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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E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출간 전 연재 8화_‘공동체’란 결코 놓아서는 안 될 테두리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소득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인종에 따라 분리된 공동체에서 살고 있으며,

노인들은 공적인 생활에서 대체로 격리되어 있는가 하면,

무차별 총기 난사는 어찌나 자주 벌어지는지 그런 사건을 다룬 기사도 하루 이틀이면 뉴스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치인들은 경쟁자들을 향해 의도적으로 자기 나라를 해치려 든다고 비난하기 일쑤다.

 

이런 비난은 공동체의 단결에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과거의 사회 같았으면 여지없이 일종의 반역죄로 다스렸을 것이다. 그건 정말 완전한 광기다.

 

 

 

 

 

 

 

우리에게 가장 경종을 울리는 수사법이 드러나는 것은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논쟁을 벌일 때인데, 이 경우엔 양쪽 모두가 옳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시간 낭비가 되기 일쑤다.

 

일자리가 없는 하위계층을 지원하기 위해서 세금을 높게 매기는 것에 대한 보수진영의 지속적인 우려는 인류의 진화에 그 합당한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고려 대상에서 제쳐놓아서는 안 된다. 초기 인류의 조상들이 살았던 그 아슬아슬한 생존 게임에서,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은 곧바로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공동체 내의 어떤 구성원들이 자신들을 이용하는 건 아닌지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고대사회가 지녔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아프고, 늙고, 상처받고, 불운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의 문화가 탄생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흔히 쓰는 용어로 하자면, 그것 역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흔한 진보주의적 관심사라 하겠다.

 

 

 

 

 

 

 

 

인류의 사회에는 이 두 가지 추진력이 수십만 년에 걸쳐 공존해왔으며,

미국의 경우엔 그 둘이 양당兩黨 제도라는 정치시스템으로 정착되었다.

 

소위 복지정책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좀 더 폭을 넓혀 진보주의 및 보주수의 사고방식이란 것을 둘러싼 영원한 논쟁은 절대로 해결을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진화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고대로부터의 구성요소를 양쪽이 각각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안전하고 부유하지만, 자신과의 정치적인 제로섬 게임에 빠져버린 국가는 어떻게 내부 결속을 꾀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의 공동체라고 의식하고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느끼도록 할 것인가?

 

뉴욕시에 있는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레이철 예후다에게 그걸 물어봤다. 그녀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참전용사들에 관한 반사회적인 의견 분열의 피해를 가까이서 봤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어떤 사회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도록 만들고 싶으면,

서로 차이가 나는 점들을 자꾸 강조하거나 부각하지 말고,

만인이 공유하는 휴매니티(인간성)를 부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의 차이에 매몰되어 있는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요.

 

어째서 서로가 어떻게 다른지에만 신경을 쓰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에는 눈길도 안 주는 거죠?

 

 

 

 

 

 

 

미합중국은 강력하다.

너무나도 강력해서 미국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미국 자신뿐일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미국을 그냥 가만 놔두는 것이 가장 좋은 테러 전략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내버려 두면 미국의 가장 꼴사나운 여러 가지 편파적인 경향들이 모두를 단결시키는 전쟁의 효과에 의해서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결국 부족사회를 배반하는 것은 경쟁적인 행동이 아니라 나에겐 다른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파문破門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이 경쟁자들에 관하여 악의를 담은 독설을 쏟아내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이런 힘의 단정이다.

 

유명 인사들이 각종 매체에 나와 동료 시민들을 비판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주 대놓고 매도罵倒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하는 짓거리도 바로 이런 힘의 단정이다.

 

전투 전초前哨 임무를 함께 해야 할 동료들을 싸잡아 매도한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우리나라는 거대한 전투 전초가 아니라고 혹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상상하는 공인公人있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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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6-11-24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합중국은 강력하다. 너무나도 강력해서 미국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미국 자신뿐일 것이다라에 많은 생각을 했네요 하ㅡ 트럼프 떠올라 짜증도 나고요...

