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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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자크 섬에서 나를 낳았다(p.9)."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샀다.


<자살의 전설>은 다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으로 엮인 선집이다. 여섯 편의 소설은 모두 저자 데이비드 밴의 실화를 바탕으로 지어졌다. 특이한 점은 여섯 편의 소설이 모두 한 개의 경험을 재구성 했다는 점이다. 더 특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개의 이야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1966년 아다크 섬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밴은 알래스카 케치칸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평범한 치과 의사처럼 보였으나 실은 마음이 공허한 남자였다. 외도를 했고, 치과를 팔아 어선을 샀다. 만선의 꿈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


데이비드 밴은 이혼한 엄마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갔다. 어느날 그는 알래스카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밴에게 자기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밴은 거절했다. 그가 거절한 직후 "아버지는 44구경 매그넘을 꺼내들고 선미에 섰다. 그러고는 연어 내장 위로 자신의 몸을 뿌렸다." (어류학, p. 21)


이 죄의식이 10년 동안 여섯 편의 소설을 만들어 냈고 2년 간의 퇴고를 거쳐 <자살의 전설>로 묶였다.


여섯 편의 소설 중 핵심은 역시 중편 <수콴 섬>이다. 데이비드 밴의 고백처럼 글쓰기에는 확실히 치유 효과가 있다. <수콴 섬>은 어른이 된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속죄의 편지다.


<수콴 섬>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알래스카로 간다. 부자는 외딴 섬에서 일 년을 지내기로 마음 먹고 사냥을 하고 훈제실을 짓고 식량 창고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자신의 상실감을 메워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문제는 아들도 자신이 아버지를 치유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외딴 섬의 외딴 오두막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한 사람 뿐이라는 것을, 아버지도 아들도 알았다.


속죄를 위해 데이비드 밴은 <수콴 섬>의 아들에게 피스톨을 건넨다. 아들은 피스톨의 공이를 젖힌 뒤 총구를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이로써 수 십 년 간 아들을 괴롭힌 죄책감이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아버지는 머리가 박살난 아들의 시체를 침낭에 싸들고 눈 덮인 섬을 헤매며 죽음을 구걸하지만 행운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구원을 얻은 건 멕시코로 가는 밀항선에서였다. 아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은 뒤 도망을 가는 길이었다. 아버지에게 돈을 받고 밀항을 도운 두 명의 선원은 잠든 아버지의 목에 밧줄을 걸고 질질 끌고 가더니 버둥거리는 발을 몽둥이로 내려치고는 그대로 바다 속에 쳐넣었다. 물은 차가웠고 젖은 옷의 무게가 아버지를 깊은 바다 속으로 끌고갔다. 아버지는 차가운 물을 마시며 "아들이 자신을 사랑했음을, 그리고 그 사랑으로 충분했음을 깨닫는다" (p. 163).


그 순간 <수콴 섬>의 아버지와 데이비드 밴이 구원을 얻는다.


<자살의 전설>을 재미 있다고 말하기엔 솔직히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야기는 특별한 사건이 없고 그저 지루한 일상을 담담히 늘어 놓는다.


그런데 죽음이 있다.


혹한의 겨울 마저 꽁꽁 얼려버릴 듯 차갑고 담백한 죽음의 묘사.


고요한 밤, 불현듯 현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는 확실히 요란한 낮 시간에 울리는 소리와는 충격의 질이 다르다. 절정의 순간을 지극히 담담히 그려 독자를 방심케 한 뒤 뜩, 강펀치를 날리는 '전형적 하드보일드'. 그러나 여기선 '전형적'이라고 비하하기가 무색할 만큼 깊은 맛이 난다. 이 맛에 빠진 사람은 울고 불고 쥐어짜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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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관조의 대상이다.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볼 때야 비로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떼지어 줄줄이 관람하는 미술관을 이해 못 한다. 강렬한 색채와 조명 효과가 시각을 사로잡는 서양화라면 그나마 괜찮지. 동양화의 경우라면, 그 텅빈 백색 여백이 머리 속에 공백을 남길 뿐이다.


'여백의 미'란 우리 옛 그림의 허술함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지어낸 허울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여백을 채울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것은 치밀히 계산된 것이었다. 고색창연한 사상 속에 그런 얄팍한 계산이 존재할리 없다고 믿어도 소용 없다. 우리 옛 그림에서 '텅 빔'은 명백히 의도된 것이다.


