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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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는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살인을 통해 사형제도의 허점을 드러내는 장르 소설이다. 일본에서만 30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 아무래도 장르에 대한 재미에 무거운 주제의식 까지 더해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나 보다. 사람들은 재미만 있어도 싫어하고 주제만 있는 건 더 싫어하니까. 440페이지에 걸쳐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는 미스테리 소설이니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내용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러면 좀 다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게 정말 고민이다. 아무래도 좋은 말이 나오긴 틀렸기 때문이다.


전세계 수백만 독자의 지지를 받는 작가와 작품을 너 따위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게 말이 되냐 고 물으면, 솔직히 좀 송구스러운 기분이다. KPOP 스타의 박진영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이 작가와 작품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모욕이 될 수 있고, 상처가 될 수 있고, 혐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이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둘이든 셋이든 다 별로였다. 딱히 평을 하기도 애매할 만큼 별로였다. 사실 최악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동명의 소설가가 쓴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데뷔 후 5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소재,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으로 매 작품마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전부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대단한 다작 작가인데다 나오는 것마다 인기를 얻으니 늘 새로운 소재를 꺼내 보인다는 건 사실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50편 전체를 읽은 건 아니니까 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다. 그런데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이라고 한다면 정말 똥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고 싶다. <공허한 십자가>는 억지와 인위의 덫을 보란 듯이 펼쳐 놓고 독자가 걸려들길 바라는 함정 소설이다. 아마 예민한 짐승이라면 어설프게 가린 쇠 냄새에 질려 거들 떠 보지도 않으리라. 소설에 인위적 구성이 아닌 게 어딨는가? 고 묻는다면 인위적 구성 조차 인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게 바로 좋은 소설의 조건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스스스스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단하게 부풀려진 미스테리는 440페이지에 걸쳐 서서히 바람이 빠지다 종국에 이르러 피식 하는 방구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완전히 쪼그라들고 만다. 이게 정말 치밀한 구성이라면, 내가 한글 공부를 다시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날카로운 문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 날개를 쓴 사람이 착각한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문장만큼은 정말 최악이다. 어설픈 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상 깊은 문장은 책 전체를 통틀어 하나에서 두 개 도 찾기 힘든 수준이다. 날카로운 문장이란 말을 밋밋한 문체, 짧은 문장, 별 생각 없이 쓴 문장 과 같은 의미로 쓴 거라면 동의한다. 또 이런 조악함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 자체가 문장의 디테일에 힘을 쓰기 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이런 건 스타일 혹은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히려 화려한 문체가 이야기의 흐름에 방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문장을 가져야만 좋은 소설이냐 하는 건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날카로운 문장이 아닌데도 날카롭다고 소개하는 건 문제가 있다.


솔직히 이런 독설을 쏟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누가 내 글을 이런 식으로 평한다면 나도 아마 살인 충동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모르겠다. 회사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작정을 하고 완독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 나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루함의 늪과 조악한 문장의 정글을 지나 마침내 발견한 보물 상자에서 고양이도 끌고 들어가지 않을 만큼 어이 없는 잡동사니를 얻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하지? 그러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말 혹시 모르니 그의 책 중 가장 인기가 많고 평가가 좋은 책 한 두 권은 더 읽어 보겠다. 이 위험한 모험을 떠나는 나에게, 부디 이야기의 신의 축복이 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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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동양고전 슬기바다 2
맹자 지음, 박경환 옮김 / 홍익출판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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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춘추와 전국을 싸잡아 춘추전국 시대로 일컫지만 두 시대 사이에는 꽤 큰 시간 차가 있다. 단순하게 말해 춘추는 공자의 시대였고 전국은 맹자의 시대였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도 아닌 그 손자의 제자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맹자가 태어난 때는 공자가 죽은 지 이미 100년이 가까운 시대였다.


