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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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은 뒤 하루키의 소설이 미친 듯이 읽고 싶어 서점에 들렀지만 실패한 적이 있다. 지난 번 글에도 쓴 적 있지만 나는 그 '청량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1Q84>는 재밌지만 너무 길다. <해변의 카프카>는 손에 드는 순간 끈적끈적한 뭔가가 온 몸을 덮어 기분을 잡칠 것 같았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세계의 끝'의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 <회전 목마의 데드히트>나 <1973년의 핀볼은>은 애초에 관심 목록에 들지도 못했지만 동네 서점에 있을리도 없었다. 남은 건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노르웨이의 숲>이나 사자, 바다 표범 어쩌고 하는 에세이들 뿐인데, 그런 걸 읽느니 차라리 낮잠이 자는 게 더욱 나았기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솔직히 말하면 <노르웨이의 숲>을 계속 만지작 거리긴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서점을 찾은 그 날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만나고 말았다. 2015년 12월 3일에 찍은 2판 30쇄가 반짝 반짝 빛을 내며 누워 있었다. 고작 167페이지. 페이지당 글자수는 꽉 채워봐야 700자가 넘질 않으니 바로 이거야 하고 소리를 지를 수 밖에.


물론 고려 요소가 분량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보니 나름 하드보일드를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답게 담담한 문체가 마음을 끌었다. 담담함이야 말로 가슴 속 청량감을 망치지 않는 유일한 열쇠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나'와 그의 친구 '쥐'가 함께 보낸 18일 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뚜렷한 내러티브가 있어 기승전결을 이루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의 전통적 구성, 줄거리에 강박 관념이 있는 사람들에겐 뭐가 뭔지 모를 소설이다. "이게 끝인가요?" 혹은 "이게 무슨 뜻인가요?" 라고 묻거나 "저랑은 잘 맞지 않네요."라고 말할 확률이 높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중요한 소설이 아니기에 줄거리와 상관 없는 딴 얘기가 범람한다.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느껴져 집중을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았다. 아주 만족했다 라고 말하면 나를 반사회적 인경장애자로 여기겠지만 부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 주시길.


확실히 이 소설을 대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대가가 되버린 작가의 데뷔작을 읽는다는 건 상상을 뛰어 넘는 재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몰래 꺼내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데뷔작 다운 엉성함이 오히려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가게를 마치고 부엌에 앉아 매일 밤 원고지를 채워 나갔을 하루키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화이팅을 외치고 싶은 심정.


흔히 하루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을 풍요의 시대 속에서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존재, 혹은 메마른 청춘 따위로 묘사하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뭔가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도 따져 볼 새 없이 무자비하게 정해진 방향으로 질주하는 역사와 시간에 조용히 저항하는 게 아닐까? 하고. 과거의 세대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사람을 죽여가며 역사의 방향을 틀려했다면 오늘의 세대는 열심히 방황함으로써 혹은 방향 없이 부유함으로써 정해진 경로를 거부하고 그를 통해 폭력적 전진을 막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이렇게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하루키의 의도도 거기에 있진 않을 것이다. 그저 의도치 않은 결과랄까.


'나'는 도쿄로 돌아가는 날 저녁 매일 들르던 바에 얼굴을 내밀고 주인과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쥐도 틀림없이 서운해할 거야."

"그렇겠죠."

"도쿄는 재미있을까?"

"어디나 마찬가지죠, 뭐."

"그렇겠지. 나는 도쿄 올림픽이 있었던 해 이후로는 이 고장을 떠나본 적이 없어."

"이 고장을 좋아하세요?"

"자네도 말했잖아, 어디나 마찬가지라고."

"그렇네요."