미고 2016-12-30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내용이 실제로 어떨지 모르지만 비약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부분 많아 보입니다. 가령 세계2차대전 이전의 다리파 화가들도 전쟁이 인류를 구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예상과 실상은 아주 달랐으며 자진입대한 남성들은 전쟁 이후의 트라우마에 시달립니다. 글 곳곳에서 너무나 미국적인 가치관들이 묻어나는 게 불편하고 현대 문명 사회와 원시 공동체 사회의 어떤 이면만을 부각시켜 왜곡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단 생각이 가시질 않네요.

미고 2016-12-30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게다가 지금의 사태를 비판하며 쓰시는 워딩이 ‘몰상식한 아줌마‘라니요? 글 정리하신 분의 서술에서 비치는 사고도 매우 위험해 보이고, 첨언들에서 보이는 사고의 모양새가 다소 얄팍합니다. 함께 사는 삶과 공동체에 매우 관심이 많은 차에 이 글을 쭉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부각시키는 모범 사례들의 좋은 점이 제 눈에는 그 공동체들이 진전되며 나타날 문제의 시발점으로 보이며 제가 겪어온 사례들이 왜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만 역설적으로 드러날 뿐이란 생각 드네요. 눈에 걸리는 지점을 보고도 지나갈 수 없어 덧글 남깁니다.
 

 

TRIBE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출간 전 연재 7화_연대는 역사다!

 

 

 

지금 한국은 사회적 재앙이 현실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국민들을 농단한 세력이 하루가 멀게 새로운 비리가 드러나 막장성 드라마 못지않다. 아니, 드라마는 편하게 누워서라도 볼 수 있지만, 현실로 다가온 재앙은 몸과 마음마저 불편하게 한다.

 

급기야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으로 모였고, 선거권이 없는 청소년들까지 미래라는, 어른들이 오롯이 짊어지지 않았던 출사표와 함께 거리에 모였다. 그러나 광장엔 성별과 나이가 없었다.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은 달랐지만, 내가 사는 공동체를 위한다는 마음은 하나였다.

 

비로소 국민통합이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이 그토록 외쳤던 공약 하나가 이뤄진 현장이다.

 

 

 

 

 

자연재해가 발생한 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공동체 지향의 행동양식들은 18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국제적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이 그의 혁명적인 글에서 고무하고자 했던 바로 그런 미덕이다.

 

2차 세계대전과 자연재해에서 사회가 붕괴된 모습을 관찰해 사회 회복 탄력성에 관한 폭넓은 이론을 만들어 낸 찰스 프리츠도 이러한 점에 주목했다.

 

그는 현대 사회는 항상 인류의 경험을 특징지어왔던 사회적 유대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각종 재난과 재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고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맺기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그러니까 재난은 고통받는 자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이 공동체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타인들과의 엄청나게 마음 든든한 일체감을 경험하도록 해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실존에 대한 위협과 맞서게 되면서, 계급의 차이는 잠시 사라지고 소득 격차는 아무 상관도 없는 쟁점이 되며 인종차이도 무시하게 되어 개개인은 단순히 그가 집단을 위해 무엇을 할 의향이 있는지에 의해서만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프리츠는 알아냈다.

 

그리고는 이렇게 느꼈다.

 

 

 

 

 

 

이것은 잠깐이긴 하지만 일종의 사회적 유토피아다.

보통사람들이 매우 흡족하게 느끼는 유토피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겐 완전한 치료제 역할을 하는 유토피아 말이다.”

 

 

 

 

 

 

1970531, 칠레 중부의 도시 융가이를 초토화시켜버렸던 대지진 및 암석 슬라이드 사태 연구에서도 프리츠가 내린 결론이 옳았음이 다시 증명되었다.