전국은 춘추보다 혼란과 분열이 심화되었는데, 예(禮) 운운하며 격식을 차리던 제후들이 비로소 가면을 벗고 이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전국은 오로지 힘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당연하게도 전국을 평정한 남자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교활하기로 소문난 '영정'이었다. 최초의 황제. 진시황 말이다.


공자나 맹자나 지금에 와서야 성인으로 떠받들여지지만 당시에는 내뱉는 족족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상주의자 떠돌이들이었다. 맹자의 말대로 인간이 본래 선하며 따라서 누구나 요, 순, 우, 탕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는거라면 춘추와 전국은 왜 그리 피와 살육을 즐겼을까? 군마를 이끌고 달려오는 적국의 왕에게 인과 예를 설파하여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단 말인가? 힘의 시대에 인의는 무력하다. 그리하여 힘을 강조한 시황이 비로소 길고 긴 춘추와 전국을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그런데 웃긴 건 천하를 통일하게 만든 그 힘이 정작 통일된 천하를 무너뜨리는 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 진(秦)은 20년도 가지 못해 멸망하고 말았다. 분열된 천하를 두고 항우와 유방이 싸웠는데, 힘의 항우가 덕의 유방에게 패해 비로소 유학의 전성 시대를 여는 한(漢) 나라가 건국된다.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한 나라는 이후 400년 동안 유지된다.


유학은 확실히 전란의 시대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나 평화의 시대, 즉 통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선 탁월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인간은 우선 생존권이 확실하게 보장되야 인의라는 가면을 손 쉽게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와 맹자는 이 점을 몰랐다. 두 사람에겐 큰 뜻은 있었지만 그 뜻을 실현할 전략이 부재했다. 상황이 받쳐주질 않는데 꼬장 꼬장 자기 주장만 되풀이 해서야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두 사람은 평생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다 "아아, 세상이 정녕 나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구나" 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당시의 사람들이 정말 공맹의 사상을 이해 못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충분히 유학의 사상을 적용하여 힘과 덕의 균형을 맞추는 정치를 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원인을 맹자 본인에게서 찾는다.


솔직히 맹자는 같이 일하기 싫은 동료 유형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꼽을 만큼 짜증나는 인간이었다. 우선 잘난척이 심하다. <맹자> 공손추 하 편에는 그의 제자 충우가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p.137)며 스승의 언행 불일치를 힐난하자 "만일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려 한다면 오늘날의 세상에서 나 말고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유쾌해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요즘 같으면 대단한 swag으로 치부하고 박수를 칠 수도 있겠지만 도무지 군자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맹자의 잘난척은 사람을 너무 가르치려 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무지한 사람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걸 즐기는 전형적 엘리트였다. 사사건건 왕을 모욕하고 왕을 힐난하고 왕의 권위를 짓누르면 과연 누가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루 상편에서 맹자는 "사람들의 문제는 남의 스승 노릇을 하기 좋아하는 데 있다."(p.211) 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이 말의 반만 지켰어도 전국 시대에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게 완전히 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최악은 독선이었다. 맹자는 요, 순, 우, 탕이라는 전범을 세워 놓고 이들과 같으면 선, 다르면 악이라 몰아 세웠는데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행동에 모순이 있고 잘못이 있기 마련이다. 맹자는 온갖 변명을 늘어 놓아 이 같은 모순을 옹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반드시 논쟁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한마디로 맹자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유교 광신도였던 것이다.


정녕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다면 사람을 마음으로 감화시켜야 한다. 맹자는 그냥 뭘 해도 밉상인 사람이었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맹자가 성인의 뜻을 헤아리는 대신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그의 왕도정치는 충분히 전란을 평정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써 놓고 보니, 내 얘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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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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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폴 오스터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압도적이다.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라는 부제가 달렸는데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쓴 것 같다. 그냥 모든 소설을 이렇게 써줬으면 좋겠다. 확실히 모든 작가는 자기 체험을 얘기할 때 더 생생하고 더 진실되고 더 아름답다.