이 대화에 쓸쓸함이 없는 건 아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뿐이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쿄에 가면 가는대로의 삶이, 고향이 남으면 남는대로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면 같이 하는대로의 삶이, 헤어지면 헤어지는 대로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간다.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하루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린 주인공들은 왠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진정한 관계 맺기에 실패한 패배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놔둘 뿐이다. 이 하드보일드한 삶의 태도에 기어이 무의미를 쑤셔 넣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굳이 허무를 낙인 찍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이런 것들은 모두 가짜요 이 세상 어딘가에 뜨거움과 영원을 간직할 곳이 있다고 믿는대도 좋다. 나는 당신이 행복과 사랑과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말할 뿐이다. 그런 것들은 결코 당신이 정해 놓은 의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라고. 당신이 열심히 가두려 할 수록 그것들은 더더욱 멀리 달아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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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펭귄클래식 155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심영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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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제대로 증오하기 위해 또 한 번 완독했다. 작은 판으로도 121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책이다. 두 시간 정도면 얼마든지 읽어 치울 수 있다.


워낙 유명한 보아뱀 이야기 때문에 그거 말고는 도입부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다시 들고 보니 화자의 독백 부분이 상당히 멋진 책이었다. 그 멋진 감각을 깨는 건 여지 없이 어린 왕자가 등장하는 부분이고 특히 "양을 그려줘.", "상자 안에 네가 원하는 양이 있어.", "세상에 하나 뿐인 꽃이야." 따위의 개수작을 벌일 땐 손발이 오그라들어 차마 독서를 이어갈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곤 했다. 만일 이 책이 사막에 불시착한 화자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됐다면 지금 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 됐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 왕자>를 망치는 건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어린 왕자 자신이다.


지금 부터 이 책의 최악의 장면 3개를 꼽아 보겠다.


첫째, 그 지긋지긋한 보아뱀 이야기다. 생떽쥐베리는 어린 시절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보여주며 이 그림이 무섭지 않냐고 물어본다. 어른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지. 겉으로 보기에 그건 완벽한 모자 그림이었으니까. 작가는 자기가 모자 그림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나빠진 그림을 자꾸 "코끼리를 삼킴 보아뱀"으로 보도록 강요한다. 그러면서 어른의 상상력을 미천한 것으로 치부하는데 글쎄, 아이에게 아이의 시선이 있듯이 어른에겐 어른의 시선이 있는 걸로 이해할 순 없을까? 그림을 본 어른들은 그 누구도 "이건 모자야 보아뱀이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모자구나."라고 했을 뿐이다. 그림의 의미를 한가지로 고정시켜 결코 그 이상의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독재자의 마음은 오히려 어린 작가 쪽에서 보인다.


물론 일부의 어른들이 그런 그림을 그리기 보단 지리, 역사, 산수, 문법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충고했다. 작가는 이것 때문에 자신이 화가의 길을 접었다고 말하고, 어쩔 수 없이 비행 조종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 비행기로 무슨 짓을 했는지 돌이켜보면 애초에 화가 따위는 관심도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인생은 선택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놓을 수 밖에 없다. 그는 화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비행 조종사가 됐다. 그는 그 직업을 엄청나게 사랑했음에도 어릴 적 포기한 화가의 꿈이 더 큰 것처럼 독자를 속이고 있다. 나쁜 어른이란 특별한 게 아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둘째, 여우와 어린 왕자의 첫 대면이다. 다시 읽어보면 알겠지만 여우는 거의 길거리 콜걸처럼 어린 왕자에게 접근한다. 여우는 어린 왕자를 만나자마자(초면이라는 걸 기억하자) 뜬금없이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는데 그러고는 곧장 "제발..... 나를 길들여줘!"라고 말한다. 세상에 진도가 빨라도 이렇게 빠를 수 없어, 둘은 어떠한 교감도 감정의 고조도 없이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물론 그 순간 어린 왕자가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많지 않아.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어야 하고. 알아야 할 것도 많거든." 하고 튕기지만 이어지는 말 한 마디에(총 93자. 공백 미포함) 의지는 스르륵, 곧장 "어떻게 하면 되는데?" 라며 미끼를 물고 만다. 책을 통 틀어 가장 천박한 장면으로 꼽고 싶다.


마지막은 관계에 대한 폭력적 정의다.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사실은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서로를 길들이고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사람은 결국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 언젠가는 영원을 이뤄야 한다 고 말이다. 이는 사랑의 본질을 완전히 착각한 것이다.


