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BE 트라이브, 각자도생을 거부하라!

 

출간 전 연재 4화_우리가 찾아야 할 '그것'

 

 

 

사회가 붕괴하는 일에 관하여 그나마 다행인 점을 하나만 말하자면,

적어도 잠깐만큼은모든 사람이 평등해진다는 사실이다.

 

1915년 이탈리아의 아베자노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1분이 되지 않아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투쟁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먹고 마실 것과 몸을 뉘일 장소가 필요했다.

 

 아베자노 지진의 생존자 한 사람이 그 상황을 두고 이렇게 회상했다.

법률이 약속만 해놓고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것들을 지진이 성취했다. 평등을 말이다.”

 

 

 

 

 

자연재해나 인간에 의해 촉발된 사고로 황폐해진 공동체는 혼란, 무질서 상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어려움에 빠진 사회는 오히려 더욱 공정해지고 한층 평등해진다.

 

몇몇 언론들이 잘못된 기사를 내보내긴 했지만,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후 미국 뉴올리언스는 범죄율의 하락을 경험했고, 소위 약탈행위의 대부분은 식량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재해가 발생한 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공동체 지향의 행동양식들은 토머스 페인이 그의 혁명적인 글에서 고무하고자 했던 바로 그런 미덕이었다.

 

 

 

 

이런저런 재앙에 맞닥뜨린 사회의 붕괴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시점에 갑자기 큰 쟁점이 되었다.

 

전 세계의 열강들이 대도시에 집단 히스테리를 불러오려고 계산된 공습을 예상하던 시기였다. 영국 정부는 독일이 런던 공습을 감행할 경우 하루 35천 명의 사상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처칠 정부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대응은 얼마나 형편없었던지, 비상계획 수립을 담당한 공무원들은 방공호를 구축하는 일조차 망설였다.

 

사람들이 일단 대피소로 들어가면 다시는 안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경제는 곤두박질 칠 것이고, 대피소에서는 정치적인 이견이나 심지어는 공산주의가 싹틀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194097, 독일은 본격적으로 런던 공습을 시작해 이듬해 5월까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독일의 폭격기들은 무려 57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파도처럼 런던의 하늘을 누볐고, 수만 톤의 고성능 폭발물을 런던 주거지역에 쏟아부어 한꺼번에 수백 명의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블리츠(the Blitz)’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대공습이 계속되는 내내, 런던의 시민들은 아침마다 일터로 향했고, 저녁이면 대피소나 지하철역을 찾아들었으며, 동이 트면 다시 각자의 일터로 갔다. 대피소 안으로 모인 사람들의 태도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서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을 부를 일도 없었다. 오히려 누가 정해놓지도 않은 규칙에 따라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스스로 치안을 유지했다.

 

 

 

또 어떤 사람은 틸버리(Tilbury) 대피소라고 불렸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적기도 했다.

 

서로 친분도 없고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수만 명이 모여들었다. 규칙도, 보상도, 처벌도, 계급도, 명령도 없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란 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피소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법말이다.”

 

 

 

 

 

 

사람들은 집안이나 동네에서 더할 나위 없이 일상적인 일을 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전쟁 전만 해도 잉글랜드 지역에서 4백만 명가량이 심리적 쇠약을 경험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막상 블리츠가 진행되자 정신과 병동에는 오히려 환자가 줄었다. 런던 시내 응급구조대의 기록에 의하면 공습으로 인한 노이로제는 기껏 일주일에 두어 건 정도였다.

 

어떤 의사는 이렇게 언급했다.

지금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만성신경증 환자들이 구급차를 몰고 다닌다.”

 

 

 

 

재앙이나 재난을 당한 공동체치고 지속적인 패닉(공황) 상태로 빠져드는 사례를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더더구나 무정부 상태 혹은 난장판에 가까운 상황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재난이 계속되는 동안 사회적인 유대는 강화되었고,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향해서 자신들의 모든 에너지를 바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쟁이 정신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처음으로 눈여겨본 사람은 위대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Emile Durkheim)이었다.

 

그는 서유럽 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자살률이 하락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파리 시내의 정신과 병동은 텅 비어 있었고, 독일군이 시내로 진입했을 때까지도 그 현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현대 사회는 항상 인류의 경험을 특징지어왔던 사회적 유대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각종 재난과 재해는 사람들이 좀 더 고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맺기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난은 고통받는 자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이 공동체는 개개인이 타인들과의 엄청나게 마음 든든한 일체감을 경험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