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인재들 - 왜 미국 최고의 브레인들이 베트남전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가 걸작 논픽션 7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송정은.황지현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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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애치슨이 국무차관 직에서 사임하자 마셜(당시 국무장관)은 러벳을 후임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1950년 러벳은 국방장관이 되었다. 스팀슨이나 마셜 이전에 일라이휴 루트나 테디 루스벨트가 그 자리에 올랐다면 1960년이나 되어야 러벳의 차례가 돌아왔을 것이다. (-37-)

결국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흠이 없고 반대가 없는 인물을 찾게 되었다. 그 시대의 뚜렷한 대의명분을 옹호하는 사람은 누구나 많은 적을 두게 마련인데, 이제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케네디는 파장이 가장 적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그 자리는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기에 무한한 지적인 자질과 지혜,교양, 조국과 세계에 두루 통달한 지식을 겸비한 인물이 중용되어야 했다.그런데 그들은 대통령 후보가 부통령을 선택할 때 가장 무난한 사람을 고르는 식으로 인선 작업을 했다. 곧, 모두가 수용할 차선채글 찾고 있었던 것이다.따라서 재능이나 권력이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였다. (-79-)

케네디는 영국식이었다. 압박 속에서도 품위 있게 행동하는 것은 케네디가 매우 존경하는 자질로 자주 인용되었다.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결코 굽히지 않으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것은 대단히 영국적인 자질이었다. 약하고 격이 떨어지는 지중해 사람들은 압박을 받으면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감정 표출을 혐오하는 영국인들은 입을 굳게 다문다. 존 케네디가 그랬다. 케네디는 닉슨이 1950년대 민주당에 퍼부었던 지독한 비방을 용서할 수 있었다.그러나 1960년 선거일 밤 닉슨의 부인 팻 닉슨이 신경쇠약 직전까지 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스타일과 격조가 없는 것으로 용서되지 않았다. (-181-)

미군 부대가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에 테일러는 베트남이 '작전을 수행하는 데 아주 힘들거나 불쾌한 곳은 아니다' 라고 답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베트남을 한국과 비교할 수 있다고 한 내용이었다. '미군은 한국에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살아서 작전을 수행하는 법을 배웠다.당시 미군은 고원지대와 해안 평야에 주둔했는데, 이곳 베트남의 정글은 그리 크지 않다.' 연안지역의 고약한 특징은 더위이고, 삼각주의 경우는 홍수가 남기고 간 진흙이다. 고지대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데 특별한 방해물이 없다. ' (-289-)

지엠과 뉴의 태도를 통해 그들이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방식과 베트남 사회가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반공주의자가 아니었던 주민들은 자신을 속박한 적을 두려워하지 보다 자신에게 자행된 무력에 더 분개했다. 마찬가지로 몇 년 뒤 미라이 학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 정부 역시 중대한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티에우 정부도 지엠 체제처럼 사이공 정부를 수호하고 미국의 반공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과도하게 무력을 사용했다가 베트남 사람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346-)

따라서 베트남이 붕괴되면 다음 조치가 큰 문제로 부각될 터였다. 제한적인 무력 사용이 실패할 경우 더 많은 무력을 투입하라는 압력이 거세질 것 아닌가.테일러는 폴하킨스를 투입해 소규모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제한적 개입의 개념을 스스로 시험할 수 있었다. 하킨스가 선택된 것은 가장 유능한 장군이라서 아니라 그가 테일러의 사람이고 테일러가 그를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국무부 사람들이 지엠과 베트남 전쟁에 실망한 위기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체면을 유지하고 싶었고, 노심초사했던 전쟁이 실패하는 걸 막고 싶었다. 그는 논쟁이 가열되는 상황에서 크룰랙과 하킨스로 하여금 각각의 위치를 사수하게 했고, 입장이 흔들리는 맥나말라를 안심시켰다. (-437-)

이것이 트루먼 독트린의 기원이 되었다. 그 나라에 겁을 주어야 하다는 의무감으로 뭉친 트루먼은 정말로 그렇게 했다. 독트린의 메시지가 그 정도로 의회에 제기되었을 무렵에 모스크바로 날아가고 있던 마셜장관은 깜짝 놀랐다. 반공산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강조된 것을 우려한 마셜은 트루먼에게 이 발표가 과연 현명한 것인지를 전신을 통해 물어왔다. 그는 트루먼이 이 사건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사원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눈 뒤, 이것이 자신의 메시지를 통과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534-)

1964년은 폭풍우가 오기 전의 고요가 감도는 기이한 해였다. 베트남 전쟁이 일조해서 만들어낸 구절에 따르면, 관료사회는 계획 없이 선택 사항만 비축하소 있었다. 군은 폭격할 장소를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했고, 펜타곤의 깊숙한 내부에서는 만일의 사태를 위한 계획을 알고 있었던 전문가들이 전쟁 개시가 결정되었을 때 필요하게 될 것들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약 전투 병력을 필요로 한다면 어떤 부대가 가야 하며 어떤 예비부대를 소집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작업이었다. 모든 것이 물론 만약이라는 가정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펜타곤은 당연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639-)

그러나 테일러는 이제 정치적 이유로 폭격을 원했다. 과거에 그는 미국이 북 베트남에 더 큰 무력을 행사하는 일을 꺼려 폭격에 반대했었다. 그는 무력 행사가 더 큰 게임을 의미하고, 의외로 북베트남과의 전쟁을 통해 미국은 남베트남에 매우 약한 정권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변하고 있었다. 8월 18일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다음 달에는 반드시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합니다.' 어떤 조치란 바로 폭격이었다. 적절한 시기에 보복적 군사작전을 시작하자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 때는 편리하게 선거 직후인 1965년 1월 1일이 될 터였다. (-780-)

