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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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라 불리운 사람들


흔히 장르 문학의 대가라 불리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해당 장르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된 세계관, 혹은 테마의 원형을 창조했다.

둘째, 바깥의 의견은 관심 밖. 오로지 자체의 형식과 체계를 단단히 해 범접할 수 없는 장르의 성벽을 쌓아올렸다.

셋째, 심오한 주제 혹은 독특한 문체를 더해 장르 문학을 순수 문학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첫 번째에 속한 작품을 현대에 와서 읽는 건 상당한 실망을 유발할 수 있다. 당신은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라는 의문을 수 없이 되뇌이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을 만든 사람입니다'라는 틀에 박힌 평가를 내놓을 뿐이다


두 번째에 속한 작품은 읽는 건 상당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성벽은 까마득히 높고 또 낯설어 감히 올라갈 엄두 조차 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올라가 성 안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곳이 긱과 괴짜들의 소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게 세 번째에 속한 작품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바로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소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한 마디로 말하면 -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지만 - 로저 젤라즈니는 심오한 베르베르 이자 문학을 전공한 테드 창(<내 인생의 이야기>의 저자, 공학을 전공함)이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SF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가 방점을 찍는 곳은 과학 기술이 아니다. 그는 종교와 신성, 인간의 정복욕과 자기 파괴욕, 불사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이중성, 판타지와 신비주의 등 철학적, 신화적 관념을 적극 흡수함으로써 쇠 맛이 전혀 나지 않는 SF를 만들어낸다. 이는 'S'에 천착하려는 골수 팬들에겐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풍부한 상징과 상상력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선 가히 장르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특히 소설이 드러내는 강한 판타지적 요소에서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술했듯 젤라즈니가 관심을 갖는 영역은 종교와 신화, 신비주의 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러한 소재를 다루기엔 아무래도 전통적 'S'F 보단 판타지가 결합된 새로운 서사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이유야 어떻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젤라즈니의 작품이 단순한 장르 문학에 그치지 않고 위대한 신문학에 이를 수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SF에 바치는 장미


흔히 오타쿠들의 소설, 머저리 괴짜들의 이야기로 알려진 SF는 많은 사람들의 경멸을 받아온 장르였다. 과연 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SF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독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할 지식인 박경철은 자기 인생을 통털어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 중 하나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꼽은 적이 있다. 특정인의 권위에 힘 입어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니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유명인이 있다는 게 일말의 안도감을 주는 건 사실이니 거기에 힘 얻어 한 마디 하겠다. 로저 젤라즈니의 SF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장르다.


혹자는 신에 대한 고찰은 니체로 충분하고 신화의 세계는 이미 조 프레이저가(<황금가지>의 저자) 끝낸 바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며 SF 무용론을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이야기의 전달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컨대 신성이란 '신성'이라는 단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지닌 캐릭터가 특정한 세계 속을 헤집고 다닐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난 실체는 온갖 학문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표현한 개념을 초월한다. 개념을 초월해 실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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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림으로 빽빽히 둘러 쌓여 산 속은 컴컴했다. 컴컴한 그 산을 사람들은 흑산이라 불렀다. 오늘날 홍어로 유명한 이 섬은 1801년 부터 1816년 까지, 정약전이 16년간 유배를 산 섬이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큰 형이다. 김훈의 <흑산>은 정약전의 이야기다. 



익숙한 나라의 익숙한 백성들


김훈은 늘 역사적 인물을 그리지만 역사적 인물만을 그려본 적은 없다. 어쩌면 그는 민초들의 삶을 그리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빌려오는 걸지도 모른다. 김훈의 소설엔 이처럼 바글거리고 개미처럼 짓밟히는 민초들의 삶이 존재한다. 백성은 그의 소설 속에서 언제나 고통으로 실존을 증명한다.


정약전은 유학의 이념이 지고한 시절 사특한 학문(천주교)에 빠져 사직을 능멸하고 군왕을 욕보인 죄로 흑산에 유배됐다. 사학에 물든 양반은 유배를 당하지만 사학에 물든 백성들은 곤장에 맞아 엉치뼈가 뒤틀리고 척추가 깨져 죽었다(김훈은 원고지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눌러 적는다는 데, 그래서인지 민초들의 엉덩이에 내려지는 곤장의 무참함이 읽는 사람의 피부에까지 전달된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건 매를 맞고 죽어간 백성들이 아니다. 매를 맞고도 살아 목숨을 연명한 백성들이다. 


