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대니얼 길버트 지음, 서은국 외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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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그런 책이 아니다. 신간도 아니다. 2006년에 나왔다. 2009년 처음 봤고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해 6년 만에 다시 읽었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는 행복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인지 특성과 심리에 대한 책이다. 수 많은 심리 실험이 나오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다. 세상에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다는 건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특별한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은 미래를 대비하는 몇 안되는 동물 중 하나다. 인간은 언제나 미래를 상상하고 거기에 대비한다. 이유가 뭘까? 허무하지만 그게 바로 뇌의 취향이다.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사실 통제는 그 자체로 엄청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권력의 맛'이 바로 '통제의 맛'이다. 권력을 잃은 사람이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것처럼 통제 하지 못하는 뇌는 불안에 빠진다. 그래서 뇌는 끊임없이 미래를 떠올린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오류를 범한다는게 이 통제중독자의 문제지만.



보이지 않는 것 상상하기


우리의 뇌는 보이는 것을 상상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는 데는 정말로 무능하다. 잠시 부자의 삶을 상상해 보자. 아마도 거대한 요트, 멋진 부동산, 잘 빠진 자동차, 화려한 파티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돈을 꿔달라고 찾아오는 수 백 명의 사람들, 옆 집 수영장보다 우리 집 수영장이 작아서 오는 자괴감, 내 돈만 바라보는 자식과 친척들은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부자가 더 낫지! 나 같은 거지의 입장에선 이런 생각을 할 법도 하다. 그러나 행복은 주관적이다. 돈 걱정 때문에 꼬박 한 달을 지새우는 나의 슬픔이 옆 집 수영장 보다 우리 집 수영장이 작아서 오는 자괴감 보다 절대적으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자괴감은 돈 걱정으로 인한 내 불행보다 훨씬 클 수 있다. 말도 안된다고? 그러면 더러운 물 속에 먹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해보자. 이 먹물은 그저 수 많은 오물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반대로 깨끗한 물 속에 빠뜨렸을 땐? 얘기가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다. 


우리는 부자가 되면 어떨지 갖가지 상상을 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부자들은 우리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재를 기반으로 미래를 상상하기


나는 뷔페를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뷔페를 갔다 올 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한다. '너무 돼지 같이 먹었어. 내가 다시는 뷔페를 오나 봐라'. 이렇게 다짐한 뒤 나는 또 다시 뷔페를 간다!


바로 이 순간 벌어진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을 '느낌', 상상하며 느낀 정서를 '미리 느껴봄'이라고 하자. 우리의 뇌는 미래를 상상할 때 언제나 '느낌'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 음식을 먹고 난후 다음 주에 먹을 음식을 구매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 식욕을 과소평가하고 조금밖에 사지 않는다(p171)! 한편 이런 심리 실험도 있다. 한 연구진이 참가자들에게 지리에 관한 문제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각각의 문제에 답하고 나면 정답과 초콜릿바 가운데 하나를 보상으로 주겠다고 알려주었다. 몇몇은 문제를 풀기 전에 어떤 보상을 받을지 선택했고 나머지는 문제를 풀고 난 뒤에 보상을 택했다. 그러자 먼저 보상을 선택한 집단에서는 초콜릿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지만 반대의 경우 정답을 더 알고 싶어했다. 문제를 풀기 전에는 자신이 지리 같은 따분한 분야의 정보를 알기 위해 초콜릿을 포기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재와 미래를 비교하기


다시 부자가 되보자. 잘 빠진 스포츠카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 스포츠카가 좋아보이는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그 스포츠카를 현재의 내 똥차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스포츠카를 사고 나면 우리의 똥차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더 이상 비교할 게 사라진 스포츠카에 대한 열정 또한 시들시들해 진다. 차근차근 돈을 모아 꿈에 그리던 물건을 샀지만 예상보다 쉽게 시들해졌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이 시들해짐을 견디지 못해 또 다시 더 비싸고 화려한 물건들을 갈망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성능이 좋고 가장 멋진 스포츠카를 산다 하더라도 똑같은 경험이 되풀이 될 뿐이다. 궁극의 경험은 존재할 수도 없지만,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비교할 게 사라진 순간 평범함으로 퇴색되고 만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은 천국에서도 영원한 만족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조언을 얻으세요, 결국엔 마음대로 하겠지만


이처럼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는 엄청난 오류가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오류를 피해 그나마 객관적인 미래를 도출해 내는 방법이 없을까? 그건 바로 기경험자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미래를 현실로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고시를 패스한, 삼성전자에 입사한, 떼 돈을 번 선배들의 강연이 비온 뒤 독버섯처럼 무수히 열리는 게 아닌가.