여백을 쓸모 없음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침묵의 정보량이 '0'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이거 먹을래? 상대방의 침묵. 여기서 침묵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침묵은 도리어 수 많은 말을 한다. 그래 아무거나 상관 없어. 먹고 싶지 않아. 먹고 싶지만 너랑은 아니야. 다른 건 없을까?


침묵이 하는 말을 듣게 됐을 때에야 우리 옛 그림은 오롯이 마음에 담긴다.




김홍도(1745~1806?), <주상관매도>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객체와 그 구도(배열)가 만들어내는 총체적 표현이다. 우리 옛 그림이 혁신적인 이유는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은 여백을 하나의 객체로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눈을 그리는 방법 중 하나인 유백법은 이러한 생각의 정수를 담는다.





김유성의(1725~?) <설경산수도>는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옛 그림과는 다르게 여백을 가득 채운다. 채움이 멈춘 곳은 나뭇가지 주변이다. 멈춰선 자리에서 무가(無, 여백) 생겨나고 무는 곧장 유를(有, 눈) 낳는다. 비로소 침묵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우리 옛 그림의 치밀함은 여백을 다루는 방식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김홍도의 <씨름>은 완벽히 계산된 구도를 논하기에 제격이다.





<씨름>은 곳곳에 놓인 신발과 갓에서 빙 둘러 앉은 관중, 중앙의 씨름꾼, 홀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엿장수, 오른쪽으로 터진 여백 등 어느 것 하나 의도하지 않은 게 없다. 더욱 놀라운 점은 중앙의 씨름꾼과(아래서 위를 바라본 시점) 관객을(위에서 아래를 바라본 시점) 그리는 시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뿐만아니라 원근도 미묘하게 틀어져 있다. 씨름꾼 보다 가까이에 앉은 관객들이(작품 하단) 도리어 씨름꾼 보다 '작게' 그려진 것을 보라. 서양에서는 피카소에(20세기) 이르러서야 등장한 다시점 구성이다. 김홍도가 왜 천재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선(線)'이야 말로 우리 옛 그림에서 가장 독특한 구성 요소라고 생각한다. 서양화의 경우 선은 면을 구성하기 위한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부속인 선은 발언권이 없다. 김명국의 <달마상>을 보자.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나아갔다, 머물렀다, 다시 솟구쳐 오르는 선이 보이는가? 선이 달마의 옷을 그리고 그려진 옷을 입은 달마가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선 자체가 말을 한다. 


답답한 이론 중심의 교종 일색이던 6세기의 중국을,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뚫고 나간 달마의 기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나무와 집을 그리는 선의 대비가 화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경우다. 이 그림은 유배 시절 자기를 잊지 않고 챙기던 제자의 마음에 감동을 받은 김정희가 그려 보낸 그림이다. '해 세'자에 '찰 한'. 이른바 추운 시절의 그림.





위태위태 얇은 선으로 지은 집 안엔 분명 김정희가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럼 해마다 잊지 않고 안부를 묻는 제자는 어디 있는가? 


힘차게 줄기를 뻗은 두 그루 소나무가 무너져 가는 집을 지킨다.


유백법과 김홍도의 구도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하며 감탄하게 되지만 <달마상>이나 <세한도>는 설명 없이도 전해지는 감정이 있다. 전자가 머리를 통하는 그림이라면 후자는 마음에 직접 말하는 그림일 것이다. 


모두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다.



 
 
바람돌이 2014-12-15 08:57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 김홍도의 <주상관매도>인데요. 아침에 WiredHusky 님 덕분에 기분좋은 출발을 합니다. ^^

WiredHusky 2014-12-15 12:58   URL
제 글이 누군가의 기분 좋은 출발을 만들어 줄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하네요. <주상관매도>는 진짜 진짜 명작입니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지음, 류현 옮김, 한순구 감수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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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분야에 입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분야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철학을 배우고 싶으면 철학사를, 미학을 배우고 싶으면 우선 미학사를 들여다 보라는 말이다. 


역사는 개괄이고 종합이다. 훑어볼 수 있다. 그저 코를 대고 쓱 냄새만 한 번 맡아보라. 분명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끝이다. 한 번 구미가 당기고 나면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게 당신과 나, 우리 '지식 포식자'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경제사다. 애덤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에서 최신의 대세로 떠오른 행동 경제학(분량이 코딱지 만큼이긴 하지만)까지 300년에 다다르는 방대한 경제사를 역시 60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엮어냈다. 어쩔 수 없지 뭐, 300년 짜리를 60쪽으로 묶을 수는 없잖아.