 

융가이 주민의 90%가 거의 즉사했고, 인근 지역에서 약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그 지역이 핵 공격을 받을 경우에 예상되는 피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암석 슬라이드 사태로 공기 중 먼지가 얼마나 많이 생겼던지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없었고, 융가이의 생존자들은 며칠 동안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자력으로 견뎌야 했다.

 

이처럼 끔찍스러운 진공 상태에서 새로운 사회질서가 싹텄다

개인의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은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인류학자 앤서니 올리버-스미스는 고통 속의 형제애라는 논문에서 그렇게 적고 있다.

 

또한 이 위기는 그 때문에 생겨난 초기 단계 공동체에 대하여 신분이나 지위를 파괴하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당장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원주민 인디언, 하위 계급과 상위 계급 등이 협업 형태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자…… 일종의 형제애 같은 감성이 분위기를 지배했다.”

 

 

 

 

 

 

이렇게 사회가 붕괴할 위험에 처하면 나타나는 이타적인 모습들은 인간의 본능인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서로서로 도우며 살게끔 만들어진 측면이 너무나도 강렬한 데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사회적 혜택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위해서도 그처럼 흔히 자신의 목숨까지 거는 것이다.

 

, 진화론적으로 생존을 위한 가장 합리적으로 발달한 본능인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우리의 사회를 붕괴시키려는 국정농단 세력이 득세하고 있고, 분노에 찬 국민들이 들불처럼 분연히 일어섰다. 광화문의 촛불은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생존과 번영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연대의 촛불인 것이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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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E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출간 전 연재 6화_유대감을 상실한 북유럽 육아법

 

 

미국의 잡지 <Journal of Affective Disorers>는 삶의 진정성 결핍, 유대감 결핍을 진단한 기사를 싣고 이렇게 마치고 있다.

 

 

근대사회의 산업 구조가 장기적인 웰빙을 희생하면서

소비를 극대화하도록 우리 삶을 조성해왔다.

 

과식하면서도 영양실조에 걸리고,

무엇이든 앉아서 생활하고,

햇빛이 부족할 뿐 아니라 잠까지 빼앗긴 환경.

 

게다가 항상 경쟁에 쫓기며 불공평하고,

사회적으로도 고립될 수 있는 일상.

 

진화한 영장류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이러한 환경으로 끌고 들어갔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원시의 부족사회에 비해 발달한 근대사회가 인간을 소외하는 효과는 태어나자마자 시작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수렵이나 채집을 주로 하던 사회에서 갓난아기들은 하루의 90% 이상을 엄마의 품에서 보낸다. 다른 영장류 동물과 마찬가지다.

 

영장류를 연구한 해리 할로우(Harry Harlow)라는 이름의 동물학자 겸 심리학자가 1950년대에 실시했던 악명 높은 실험을 상기해보면, 유아 시기 이런 종류의 접촉이 영장류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할로우는 먼저 붉은털원숭이들을 어미에게서 떼놓았다.

 

그런 다음 어미를 닮은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인형과 차가운 철망으로 얽어 만든 매력 없는 인형을 주고는, 이 두 어미 인형 가운데 하나를 고르도록 했다. 철망으로 만든 인형에는 따뜻한 우유가 나오는 젖꼭지를 달아놓았다.

 

그러자 새끼 원숭이들은 재빨리 철망 인형에 설치한 우유만 챙겨 먹고는 금세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인형에 찰싹 달라붙더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환상이긴 하지만 애정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부드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몸에 닿는 따뜻한 손길이라든가, 누군가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은 어린 영장류 동물의 건강에 너무나 중요하며, 인간도 거기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1970년대의 미국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기들과 직접 살을 맞대고 있는 시간은 겨우 전체의 16%에 지나지 않았다.

 

전통적인 사회였다면 거의 아동학대의 한 형태로 간주할 만한 수준이었다.

 

어린아이들을 혼자 자도록 내버려 두는 근대의 관행 역시 전통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으리라.