그런데 강의에 나온 선배의 말이 요상하다. 그토록 원하던 회사에, 시험에, 사업에 성공했는데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곧 이 일을 그만두고 낙향해 농사를 짓겠다고 말한다. 여러분들도 결국엔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테니 지금 이런 일에 목숨을 걸지 말고 좀 더 가치있고 행복한 일을 스스로 찾아보라고 덧붙이면서.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선배는 미친게 틀림없다. 저 사람은 성공을 너무 쉽게 얻었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버리려는 것이다. 선배는 요령있게 설득해 보지만 한 가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나'는 선배가 아니다. 나는 당신과 다른 사람인 것이다. 내 인생에선 이게 전부다. 나는 이것만 이루고 나면 더이상 아무것도 바랄 게 없다. 저 사람은 지금 내 갈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특별'한지 모른다. 내 갈망은 누구보다도 강하다.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우리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다. 당신의 갈망은 결코 '특별'하지도 '누구보다 강하지'도 않다. 우리는 모두 정규분포 곡선의 불룩 튀어나온 정상에 서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보통의 존재일 뿐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읽고도 이런 비관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니, 역시 나에겐 좀 특별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네가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었다면, 너는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대신 이 책 자체를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을 것이다.


아멘.




 
 
 

*막대한 양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반드시 영화를 본 뒤에 읽으십시요.



나는 단 한 번도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적이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미래에서 온 안드로이드거나 슈퍼 컴퓨터가 만들어낸 홀로그램이 분명하다. 이 남자의 영화를 보는 건 최첨단 냉장고의 매뉴얼을 읽는 것과 같다. 로봇이 아니라면 이렇게 뻣뻣한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는 항성간 우주 여행을 소재로 다룬다. 이는 이 영화가 배트맨, 인셉션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과학 이론을 활용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전 공부 없이 영화의 내용을 100% 이해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당신의 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인터스텔라>의 모든 걸 이해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와 결혼 할 것을 권유한다. 당신의 옆에서 팝콘을 씹는 그 오징어가 세계 상위 0.1% 이내의 천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과 시간의 상대성


<인터스텔라>의 시간 지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알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시간은 전 우주에 걸쳐 동일하게 흐르는 절대적 물리량이 아니다. 시간은 물체의 속도 혹은 물체에 가해지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 데, 물체의 속도가 빨라 질수록 중력이 강해 질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이 말은 우리가 지구 보다 중력이 10배 강한 행성A로 이사를 갈 경우 10배 느린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편의상 중력의 세기와 시간 지연이 정비례한다고 가정했다). 그렇다고 행성A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입장에선 지구에서 보내는 1년과 행성A에서 보내는 1년은 체감상 완전히 동일하지만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는 행성A의 사람들이 지구인 보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행성A로 이사간 인류의 수명이 지구인의 10배로 늘어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행성A에서 10년을 산 뒤 지구로 돌아올 경우 우리가 떠날 당시 알고 지냈던 친구들은 거의 죽고 없을 것이다. 시간 지연 현상은 우리를 그저 상대적으로 오래 살게 해 줄 뿐이다.


<인터스텔라>의 초반 밀러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이 같은 시간의 속성을 잘 표현한다. 밀러 행성에서의 1시간은 지구에서의 7년에 가깝기 때문에 여기서 3시간을 보낸 주인공이 인듀어런스호에 도착했을 때 성년이 된 가족의 영상 편지를 받게 된다. 


밀러는 이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발견하고 적합 신호를 보냈다. 이 신호를 받자마자 쿠퍼 일행이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밀러 입장에선 자신이 도착한 뒤 고작 몇 십분 만에 쿠퍼 일행이 도착한 셈이 된다(쿠퍼 일행이 토성의 웜홀까지 2년을 비행하고 웜홀 통과 후 바로 밀러 행성을 찾았다면 아무리 길어도 3년은 안됐을 거고 1시간이 지구의 7년과 같은 밀러 행성에서 이는 고작 20~30분 밖에 안되는 시간이다). 행성을 탈출하며 브랜드가(앤 해서웨이) 했던 대사가 이해 되는 대목이다.



밀러는 우리가 도착하기 고작 몇 십분 전에 죽었을 거에요



블랙홀과 사건의 지평선 그리고 슬링샷


영화를 봤다면 '지평선'이라는 단어가 몇 차례 등장하는 것을 봤을 것이다. 이는 사실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을 그냥 지평선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사건의 지평선이란 블랙홀의 중력 경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체든 이 지점을 넘어가게 되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영원한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한다.