사랑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만이 진짜라고 정의하면 지난날 우리를 울고 웃긴 그 소중한 사랑들은 모두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정녕 가짜를 포옹하고 가짜와 키스하며 가짜를 사랑한 것일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던 시간을 갖고 있다. 우리가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는 지난날 가졌던 그 시간의 아픔 때문이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 아니다. 여우는 관계를 지나치게 신파적으로 만든다. 어쩌면 떠나가는 왕자를 붙잡기 위해 그런 말을 지껄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거짓을 말한 거라면 그래, 여우를 용서해 줄 수는 있다.


<어린 왕자>는 지나치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오늘날 <어린 왕자>는 어른의 동화를 넘어 일종의 신화가 되버렸다. 다른 감상은 허용치 않는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알아보는 사람이 그것을 "모자 그림."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경멸하고 무시한다. 그것이 바로 유아의 무지이자 유아의 잔인함이다. 하지만 명심하자. 시간이 흘러 몸과 마음이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찌든다." 시간의 때가 켜켜히 마음에 쌓이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냥 "찌든"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냥 "모자"를 그리고 싶을 수도 있다. <어린 왕자>는 이 자연스러운 욕망을 조롱하고 경멸한다. 오직 자신의 시선만이 "순수"하다고 공표한다. 나는 이 폭력이 몸서리 치게 싫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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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진의 요리왕국
기타오지 로산진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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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진은 만화 <맛의 달인> 속 최고의 미식가로 등장하는 유키하라 유잔의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요리를 미각만의 전유물에서 해방시켜 보고, 만지고, 듣고, 맡는 종합 예술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 아주 끔찍할 정도로 까다로운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 까다로움이 불쾌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시비를 가르는 기준이 될 때(조미료를 넣은 음식은 음식이 아니다, 회를 얇게 썰어 먹는 사람은 회 맛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등) 듣는 이의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도대체 니가 뭘 알아? 맛은 각자가 느끼는 건데!"


로산진은 현대에 태어났으면 딱 꼰대가 됐을 그런 사람이었다. 맛의 기준이 명확해 판단에 거침이 없다. 취향이 없는 게 전반적 취향이 되버렸고 고급과 저급에 대한 감식안이 떨어진 요즘 세상에선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악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호오의 판단을 오로지 주관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100% 동의할 수 없다. 주관 또한 불변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 형성되며 경험이란 얼마든지 더하고 뺄 수 있기에 주관 또한 시간을 거쳐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 따라서 드라이 에이징 소고기고 나발이고 나는 집 앞 기사 식당의 제육볶음이 제일 맛있다 고 말하는 사람은 물론 매우 행복한 사람일 순 있으나, 그 판단은 아주 미천한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전문가들이 TV에 나와 고기는 어떤게 맛있고 어떻게 해야 맛있고를 떠들고 이 와인에선 타르 맛이 나며 젖은 흙냄새, 오렌지 껍질, 장미 향이 난다고 하는 건 단순히 개수작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밤이 되면 태양을 볼 수도 그 흔적을 느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솔직히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로산진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수시로 분노가 일만큼 그가 보여주는 맛의 기준은 까다롭다. 하지만 그는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스스로 먹어 본 사람이고 직접 해 본 사람이다. 그의 말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이 맞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직급과 연봉 체계를 거부해야 한다. 오늘날 10년 차의 디자이너가 신입 디자이너보다 직급이 높고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이유가 뭘까? 그래, 때로는 신입 디자이너가 수석 디자이너 보다 높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낼 수 있고 어떤 사안에 대해 더 맞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확실히 낮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직급 체계는 완전히 거꾸로 되야 한다. 부장으로 입사해 시간이 흐를수록 차장, 과장, 대리, 사원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맛이나 미를 논하는 것과 객관적으로 평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논하는 건 다른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능력이 객관적으로 평가된다고 믿는다면 지난해 말 당신이 받은 고과를 떠올려 보자. B 혹은 C? 당신은 그게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추호의 의심도 없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내려진 거라고 받아들이는가? 사람들이 맛이나 미를 두고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보고 맛을 느끼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게 없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1초 안에 누구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볼 수 있고 종로의 유명 평양 냉면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서 먹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미와 맛의 세계는 사기꾼, 비전문가의 영역 좋게 말해 오로지 주관에 달린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우리가 프로 화가와 프로 요리사의 지위를 인정한다면(현대 사회에서 이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다) 프로 비평가와 미식가의 지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로산진의 요리왕국>에는 다양한 요리가 등장하고 그 요리를 맛있게 먹는 법, 그 요리를 맛있게 조리하는 법이 등장한다. 딱히 생생한 표현은 없어 건조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확실히 "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한 번 먹어보고 싶은 걸." 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물론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엔 "아니야." 라고 소리를 질러 버린다. "요리 하나에 뭐 이렇게 까다롭게 굴어."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한다. 까다롭지 않은 요리에 매력이 있듯이, 까다로운 요리에도 마찬가지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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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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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훈의 수필을 들었다. 숙명처럼 인 박힌 무거움과 글쓰기라는, 노동의 땀에 절인 단어들이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김훈의 글을 읽고 나면 완전히 탈진해 버린다. 그 적막한 피로와 고됨이 싫어 항상 관둬야지 관둬야지 하면서도 기어이 다시 손에 들고 마는 마력이 김훈의 글에는 담겨 있다.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김훈은 얼마나 많은 문장을 빚고, 굽고, 깨부쉈을까? 어쩌면 그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갓 태어난 연어 새끼가 되는 지도 모른다. 나자마자 대양을 향해 떠나가지만 태어난 곳의 향과 풍경이 그리워 다시 강가로 돌아오는 것처럼.