나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아무리 경제에 관심이 많아도 비전공자는 비전공자. 마셜의 '한계 효용 이론'이나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를 단 한 번의 독해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 두 번을 연거푸 읽은 지금은 완전히 이해했나? 그렇지 않다. 내가 이 책을 반드시 소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본'이라는 건 반복의 횟수에 비례해 그 강도가 결정된다. 물론 잘못된 기본이라면 단단함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구성이 탄탄하다. 경제학의 핵심만을 골라 촘촘히 짜 넣었다. 365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야 할 책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재미있다.


당연한 걸까? 세상에는 중요한 것일 수록 배우기 어렵고 힘든 경우가 많다. 경제학이 그렇다. 이런 분야일 수록 더욱 재미를 고려해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심지어 어떤 대가들은 자기 학문이 난해할 수록 만족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높고 굳건한 진입 장벽을 세워야 자신이 더 위대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지. 아무도 이해 못하는 걸 나 혼자 알고 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저자는 지루하고 어려운 경제학 이야기를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문장 곳곳에 재치와 위트를 풀어 넣었다. 고명한 학자가 유머를 갖추기란, 독수리가 근시가 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법이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게 또 세상의 이치다. 이 책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의 경제 담당 비서관 이라는 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자유주의 진영의 경제학자다. 물론 600 페이지의 책을 써 내려가는 동안 저자는 단 한 번도 일방적인 편들기나 자기와 반대편에 선 주장에 노골적인 적대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래도 뉘앙스가 있다. 


은근한 편들기. 따라서 균형 잡힌 경제사 지식을 쌓고 싶은 사람이라면 토드 부크홀츠와는 완전히 반대 쪽에 서 있는 '장하준 류'의 경제사를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둘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빠져 있다.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게 2007년 이니까 2008년에 터진 금융 위기를(07년에 시작해 08년이 본격화 된) 설명하려면 웜홀과 중력자 별을 이용한 시간 여행이 필요했을테니 결코 저자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그 동안의 경제학 이론을 뿌리 부터 재고해 봐야 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일본 경제의 몰락과 미국의 부흥을 비교하면서 '금융 서비스를 고도화 시키지 못한 일본인'과 '복잡한 파생 금융 상품을 개발해 낸 창의적 미국인'이라는 도식을 제시한다. 내 알기로 그 '창의적 파생 상품'이 2008년에 미국을 강타한 역사상 최대의 금융 위기의 주범이었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저자는 이 금융 위기를 어떻게 설명할까?


벌써 3판이 나왔으니 4판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한 명이 독자는 확보한 셈이니 고민하지 말고 내주시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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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는 내 아버지의 소설가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그저 난해하다는 이유로 포크너를 선택했다. 그리고는 영영 빠져버렸다. 확실히 문학은 개미지옥 같다. 한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 삼킬 만큼 거대하고, 집요하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이야기 자체가 난해한 건 아니다. 난해하다기 보다는, 기괴하다. 어쩌면 기괴하기 때문에 난해한 걸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은 그것의 진짜 의미에서 두어 발자국 떨어져 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솔직히 파악이 됐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그것이 진짜인지 확신할 방법도 없다. 느낄 수 있는 건 일련의 모호한 분위기다. 그러나 분위기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뜩, 몸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피부에 닿는 순간 그 어떤 진실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소설은 엄마의 죽음을 둘러싼 한 가족의 독백으로 이뤄져 있다.



바더만


바더만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 흙투성이 마당에 놓았다. 엄마에게 보여줄 생각이다엄마는 침대에 누워 죽어간다. 물고기가 온 몸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채 꿈틀댄다. 엄마가 죽었다. 물고기가 죽는다. 


나의 엄마는 물고기다.



캐시


캐시는 엄마가 침대에 눕는 순간 엄마의죽음을 예견했다. 캐시는 엄마가 낳은 첫 번째 자식이다. 아들이다. 그리고 목수였다. 캐시는 엄마가 아파 누워 있을 때 부터 줄곧 말 없이 관을 만들고 있다. 탕! 탕! 탕! 아파 누워 있는 엄마의 귀에 자신의 관을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꽂힌다.