영화 후반부 쿠퍼 일행은 연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건의 지평선을 이용한 중력 슬링샷을 시도한다. 이는 우주선을 사건의 지평선 가까이로 몰고가 안전 궤도로 진입, 일정 시간 비행 후 궤도를 탈출함으로써 궤도를 회전하면서 얻은 가속력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공에 줄을 묶고 빙빙 돌리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이 때 공을 매달은 줄을 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회전 시 얻은 속력을 바탕으로 하늘 멀리 날아가 버릴 것이다. 쿠퍼는 사건의 지평선 궤도 진입 후 인듀어런스호에 도킹한 두 대의 우주선으로 재추진을 하는 데 이 재추진이 바로 공의 줄을 끊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중력을 이용한 정보 전달


영화 내내 중력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겠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적은 없기에 나름대로 추측을 해본다.


우선 디지털 정보는 모두 '0'과 '1'로 기술할 수 있기 때문에 우주선의 특정 물체에 중력을 전달하고(1) 전달하지 않는 것(0)으로 원하는 모든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쿠퍼가 머피의 시계 초침을 움직인 방법도 바로 이것). 특히 중력의 전달 속도는 광속이고 전달 거리가 무한대이기 때문에 멀리 나가 있는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할 신호로 중력만한 게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의 아주 작은 물체에 중력을 전달할 만한 정교한 기술이 존재하냐는 것이다. 인류가 이 정도로 중력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플랜A의 실현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쿠퍼는 블랙홀에 빠진 뒤에도 중력을 이용해 특이점의 관찰 정보를 송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알다시피 블랙홀의 내부에선 어떠한 정보도 빠져나갈 수 없다. 물론 호킹복사라고 불리는 열이 방출되기는 하지만 이 열은 모든 정보가 뭉개져 있는 상태이므로 그것이 가스불인지, 모닥불인지, 샤넬 백을 원하는 여자 친구의 불타는 욕망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가설은 중력이 '중력자'라고 불리는 물체를 주고 받으면서 전달된다는 양자화된 중력 이론을 이용하는 것인데... 여기서부터는 나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니 이만하고 넘어가도 크게 탓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플랜A, 플랜B


플랜B는 명확하다. 인듀어런스호에 수정란을 싣고 가 적합 판정을 받은 행성에서 새로운 인류를 양성하는 것이다. 만 박사와(맷 데이먼) 아빠 브랜드는(마이클 케인) 애초에 플랜A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쿠퍼 일행을 속여 여행에 나서게 한다. 문제는 진실을 알게 된 쿠퍼가 지구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 이렇게 되면 만과 아빠 브랜드가 계획한 플랜B의 실행이 물거품이 되므로 만이 쿠퍼를 죽이려 한 것이다. 


문제는 플랜A다. 너무 잠깐 언급되는 바람에 이해하기 힘들지만, 힌트는 아빠 브랜드가 쿠퍼를 로켓 발사대로 데려간 뒤 뭔가 이상한 점을 못느끼겠냐고 물어보는 장면이다. 쿠퍼는 "발사대 전체가 원심 분리기 군요"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플랜A는 강력한 원심력을 이용해 지구의 중력을 상쇄, 엄청나게 큰 우주선 혹은 나사 기지 전체를 들어 올려 적합 판정을 받은 행성으로 여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콜로니는 인류가 플랜A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나의 의문은 원심력으로 어떻게 지구의 중력을 상쇄시킬 수 있냐는 것이다. 사실 지구의 중력을 상쇄하기 위해선 우주선이 아니라 지구 자체의 자전 속도가 빨라져야 한다. 이 경우 지구 바깥 쪽으로 큰 원심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물체를 지구 안 쪽으로 당기려는 중력을 상쇄할 수 있다. 물론 우주선 주변에 자석을 달아 빠르게 회전시키면 자기장이 발생해 중력을 상쇄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쓰기 위해 중력 방정식이나 블랙홀 특이점의 관찰 정보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다른 누군가의 해설에 맡겨야 할 것 같다.





'그들'의 존재와 영화의 결말


특이점에서 5차원 큐브를 만난 쿠퍼는 이것이 미래의 인류가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완벽한 착각이다. 생각해보자. 미래에 인류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문제가 해결 되어 인류가 살아 남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미래인에게는 과거의 인류를 도울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물론 미래의 인류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면 그들이 과거에 개입하려는 이유가 성립된다.