<라면을 끓이며>는 완전히 새로운 글이 아니다. 김훈이 써온 여러 수필집에 실린 글 일부와 그 후에 새로 쓴 글을 합쳐서 엮은 책이다. 나는 과거 그의 수필을 몇 권 읽은터라 여러군데서 익숙한 글을 다시 만났다. 그러니까 <라면을 끓이며>는 나에게 재회 안에 재회가 켜켜이 쌓인 다시 봄의 밀푀유랄까?


익숙함은 익숙해서 좋고 익숙해서 나쁘기도 하다. 익숙해서 좋은 이유는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고 익숙해서 나쁜 이유는 역시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김훈은 이렇게 허황된 말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무의미한 동어 반복을 경멸하지만 방금 내뱉은 저 말엔 김훈의 글이 가진 독특함이 반영되어 있다. 김훈의 글은 시대와 뒤엉켜 시비를 가리려 하지 않는다. 김훈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언제나 진저리를 치며 자신이 딛은 길 위를 묵묵히 걸어갔다. 익숙함은 익숙해서 좋고 익숙함은 익숙해서 나쁜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의 뼈에 새겨진 기자의 낙인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공정하게 사실 만을 전하겠다는 직업 윤리가 그가 써내는 온갖 글들에 절절이 배어 있는 것이다. 기자는 불 속에서 타버린 소방관의 시체를 보고, 그 숯덩이를 부여 잡고 통곡하는 애엄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그리하여 그 죽음이 낳은 비애와 고통을 느끼지만 그 절절한 감정을 기사 속에 풀어 넣을 수는 없다. 기사는 기사여야지 일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김훈은 여러 글에서 자신이 가 닿으려 했으나 결국엔 닿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것이 김훈의 실력이 부족해서라거나 김훈이 닿으려 한 곳이 너무 멀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훈이 닿고자 하는 곳에 닿을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늘 세상을 관조하려 한다. 그 뜨꺼운 핵심에 뛰어들고 나면 온 몸이 타버려 사라지는 걸 두려워 하기라도 하듯. 이 늙은 작가의 몸 안엔 아직도 그런 공포가 있는 것 같다. 나같은 풋내기가 어찌 그의 마음이 보는 세상의 깊이를 알겠냐마는.


이 책에서 가장 좋은 글은 안타깝지만 이 책의 글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른 수필집에 등장한 적이 있다. <1975년 2월 25일의 박경리>다.


이 글은 평범한 사건기록지처럼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김지하의 출감을 기다리는 1975년 2월 15일의 기록이 시간순으로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 느닷없이 박경리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기사에서 드라마로 전환될 것을 요구하지만 김훈의 문장은 차분하고 끈질기다. 그 인내와 차가움이 어떻게 마지막에 이르러 뜨겁고 무거운 진실로 변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김훈이 수 없이 빚고, 굽고, 깨뜨리는 글의 정수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익히려고 여러 차례 같은 페이지를 넘겼다.