 

 

 

 

 

 

1980년대에 행해진 미국 중산층 가정에 대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전체 어린이의 85%가 자기 방에서 홀로 자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의 경우 이 수치는 무려 95%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토록 많은 수의 어린아이들을 혼자 자도록 놔두는 사회는

인류 역사상 오직 미국을 포함한 북유럽뿐이다.

 

이러한 고립 때문에 많은 아이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각종 봉제 인형, 담요 등과 강렬한 유대관계를 갖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이들이 봉제 인형과의 유착이라는 발달단계를 거치는 것은 오로지 북유럽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며, 다른 지역의 아이들은 바로 옆에서 자는 어른들에게 안전하게 보호받는 느낌을 얻는다.

 

 

 

 

 

 

서구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로는 아이들을 혼자 자게 하는 것이 그들이 자신을 달래도록(self-soothing)” 만들기 위함이라지만, 이것은 명백히 우리 인류의 진화에 역행하는 짓이다.

 

DNA98%를 침팬지와 공유하는 우리 인간은 영장류에 속하며, 영장류는 절대로 어린 새끼를 혼자 내버려 두는 법이 없다. 포식동물의 위협에 지극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어린 새끼들도 이것을 본능적으로 아는지, 어두운 방에 혼자 남겨진 아이들은 매우 큰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달래도록하는 접근법을 과테말라에 사는 전통적인 마야 공동체의 관습과 비교해보자.

 

 

 

 

 

갓난아기와 아이들은 졸리면 그냥 잠들어버리고, 특별히 잠옷이 있는 것도 아니며

담요나 봉제 인형 같은 전통적인 이행대상을 사용하지도 않으며,

같은 방에서 부모나 형제들과 함께 잠자고

아침에 해 뜰 때까지 필요한 경우에만 젖을 먹인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문화를 연구한 뒤에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부모들은 갓난아이가 어떤 환경에서라도 잠들 수 있는 능력을

가능한 한 빨리 습득하도록 북돋워 준다.

 

자극이 아주 높은 환경이라든지,

악을 연주하고 있거나 다른 요란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등,

성인들의 사회적 활동 속으로 아이들이 좀 더 완전하게 스며들도록

도와주는 제반 환경이 여기에 포함된다.”

 

 

 

 

 

 

과연 지금의 사회가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진화해온 방향에서 얼마나 역행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서양 문화권에는 없는 우리의 포대기문화는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주목할 점은 서구 사회에서도 개량된 우리의 포대기(아기끈)가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 사회가 선진화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문화가 인간 본성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더불어 사는 사회, 유대감 넘치는 공동체를 위해서 말이다.

    

 

*이행대상: 유아가 처음으로 갖게 되는 내가 아닌(Not-me)’ 소유물. 아이가 사랑의 일차적 대상(주로 어머니)과 감정적으로 분리되는 과정, 즉 잠자리에 들 때나 아플 때 집어 들고 만지작거리며 손에 꼭 쥐는 친숙한 장난감이라든지 엄마의 젖가슴 같은 담요 조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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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BE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출간 전 연재 5화_공동체와 행복의 관계

 

 

 

1960년대에 이루어졌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쿵(Kung) 족 부시맨들은 1주일에 겨우 12시간만 일하면 생존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도시에 사는 관리자들이 일하는 평균 시간의 대충 1/4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1968년 고고학자인 리처드 리(Richard Lee)는 사뭇 경탄을 금치 못하는 문투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캠프는 서로서로 협동하는 사람들의 열린 집단으로서, 그 크기나 구성이 매일매일 바뀐다.

 

캠프의 구성원들은 매일 밖으로 나가 사냥과 채집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면 그렇게 구한 음식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누구나 공평한 몫을 받을 수 있도록 분배한다……

 

공유의 개념을 상당히 강조하는 데다, 캠프를 옮기는 빈도도 높으므로 잉여 음식물의 축적은 최소한으로 유지한다.”