인류는 어찌저찌 살아 남아 웜홀을 만들고 블랙홀 특이점에 원하는 시공간을 만들어 놓을 만큼 기술을 발전시키기는 했으나 여전히 옥수수 재배의 미스테리는 풀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먹을 식량은 50년 치도 남아 있지 않다(영화에 따르면 웜홀이 생긴건 48년 전이다). 그러니 웜홀을 뚫어 과거 인류에게 지구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지구를 떠나기 위해선 중력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데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하니 직접 알려주기보다는 블랙홀 특이점에 그 해를 숨겨 놓겠다.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말아라. 너희들도 정답을 찾는 재미는 누려야 하지 않겠니?


뿡야!


만에 하나 5차원 큐브가 인류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쿠퍼 일행과 같은 시공간 차원에 존재하는 인류는 아닐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우주와는 완전히 별개인 또 다른 우주, 즉 평행우주의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만약 미래인이라면 나는 결코 과거에 개입해 미래를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꾸려는 과거가 현재와 멀수록 역사의 변수가 너무 많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내가 과거를 바꿨다고 내가 원하는 미래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 과거의 특정 사건 하나를 바꿀 경우(물론 결정적 계기이기는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미래가 확정되는 것처럼 그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머피에게 방정식의 해가 전달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의 사건은 톱니바퀴 물리듯 착착 진행되어 원하던 미래가 올거라 생각하지 머피가 그 해를 스위스 개인 금고에 넣어두거나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다 감전되어 죽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래가 이런 식으로 구성되는 게 맞다면 미래를 바꾸기 위한 우리 노력이 사실은 정해진 미래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거대한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인터스텔라>는 중력이라는, 인류 최강의 속박을 벗어 던지고 기어이 우주로 향하는 인간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 놀란에게 이와 같은 운명론은 모욕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124세가 된 쿠퍼는 콜로니에서 머피를 만난다. 이 때 머피는 쿠퍼에게 브랜드가 도착한 별로 가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분명 '우리는 그곳으로 가지 않겠다'는 뉘앙스가 있었다. 콜로니의 환경도 이 주장을 뒷받침 한다. 만약 전 인류를 새로운 행성으로 이송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콜로니 안에 밭과 집을 만들 게 아니라 수 백, 수 천만의 동면 장치를 설치했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콜로니는 토성 궤도를 돌고 있었을까? 웜홀을 통과해 새로운 행성으로 가기 위함인가? 아니다. 붕괴된 특이점에서 빠져나온 쿠퍼가 웜홀을 통해 토성 궤도에 등장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머피는 쿠퍼를 구조하기 위해 수 년 혹은 수십 년 간 토성의 궤도를 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좀 전에 과거의 특정 사건이 바뀌면 이후 개인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미래가 고정되는 것이냐고 물은 바 있다. 만약 머피가 콜로니를 이끌고 웜홀을 건너 새로운 행성에 도착했다면 온 힘을 다해 지구 멸망이라는 운명을 거부한 머피가 새롭게 확정된 밝은 운명에는 아무 스스럼 없이 순응하는 웃지 못할 결과를 낳는다. 인간은 자유의지 없이 '그들'이(신, 외계인, 평행우주의 인류 등) 인도하는 미래를 따라야만 하는가?


머피는 이러한 운명을 거부한다. 


머피는 콜로니를 끌고 새로운 행성으로 가지 않고 아버지만을 보낸다. 쿠퍼와 브랜드는 그 곳에서 새로운 인류를 성장시킬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인류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기꺼이 서로를 돕고 협동하는 신인류로 성장할 것이다. 이를 위해 오염된 우리 구인류는 영원히 우주를 돌며 살아가겠다.


진보는 어둠에 항복하지 않고 분노를 외치는 인류의 노래에서 탄생한다. 절대 어둠에 굴복하지 말라. 그 어둠은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 모든 종류의 운명론이다.



놀란이 노래합니다, 오로지 실재만이 실재를 전달해요


배트맨 시리즈와 인셉션으로 30억 달러(3조 이상)가 넘는 수익을 올린 탓에 영화 제작에 관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꺼내 쓸 수 있는 ATM기를 선물 받은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번에도 엄청난 규모의 세트와 Non-CG 특수 효과를 선보인다.