김훈은 역사를 옮겨 다니며 늘상 같은 고통을 늘어놨다. 따지고보면 신라의 철제 도끼를 머리에 맞고도 살아난 자들의 자식이(<현의 노래>) 충무공의 수군을 따라 피난지를 옮겼던 백성들(<칼의 노래>)일 것이며 울음이 잠시 그친 피난지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남한산성(<남한산성>)에 갇혀 신음한 백성들이고 그 신음 속에서 잉태된 생명 바로 곤장에 엉치뼈가 뒤틀리고 척추뼈가 깨진 <흑산>의 백성들일 것이다.


김훈의 소설 속에서 고통은 역사와 무관한, 그 어떤 변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영속적 실재이거나 혹은 역사의 본질이다. 안타까운 건 둘 중 뭐가 맞든 우리는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생을 이어가고자 하는 민초의 생명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젠가는 고통이 없는 곳에 이를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아니면 그 숙명을 깨닫지 못해 바둥거리는 어리석은 몸짓일까? 김훈은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에게 대답을 바라는 건 똑같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기자와 소설


김훈은 기자였다. 김훈은 소설가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은 기자가 쓰는 소설이다. 아니 소설가가 쓰는 기사일지도 모르겠다. 김훈은 곤장에 맞는 백성과 그 백성의 피와 똥으로 범벅된 형틀과 그 형틀이 놓은 끔찍한 형장을 무심할 정도로 담담한 문체로 훓는다. 그러나 담담함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 문체는 김훈의 태생적 한계이거나(뼛 속까지 기자) 사실을 온전히 사실로만 전달하고픈 강박의 산물인 것이다. 김훈은 여지껏 한 번도 소설을 쓴 적이 없거나 아니면 한 번도 소설가였던 적이 없다. "김훈은 언제나 '기사'만 쓴다'는 박경철(시골의사)의 평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역사적 사실에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공평한 것인가 비겁한 것인가? 공평과 비겁과 이쪽과 저쪽, 온갖 말이 말을 물고 말을 쫓는 허황된 말의 세계에선 오로지 지금, 여기에, 산다는 것만이 중요한 일일까? 나는 그가 견뎌온 역사의 무참함을 모르기에 그 침묵의 이유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나는, 너무나 외람된 말을 지껄인건지도 모르겠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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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하다보면 프레임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목격할 기회가 많다. 예를 들어 사용자들이 실수로 삭제 버튼을 눌러 모든 자료를 지우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시오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치자. 이 때 대다수의 디자이너들은 삭제 버튼을 잘 안 보이게 디자인하거나 버튼을 눌렀을 때 안내 문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화면 내에서 '삭제' 버튼을 제거하는 것이다. 실제 삭제 버튼 없이도 시스템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동작하지만 사람들은 '삭제 버튼의 문제점을 해결하라'는 질문이 형성한 강력한 프레임 덕분에 문제 자체를 '없애려'기 보다는 기어이 그것을 '해결'하려 든다.


앨버트 O.허시먼이 보수주의자들의 수사학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담론은 어떤 근본적인 성격적 특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욕망, 성격, 신념과는 거의 무관한 '논쟁의 규범들'에 의해 형성된다(p.17)'고 말했다.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프레임을 깨지 않고선 우리는 그들의 규칙 안에서 영원히 진흙탕 싸움을 벌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보수의 수사학을 꿰뚫어 봄으로써 그들의 올가미를 피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역효과 명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 서울 시장에 출마한 정몽준 후보가 반값 등록금을 두고 했던 말을 기억해 보자. 그는 반값 등록금이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떨어뜨리고 대학 졸업생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을 훼손시킨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바로 보수의 첫 번째 프레임, 역효과 명제다. 더 좋은 삶을 위한 당신의 노력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말이다. 정몽준 후보의 발언은 이미 반값 등록금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확고하게 형성된 탓에 그닥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보수주의자들의 전형적 수사학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사실 이런 역효과 명제는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반값 등록금 쟁취를 위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이 있다고 하자. 비겁함을 갑옷처럼 두르고 살아온 어른들은 그 학생들에게 집에 들어가 공부나 하라고 할 것이다. 너희들이 더 좋은 삶을 위해 발버둥 칠수록 공부할 때, 취업할 때를 놓친 너희 개인의 삶은 더 깊은 시궁창에 빠질 것이라고 점잖게 타이르면서 말이다.



