건 어떨까?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은 희망은 미래에 굳건히 자리를 잡은 뒤 절망에 빠진 현실을 끌어 당길 것이다. 미래가 끌고 현재가 미는 것. 그렇게하면 현실은 미래로 나아가 마침내 그곳에 있던 희망을 현실로 바꿔놓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자조한다. 변화를 막는 권력의 힘은 결코 시들지 않는 불멸의 세계수가 되어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라면, 그 행위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 귀하디 귀한 자식을 낳아 이 지옥같은 세상에 바치는가?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개인의 관점에선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라는 종의 관점에서 다시  역사를 바라 보자. 세상은 정말로 바뀌지 않는가?


나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첫 번째라고 대답하겠지만 무엇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결코 대답할 수 없다.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는 우리에게 두 번째 삶의 방식을 권고하지만 무엇을 선택할지는 오직 당신의 몫이다. '나의 삶'이냐 '우리의 삶'이냐,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더 많이 선택한 쪽이 어디인지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걸 알고 싶으면 TV를 켜라. 그리고는 광화문을 가득 채운 촛불의 파도를 보라. 첫 번째 삶을 선택한 나는, 그들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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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들
제임스 설터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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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난 인연이 마음을 사로잡을 경우 우리는 자연스럽게 운명을 떠올리게 된다. 애초에 그 만남이 우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채. 혹은 까맣게 잊고 싶은 마음으로.


제임스 설터를 처음 만난 건 아마 <올 댓 이즈> 였을 것이다. 줄거리나 구성이 기억나기 보단 문장 하나 하나에 깊게 배인 허무의 냄새가 또렷이 떠오른다.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온 마음이 조금씩 부서지다 결국 연기로 승화해 사라질 것만 같다. 밤에 더 어울리는 작가고, 두 번 읽기엔 큰 다짐이 필요한 글이다.


제임스 설터는 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육군항공단 소속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바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중에 전투기 조종사였던 사람은 생떽쥐베리와 로맹가리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이들의 이름 밑에 제임스 설터를 적어놔야겠다. 그는 100회 이상 출격한 베테랑 조종사였다.


<사냥꾼들>은 이 때의 경험을 옮긴 설터의 데뷔작이다. 흔히 순수 문학 계열의 전쟁 소설이라 함은 그 비인간성과 야만을 고발하는 비판적 내용일 거라 생각하기 쉽고, 특히 설터의 특기가 허무를 묘사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얼추 분위기가 그려지기 마련인데, <사냥꾼들>은 다소 예상이 빗나가는 소설이었다. 폐허가 된 한국의 도시와 그 쓸쓸함을 지우기 위해 세워진 일본의 유흥가들. 한 남자의 긍지와 명예, 그리고 열정이 창대한 하늘을 떠나 지상으로 추락하는 모습. 이 이미지들이 후기의 설터를 특징 짓는 허무를 예고하고는 있지만 이 책에 오직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고고히 비행하는 독수리의 모습이랄까. 허무보다는 오히려 고독이, 그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휘젓는 힘있는 책이다.


클리브는 반드시 에이스가 되리라는(적기 5대를 격추한 조종사를 일컫는 말) 꿈을 안고 김포에 배속된 편대장이다. 그의 편대는 그가 배속되기 전까지 단 한대의 적기도 격추한 실적이 없다. 이 사실로 인해 클리브의 어깨는 무겁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부풀어 오르는 열의에 의해 그 무게는 쉽게 상쇄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의 출격을 나간 뒤에도 여전히 그의 편대가 적기를 격추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클리브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지만 자기 자신을 믿고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비행술 면에선 부족함이 없었다. 그저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니까. 이 때 그의 편대에 갓 훈련 학교를 졸업한 편대원 펠이 배속된다.


클리브가 긍지와 명예로 달리는 기관차였다면 펠의 심장은 욕망과 오만을 태우는 용광로였다. 펠은 편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모한 행동을 계속했다. 머리 속엔 오로지 자신이 적기를 격추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클리브는 펠의 행동을 저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가까스로 한 대의 적기를 격추한 조종사가 됐을 때 그는 이미 한 전투에 두 대를 연달아 잡은 영웅이 되어 있었으니까.


이제 클리브의 편대는 더 이상 클리브의 것이 아니었다. 편대장 보다 뛰어난 부하. 펠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고 있었지만 머나먼 곳의 장성들은 오로지 결과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의 실수로 동료가 죽었다. 대신 그는 두 대의 적기를 잡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뭐가 문제란 말인가?


