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 복음서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이미경 옮김 / 열림원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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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뭔가 종교적 색채가 강해보이는 책 '빌라도 복음서'는 빌라도에 대한 작가의 색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인물들을 드러내는데, 바로 예수와 빌라도다.
첫번째 장은 예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때는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고 로마의 병사들이 그를 체포하기 몇 시간 전이다. 예수는 지난 삶을 회상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한다.
두번째 장은 빌라도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 못박는 장면에서부터 그가 무덤에서 사라지는 사건까지 쭉 자기 입장을 서술한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의 색다른 시점은 바로 이 둘이 취하는 행동과 생각들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경인물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점에서 있다.

그 예로 예수가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예수는 성경책에서 묘사하는 예수와는 전혀 다르다. 성경책 속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적을 일으키고 죽을 때까지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거의 완전한 존재로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의 예수는 일반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뇌하고 성경책과는 다른 내면의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그는 자기의 기적에 중점을 두는 제자들이나 사람들을 꺼려하기도 한다. 아무튼 여기의 예수는 종교 지도자보다는 철학가적 면모에 가깝다.
그리고 빌라도 또한 성경과 달리 예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 성경책에서 미처 소개하지 않는 그의 개인 사정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책 자체가 무신론적이면서도 유신론적인 분위기를 띈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을 성령의 힘보다는 예수의 깨달음과 철저한 계획이었다고 말한다. 유다가 예수를 밀고한 것도 돈 때문이 아닌 예수와 모종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느니, 죽은 사람을 살린 것도 사실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깨어난 사례라고 예수 본인의 입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것을 예수는 하나님의 힘이라고 공을 돌린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입장을 모두 반영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원문은 '예수를 사랑한 빌라도'이다.
사실 성경에서 빌라도는 악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라는 입장을 취했기에 더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의 빌라도는 예수보다 더 정감이 가는 사람으로 나온다. 사실 빌라도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수와 빌라도의 관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참고로 번역이 좀 불친절하다. 직독직해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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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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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실존주의 작가이자 ‘이방인‘ 작가로 유명한 카뮈. 그가 이번에는 희곡을 선보였다. ‘정의의 사람들‘과 ‘계엄령‘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정의의 사람‘이라는 작품 하나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얼마전에 읽었던 보리스 사빈코프(일명 롭쉰)의 ‘창백한 말‘과 ‘검은 말‘과 비슷한 양상을 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즉, 이 ‘정의의 사람들‘이라는 작품은 테러리스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희극이라 사빈코프 작품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배경이 러시아인 점과 여러 테러리스트가 고위 관리를 죽이는 설정은 매우 비슷했다. 카뮈도 사빈코프의 작품을 읽었던 것인지 기쁜 의구심이 들었다.

여하튼, 자꾸 사빈코프와 비교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그 둘을 비교하면 카뮈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물론 사빈코프도.
일단 결론만 말하자면,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 ‘검은 말‘은 사회적 정의보다 테러리스트의 감정과 혼란을 그려내고 있지만 카뮈의 테러리스트 이야기 ‘정의의 사람들‘은 사화적 정의에 대한 테러리스트의 깊은 성찰이 담겨있다.
카뮈의 작품이 좀 더 교훈적이고 정의로웠달까.
(사빈코프 작품이 체육 실습이면 카뮈는 체육 이론책인 셈이다)

‘정의의 사람들‘에 나온 테러리스트들은 세르게이 대공을 죽이려한다.
그들은 테러를 감행하는 직전에는 흥분과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막상 대공을 죽이려 할때 아이들이 함께 타 있다던가 본인의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해 괴로워한다.
결국 칼리아예프라는 이상주의적인 사람이 대공을 암살하는데 성공해 교수형을 당하게되지만 그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모습을 보인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등장인물마다 성질이 다 다르다는 점이다. 당연히 성격이나 성질이 같으면 안되지만 이 작품에선 뚜렷하다.
가령 스테판은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압제자 계급인 자들을 모조리 죽여야한다는 극단적인 혁명가의 모습을 보이지만 아넨코프와 도라는 무자비한 테러를 경계하는 온화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스테판이 모든 것을 증오해서 테러를 저지르는 반면 칼리아예프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에 테러를 저지른다.
거기에 진정한 혁명의 폭력적인 면에 충격을 먹고 뒤로 물러서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는 부아노프.