그는 베트남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들의 대의명분에 진심으로 헌신했지만, 그들의 취약점과 불완전성, 부패, 순수의 상실 (그들에게 순수했던 적이 있기는 할까?)을 체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그는 미국인일 뿐이었다. 미국인과 서유럽인의 관점에서 성공한 제품, 다시 말해 변화와 미묘함이 사회를 실패로 이끈다고 믿는 성공지향적인 나라가 배출해낸 훌륭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또한 올바르게 행하면 항상 보상을 받고, 열심히 일하면서 규칙을 지키고 책에 쓰인 대로 행동하면 성공할 수 있는 나라, 결코 부패하지 않은 나라가 만든 최고의 생산물이었다. 반면 베트남은 뻔질나게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미국인이 거짓말을 원한다고 생각했고, 항상 거짓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888-)

그 일은 모두 나중에 일어났다. 다른 정치가라면 변화를 명확히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감지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린든 존슨은 눈치 채지 못했다.오로지 자신이 맨 꼭대기에 있었고, 중심에서 통제했고, 반대자들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는 사실만 인식했다. 그는 의회를 조종했고, 진심이 없는 서명을 받아냈다. 그는 아주 얇게 썰어서 더 이상 썰 수 없는 연어처럼 언론을 조종해서 그들이 자신을 장악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통킹만에서는 호찌민이 자신을 공격한 것처러 위장해서 호찌민을 조종했다. 그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무력을 사용했고, 군 역시 조종했다.군은 처음부터 전쟁을 향해 전진했지만, 이렇듯 감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의회나 언론까지 돌연한 비약을 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결정이 교묘하게 은폐되었고, 존슨은 반대를 막기 위해 그 결정들을 얇게 썰어놓고 있었다. (-957-)

린든 존슨은 모든 것을 잃었다. 이는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뛰어난 재기와 자만심, 자신에 대한 느낌 때문에 과거를 바라보고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공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과 이번 세기에서 미국의 권력과 영광에 대한 인식, 미국의 전지전능함에 매몰되었다. 그들은 미국인이었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에게 제기되는 도전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 면에서 린든 존슨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걷는 길에 대해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지만 , 그의 본능, 곧 미국 정치를 읽는 그의 방식과 타인을 보는 방식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발산하 길은 보이지 않았다. (-1054-)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최고의 인재들』 은 베트남 전쟁 (1960년~1975년)의 기원에 대해 정리되어 있는 정치사회학으로서, 제34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1953~1961),존 F 케네디 (1961~1963), 린든 존슨(1963~1969), 닉슨(1969~1974) 까지 이어진 전쟁이었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베트남 의 반공주의 사회로 전환되는 것을 막기 위한 , 명분 없는 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시작은 미국 스스로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다. 한국 전쟁 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의 시선은 베트남으로 행하고 있었다. 반공주의가 여전히 아시아 전역에 존재했으며, 러시아,미국긔 군수 물자 산업 졍애서 미롯된 냉전사회에서, 미국에 위협이 되는 두 나라,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보복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남베트남을 미국의 통제권 안에 두어야 했고, 인도차이나 지역 뿐만 아니라 , 동아시아 전역을 미국의 관리에 두고 싶었다.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패착에 가까운 전쟁이다.미국은 베트남에 대해 지형 조건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앗고, 굳이 그것들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중국의 인해전술도 몰랐고, 베트남의 게릴라 전법도 모른 상태에서, 한국을 상대한 것처럼 베트남 사이공에게 위협을 하면, 베트남 또한 쉽게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다.

4대에 걸친 미국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베트남 전쟁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폭격과 포격으로 베트남 하늘과 육지를 지배하려고 했지만, 결국 베트남은 미국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전면전을 치룬다.더군다나 1960년대 반전 운동이 일어났고, 68 혁명으로 인해 미국은 베트남 전앵의 명분을 서서히 상실하였다. 발을 걸쳐 놓았기에 철수 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케네디 암살에 이어서, 대통령이 된 린든존슨은 지극히 정치적인 인물이었고, 대통령이 되기 직전이 ,린든존슨의 인기도가 최고인 상황이었다. 정작 대통령이 되자마자,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망각한 채,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고 만다. 린든존슨 대통령을 최악의 미국 대통령으로 손꼽는 이유도 그러하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책 『최고의 인재들』에는 미국과 베트남의 입장이 반영되고 있었으며, 전쟁 수행 의지가 시간이 흘러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린든존슨의 정이 인생에서는,사이공을 상대로 한 최악의 전쟁 베트남 전이지만, 한국의 입장,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베트남 전쟁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개발도상국, 후진국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월남전이라 부르고 고엽제 피해가 남아 있는 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베트남 전쟁에 한국 군인이 투입됨으로서, 대한민국은 미국의 자본 지원을 기반으로 경제발전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남한의 경제 수준이 북한을 넘어설 수 있는 상황을 박정희 정권에서 구축할 수 있었다.배고픔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라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으로서, 미국이 베트남 땅에서 철수하게 된 지형적 조건 뿐만 아니라 ,베트남인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정석대로 전쟁을 수행한 미국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한 베트콩,두 가지 관점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현주소, 1960년대 공산주의가 미국을 어떻게 위협하고 있었는지,낸정체제 뿐만 아니라 핵무기 실험에 대한 위협까지 살펴볼 수 있다.미국은 러시아를 견재하기 위해서, 베트남전쟁은 불가피한 전쟁이며, 철두철미하게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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