사람들은 달이 어딘가 덜 떨어진 아이라고 말했다. 달은 둘째 아들이다. 할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달은 엄마의 관을 마차에 싣고 40마일을 가는 동안 어느 마을의 마구간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그날 밤 달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집의 마구간에 불을 지를 것이다. 그리고는 경찰에 잡힐 것이다. 사람들은 역시 달이 정신병자였다고 말한다. 아니다. 달은 그 누구보다도 엄마를 사랑했을 뿐이다. 엄마의 관을 땅 속에 묻고 나면 다른 가족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일상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바래게 만들 것이다. 엄마는 죽었을 때 죽는 게 아니다. 엄마는 잊혀졌을 때 죽는 것이다. 그래서 달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달은 불을 지르고 정신병자가 되어 세상 밖으로 뛰쳐나간다.



주얼


주얼은 셋째 아들이다. 엄마를 가장 사랑한 건 달이었지만 엄마가 가장 사랑한 건 주얼이었다. 주얼은 엄마의 아들일 뿐 아빠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얼은 엄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알았다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관을 실은 마차가 강에서 전복 됐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게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마차에서 뛰어내려 강둑으로 올라갔다. 주얼은 보이지 않았다. 물 속에서 마차의 바퀴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주얼은 엄마의 아들이었다.



듀이 델


엄마는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유일한 딸 듀이 델이 생각했다. 이 사실을 아는 건 남자 뿐이다. 남자는 나에게 10달러를 줬다. 읍내에 도착하면 나는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약국에 갈 것이다. 남자는 10달러면 충분할 거라고 말했다.



앤스


사람들이 나를 멍청한 남편이라고 부르는 걸 안다. 그들은 마차가 강에서 전복된 것도, 여름날 관 속에서 시체가 썩는 것도 내 탓이라고 말한다. 내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아내는 자기가 죽으면 꼭 고향 마을에 묻어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킬 뿐이다.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왔고, 강이 불었고, 다리가 떠내려갔다. 비가 온 것도, 강이 불은 것도, 다리가 떠내려간 것도 내 탓이란 말인가?


아내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 들러 틀니를 해 넣을 것이다. 그리고 새 아내를 만날 것이다. 아내에게는 근사한 축음기가 있다고 했다. 아내는 축음기와 함께 내 집으로 갈 것이다.



휘트필드


사람들은 애디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식을 듣고 나는 애디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마을의 목사다. 나에겐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마지막 회개를 할 것이다.


애디는 죽으면서 나와 저지른 죄악을 고백할까?


애디는 죽으면 그만이다. 죽고 나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워 모욕하고 단죄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나는? 나는 그녀의 남편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비 때문에 다리가 떠내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웃집 남자의 딸로부터 애디가 이미 죽었다는 말도.


나는 용서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입술이 죄를 발설하기 전에 그녀를 죽인 것이다. 나의 주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적을 내리신 것이다. 그의 집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길.



애디


살아 있는 이유는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아버지는 말하곤 했다. 마침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p.203). 이웃집 여자는 내가 아이들과 남편,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곤 했다(p.201).


캐시는 나를 위해 관을 만들었다. 나는 죽어 그 관에 눕혀질 것이다. 남편은 이 더운 여름날 내 관을 마차에 싣고 고향 마을로 떠날 것이다. 다리는 강물에 떠내려 갈 것이고 마차가 전복되 내 관과 내 아이들이 물에 잠길 것이다. 썩은 내 몸은 지나는 거리 마다 끔찍한 냄새를 남길 것이다. 마침내 나를 땅 속에 묻고 나면 남편은 두 손에 근사한 전축을 든 새 아내와 나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천만다행인 건 이 모든 일이 벌어질 때 나는 죽어 누워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죽어있으므로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고,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축복 받은 여자다. 



 
 
antibaal 2014-12-02 07:35   댓글달기 | URL
잘 모르겠어요. 정말 난해하네요

WiredHusky 2014-12-02 13:04   URL
ㅋㅋㅋㅋㅋ 네, 제가 일부러 더 난해하게 썼어요. 그래도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읽어 보세요.
 