<빵 굽는 타자기>가 왜 재미있는고 하면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책 뒤 쪽에 나오는 두 편의 희곡을(희곡이나 소설이나 어쨌든 극화된 글 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길) 제시한다. 나는 이 희곡들을 한 번에 10페이지 씩 넘겨서 봤는데 그건 나에게 속독술이나 투시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뭉텅이로 페이지를 넘겨 책을 뭉개버리고 싶을 정도로 두 희곡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빵 굽는 타자기>에도 극적 각색이 있는지 없는지(그러니까 이걸 소설이라고 간주할 만할),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서 딱히 대단한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패스하자. 그냥 내 주장이 틀린거지 뭐. 재밌으면 된 거 아냐!


나 같은 폴 오스터 혐오자가 왜 또 다시 폴 오스터의 책을 꺼내들었는지에 대해 얘기해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들어보라. 사실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 <환상의 책> 이후로 그와는 완전히 짜이찌엔, 굿 바이, 사요나라 해 버렸으니까. 도저히 그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얼마전 <그림과 문장들>이란 책을 읽으며 어마어마한 문장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기적같은 역전을 꿈꾸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 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중략) 한쪽에는 시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돈이 있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 다룰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지만, 처음에는 한 입, 다음에는 두 입, 다음에는 세 입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면서 몇 년을 지낸 뒤 결국 내기에 지고 말았다.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p.146)


이 말은 우리 우주에 사는, 소설가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생물들을 위한 잠언이다. 이 말 하나만 가슴에 품고 살면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진리요 빛이요 바다를 집어 삼킨 캄캄한 폭풍우를 뚫고 들어오는 등대의 가르침이다. 명심하라. 누구나 돈을 갖진 못하지만 우리 모두는 시간을 갖고 있다. 폴 오스터는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은 탓에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 결국 시간도 돈도 모두 잃고 말았다.


나는 너무 늦게서야 이 진리를 만났다. 돈은 애초에 없었으니 별로 원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많던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일 초도 멈추지 않고 꼬박 꼬박 쌓이는 시간을 수십 년이나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담은 그릇은 밑 빠진 독이었고 시간은 빠진 밑을 따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시간은 헤어진 연인과 같고 제 때에 뒤집지 못해 까맣게 타버린 삼겹살과 같다. 떠나간 연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타버린 삼겹살을 먹는 건 자유지만, 자유란 결코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무적의 화폐가 아니란 걸 알아두시길. 어쩌면 그 놈의 자유가 우리를 궁지로 몰아 넣은 주인공 일지도 모른다. 자유는 쓰기는 쉽지만 길들이기란 죽을만큼 어려운 괴물이니까. 당신의 인생이 왜 이리 누추한지 알고 싶다면 이 괴물이 어디에서 뛰놀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혹시 그 곤궁한 인생을 역전시키고 싶으면 괴물을 가장 놓고 싶지 않은 곳에 데려다 놓으라. 그리하면 고통과 함께 원하는 것을 얻을지니.


1947년에 태어난 폴 오스터는 1977년이 되서야 이 진리를 깨달았는데,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한참이나 어두운 통로를 헤매다 1978년에는 파경을 맞았고 1981년이나 1982년, 혹은 1983년 쯤에 겨우 겨우 한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리고 소설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폴 오스터는 "여기까지 온 이상,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노력해서,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172) 정말 소름끼치게도, 


그 마지막 한 번의 노력이 나와 당신에게 폴 오스터란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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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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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루키다. 단숨에 읽어 치웠다. <색채개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거창해 보이지만 소소한 내용이다. 그런데 거기에 감탄할 만한 이야기의 힘이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스르륵하고 다른 세계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지점이 있다. 긴자의 대로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색채와 분위기, 공기의 맛이 전혀 다른 긴자가 펼쳐진다. 독자는 하루키가 부는 피리의 선율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 공간에 발을 딛는다.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러나 곰곰히 생각을 집중하면 이 곳이 이세계(異世界)라는 게 또렷이 드러난다.