그는 인터스텔라의 광활한 옥수수 밭을 찍기 위해 3년 동안 30만 평의 땅을 사들여 직접 옥수수를 심었고,



무독성, 생분해 골판지 C-90을 갈아 실제 모래 폭풍으로 사용했으며, 



이 정도 우주선은 기본으로 제작했는가 하면,



아일랜드 로케이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모든 사실이 크리스토퍼 놀란을 신화화 하는 데 한 몫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재밌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인터스텔라>는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내용과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웬지 재미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소개팅에서 만난 못생긴 남자가 알 수 없는 짓을 하면 변태, 오타쿠, 찌질이가 되지만 잘생긴 남자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면 신비스러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매력남이 되는 것과 같다. <인터스텔라>가 딱 후자의 경우다. 그러니 이 영화에 광분하여 난리를 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의심의 눈초리로 보라. 의심은 광명을 안겨줄지니, 저리로서 사기꾼과 멍청이와 오타쿠를 구분해 줄 것이다.





 
 
표맥(漂麥) 2014-11-10 08:44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근래 SF영화 중 가장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이 마다의 생각차이겠지요. ˝블랙홀의 특이점에 도착한 쿠퍼는 5차원 큐브를 만난다. 이게 왜 5차원인지는 나도 모른다.˝고 하셨는데요. 나중에 다시보면 아시겠지만, 제 기억으로는 5차원의 존재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3차원의 공간을 꾸몄다는 설명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참고 바랍니다. 그래도 비평(?) 정말 잘읽었습니다.^^

WiredHusky 2014-11-10 13:07   URL
제가 글을 좀 잘 못 썼네요. 궁금했던 점은 `그들`이 왜 6, 7, 8차원의 존재가 아니라 5차원의 존재이냐 였거든요. 보통 인간은 3차원 이상의 공간이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는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놀란은 과연 5차원의 존재를 어떻게 표현할까, 그걸 굉장히 기대했는데 다소 맥빠지는 상황이 나와서 약간 실망을 했습니다. 댓글을 보니 특이점에서 만난 건 3차원 큐브였군요.

<인터스텔라>는 객관적으로 잘 만든 영화고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단지 제 기대치가 너무 높았을 뿐입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2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홍서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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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라. 당신과 눈을 마주치는 젖소의 두 눈이 순진무구해 보인다 해서 이 젖소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 젖소는 쿠키다. 만든 사람이 있다.


모든 창작물에는 의도가 있다. "그냥 머리 속에 떠오른 걸 만들었을 뿐이에요"라고 하는 사람의 작품조차 의도를 갖는다. 단지 의식 하지 못할 뿐이다. 


이 경우 젖소의 두 눈은 책을 사달라는 의미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저 눈은 순진무구한 게 아니라 뭔가를 들켜 깜짝 놀란듯 동그랗게 치켜 뜬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숨겨야 할 의도를 들켰을 때 만큼 바보 같은 게 없다. 그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쿠키나 마찬가지다.


이 책은 전세계 10개 국으로 번역되어 저자 뮈리엘 바르베리에게 그럭저럭 명성을 안겨줬다고 한다. 이후 그녀가 출간한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113주 연속 프랑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그녀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줬다. 그러나 한국에는 113주 연속 프랑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무시무시한 책 대신 전세계 10개 국으로 번역되어 그럭저럭 명성을 안겨준 <맛>만이 번역되어 있다.


나는 꿩대신 닭을 먹으며 닭에서 난 맛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책은 음식에 관한 소설이다. 뿡야!


소설의 제목을 단 한 단어로 지을 수 있는 작가는 비범하다. 주저하지 않는다. 망설임이 없다. 자기 작품에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작품에 확신을 갖는 작가의 문장이 온갖 장황한 수사로 채워지는 건 이상한 일이다. <맛>의 화려한 문장은 풍부함일 수도 있고 빈약한 알맹이를 감추려는 위장일 수도 있다. 아니면 프랑스인 고유의 종특(인종 특성)이거나.


프랑스 요리는 화려하다. 성게, 어린 토끼의 등심과 콩팥과 간, 메밀, 대구, 아그리아(감자의 한 품종), 남프랑스 산 보라색 마코, 굴, 거위의 간, 고등어, 파, 푸른 오이, 코미스 배, 육두구, 비둘기, 건과, 통카 콩을 재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이를 산초로 양념하고, 으깨서 굽고, 향료를 넣어 삶고, 늘어붙은 즙을 버터, 크림, 술, 물, 식초 등으로 녹여 소스를 만들고, 베샤멜 소스와 달걀 노른자 또는 래디시, 마들렌을 곁들인다. 프랑스 요리는 까다롭다. 알리오 올리오라거나 고르곤졸라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저 장사꾼들의 거리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넘쳐나도 프랑스 요리 전문점은 없는 이유를 알겠는가.