무용 명제, 무엇을 하든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명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명제는 대다수 현대인이 깊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파괴적인 보수의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역효과 명제는 설령 그것이 맞는 것으로 판명됐더라도 '이 방법은 틀렸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여지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무용 명제는? 그것은 심각한 허무와 극심한 무기력을 낳는다. 게다가 한 번 심어진 무기력과 허무는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강화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력과 허무는 그것이 외부에서 심어진 가상이라는 사실을 지우고 자기가 실제로 경험한 현실이라는 생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사회 변혁을 위해 큰 노력을 해본적도 없고 모든 게 무용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으면서 오늘날의 청년들이 보여주는 극심한 허무는 허무와 무기력의 내재화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나는 이런 무용 명제의 가장 멋있는 대응으로 영화 '변호인'의 한 대사를 꼽는다. '늬들이 아무리 데모를 해봤자.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송강호에게 임시완은 '아무리 단단해도 바위는 죽은 것이고, 계란은 살아 있기에 기어이 부화해 그 바위를 넘는다'고 말한다. 


현재만 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변화란 원래 실감하기 힘든 법이다. 그러나 삶에서 조금만 거리를 두고 역사를 바라보면 보수주의자들의 무용 명제가 얼마나 무용한지 알 수 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당신이나 나나 모두 종으로 살았을 것이다(조선 시대 양반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쉴새 없이 정부를 비판하는 난 이미 남산의 한 고문실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정치인들이 장충 체육관에 모여 그들만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넋 놓고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대통령 직선제는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폐지 됐다 1987년에 이르러 겨우 부활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된 게 채 30년도 안 된 것이다).



위협 명제, 너희들은 전부 빨갱이


북한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이토록 쉽게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보수주의자들은 앞에선 북한을 없앨듯이 노려보지만 뒤에선 그들이 존립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대한민국에선 표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빨갱이를 조지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선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갖거나(4대강 사업에 반대하거나) 아동 복지에 찬성하거나(무료 급식에 찬성하거나) 교육 기회의 확산에 동조하면(반 값 등록금을 지지하면) 누구나 쉽게 종북주의자가 될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과 손을 잡아 4대강을 살리고 아동 복지를 확립하고 많은 학생들에게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 준 뒤 내란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할 존재다. 정신병도 이만하면 중증에 가깝지만 그 바닥에선 가장 심한 정신병자가 가장 큰 영광을 받기에 정신병자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복지 정책은 꼭 색깔론이 아니더라도 국가 전체를 빈민의 소굴로 만들 것이라는 위협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복지는 필연적으로 국가 지출을 늘리며 부족한 세수는 증세를 통해 확보할 것이다. 호환마마 보다도 무서운 세금! 늘어난 세금 때문에 기업의 투자는 위축될 것이며 이는 곧 기술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져 기업이 도산할 것이다. 여기서 양산된 실업자를 감당하기 위해 국가의 지출은 더더욱 늘어나고 늘어난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살아 남은 자들에게 더더더욱 과도한 세금이 부여될 것이며 이로 인해 도산 기업이 폭포수 처럼 쏟아지고 바야흐로 실업자의 빅뱅이... 이 악순환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국가 경제의 완전한 파탄 뿐이다. 유럽의 복지 국가들이 수 십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지에 대한 이런 터무니 없는 위협이 먹혀든다는 건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수사학의 아이러니


보수란 간단히, 현재 상황에 불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들의 삼대 수사학인 역효과, 무용, 위협 명제의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가만히 있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여기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보수가 온갖 수사학을 동원해 우리의 길을 막으려 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보수는 자유와 평등의 빛을 가리기 위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두꺼운 켜튼을 쳐둔다. 이로써 세상은 캄캄한 암흑 속에 갇히겠지만 암흑은 오히려 우리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걔 중 가장 캄캄한 곳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온도계의 철학 - 측정 그리고 과학의 진보
장하석 지음, 오철우 옮김, 이상욱 감수 / 동아시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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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과학의 골수팬이라면 과학 철학을 변태 잡종 쯤으로 경시할지도 모른다.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라는 거겠지. 그러나 과학과 철학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에게 과학 철학은 강된장을 만난 보리밥이 될 수 있다.