다자키 쓰쿠루라는 남자와 그가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네 명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다섯은 그 나이 대의 청년들만이 지닐 수 있는 낭만적 이상에 따라 한점 "스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를 구성한다. 남자 셋 여자 둘. 쓰쿠루와 아카마쓰와 오우미와 시라네와 구로노. 빨강(아카)과 파랑(아오)는 남자. 하양(시로)와 까망(구로)는 여자. 쓰쿠루만이 유일하게 색채가 없는 남자다.


혈기 왕성한 남녀가 모였지만 그들에겐 이성간의 관계 발전을 자제하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 우정은 영원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으니까.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는 그렇게 유지된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동체는 쇳가루 맛이 나는 세상의 바람을 맞기 전에나 유지 가능한 법이다. 그들도 나이를 먹는다.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야 할 시기가 오는 것이다. 쓰쿠루를 제외한 넷은 아직 그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나고야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결심한다. 오로지 색채가 없는 쓰쿠루만이 도쿄의 공대에 진학해 공동체를 이탈한다. 물론 공동체는 변함없이 유지됐다. 그들의 우정은 신칸센으로 한 시간 반 만에 건널 수 있는 거리에 무너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빨강과 파랑과 하양과 까망, 아카, 아오, 시로, 구로는 일방적으로 쓰쿠루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공기의 맛이 다른 이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아마도 이런 점이 하루키를 이토록 오랜 시간 대중적 지지를 받는 작가로 만든 힘인 것 같다. 알쏭달쏭한 이야기, 복잡한 메타포, 상징, 다채로운 해석. 소설에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한 가지는 도대체 다음 페이지에 뭐가 써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다. 하루키에겐 그 힘이 있다.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일본 남자의 절교 사건을 궁금해 해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그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평범하고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왜 내 마음을 잡아 당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조화로운 공동체가 쓰쿠루에게 내린 절교 선언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같이 떡볶이를 먹고, 땡땡이를 치고, 오락실을 다니고, 숙제를 안 해 복도를 오리 걸음으로 걷던 내 오랜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나는 한 번도 그 친구들에게 절교를 선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져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머무른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 가능성은 현실의 칼날을 거쳐 몇 가지 실현 가능한 범주로 좁혀진다. 날카로운 가위가 싹둑 싹둑 필요 없어진 가지들을 잘라낸다. 당신은 인생이 다양한 경험을 하나 하나 축적해 나가는 풍요의 과정이라 믿고 싶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인생이란 가슴 깊숙이 간직했던 따뜻한 무언가를 조금씩 조금씩 잃어버리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자키 쓰쿠루의 상실은 그저 개인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상처를 우리의 마음 속에 갖고 있다. 순례를 떠나야 하는 건 다자키 쓰쿠루만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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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생각들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52가지 심리 법칙
롤프 도벨리 지음, 두행숙 옮김, 비르기트 랑 그림 / 걷는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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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사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 동안 전혀 읽지 않았던 종류의 책들을 많이 보리라 다짐했다. 예컨대 '삼성 경제 연구소'가 추천하는 'CEO'가 여름 휴가 때 들고 가는 책'들 말이다.


나는 지난 <괴짜 경제학> 리뷰에서 이런 류의 책만을 읽어선 결코 이런 류의 책을 쓸 수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내 말은 틀렸다. 쓸 수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잘.


CEO들이 하고 많은 날 중에 유독 여름 휴가를 골라 책을 읽는 이유는 평소엔 끔찍이도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바뻐,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없다. 그래서 휴가 때라도 좋다는 책을 읽어야지. 그런데 어려운 건 안 된다.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곤란해. 원 포인트 레슨. 실용적인 것만 콕 집어. 쉽게 쉽게 가자. 