카뮈는 러시아 혁명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에 살았던 다양한 군상들을 보여주고 이들의 입을 빌려 진정한 혁명과 테러의 의미를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의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역자가 머리말에 써놓은 것처럼 테러리스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념에 죽고 살지만 이 테러리스트들은 파괴 행위에도 질서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한 ‘정의의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파괴 행위에도 어떤 질서가 있고 한계가 있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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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손정숙 옮김 / 지식의풍경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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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라는 이름은 지난 2차 세계대전이 끝날때부터 지금까지 ‘최악의 인물‘,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등등의 수식어를 달고있다.

과연 그는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이 히틀러가 독일국민들을 세뇌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도 안다. 그치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파시즘의 영향도 있었으나 나치가 집권하던 시기에 거의 모든 국민들이 나치의 행보를 찬성했다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 나치는 어떻게 국민들을 세뇌시켰는가, 이 책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히틀러는 조직적으로 어른이 아닌 청소년들을 타겟으로 선전 유세를 떨쳤다.
보통 사람들은 ‘정치란 어른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청소년들도 충분히 어른들보다 정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정치에 대해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불완전한 이념에 쉽게 물들여질 수 있는 성질을 동시에 뜻한다.

먼저 히틀러는 처음 집권할 때 히틀러 유겐트를 만들어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히틀러 유겐트의 활동은 마치 오늘날 아람단 같이 모여서 캠핑하고 여행을 하는 등의 재미를 제공했다. 당연 아이들은 점차 모여들었고 단체 생활에 적응하면서 점차 어른들과 멀어지게 된다. 그러면 나치는 이때를 기회삼아 조용히 아이들에게 나치 이념을 주입시켰다.

그렇게 세뇌된 아이들은 당시 어려웠던 독일의 사정을 구원해 줄 나치에게 충성했고 자라나서 나치의 일을 돕는다.
언뜻 보면 나치가 집권기 중에 했던 모든 범죄는 대부분 성인이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십대 청소년들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막바지즈음엔 게슈타포와 비밀경찰들도 거의 히틀러 유겐트에서 뽑은 13~18세의 청소년로 이루어졌다고한다.

그러나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바는 청소년들의 불완전한 정치적 안목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청소년들이 어른 못지 않게 독일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샀다.
다만 저자는 히틀러라는 정신이상자가 휘두른 정치적 폭력의 폐해를 설명함과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가져할 정치적 안목을 이야기하고 있다.

- 이 책은 전쟁사를 아는 데도 도움이 된 책이었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주제에 약간 벗어나는 내용이 있다는 것, 너무 청소년에게 집중하려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도 세계대전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읽기 좋은 책임에는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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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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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은 주인공 홀든 콜필드라는 퇴학생이 약 사흘 동안 도심의 어두운 곳에서 방황하면서 겪게되는 현실의 쓰라린 참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현실의 어두운면을 고발하는 것이 아닌, 그 현실에서 방황하는 한 영혼에 대해 적고있다.