동료들의 빈자리가 늘어날 수록 에이스가 되겠다는 클리브의 마음은 점점 회의감으로 차오른다. 그는 이 전장에서 승리와 패배 이외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누구도 패배를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점점 패배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승리와 패배. 클리브가 결국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나는 그 장면을 읽는 순간 책장을 쥔 채 한 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우연을 운명으로 믿고 싶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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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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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서운 책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충격을 받아본 책이 몇 권이나 있었나 싶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역사학과 생물학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다. 시원부터 현대에 이르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600쪽으로 정리한 조감도. 혹은 인문학 총서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냥 정리를 잘한 거냐 하면 그렇지 않다. 모든 사안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선보인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류는 약 7만 년 전 인지혁명을 일으켜 이후 3만 년 전 까지 언어, 바늘, 배, 활과 화살 등 다양한 도구를 발명했고 이는 현대 호모 사피엔스 사회를 이룩하는 초석이 된다. 그리고 이 인지 혁명은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속에 속한 유일한 인간 종으로 만들어 준다.


인류의 진화에 대해 우리가 갖는 많은 오류 중 하나는 먼 옛날 살았던 수 많은 원시인들이 하나의 종 안에서 순차적으로 진화해온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예컨대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호모 에렉투스가 되고 호모 에렉투스가 진화해 호모 사피엔스가 됐다는 식으로 말이다. 진실을 말해주자면 그렇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나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등은 모두 같은 시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아간 독자적 '인간 종' 이었다. 고시히카리, 오대쌀, 추청, 남평, 동진 등으로 나뉘는 쌀의 품종과 똑같은 의미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의 결과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 종이 됐다.


이 세상에 우리와 조금 다른 '인간'이 살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세계 인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다. 우리는 결코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지구에 사는 수 많은 동물 종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일 네안테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우리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호모 사피엔스 대통령은 자국민이 네안데르탈인과 결혼하는 걸 금지하거나 힘세고 강인하지만 우둔한 그들을 잡아 노예로 부렸을까? 아니면 스포츠 팀이나 군대에서 활약하는 네안데르탈인과 회계와 법률 회사에서 일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우러져 서로의 차이를 좀 더 잘 이해하는 화목한 사회를 이뤘을까? 이런 가정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필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그것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상상은 곧 피비린내나는 범죄를 암시하는 흔적을 따라 나아간다. 호모 사피엔스의 대규모 인종 청소라는 혐의를 향해.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있었을 법한 가정들을 제시할 뿐이다. 어쨌든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 속의 유일한 승리자였고 자연을 독점한 그들은 바다로 산으로 삶의 터전을 넓혀나가며 수 많은 동물 종을 멸종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호모 사피엔스는 확실히 네안데르탈인 보다 힘이 약했다. 메머드의 발길 한 번이면 대 여섯 명의 호모 사피엔스가 케첩 범벅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직적이었다. 선발대를 보내 동물 떼를 추적하고 역할을 분담해 사냥에 나섰으며 교묘히 함정으로 유인했다. 이것은 분명 의사 소통의 힘이었다. 바로 언어가 승리의 칼자루였던 것이다.


언어는 효율적 사냥의 필수 요소였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 의사소통이라면 침팬지, 고릴라, 돌고래 등 다른 포유류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언어의 가장 큰 목적은 '뒷담화' 였다. 호모 사피엔스는 뒷담화를 통해 관계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았고 관계에 대한 정보는 집단을 조직, 운영, 확장하는 데 필수 요소였다. 누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무엇을 원하고 누가 믿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정보. 이것으로 호모 사피엔스는 150명 가량의 집단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150명 이라는 숫자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뒷담화를 통해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의 규모가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는 이 임계치를 넘어 수 만, 수십 만이 거주하는 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허구를 창조해내는 능력이었다. 인간은 신화, 종교, 민족, 국가라는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 수 많은 인간을 하나로 묶어낸다. 


생각해보자. 이슬람 교도들은 왜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지구 반대편의 이슬람 교도들을 형제라 부르는 걸까? 우리는 왜 올림픽 시상대에 걸리는 태극기를 보며 가슴 뭉클해 하는가? 그들이 알라, 성경, 단군, 국기의 존재를 함께 믿기 때문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라도 하나의 공통된 신화를 믿게 되면 대규모 협력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소규모 집단이야 단순한 수렵과 채취로도 충분히 먹일 수 있었겠지만 수 만, 수십 만의 사람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법이다. 인류는 오래지 않아 그 해답을 찾아냈다. 바로 농업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자, 이제 인류는 유례없는 성장을 거듭해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규모의 집단을 이뤄냈다. 하지만 성장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 혁명은 조, 피, 귀리, 콩, 벼, 밀 등 다양한 곡식을 골고루 섭취하던 수렵인의 식탁을 벼 또는 밀로 고정시켜 버렸다. 집단 전체의 영양을 한 두 종의 곡물에 맡겨버린 상태. 그들에게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충고를 해줬어야 하는데! 예컨대 어느 해 이상 저온 현상이 발생해 벼들이 모두 얼어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귀리와 피, 조가 자라던 들과 사과, 배, 밤이 떨어지던 숲은 이미 불태워 논으로 바꾼지 오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먹을 걸 구해야 할까? 도시의 출현과 농업의 시작으로 인해 인류를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기아라는 재난에 맞닥뜨리게 된다.