버블 경제학 - 세계적 현상, 부동산 버블과 경제 시스템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다
로버트 J. 쉴러 지음, 정준희 옮김, 장보형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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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란 실제 가치가 아니라 투자자의 '열광'에 의해 일시적으로 가격이 상승하고 유지되는 현상을 말한다(p.11). 누구나 알다시피 '열광'에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뜨거운 여름날 아스팔트 위로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와 같다. 무섭게 솟아오르다 한 차례 장마비와 함께 순식간에 꺼져 버린다. 사람들은 투기 때문에 버블이 생기는 거라고 믿는다. 내 생각은 다르다. 투기는 버블 그 자체다.


버블의 위험성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자신이 버블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버블을 인지하기 어려운 이유는 버블이 한창일 때 실제로 자산 가격의 폭등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바보인 줄 알았던 내 친구가 아무 생각 없이 2억의 대출을 받아 산 아파트가 1년 새에 3억이 됐다는 얘길 듣고 나면 엉덩이가 들썩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2007년 미국은 대공황 이래 최악의 금융 위기를 맞았다.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원래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저신용자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주택 대출이었다(서브프라임은 낮은 신용 등급을, 모기지는 주택 대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게 투기의 도구로 변질되고 만다.


위기의 연쇄 작용은 언제나 사소한 결정으로 부터 시작된다. 모기지 대출 업체는 대출을 공모한 뒤 이걸 다른 업체에 팔아 넘길 생각 이었기 때문에 신청자들의 상환 능력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았다.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듯 은행에 가서 서류를 쓰면 집이 나왔던 것이다. 대출은 당연히 과열 양상을 띄었다. 너나 없이 집을 살려고 하자 주택 가격이 폭등했다. 높아진 주택 가격 때문에 건설사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았고 자연스레 공급량을 늘렸다. 물들어 올 때 노를 젓는다고 탓할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노를 너무 저었다. 공급 과잉. 주택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안을 느낀 주택 소유자들이 매도 움직임을 보인다. 그런데 팔리질 않는다. 큰일이다. 더 늦기 전에 팔아야 겠다. 매도가 폭증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안이 팽배한 시장에서 누가 매물을 받아 주겠는가? 무서운 속도로 상승했던 주택 가격이 역시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빌린 대출금은 집 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그대로다. 설상가상으로 초기 저리 기간이 끝나 이자 부담이 늘어난다. 집을 팔아 대출을 갚고 싶어도 집이 팔리지 않는다. 집 값이 지표를 뚫고 핵으로 돌진한다. 대출자가 파산한다. 이자는 커녕 원금 회수도 안되는 은행이 파산한다. 파산한 대출자가 자동차 할부와 카드 값을 갚을 수는 있을까? 통신료는? 외식은 할 수 있을까? 자동차 회사와 카드사가 망하고 상점 주인이 깡통을 찬다. 위축된 소비로 인해 일반 기업이 파산한다. 이제 파산의 그림자는 미국에 물건을 팔아 경제를 유지하던 나라들을 뒤덮는다.


사람들이 부동산 투자에 열광했던 이유가 뭘까? 90년대 말 닷컴 버블의 붕괴로 주식 시장이 폭락한 게 하나의 계기가 됐을 것이다. 갈데 없는 투자금이 부동산에 몰렸고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환상의 짝궁이 됐다. 게다가 부동산 투자에는 몇 가지 근거 없는 믿음이 존재한다. 


첫째, 인구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둘째, 땅은 유한하다.

고로 부동산은 승리한다. 과연 그럴까?