프랑스 요리는 모두 허세다.


난 허세를 사랑한다.


<맛>은 텍스트로 '맛'을 전달하려는 불가능한 과제를 완벽한 전략으로 농락한다. 


고소하니 달콤하니 짭쪼름하니 부드러우니 쫀득하니, 맛 자체를 묘사하는 건 유치하고 멍청하고 비효율적이다. 익숙한 요리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맛을 전달할 수 있다. 소스를 자작하게 끓여 바싹 튀긴 탕수육,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과 생마늘, 기름장에 찍어 깻잎쌈 위에 올린 차돌박이, 초고추장과 골뱅이를 넣고 비빈 국수, 크게크게 문어를 썰어 넣어 부친 파전, 양파와 청양 고추에 초간장을 넣고 절인 장아찌, 얼음 송송 시원한 동치미를 말은 막국수. 내 말이 맞지?


완성된 요리의 외형을 묘사하는 방법도 있다. '사과 타르트. 얇고 바삭거리는 타르트 판과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수정 같은 설탕 캐러멜이 살짝 얹힌 도도한 과일'(p.86). 


요리 과정을 설명할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태국산 쌀을 조심스레 헹구고 작은 은빛 체로 물을 뺐다. 냄비에 넣고 소금 탄 물을 한 배 반 부은 다음 뚜껑을 덮고 끓게 놓아두었다. 세심하게 새우 껍질을 벗겼다. 주철 프라이팬을 불 위에 얹고 올리브유를 한 가닥 부은 다음 달구어진 팬에 벌거벗은 새우들을 흩뿌려 던졌다. 그다음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카레. 이 관능적인 가루가 이국적인 황금빛으로 갑각류들의 분홍 구릿빛을 장식했다. 소금, 후추를 치고 프라이팬 위에서 고수 한 줄기를 가위로 잘게 잘랐다'(p.66).


프랑스 대혁명 시절 플롱 드 두에는 굶주린 민중을 향해 "빵이 없으면 건초를 먹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봐, 프랑스 요리가 아무리 위대해도 동물의 건초를 맛있는 음식으로 요리해낼 정도는 아니잖아. 프랑스 시민은 플롱 드 두에의 머리를 잘라 장대에 꽂았다. 그의 입에는 건초가 물려 있었다. 그런데 건초를 입에 물리고 머리를 잘랐을까, 머리를 자르고 건초를 물렸을까?


뿡야!


줄거리 얘기를 좀 해주면, '나'는 위대한 요리 비평가다. 말 한 마디로 유명한 레스토랑을 망하게도 별 볼이 없는 음식점을 세계 최고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온갖 좋은 음식만 다 먹고 다녔음에도 70세도 되지 않아 심장에 이상이 생겨 죽게 된다. 남은 건 48시간이다. 이 48시간 안에 그 동안 먹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최고를 찾고자 한다.


"범인은 심은하다"라거나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라거나 혹은 "절름발이를 믿지마"라고 외치는 사악한 스포일러가 되 온갖 비난과 경멸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항상 동일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 그 패턴은 성경의 '돌아온 탕자' 비슷해 보이지만 가장 흡사한 이야기는 역시 '파랑새를 찾아서'일 것이다. 새 한 마리를 찾아 별의 별 고초를 겪으며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사실은 우리 집 앞에 앉아 있었다는 식의 더럽게 허무한 이야기나는 이런 식의 결말을 오늘부터 '파랑새 증후군'이라 부를 것이다.

특히 '맛'의 세계에서 '파랑새 증후군'은 맹위를 떨쳐왔다. 칼, 냉장고, 솥, 냄비 등 8가지 전설의 요리 도구를 찾아 떠나는 '요리왕 비룡' 1편에서 주인공은 사천 지방의 화려한 음식 대신 엄마가 해주던 계란 볶음밥으로 대결 상대를 꺽었고 '심야식당' 시즌1 5화는 일본 최고의 미식가가 결국 공산품 버터를 넣고 비빈 간장밥에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그린 바 있다.


죽기 직전 '나'가 찾은 최고의 음식은 슈케트 였다. 그것은 최고급 제과점에서 반죽하고 굽고 크림을 채워 넣은 딱딱하지도 물렁하지도 쫀득하지도 탄력이 없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완벽한 슈케트가 아니라 봉지면에 눅눅하게 설탕이 늘어붙은 슈퍼마켓 슈케트였다.