 

 

 

 

 

칼라하리 사막은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환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쿵 족은 다른 누구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로 무려 1970년대까지도 줄곧 석기시대와 같은 삶을 영위해올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 쿵 족이 얼마나 철저하게 잘 적응해왔는지, 가뭄이 닥치면 주위의 농부들이며 가축 몰이꾼들이 생계를 다 포기하고 부시맨들을 따라 숲으로 들어갈 정도다.

 

음식물을 얻기에는 채집과 사냥이 훨씬 더 믿음직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더 많은 여가를 창출해냈다는 통설이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쿵 족이 누리는 여유 만만한 삶의 페이스는 그런 이론에 대해 놀라운 도전이었다.

 

사실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것은 그 정반대의 것, 즉 필사적인 업무의 반복, 재정적인 의무, 그리고 더 많은 업무였다.

 

쿵 족 사람들이 소유한 재산은 서구인들보다 훨씬 더 적었지만, 그들의 삶은 각 개인이 저마다 주체적으로 더 훌륭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초기 인류는 쿵 족이 그런 것처럼, 대략 50명 정도로 이루어진 유목민의 무리 속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사고로 인한 부상이나 죽음을 상당히 많이 겪었을 것이다.

 

연장자인 남자들이 무리를 좌지우지하려 드는 행태에 대해서는 집단 내 연대를 통해서 맞섰을 것이다.

 

먹을 것이나 물건을 따로 비축한다든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농업이, 그리고 나중에는 공업이 인류의 경험에 있어서 근본적인 두 가지를 바꾸어놓았다.

 

개인 재산의 축적은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인 선택을 점점 더 많이 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런 선택은 공동의 선을 지향하는 집단의 노력을 깎아 먹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집단에서 시작한 사회가 점점 근대화함에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공동체 집단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도시나 교외에서 사는 현대의 개인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온종일 아니, 어쩌면 평생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 수 있다. 그 개인들은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절절한 외로움을 느낀다.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 정말 가혹하다는 증거는 정말이지 압도적으로 많다.

 

행복이란 고약하게도 주관적인 데다 측정하기도 어렵지만, 다행히 정신병은 그렇지 않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교문화연구가 밝혀낸 바에 의하면, 근대 인류사회는 의료, 과학, 기술 분야의 거의 기적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볼 수 없었던 높은 비율의 우울증, 조현병(정신분열증), 부실한 건강 상태, 불안, 만성적인 고독에 찌들어 있다.

 

하나의 사회가 부유해지고 도시화하여감에 따라, 우울증과 자살의 비율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증가하는 사회의 부는 사람들을 병적 우울로부터 보호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키우는 것 같다.

 

 

 

 

 

 

이런 결론이 도출되는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풍족한 사람들에 비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시간과 자원을 훨씬 더 남들과 공유해야 하고, 그 결과 그들은 좀 더 밀접하고 좀 더 상호의존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 때문이다.

 

상호의존적인 빈곤에도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따라오게 마련이고, 빈곤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이 꿈꾸는 바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진화에 따라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에 훨씬 가까운 것은 풍요로움보다 빈곤이다.

 

오히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도움이나 자원에 의존할 필요가 한 번도 없이 살아온 부자야말로, 백만 년이 넘은 인류의 경험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특권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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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6-11-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읽고 싶은 책이예요
 

TRIBE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출간 전 연재 4화_우리가 찾아야 할 '그것'

 

 

 

사회가 붕괴하는 일에 관하여 그나마 다행인 점을 하나만 말하자면,

적어도 잠깐만큼은모든 사람이 평등해진다는 사실이다.

 

1915년 이탈리아의 아베자노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1분이 되지 않아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투쟁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먹고 마실 것과 몸을 뉘일 장소가 필요했다.

 

 아베자노 지진의 생존자 한 사람이 그 상황을 두고 이렇게 회상했다.