과학 철학은 메타 학문이다. 거창하게 메타라고 써봤지만 사실 나도 메타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과학이 그릇에 담긴 물을 탐구하는 분야라면 메타 과학은 바로 그릇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그릇을 연구해서 뭐할 건데요?


물만 쳐다보는 사람에겐 호수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지 않는 법그릇을 더듬어 더듬어 더듬어 가다보면 물 속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물 전체의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릇을 연구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메타적 사고는 매우 생경하다. 우리는 초등 6년, 중학 3년, 고교 3년 총 12년 동안 받은 정규 교육에 불필요할 정도의 증오심을 갖고 있는 데, 이는 12년 동안 배운 지식들이 살아가는 데 혹은 직장을 얻는 데 혹은 일 잘하는 회사원이 되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비메타적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물론 한국 교육이 메타 교육을 지향한 것 같지는 않지만 사실 학교에서 수학을 배운다는 건 '수학적 사고'를 기르기 위함이지 수학 공식을 외우자는 게 아니다. 비메타적 사고 안에서 지식과 그 지식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상황은 오로지 1:1(일반적으로는 그것보다 더 낮은 비율로)로 대응할 뿐이지만 메타적 사고는 지식을 틀로써 이용하므로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극도로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선 이도저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당장 써먹을 방도도 없어 보이는 메타적 사고가 지나치게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200년 전만 해도 과학과 철학은 하나였다. 그 위대한 뉴턴조차 자연 철학을 연구한 '철학자'아니었던가. 피타고라스는 어떤가 그는 철학자이자 사운드 엔지니어였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물리학자였지만 그의 연구를 가능케 한 건 우주와 삶에 대한 그의 철학적 태도 덕분이었다. 전공을 하지 않으면 그 분야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프로페셔널 멍청이들은 뉴턴과 피타고라스와 아인슈타인이 철학과 과학을 '복수 전공' 했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그들이 처음부터 모든 걸 갖고 태어난 천재였다고 믿거나. 그러나 인류 지성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인들에게 쏟아진 찬사는 그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생각할 줄 안다'는 이유로 부여된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들은 메타적으로 사고할 줄 알았기에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분야를 매끈하게 연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철학>은 과학 철학서다. 메타 과학이다. 이 책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온도라는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다고 이 책을 말랑말랑한 과학 이야기 쯤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메타 과학이라도 과학은 과학. 무시무시한 공식이 등장하고 어마어마한 전문 용어가 쏟아진다. 번역도 그닥 온전치 않다.


그러나 온도계는 커녕 온도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에 '온도'를 연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걸 기억하자. 그들은 오로지 뜨겁고 차갑다는 감각만을 갖고 연구를 시작했다. 아주 짙은 안개 속에서 시작한 작은 여정이 끝내는 거대한 '앎'에 도달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터져나오는 뜨거운 경의를, 당신은 이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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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김규항은 오늘날 좌와 우를 가르는 기준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에 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그 이름만 듣고선 마치 숭고한 인권 운동을 연상시키는 '신자유주의'는 그러나 지난 30년 간 세계 경제를 극심한 빈부격차와 빈곤으로 빠뜨린 무시무시한 경제 역병의 이름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은 언제나 효율적이고 공정하니 무능한 정부 따위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규 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애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의 클래식 버전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왜 시장을 믿는걸까? 그건 개별 경제 활동에 대한 판단은 그것과 관련된 이해 관계자들이 가장 잘 내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경험도 정보도 부족한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삼성전자의 미래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에 반박할 여지를 찾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1997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엔 대우도 현대도 엘지도 삼성도 휴대폰을 만들었다. 당시엔 대우도 현대도 엘지도 삼성도 건설을 했다. 당시엔 대우도 현대도 삼성도 기아도 자동차를 만들었다. 당시 대기업들은 돈이 되는 곳이라면 우후죽순 손을 뻗쳤고 그걸 가능하게 한 건 높은 부채 비율과 계열사간 순환 출자였다. 가장 유망한 직종의 성장을 보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건 합리적 경영인이 할 짓이 아니다. 그들은 당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으로 새로운 시장에 진출했다. 기업은 커질대로 커졌지만 그 속을 채운 건 고름이었다. 1997년 그 고름의 쓰나미에 휩쓸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가. 신자유주의 맹신론자들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가 하면 인간의 욕망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혹자는 1997년의 외환 위기가 일시적 착란에 빠진 기업인들에게 내려진 시장의 철퇴였으며 결국 이 시련을 통해 우리가 글로벌 초일류 기업을 얻게 되지 않았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7년 이후 극도로 불안해진 고용 환경은 임금 노동자들의 권리를 쓰레기통에 쳐박았고 그들을 무한 경쟁의 칼날로 갈아버렸다. 시장의 은혜는 극소수의 부자들에게만 내려졌을 뿐이다. 