'나'는 커녕 심지어 저자 조차 모르는 것 같길래 말해주면, '나'는 심장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나'는 굴과 푸아그라와 콩과 오이와 파와 고등어와 식초와 물과 양배추와 밀가루와 카다멈과 고수와 호로파와 온갖 종류의 생선, 고기, 와인의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이다. 평생을 질펀한 식도락에 빠져 흥청망청 살아온 네가 무자비한 어금니 사이에서 온 몸이 으깨지고 날카로운 송곳니에 잘리고 음탕한 혀에 농락당한 음식들을 제쳐놓고 슈퍼마켓 슈케트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 주다니. 너는 은혜를 모르는 놈이다. 죽어 마땅한 놈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이다. 그 중 팔할은 나의 저주라 해도 부인하지 않겠다. 



 
 
 
신학-정치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김호경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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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그래서 불안을 떨쳐낼 수 있었다면, 종교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도 존재한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초기의 종교는 언제나 소박하고 진실하다. 나쁘게 말해, 덜 체계적이다. 지도자들은 부족한 체계에 언제나 불안을 느끼기에 각종 형식이 더해진다. 형식이 체계적이고 화려할수록 종교에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는 언제나 억압적이다. 지도자들은 성전의 해석과 형식을 만들 권리를 독점한다. 반론은 불신으로 여겨지고 파문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이 등장한다. 이제 사람들은 거룩한 신의 말씀을 믿는 게 아니라 종교의 형식을 숭배한다. 형식을 숭배하는 한 종교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종교는 전쟁과 심판의 구실이 된다.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에 온 사람답게 스피노자는 천부인권으로서의 자유를 옹호한다. 이 자유는 물론 종교에도 적용된다. 생각해보라, 인간의 성향은 다양하므로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근거해 믿음의 원칙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이 자유로운 의지로 신에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p.24)


이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종교를 해석하는 데 그 중 옳고 그른 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인의 믿음은 오직 그의 행위에 따라서만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도덕이다. 쉽게 말해 믿음의 해석이 도덕적 행동으로 귀결된다면 그의 자유는 보장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행동이 아무리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해석이 성경 자체에서(신학-정치론은 기독교를 주제로 한다) 도출된 게 아니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예컨대 '윤회'를 믿는 사람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평생 도덕적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윤회'를 가르치지 않기에 그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해석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므로 스피노자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성경의 해석법으로 옮겨 간다.  스피노자 이전의 교리 해석은 그리스 철학이 중심이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 교부 철학의 아버지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반으로 한 사상가였다. 그런데 성경의 해석을 위해 왜 외부의 권위가 필요한 걸까? 이 같은 의문에 스피노자는 그 어떤 근본주의자 보다도 근본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성서는 오직 성서 자체로만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은 그 어떤 급진주의자 보다도 급진적이었다. 


스피노자 이전의 해석은 이미 씌어진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성서는 절대 오류가 없는 거룩한 문서였기에 교부 철학의 목표는 모순된 성서의 내용을 철학을 이용해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성서를 씌여진 언어의 문법을 고려하고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텍스트로 간주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당시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비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한술 더 떠 신학을 정치에 귀속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스피노자는 기독교의 모든 문제가 특정인에게 성서 해석의 권위가 집중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텍스트로 만들고 그 해석의 권한을 만민에게 부여하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는 한 이 같은 자유를 보장하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종교는 정치에 귀속되야 한다. 오로지 정치만이 특정 신앙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우위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신학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는 신학도 결국엔 인간의 삶을 평화롭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인간이 평화롭지 않다면 아무리 거룩한 뜻을 가졌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피노자의 신학은 신을 빙자한 사회학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 새로운 신학 안에선 신조차 초월적 실체가 아닌 지고의 도덕 선생님으로 존재한다. 


종교가 도그마였던 시대에 이보다 더한 신성모독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종교의 권위가 급속이 무너져내리던 과도기이기도 했다. 중세의 신학과 근대의 철학이 격전을 벌였다. 싸우려는 욕구가 충만한 시대엔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선택해야 명성을 얻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신학에서 벗어난 듯 보이면서도 신학으로 돌아가고 신학인듯 하면서도 기존의 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렌즈를 깎으며 생계를 유지했던 은둔 철학자의 운명이, 바로 여기서 결정됐다. 