인구가 계속 증가하리라는 기대는 전세계가 겪는 저출산 문제를 감안할 때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주택 수요로 인해 비교적 높은 가격을 유지했던 부동산은 둔화된 인구 증가의 부작용을 직격으로 맞을 것이다. 토지는 절대적으로 유한하므로 부동산은 언제나 매력적인 투자라는 생각은 어떤가? 사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토지 부족이 아니라 입지 부족에 의해 발생한다. 단적으로 시골 읍내의 아파트를 보라. 그 아파트가 강남의 아파트만큼 오르던가? 서울만 봐도 그렇다. 경제 개발 초기에 대한민국의 주요 대기업들은 모두 강북에 있었다. 당연 강북의 집 값이 훨씬 비쌌다. 그러나 강남이 개발되고 회사들이 몰리자 지금의 강남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매력적인 투자처로 여기는 도시 지역의 부동산은 신도시 개발과 교통 수단의 발달로 얼마든지 반전될 여지가 있다. 특히 미래 사회에는 재택 근무가 보편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도시에 인접한 주거지에 대한 수요는 점차 감소할 것이다. 1980년대에 1,000만 원을 주고 산 주공 아파트가 2000년대에 이르러 17억이 되는 마법은 더 이상 없을 것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동산 버블에 올라탄다. 아무리 얘기해도 부동산을 포기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동산 투자는 주식 같은 금융 투자에 비해 덜 까다롭다. 어차피 살아야 할 집, 사둔 뒤 십수 년 묵히면 자동으로 수 배로 오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 부동산은 대다수 가정이 보유한 자산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한 가정이 1억을 주식에, 3억은 부동산에 투자했고 둘 모두 20%의 수익을 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수익의 절대액은 주식이 2,000만 원, 부동산이 6,000만 원이다. 완벽한 조삼모사임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더 크게 와닿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동산 가격의 무서운 상승이 과연 우리에게 이로운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3억을 주고 산 집을 2억에 샀다면 어땠을까? 남은 1억으로 온 식구가 세계 여행을 다녀오거나 10년 탄 낡은 승용차를 Range Rover로 바꿀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5%로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면 한 달에 이자 비용만 40만 원 이상을 아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달에 40만 원이면 일년에 480만 원이고 상환 기간이 10년이라고 할 때 4,800만 원이다. 10년 동안 고생한 나에게 4,800만 원을 선물한다고 생각해 보자. 


부동산 가격의 지나친 상승이 현재의 풍요로운 삶을 저해하는 원흉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우리 뒤 세대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다. 지금만 해도 남자가 결혼을 할 때 부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서울에 집을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모두가 바라 마지 않는 삼성전자 직원이라도 안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올린다? 나는 집이 있고 대출도 다 갚았으니 부동산 경기를 활성화 시켜 국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부 정책에 박수를 칠 때가 아니다. 당신이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 정작 당신의 자식들은 빛도 들지 않는 지하방에서 신혼 살림을 차릴 것이다. 



로버트 쉴러의 대책


다소 딴 얘기를 길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사실 이 책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의 원인을 밝히고 그 해결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 로버트 쉴러는 아이러니 하게도 기존 금융 시스템의 강화를 사태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소수를 부자로 만들어준 금융을 다수를 부자로 만드는 데 사용하자는 말이다. 산업 혁명 시절 일자리를 뺏긴다며 무리를 지어 증기 기관을 파괴하고 다닌 역사를 떠올려 볼 때 저자의 생각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럼 어떤 방향으로 금융 시스템의 고도화를 이뤄야 하나? 바로 리스크 '관리'로 초점을 돌리는 것이다. 사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은행이 리스크 '회피'에 중점을 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대출자를 모집한 뒤 이를 다른 업체에 팔아넘긴다는 생각이 적극적인 리스크 회피 전략의 결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은 원래 도전적 사업가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맞은 사람들에게돈을 빌려 주고 그 리스크를 관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경제의 역동성을(창의적 사업가들이 만드는 신사업!) 한편으로는 국민의 복리와 안정을 꾀하려는 취지에서 설립된 것이다. Back to the Basic. 저자 로버트 쉴러는 은행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이 밖에도 쉴러는 금융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우리가 매년 건강 검진을 받듯 재무 상담 또한 의무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두 정보의 전달력을 높여 열광적 무지가 버블을 형성하는 걸 막자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버블임을 안다고 투기를 멈출까? 사람들은 정부의 발표나 뉴스 보다 뒷골목의 찌라시나 소문을 믿는 경향이 강하다. 아무리 금융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해도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지 않는 한 이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나만큼은 이 난장판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는 다는 것이다. 이는 개미라고 불리는 일반 투자자들의 주식 투자 행태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쉴러의 대책 중 가장 공감가는 것은 대출 계약에 디폴트 옵션을 만드는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 당시 대출자들은 은행에서 제시한 대출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보통 그러한 조건들이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비자 보호책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p.182).


따라서 소비자 중심의 표준 모기지 계약을 만들거나 사용자가 별도의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유리한 조건이 자동으로 선택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대책이 될 것이다. 일반인들은 기본적으로 정보와 친하지 못하다. 다양한 대안을 놓고 비교 분석하는 데 피로를 느끼며 많은 옵션 앞에서 오히려 선택을 포기하거나 아무거나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디폴트 옵션 계약이야 말로 진정한 사용자 중심의 금융 대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동경제학'의 대가라면 마땅히 이러한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