요구가 명확하면 만드는 것도 훨씬 쉽다. 게다가 그 요구는 대체로 변하는 일이 없어 제작 단계를 공정화 할 수 있다. 이른바 지식의 대량 생산. 교양으로 만드는 패스트푸드! 이것이 바로 이런 류의 책만을 읽고도 이런 류의 책을 쓸 수 있는 이유다. 자 그럼 우리도 한 번 만들어 볼까? 


버거킹, 맥도날드, KFC에서 햄버거를 시킨다. 빅맥 빵을 조리대 위에 놓는다. 버거킹에서 빼낸 할라피뇨와 치즈를 깔고 KFC에서 건진 징거 패티를 착. 이제 남은 야채를 적당히 섞어 그 위에 놓고 빅맥 빵을 덮어 마무리하자. 어? 그런데 내 햄버거는 팔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내가 만든 햄버거를 먹어 본다. 맛은 비슷한데, 브랜드가 없구나! 


내용 자체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누구나에게 만들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자격은 현란한 학위와 경력이다. 이 마법의 물약을 끼얹고 나면 책은 비로소 반짝 반짝 빛나는 권위의 훈장을 달게 된다. 이제 남은건 유력 언론사와 동류의 작가들이 보내는 두 줄 짜리 리뷰다. 그것으로 서빙 준비 끝. 완벽한 플레이팅이다.


이런걸 보면 인간은 좋은 생각만으로는 어지간해서 설득 당하지 않는 것 같다. 경험으로 증명해야 한다. 가시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 의견을 진리로 보이게 하는 권위가 필요하다. 세이버 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가 딱 그렇다. 메이저 리그 구단들은 빌 제임스의 기가막힌 통계 이론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가 야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다 번듯한 직장이나 학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 제임스의 의견을 편견없이 받아들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빌리 빈은 아메리칸 리그 최대 기록인 20연승을, 보스턴 레드삭스는 끔찍했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4년 만에 메이저 리그 우승을 거머쥔다(이 이야기는 영화 <머니볼>에 잘 묘사되어 있다).


<스마트한 생각들>의 저자는 롤프 도벨리. 독일에서 가장 냉철한 경영자이자 위트있는 작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그래서 더 컴팩트하다. 그래서 더 깊이가 없다. 원래 이런 책들은 유명한 교수님들이 자주 쓰는데 그 세계에선 나름 실험에 의한 검증이(혹은 통계에 의한) 보편화 되어 있어 근거가 확실한 편이다. 저자는 아무래도 학자가 아니다보니 그런면에서 많은 취약점을 드러낸다. 나쁘게 말해 이 책은 인간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심리학적 오류들을 여기 저기서 긁어 모아 짜깁기한 사례모음집이고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CEO의 '자기' 경험담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책이다. 흥미롭진 않지만, 그럭저럭 재밌게는 읽을 수 있다. 심리학과 성공은 언제나 먹히는 키워드니까.


롤프 도벨리는 중요한 의사 결정에 앞서 이 책에 언급한 생각의 오류들을 쭉 써놓고 혹시 자기가 이 중 한 오류에 빠지진 않았는지 확인해 본다고 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는 좋은 습관이다. 나도 첫 사업에 실패한 후 실패의 이유를 메모장에 적어 매일 아침 읽었던 적이 있다. 그 메모의 제목은 '나는 왜 멍천한가'였다. 항목은 무려 마흔 세 개 였다.


이 책은 뻔한 얘기를 반복한다는 혹평을 받을만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들은 너무 당연한 탓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그로인해 우리가 항상 멍청한 실수를 반복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책들의 목적은 뻔한 얘기를 진지한 얼굴로 함으로써 의식 속 깊숙히 묻혀 있던 진리를 주의의 역치 위로 올려놓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행인으로부터 '너는 결국 죽어'라는 말을 듣고난 뒤 평생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한 남자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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