그러나 선각자의 앞선 사상은 결국 역사가 보증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날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위험 요소가 있다면 바로 종교가 아닐까? 은둔자의 이해 받지 못한 신학이 비로소 빛을 발할 시대인 것이다. 



 
 
 
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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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처하는 법


사랑하는 사람과 목숨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봤거나 잃어본 상상을 해본 사람은 안다. 


압도적 고통의 무게를. 


사랑하는 사람 대신 내가 죽겠다는 건 평생 내가 살면서 지고 가야 할 슬픔의 무게를 상대방에게 전가하겠다는 얘기다. 따지보고면, 이기적인거야.


어려운 건 복수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 여기엔 인생을 걸어야 한다. 실패할지도 몰라, 불안과 초조가 홍수처럼 밀려온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있다. 이 남자는 우아하다. 자기 능력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자를 찾아 복수하기 보다는 연인을 되살리고자 마음 먹었다. 지옥문을 지키는 켈베로스를 자신의 뛰어난 연주로 잠재우고 지옥으로 갔다. 지옥의 왕과 왕녀 하데스와 페르세포를 만나 또 하나의 음악을 연주했다. 왕과 왕녀는 감동 받았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연인의 삶을 되돌려 달라고 한다. 욕심을 너무 부렸다. 연인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했어야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도 '어쭈 이것 봐라?'라는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시련을 더한다. 지옥을 나설 때까지 절대 뒤돌아 보지 말 것. 지상을 두어 걸음 앞둔 오르페우스는 방심했고 뒤를 돌아봤다. 연인은 다시 끝모를 지옥으로 끌려 갔다.


<세상의 마지막 밤>에는 마테오와 피포가 나온다. 피포가 주인공이다. 마테오는 피포의 아버지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어느 평범한 아침 마테오는 피포의 손을 잡고 등교길에 나선다. 약간 늦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재촉해 빨리 걷는다. 상기된 아버지의 얼굴에 손이 아프다는 말도 못한채, 질질 끌리듯 따라간다. 어느 골목에 들어섰을 때 마피아의 총격을 받았다. 아들이 죽었다.


아내는 아들의 복수를 원했다. 마테오가 그 더러운 마피아 놈의 심장에 차가운 총알을 꽂아 넣길 원했다. 아버지는 해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났다. 어려운 건 복수라니까.


택시 운전수 였던 마테오는 일은 하지 않고 도시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평생 동안 지옥을 연구한 교수를 만난다. 교수는 지옥의 문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르페우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옥에 내려간 피포를 찾은 마테오는 아들을 안고 경계에 선다. 두어 걸음 앞에 세상이 있다. 마테오는 비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남자였다. 


죽음 하나에 삶 하나. 


마테오는 지옥의 문 밖으로 피포를 던져 삶과 죽음의 거래를 끝마친다. 20년 뒤 피포는 마피아를 찾아 배를 가르고 20년 전 그 날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을 모두 자른다. 비겁한 아버지가 용감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복고의 아이러니


문학에서 서사가 사라지고 있다. 너무 오래됐으니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만화, 드라마는 여전히 강력한 서사의 힘을 뽐내며 끝없이 반복되는걸? 문학은 그 반복이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와 만화, 드라마가 2,000년 넘게 계속된 건 아니니까, 질림의 수준은 다를 수 있는 거다. 다른 가능성은 타 매체가 보여주는 서사의 천박함에 화가난 경우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왔는데 그걸 이 따위로!


<세상의 마지막 밤>은 프랑스인이 로랑 고데가 그린 고전적 서사의 전형이다. 어느 곳 보다 빠르게 서사가 멸종한 프랑스. 그런 프랑스에서, 마치 고대의 부활을 외치듯(르네상스!), 저자는 그리스 신화의(서사의 기원!) 모티브를 보란듯이 차용한다. 


지옥 여행자 오르페우스.


로랑 고데는 오르페우스가 가져온 삶과 죽음의 빵 사이에 부성애를 끼워 2,000년도 더 된 평범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 옛날 식 샌드위치가 오히려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니, 정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독하다세상에 새로운 일은 없고 오직 옛것이 돌고 돌며 되풀이 된다는 말은 과연 진실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 


그러나 이 서사가 현대적 프랑스와 거리를 둔 신선한 반향일지는 몰라도 현대적 대중성을 내재한 흥미진진한 지옥 여행은 아니라는 점은 알아뒀으면 한다. 프랑스인은 죽었다 깨나도 <해리 포터> 같은 건 쓸 수 없거나 그런 걸 쓰기엔 너무나 우아한 민족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