김훈은 이 책을 펴내며 과거에 출간한 적 있는 여러 편의 수필집을 절판시킨 것 같다. 참으로 그다운 행동이다. 이제 그의 과거를 읽으려면 이 책을 손에 드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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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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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키 에세이의 가벼움은 그것이 수필이라는 장르의 본래적 특성임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다. 이건 하루키가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다. 본인도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도 인정하는 얘기란 말씀.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하는 거 보면 당연히 고의적이라고 봐야 하고 그 뻔뻔한 행동을 수 십 권에 걸쳐(어디 한 두 권으로 끝내야 말이지) 하니 이는 작가 특유의 곤조랄까, 아무튼 나의 에세이는 이런 거고 이렇게 밖에는 쓸 수 없으니 사고 안 사고, 읽고 안 읽고는 순전히 독자 여러분에게 달린 일이다 고 말하는 것 같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무언가 다르다. 기존의 것과는 다르게 자기 자신을 더 밀도 있게 드러내 보인다. 그것도 신변잡기 식의, 무슨 위스키를 좋아하고 무슨 브랜드의 차를 타며 누구누구와 친하고 누구누구와 이런 일을 겪은 적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루키 아이덴티티의 핵심을 이루는 찐득하고 리얼한 얘기가 담겨있다. 감상을 말하자면 음, 역시, 그래, 이 정도인가? 하루키잖아. 결국, 아, 이게 다? 설마 진짜? 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고, 역대 최강. 농담 하나 보태지 않고.


우선 어떻게 해서 소설가가 됐는지가 나온다. 사실 이 얘기는 워낙 많은 지면에서 소개된 바 있어 새로울 건 없다. 세계 전복을 목표로 전공투가 열도를 지배하던 시절에 대학을 나와 공부는 뒷전, 한량처럼 책만 읽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대담하게 재즈바를 차린다. 바를 운영하며 가까스로 졸업도 오케이. 그러던 어느날(서른 살을 앞둔 1978년) 도쿄 신주쿠 진구 구장의 잔디가 깔린 야외석에 누워 프로야구 개막전을 관람하다 자신이 응원하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1번 타자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날린 순간 불현듯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의 전형. 하루키는 자신의 눈 앞에 현시한 이 말씀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고 이후 영업을 마친 바에 앉아 수 개월간 소설을 집필, 신인문학상을 받게 된다. 하루키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불현듯한 마술 세계로의 진입이 어쩌면 이 에피파니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흙 알갱이 하나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굳건한 현실세계에서 그 같은 기적을 경험했으니 소설에서야 뭐 마음껏 스르륵 빠져가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볼 게 참 많은 수필이지만 특히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진저리를 쳤던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사실 몇몇 작품을 좋아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 또한 눈을 흘겨 뜬 채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거 사기꾼 아냐? 확실히 하루키 월드는 이런 색채를 짙게 내뿜는다. 두 개의 달이라든지 샌더스 대령, 어둠 속의 야미쿠로, 느닷 없는 섹스씬. 시간이 흘러 내가 이 남자를 인정하게 된 건 어찌됐든 저찌됐든 뒷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능력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하루키 말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매직'이다. 이야기는 결국 매직의 힘으로 흘러가고 매직의 힘으로 읽힌다. 문장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 매직을 불어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런 면에서 하루키는 뛰어난 마술사고 자신의 믿음을 정확히 반영하는 작품을 쓴다. 그 확고한 믿음. 그 소박한 철학이 30세에 등단한 이 젊은 작가를 68세가 되기까지 작가로서 존재하게 만든 힘이다.


이 에세이를 덮고 나면 하루키의 소설이 무척이나 읽고 싶어진다. 퇴근길 서점으로 돌진해 몇 권을 들춰봤지만 끝내 빈 손으로 돌아왔다. 뭐랄까, 조금 더 이 에세이의 감동을 간직하고 싶었달까. 농밀한 소설의 언어로 덮어버리기엔 머리 속에서 느껴지는 청량감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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