법률이 약속만 해놓고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것들을 지진이 성취했다. 평등을 말이다.”

 

 

 

 

 

자연재해나 인간에 의해 촉발된 사고로 황폐해진 공동체는 혼란, 무질서 상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어려움에 빠진 사회는 오히려 더욱 공정해지고 한층 평등해진다.

 

몇몇 언론들이 잘못된 기사를 내보내긴 했지만,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후 미국 뉴올리언스는 범죄율의 하락을 경험했고, 소위 약탈행위의 대부분은 식량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재해가 발생한 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공동체 지향의 행동양식들은 토머스 페인이 그의 혁명적인 글에서 고무하고자 했던 바로 그런 미덕이었다.

 

 

 

 

이런저런 재앙에 맞닥뜨린 사회의 붕괴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시점에 갑자기 큰 쟁점이 되었다.

 

전 세계의 열강들이 대도시에 집단 히스테리를 불러오려고 계산된 공습을 예상하던 시기였다. 영국 정부는 독일이 런던 공습을 감행할 경우 하루 35천 명의 사상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처칠 정부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대응은 얼마나 형편없었던지, 비상계획 수립을 담당한 공무원들은 방공호를 구축하는 일조차 망설였다.

 

사람들이 일단 대피소로 들어가면 다시는 안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경제는 곤두박질 칠 것이고, 대피소에서는 정치적인 이견이나 심지어는 공산주의가 싹틀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194097, 독일은 본격적으로 런던 공습을 시작해 이듬해 5월까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독일의 폭격기들은 무려 57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파도처럼 런던의 하늘을 누볐고, 수만 톤의 고성능 폭발물을 런던 주거지역에 쏟아부어 한꺼번에 수백 명의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블리츠(the Blitz)’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대공습이 계속되는 내내, 런던의 시민들은 아침마다 일터로 향했고, 저녁이면 대피소나 지하철역을 찾아들었으며, 동이 트면 다시 각자의 일터로 갔다. 대피소 안으로 모인 사람들의 태도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서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을 부를 일도 없었다. 오히려 누가 정해놓지도 않은 규칙에 따라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스스로 치안을 유지했다.

 

 

 

또 어떤 사람은 틸버리(Tilbury) 대피소라고 불렸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적기도 했다.

 

서로 친분도 없고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 규칙도, 보상도, 처벌도, 계급도, 명령도 없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란 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피소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법말이다.”

 

 

 

 

 

 

사람들은 집안이나 동네에서 더할 나위 없이 일상적인 일을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전쟁 전만 해도 잉글랜드 지역에서 4백만 명가량이 심리적 쇠약을 경험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막상 블리츠가 진행되자 정신과 병동에는 오히려 환자가 줄었다. 런던 시내 응급구조대의 기록에 의하면 공습으로 인한 노이로제는 기껏 일주일에 두어 건 정도였다.

 

어떤 의사는 이렇게 언급했다.

지금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만성신경증 환자들이 구급차를 몰고 다닌다.”

 

 

 

 

재앙이나 재난을 당한 공동체치고 지속적인 패닉(공황) 상태로 빠져드는 사례를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더더구나 무정부 상태 혹은 난장판에 가까운 상황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재난이 계속되는 동안 사회적인 유대는 강화되었고,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향해서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바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쟁이 정신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처음으로 눈여겨본 사람은 위대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Emile Durkheim)이었다.

 

그는 서유럽 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자살률이 하락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파리 시내의 정신과 병동은 텅 비어 있었고, 독일군이 시내로 진입했을 때까지도 그 현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현대 사회는 항상 인류의 경험을 특징지어왔던 사회적 유대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각종 재난과 재해는 사람들이 좀 더 고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맺기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난은 고통받는 자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이 공동체는 개개인이 타인들과의 엄청나게 마음 든든한 일체감을 경험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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