어쩌면 유전자 환원주의자들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역사란 그저 유전자의 의지로 쓰인 시나리오일 뿐 고귀한 정신의 산물이 아니다. 인류는 더 강해지기 위해 신화와 국가라는 허구를 만들어냈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강해진단 말인가. 이득을 본 건 오직 유전자 뿐이다. 개개의 행복 따윈 아무런 관심이 없어, 유전자의 목적은 그저 개체수를 최대한 늘리는 거니까.


<사피엔스>는 규모를 지향하는 현대 사회에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수렵 채취인들은 이른바 문명인들보다 굶주리지도 않았고 덜 행복하지도 않았다. 평균 수명은 다소 낮을 수 있었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 더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라는 국가의 부름도 받지 않았고 집단 간의 갈등도 비교적 원만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끔찍한 살육과 전쟁은 언제나 정착민의 소유였다. 한 마을에 집과 소와 논과 곡식 창고를 가진 사람만이 그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법이다. 애초에 먹을 만큼만 축적하던 수렵인들은 몸이 가벼웠다. 그 정도 규모의 사람들을 먹일 곳은 얼마든지 다시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미련 없이 살던 곳을 떠나 쓸데 없는 다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역사는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모든 해답은 역사 안에 있다. <사피엔스>를 읽고 나면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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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개정증보판 한권으로 읽는 왕조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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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대단한 문화 유산이다. 때로는 정쟁에 휘말려 왜곡된 사실이 적히고 한 때는 나라를 빼앗겨 왜인의 손에 편찬을 맡겨야 할 때도 있었지만 실록은 500년이 넘는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한 권으로 읽든 두 권으로 읽든 조선왕조실록은 살아 생전 꼭 한 번 읽어야 할 역사다.


한 권으로 요약하다 보니 너무 빡빡한 건 단점이다. 또 왕의 비빈, 친척들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는 데 스토리 없이 신상명세를 읊다보니 지루한 감이 있다. 태정태세문단세 까지는 워낙에 잘 알려진 내용이고 나의 경우 세종실록까지도 읽은 탓에 초반은 상당히 끈적끈적 했다. 후루룩 넘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재미는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에서 시작한다. 호랑이 같던 수양대군. 왕위가 탐나 기어이 할아버지를 따라 왕자를 죽이고 왕이 된 이 남자는 왠일인지 하나같이 자식들이 허약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를 받았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가족 전체가 그 죄책감에 상당히 시달렸고(우리로 따지면 작은 아버지가 조카를 죽인거니까) 가까스로 둘째 아들이 남아 예종으로 즉위하지만 그도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 세조의 요절한 장남 덕종이 낳은 둘째 아들이 조선의 제 9대왕 성종으로 등극한다. 성종은 25년 넘게 조선을 통치하며 드디어 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대의 칼부림을 끝내는가 싶었지만 그 장남은 그 이름도 유명한 연산군!


이것이 바로 역사를 읽는 재미다. 태종은 수 많은 피바람을 일으켜 문제가 될 만한 싹을 뿌리째 뽑았고 그것이 건국 초의 불안한 왕권을 다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조선은 세종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피 냄새는 수 십 년이 넘도록 족보에 남아 기어이 수양대군의 야망에 불을 지폈다. 태종이 피를 뿌리지 않았다면 수양대군의 야심도 잠자코 눈을 감은 채 평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세조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왕위를 탈환할 수 있도록 도왔던 수 많은 권신들이 그의 사후에는 독처럼 남아 권력을 휘두르고 왕위조차 마음대로 주물렀으니까.


성공이나 성취는 그 당시에만 놓고 보면 확고불변한 완전체 같이 느껴진다. 그것으로 끝. 앞으로는 쭉 그 성공의 단물을 빨고 살면될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성공을 가능케 했던 바로 그 요소가 오히려 해가 되어 모든 걸 망쳐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성공안에 실패의 씨앗이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실패 안에도 성공의 씨앗이 있는 거 아닐까?


역사를 읽으면 일희일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깨닫게 된다. 지금은 모른다. 죽었다 깨나도 모른다. 오늘의 성공은 내일의 실패로 이어지고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흥망성쇠. 어쩌면 그건 리드미컬하게 순환하는 미지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총량은 정해져 있어 행운이 지속되는 자는 그저 몰아서 받는 것 뿐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나는 괜찮아, 울지마, 아프지마 따위의 말 보다는 이 딱딱하고 건조한 역사에서 더 큰 위안을 얻는다. 불행엔 관성이 있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긴 시간을 놓고 볼 때 언제나 바닥은 존재하고, 바닥에 닿은 자는 슬픔에 매몰되어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는 이상 다시 한 번 힘차게 뛰어 올라 숨막히는 절망의 수면 밖으로 솟구칠 수 있다. 비록 내 생애에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그 의지는 반드시 이어진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500년의 시간을 한 권으로 압축해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도 이 한 권처럼 훅, 하고 지나가 그 땐 그랬었지 저 땐 저랬었지 하고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 생전엔 절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게, 인생의 비극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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