홀든 콜필드는 성적미달로 대학교에서 퇴학당해 집에 돌아가야했다. 그러나 홀든은 수요일에 집에 도착한다는 일정을 버리고 수요일을 사흘 앞둔 날에 짐을 싸고 기숙사를 나온다. 그렇게 사흘동안 홀필드는 호텔, 바, 클럽 등등을 돌면서 심각한 수준으로 여기저기 방황한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겪어 극도로 피로했던 홀든은 유일한 구원자인 여동생 ‘피비‘를 만나면서 그는 마침내 세상을 어느정도 체념하고 이해하게된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홀든의 태도다.
홀든은 오늘날 귀신도 안 건드린다는 ‘중2병‘같이 행동한다. 마치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은 전부 타락했다는 듯이 우쭐거리고 비웃는, 그런 행동을 취한다. 처음 이 소설이 출판됬을 때도 홀든의 이러한 태도에 태클을 건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홀든의 행동은 과격하고 중2병 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사실 다른 누구보다 ‘순수‘하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홀든의 꿈을 봐도 알 수 있다. 홀든은 책의 제목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떨어지는 아이들을 구해주고 싶어한다. 즉 홀든은 아이들이 세상에 의해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이를 통해 홀든은 겉은 타락해보여도 그 속은 순수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홀든을 둘러싼 세상은 전혀 순수하지 않고 온갖 타락에 물들여 있었다.
그렇다면 홀든은 세상이 타락했음을 알고서도 굳이 나와 어두운 곳을 돌아다닌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 홀든 마음 한켠에 조금이나마 자기와 같은 순수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홀든은 창녀가 와도 성행위를 부탁하기는 커녕 어째서 창녀가 됬는지 이야기를 부탁했고 친하지도 않는 친구들을 불러 자기의 희망찬 꿈을 이야기하는 등 타락한 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일종의 ‘세상에 대란 그리움‘인 셈이다.
물론 다들 매몰차게 홀든을 내쳤고, 결국 홀든은 아무리 더러운 세상을 정화시키려해도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고작 사흘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50년이 지난 것 같았는데 말이다. 다 읽고나서 어째서 이 책이 청소년,대학생 추천도서인지 알수 있었다.
아직 세상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초년생들의 기대와 환상,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불안감과 절망이 모두 들어있는 이 작품은 명작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내가 편집장이였어도 이 책을 적극추천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작품은 민음사 것보단 문예출판사 것이 더 번역이 수월하고 읽기 편하다. 다소 오타가 보이지만 읽는데는 최적인 것 같다.

저는 지금 하나의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나 여러가지 단계를 거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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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 일기에 나타난 어느 독일인의 운명
파울 요제프 괴벨스 지음, 강명순 옮김 / 메리맥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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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최고간부이자 선전을 담당했던 괴벨스. 그가 한 선전은 대중 선도의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 예로 남아있다.

평생 정치만했을거라는 상상과 달리 그는 '미하엘'이라는 반자전적 중편소설을 썼다.
주인공은 '미하엘'이라는 대학생이다. 그는 다른 대학생들과 달리 자기 신념이 확고하고 진리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마침내 그는 독일인의 긍지와 함께 노동으로서 진리를 찾아내겠다는 일념으로 광부의 길로 가지만 그곳에서 돌에 맞아 죽고만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언뜻 들으면 젊은 애 하나가 저 혼자 너무 진지하게 살다가 돌아 맞아 죽은 이야기로 들리는데, 사실 그게 맞다.

내가 보기에 미하엘은 너무나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있다. 그는 주로 산책하거나 홀로 생각에 빠지며 한 두사람 빼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함께 나누지 않고 자기가 생각해낸 것을 바탕으로 진리를 끌어내려 한다. 자기가 느낀 신념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꼴이랄까. 여하튼 그렇게 느껴진다.

또 여기서 그는 특히나 '남성성'과 '독일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민족적 자부심일수도 있다. 그러나 괴벨스는 그걸 교묘하게도 이용한다. 바로 모든 잘못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독일인은 소박하고 선량하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용했고 이로 인해 독일이 몰락해가고 있다'라고 말이다. 이 발언은 괴벨스가 나치에 입당하기 전부터 유대인을 중오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의외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즉 약간 사회주의 분위기에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나 그런 이야기는 내가 잘 알지 못하기에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당시 상황을 보면 꽤 대중들을 선동하기 충분했을 것 같다. (나치에 열광한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것에 굶주려 있었는지도 잘 보여준다)

위의 이유때문에 중간에 도저히 읽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미하엘이 무조건 나쁘다고만은 생각되지는 않았는데, 그가 읊는 시와 몇몇 글은 뛰어나고 사색가적인 풍모가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질된 것은 틀림 없다.

역자도 말했던 것처럼 미하엘의 뜨거운 신념을 보는게 아니라 차가운 마음으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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