설령 시장이 개인의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 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모두의 장기적 이익으로 귀결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예를들어 당신이 현대 자동차의 주요 주주라고 해보자. 당신은 왜 파업도 잦고 힘센 노조를 가진 울산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지 않는가? 실제로 유명한 미국 제조 회사 중 대다수는 자국 내에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지 않다. 임금도 낮고 통제도 쉬운 개도국으로 생산 시설을 옮기면 더 큰 이익을 낼 것이고 이는 높은 배당과 주식의 시세 차익으로 돌아올텐데 말이다. 


이번엔 당신이 민영화된 전기 회사의 CEO라고 생각해보자(공기업 민영화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숙원이다). 당신이 이윤율이 낮은 도서지역의 전기 공급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대신에 당신은 지점을 폐쇄해 인력을 감축하고 그 부지를 팔아 막대한 부동산 이익을 거두는 데 집중할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이는 전체적인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지겠지만 어차피 독점 기업 아닌가? 사람들은 싫어도 당신 회사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 한 회사의 CEO로서 당신은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압력으로 자본 시장이 개방된 현대 사회에선 이같은 횡포가(합리적 판단)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은 거의 아무런 제약 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자본은 이익에 더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거대 자본은 개도국(한국도 포함된다) 알짜 기업의 최대 주주가 되어 회사와 임직원, 나아가 국민의 피를 빨아 먹은 뒤 그들이 아사 직전에 이르렀을 때 훌쩍 다른 나라로 옮겨갈 수 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경제 대국이라 자부하는 대한민국조차 론스타의 외환은행 먹튀, 상하이 자동차의 쌍용차 먹튀, 소버린의 SK 경영권 유린에 눈 뜬 채로 당할 수 밖에 없지 않았는가.


개별 이해 집단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대의나 윤리적 판단에 무심할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어떤 기업의 주주들이 자신의 월급 봉투가 얇아질 걸 알면서도 불량품에 대한 대규모 리콜을 단행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 포드 자동차는 제품 결함으로 인한 연료 탱크 폭발로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보험금 지급이 리콜에 드는 비용보다 싸다는 이유로 리콜을 거부한 적이 있다. 심지어 그 위대한 애플조차 '왜 환경 친화적인 기업을 만드느라 쓸데 없이 비용을 쓰냐'며 주식을 팔아버리겠다는 주주들의 협박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의 수명은 국가에 비해 짧다. 그리고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 보다도 짧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더 큰 이득을 취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고 기업의 영속성 보다(오너 기업은 예외) 당장의 월급 봉투를 부풀려 줄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다.


오로지 국가만이 이것을 초월할 수 있다. 국가는 장기적 발전이나 공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지금 당장의 손실을 감수할 수 있다. 국가는 고용 안정과 국민의 행복한 삶이라는 대의를 위해 생산 시설을 외국으로 옮기려는 기업,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 단기적 이익을 노리고 들어오는 투기 자본의 유입에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작은 정부는 이 같은 정부의 역할을 축소해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시장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건 아주 타당한 설득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주장에 대해 선뜻 반박할 논리를 찾기 힘들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수 많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정교한 이론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허상을 낱낱이 밝혀주는 이 책은 무척 소중하다.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에 비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훨씬 쉽고 친절하다. 이 책은 전문 경제학 분야가 으레 가질 법한 어려운 경제 이론과 복잡한 수학 공식을 포함하지 않는다. 장하준 교수는 언제나 역사를 통해 경제 이론을 검증한다. 역사는 언제나 경제보다 쉽고 친절하다.


공항과 철도를 팔아 먹으려 안달이 난 국가의 국민이라면, 복지 정책을 게으른 무능력자들의 파렴치한 요구로 받아들이는 국가의 국민이라면, 이 책을 '나쁜 사마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하준 교수 처럼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학자가 한국인이라는 건, 게다가 그가 약자의 편에 서 있다는 건 대한민국의 몇 안되는 희망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